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 속으로 - 더 자세한 쓰기, 사라짐의 쓰기에 대하여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서제인 옮김 / 에트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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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은 가볍다. 

보잘것없는 것들은 가엽다. 

이 자그마한 것들은 잊히면 시나브로 사라진다.


무미건조한 것들은 무용하다.

무무(貿貿)한 것들은 무시당한다.

이 하찮은 것들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시나브로 사라진다.


점점 잊히는 것들에 대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진지한 관찰자’는 세심한 관심을 드러낸다. 









세상을 진지하게 관찰하는 사람은 호기심이 많다. 그들은 자그맣고 하찮은 것들을 열심히 주우러 다닌다. 영국의 문학 비평가 제임스 우드(James Wood)는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세부 사항(detail)’이라고 했다.


세부 사항은 관찰자를 만나고 싶다. 세부 사항은 원래 조용한 편이지만, 자신을 알아준 관찰자를 만나면 수다스러워진다. 관찰자의 눈빛을 느낀 세부 사항이 말을 건넨다. 



“날 만져 주세요.” 



우드는 세부 사항을 ‘우리에게 만져달라고 애원하는 삶의 조각’으로 비유한다. 호기심이 많은 관찰자는 삶의 조각들을 모은다.












호기심이 솟아나면 세부 사항을 궁금해한다. 진지한 관찰자는 쓸모없는 세부 사항이 ‘궁금해서’ 공부한다. 미국의 철학자 제나 히츠(Zena Hitz)는 호기심을 죽이면서 실용성만 챙기는 공부를 비판한다. 그녀는 쓸모없는 것(지식)을 공부하는 관찰자를 ‘자유롭게 배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격찬했다. 궁금증이 많은 관찰자는 삶의 조각들을 사랑한다. 이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진지한 관찰자가 글을 쓰면 무색한 세부 사항에 선명한 빛깔이 생긴다. 미국의 작가 리디아 데이비스(Lydia Davis)는 자신의 글쓰기를 잡초가 무성한 곳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행위로 비유한다. ‘into the weeds(잡초 속으로).’ 이 관용구는 ‘더 자세하게 들어가다’라는 뜻도 있다. 잡초는 성가신(bother) 존재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잡초를 관찰하는 사람은 잡초의 매력을 알려고 노력한다. 진지한 관찰자는 성가신 것에 궁금증을 느끼면 그것에 신경을 쓴다(bother). 진지한 관찰자는 보기 좋고, 쓸모 있는 것들만 찾는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데이비스는 ‘신경 쓰이는’ 삶의 조각들을 주워서 노트에 담는 작가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삶의 조각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글을 쓴다고 밝힌다. 



“날 쓰다듬어주세요.”



삶의 조각을 여러 번 쓰(고)다듬으면 멋진 글이 된다. 글의 소재가 될 만한 삶의 조각은 작가가 직접 찾을 수 있지만, 때로는 예기치 않게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자주 봐서 흔한 사물도 자신에게는 특별한 삶의 조각이 된다. 전업 작가가 아니어도 삶의 조각을 찾아서 글을 쓸 수 있다. 


데이비스는 무용한 글쓰기를 해야 하는 이유를 강조하기 위해 조지 스터트(George Sturt)의 책 <수레바퀴 제작인의 작업실>(The Wheelwright’s Shop)을 재조명한다. 스터트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다. 그는 사람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 즉 수레바퀴를 만드는 과정과 그 밖의 공예 기술들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수레바퀴 제작인의 작업실>은 스터트의 소설들보다 더 유명해진 회고록이다. 이 책은 작가가 살았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1837~1901년)의 공예 기술을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스터트는 ‘보잘것없는 세부 사항을 관찰한’ 작가다.


똑똑하고, 표현의 기교가 뛰어난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자신의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을 애지중지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지한 관찰자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알라딘 램프에 갇혀 16년째 무용한 글쓰기를 한

cyrus가 만든 주석





* 32쪽




 

 ‘나는 내 어떤 책들을 어떻게 썼는가’[주1]는 언제나 내 머릿속에 맴도는 책 제목이다. (중략) 이 제목은 프랑스 작가 레몽 루셀의 에세이집 제목이면서 표제작 제목이기도 하다. 방금 그것을 찾아본 나는 존 애시베리가 루셀을 경유해 그 에세이집에 다시금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다.







