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도 국민도 고통스러운 ‘사법부 치욕의 과거’ 

판결로 말해야할 때 침묵
‘고문당한 증거 없다’ 외면
국정원 과거사위원 때 자료수집
신 대법관 보면서 집필 결심 

1. 연재를 시작하며


한국 현대사 연구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권위주의 시절 한국 사법부의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어둠의 역사를 밝히는 장기 연재물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를 시작한다. 50회에 걸쳐 1년 동안 연재될 이 기획은 한 교수가 2004년 10월부터 만 3년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발굴한 자료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 교수는 국정원 과거사위의 보고서 <사법 편>의 책임 집필을 맡은 바 있다. 이 연재물을 통해 사법부의 어두운 역사에 빛이 들고 사법부가 국민의 사법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전두환이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약 한 달 반 후인 1981년 4월 15일, 대법원에서는 이영섭 대법원장의 퇴임식이 열렸다. 1979년 3월 박정희에 의해 대법원장에 임명되어 10·26 사건과 김재규 재판, 5·18 광주항쟁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격동기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처리해야 했던 이영섭 대법원장이 정년을 한참 남겨놓고 중도퇴임을 당한 것이다. 이영섭 대법원장은 퇴임사에서 “취임 초에는 포부와 이상이 컸으나 과거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그는 퇴임사에 사법부를 사법부(司法府)라 쓰지 않고, 사법부(司法部)라고 적어 사법부의 위상이 행정부의 일개 부처로 전락하였다는 사실을 자조적으로 표현했다.

이영섭 대법원장의 한 서린 퇴임사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가 말한 회한과 오욕은 누구의 회한이며 누구의 오욕이었을까? 그 회한과 오욕이 어찌 신군부의 압력 때문에 입이 돌아갈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던 대법원장 한 사람만의 것이었으리오? 그 회한과 오욕은 사법부 전체, 아니 전두환 등 몇몇을 제외한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회한이요 오욕이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회한과 오욕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신영철 대법관은, 또는 그를 비호하는 사람들은 회한과 오욕이 무엇인지 알기나 할까
 

 

 1971년 ‘항응접대’를 이유로 이범렬 부장판사 등의 구속영장이 청구됐다는 소식을 들은 서울형사지법 판사 42명 가운데 39명이 일괄사표를 쓰고 있다. 흔히 ‘사법파동’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와 검찰 등 행정부의 노골적인 재판 간섭에 판사들이 집단 항거한 일로, 사법권 독립을 여망하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는 우리 사법부가 겪은 고통스러운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사법부 문제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신영철 스캔들을 보면서 2004년 10월부터 만 3년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다짐했던 것을 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거사 진상규명의 대상이 되는 주요 사건들은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 학살 관련 사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법부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들이다. 흔히 ‘사법살인’이라 불리는 인혁당 사건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수많은 조작간첩 사건들도 모두 법원의 판결에 의해 간첩으로 확정되었다. “피고인의 자백이 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거나 이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은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지켜지지 않았다.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사법부가 한발씩 뒤로 물러설 때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처음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질 때 이북정권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어 도출된 ‘반국가단체’라는 개념은 두 사람만 모여도 훌륭한 반국가단체로 인정되었다. 사법부가 중앙정보부의 요구에 굴복하다 보니 국가기밀의 개념은 한정 없이 넓어졌다. 기밀이라면 당연히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어야 할 터인데, 명문대학을 나와 고시에 합격한 검사님은 ‘짜장면은 싸고 맛있어’나 ‘경부고속도로는 4차선이다’ 등등의 얘기를 간첩이 수집한 국가기밀이라고 공소장에 올렸고, 판사님들은 이따위 공소장을 받아들여 사형에 무기징역을 남발했다.

우리 헌법은 “법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아니하며, 징계처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직·감봉 기타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 사회가 법관의 신분을 보장하고 그에게 높은 지위를 부여하는 이유는 오로지 법과 양심에 의해 판단할 뿐, 어떠한 내외의 압력에도 굴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법관들은 너무 쉽게 압력에 굴복했다. 항상 내부자가 문제였다.

