요즘 같아서는 인류가 깡그리 멸망하는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이 그렇고, 세월호 참사 후 대응하는 인간들의 악마적인 모습들이 그렇다. 이런 폭력적인 종이 지구에서 한다는 짓은 자연을 파괴하는 일 뿐이니 인류가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존재할까?

 

물론 선한 인간이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전체를 포괄하는 새로운 인류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고 등장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개인의 자유가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이상형은 결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암울한 전망 속에서 본 영화가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이다.

 

인류와 유사한 종족이 인류와 투쟁을 벌인다. 양쪽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지만 공존의 위한 평화보다 한 쪽의 절멸을 원한다. 증오를 통한 살육이 난무하는 이 영화의 주된 축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론은 평화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화를 이루는 조건이 상대방에 대한 인정인데 상대방을 인정할 수 없는 한 상대를 의심하는 한 상대를 제압하지 않는 한 평화는 그저 위태로운 동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여 카인의 징표를 받았듯이 혹성탈출에서 유인원은 결국 유인원을 죽이고 만다. 외부에 대한 위협을 강조하여 내부를 통제하기 시작하면 폭력의 주된 희생자는 내부의 반대자가 된다. 이점에서 이 영화는 통상적으로 정치적이다. 정치란 매우 지저분한 통치행위란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권력은 결국 상대방을 통제하는 힘이기에 통제에 따르지 않는 반대자를 제거하는 것은 권력의 본질이다. 권력이 등장하면서 살인이 벌어지고 살인이 벌어진 유인원의 사회는 인간의 사회와 동일하게 움직인다.

 

결국, 인간과 유인원은 다르면서도 같은 종이라는 사실....

다름과 같음이 상대방을 절멸해야 할 이유로 작동한다는 사실...

인간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세운 유인원의 사회가 자신을 억압했던 인간의 사회와 동질화 되는 이 아이러니를 보면서 씁쓸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학살하던 제3제국의 나찌와 똑 같이 가좌지구를 무차별 폭격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인류애를 부르짖던 아우슈비츠의 유대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나찌와 똑 같이 사람을 대상으로 죽음을 전파하는 전체주의자들일 뿐이다. 도시의 폭격에 웃음짓고 환호하며 떠드는 이스라엘 시민들을 보면서 세상의 악은 멀리 있지 않았다.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가 주장햇던 '악의 평범성'을 같은 유대인이 증명한다는 아이러니...

 

혹성탈출을 보면서 들었더 잡다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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