중정-안기부의 사법부에 대한 부당한 압력과 개입 문제를 조사하면서 조금 당혹스러웠던 부분은 중정-안기부가 그 험한 시절에도 시국사건과 관련하여 현직 법관을 잡아가거나 고문을 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여당 실력자나 현역 국회의원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모욕주고 수염까지 뽑았어도 현역 법관을 잡아다가 압력을 가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딱 한 번 1980년 김재규 사건 재판 당시 신군부의 요구사항을 거절한 양병호 대법원 판사가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차라리 중정-안기부가 법관들을 잡아다 협박하고 고문하고 해서 사법부가 저 지경이 되었다면 덜 슬펐을 것이다.

지금 수많은 과거사 사건들, 특히 조작간첩 사건들이 재심을 기다리고 있다. 피해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던 바로 그 사법부에 자기 사건을 다시 다뤄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 이후 사법부는 몇 차례에 걸쳐 과거청산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인혁당 사건, 수지 김 사건, 함주명 사건, 차풍길 사건 등의 재심에서 억울한 피고인들에게 무죄가 선고되었고, 몇몇 사건의 경우는 피해자들에 대한 금전적인 배상까지 이루어졌다. 이는 과거청산이나 자기반성 문제를 깔아뭉개고 있는 검찰의 몰염치에 비한다면 나름대로 긍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청산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재발 방지이다. 그런데 신영철 사건과 같은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과거사 사건들의 재심을 진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1979년 3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이영섭 대법원장. <한겨레> 자료사진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필자가 책임 집필을 했던 국정원 과거사위의 보고서 <사법 편>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는 이 보고서와 확실히 다르다. 사법부는 중정-안기부와의 관계에서는 분명 피해자였고, 국정원 보고서에서는 사법부를 당연히 피해자로 기술했다. 그러나 사법부와 고문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의 관계, 나아가 사법부와 시민의 관계에서 사법부는 분명 가해자였다. 조작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이 그토록 고문에 대해서 호소했건만, 저 높은 법대 위의 재판관들은 끝내 바짓가랑이 한 번 걷어보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흔히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고 한다. 그 판결문에서 당시의 많은 법관들은 “당사자의 주장 이외에는 고문을 당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면서 무고한 시민들을 간첩으로 만들어 버렸다. 뒤에 소장 법관들이 스스로 반성했듯이 한국의 사법부는 “판결로 말해야 할 때 침묵했고, 판결로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했던 것”이다.

피해자들이 당했던 고문 이야기를 듣거나, 유죄 판결을 끌어내기 위해 중정-안기부가 사법부를 상대로 은밀하게 공작했던 자료를 정리·분석하는 일은 피해자들의 아픔이 뼈 마디마디에 전해지는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그 와중에도 보석처럼 빛나는 판결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몇몇 법관들이 일반 형사사건에서 고문 근절을 위해서 용기 있는 판결을 내렸고, 이런 판결들은 간첩 사건이나 조직 사건에서 뒤늦게나마 무죄 판결이 나오는 길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유신과 5공의 사법부에 벼락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그래도 사법부에 이런 의로운 법관들이 몇 분은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국정원 과거사위 보고서는 국정원에 보존된 내부 기밀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다. 1971년 사법파동 이전의 자료는 불행하게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보고서에서 깊이 다루지는 못했지만, 이 연재에서는 사법파동 이전의 이야기를 5~6회 다룰 것이다. 1972년 유신 이후의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중정-안기부 자료를 활용할 수 있었는데,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아마도 자료를 많이 없앴을 것이며, 사법부와 관련된 사안들은 애초에 자료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그래도 남아 있는 자료들을 분석하여 보니, 중정-안기부의 재판 개입과 관련하여 소문으로 떠돌거나 이러지 않았을까 짐작했던 것들이 사실이었음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연재물이 다룰 내용은 이영섭 대법원장이 회한과 오욕의 시대라 부른 시기에 벌어진 일들이다. 이 연재에 거론되는 사건에 관련된 법관들에게 이 이야기는 아마도 돌이키기 싫은 치욕일지도 모른다. 그분들도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사건이 다시 거론되는 게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그분들이 내린 잘못된 판결에 의해 인생이 어긋나 버린 채 지금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피해자와 가족들의 고통에 비할 수 있을까? 국정원 과거사위 보고서, 특히 <간첩 편>과 <사법 편>은 통곡하는 심정으로 아프게 썼던 보고서였다. 독자 여러분도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피해자들을 기억하면서 아프게 읽어 주기 바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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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2일은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청계광장에 앉아 함성을 외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봄비 내리는 광장은 쓸쓸하기만 하다. 이상화가 살아있다면 아마도 ‘빼앗긴 광장’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노래했을 것이다. 1년이 되어서인지 촛불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가 나온다. 촛불에 덴 자들이 해대는 뻔한 얘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1년 전 즐겁게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 속에서도 촛불의 후유증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목소리로 외쳐댔건만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 사람들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한 모양이다. 다시 이런 판이 벌어져도 나가지 않겠다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촛불은 성공한 운동이었나? 나에게도 몇몇 기자가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3·1운동은 성공한 운동입니까?” 기자들은 물론 성공한 운동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1920년 3월1일에도 사람들이 3·1운동을 성공한 운동이라고 평가했을까? 조선이 독립되었나, 민족이 해방되길 했나, 수천명의 희생자만 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3·1운동을 한 30년쯤 흐른 뒤에 평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어떤 운동의 성패를 가늠하기에 1년이란 너무 짧은 시간이다.

촛불과 비교할 때 3·1운동은 단기적으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 민중들에게 사과하지는 않았지만, 통치방식을 바꾸었다. 이른바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한 것이다. 촛불에 대하여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무서운 속도로 역주행을 하여 ‘무단통치’의 시기로 회귀하고 있다. 일본 통치배들조차 열어주었던 언론의 자유는 급격하게 유린당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촛불 관련자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기소하고 있다. 촛불 관련으로 기소된 사람이 10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유모차 끌고 나온 엄마들이 조사받질 않나, ‘피디수첩’ 관련자들이 줄줄이 체포되질 않나, 미네르바가 구속되질 않나, 촛불 직후의 경찰과 검찰은 바쁘기 한량없다. 3·1운동 후 상해 등지로 망명하였던 독립운동가나 열혈청년들이 1년쯤 지난 뒤 국내로 돌아와 아무 탈 없이 지냈다는 것은 어느 태평성대의 이야기였던가? 지금 이명박 정부가 하고 있는 짓은 한마디로 일본 총독부보다도 치졸한 것이다. 그래서 창피하다.

운동도 상대가 있는 법인지라 모진 놈 만나면 응당한 변화를 단기간에 끌어내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급해할 이유는 없다. 3·1운동 덕분에 상해임시정부도 수립되고, <동아일보>, <조선일보>도 만들어졌지만, 나는 3·1운동의 진정한 성과는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 바로 3·1운동을 겪은 사람들이 변한 것이다. 물론 그때도 당장 독립을 이루지 못한 데 실망하고 좌절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일제 시기의 독립운동사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3·1운동의 체험이 얼마나 뼛속 깊이 한 사람을 변화시켰는지를 절감했을 것이다. 3·1운동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태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3·1운동의 한계를 딛고 넘어서서 새로운 운동을 펼쳐나갔다. 3·1운동의 맛은 준비된 선수들만 참가했던 의병운동이나 애국계몽운동과는 달리 그야말로 시장 보러 나왔던 장삼이사들이 진하게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촛불에 나왔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마음의 촛불을 끄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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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에 대한 평가와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촛불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했다는 사실 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내 주변에 몇몇은 촛불로 부터 세상을 보는 관점과 인식이 틀려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물론 소수지만 난 그 소수가 참으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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