[주1] 레몽 루셀(Raymond Roussel)은 독특한 방식으로 글을 쓴 프랑스의 작가다. 그의 실험적인 글쓰기는 당대의 독자들로부터 외면받았다. 루셀은 자신의 글쓰기에 관한 생각을 정리한 <나는 내 어떤 책들을 어떻게 썼는가>라는 글을 썼고, 자신이 죽은 후에 출간할 것을 요청했다. 







루셀의 대표작은 《아프리카의 인상》(송진석 옮김, 문학동네, 2019년)과 《로쿠스 솔루스》(송진석 옮김, 문학동네, 2020년)다. 국역본 《아프리카의 인상》에 부록으로 <나는 내 책 몇 권을 어떻게 썼는가>가 실려 있다. 루셀의 작품을 진지하게 분석한 학자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다. 루셀에 심취한 푸코는 1963년에 <레몽 루셀>을 출간했다. 이 책의 영문판 제목은 <죽음과 미로>(Death and the Labyrinth: the World of Raymond Roussel)다. 미국의 시인 존 애시베리(John Ashbery)는 루셀의 열렬한 독자이자 루셀의 작품을 영어로 옮긴 번역자로, <죽음과 미로> 서문을 썼다.







푸코의 <레몽 루셀>은 국내에 번역 출간되지 않았다. 루셀이 언급된 또 다른 철학서가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차이와 반복》(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년)이다. 들뢰즈는 푸코의 <레몽 루셀>을 참조했다. 










[주2] 제임스 우드의 비평 에세이집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에 실린 두 번째 글은 『진지한 관찰』이다. 이 글에 리디아 데이비스의 단편소설 <문법 질문>(Grammar Questions)이 언급된다(177쪽). <문법 질문>은 작품집 《불안의 변이》(강경이 옮김, 봄날의책, 2023년)에 수록되어 있다(제목은 ‘문법 질문들’이다). 《불안의 변이》에 <푸코와 연필>(Foucault and Pencil)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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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07-06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우드 책 읽었는데 리디아 데이비스 언급된 것도 잊고 있었네요. 연결 지점 배워갑니다. 전 무엇보다 저 <수레바퀴제작인의 작업실> 읽어보고 싶어요.

cyrus 2026-07-13 06:55   좋아요 1 | URL
저는 존 애시베리의 시집이 출간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생소한 이름이라서 알아봤는데, 노벨 문학상 빼고 퓰리처상, 전미도서상을 받은 시인이라고 하더군요.
 




2년 만에,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방문객도 많은 서울국제도서전(약칭 ‘국도’)에 갔다. 이 글은 출판사 부스가 있는 곳에 입장하기 위해 줄 서서 기다렸을 때 썼다.















* 이창현 · 유희(그림)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사계절, 2018년)

 

* 이창현 · 유희(그림)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2》 (사계절, 2023년)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책보다 굿즈를 판매하는 출판사들이 많아진 국도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누군가는 국도에 간 사람들을 ‘진정한 독서인’이 아니라고 했다. 어떤 기자는 국도를 겨냥해서 ‘돈맛에 매몰된 도서전’이라고 표현했다.


국도의 운영 방식을 살펴보면 출판인과 독자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문제점이 수두룩하다. 그렇다고 해서 국도에 참여한 출판인을 ‘돈맛’에 빠진 사람인 것처럼 매도하는 비난은 틀렸다. 도서전 예매에 성공한 사람들을 ‘굿즈 마니아’라고 비아냥거리는 시선 또한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국도에 ‘책(의) 맛’을 보러 오는 독자들이 찾아온다. ‘책 맛’을 아는 독자는 자기가 특별히 관심 있는 출판사가 만든 책들을 구매하거나 읽는다. 이런 독자들은 출판사에서 나온 시리즈나 전집을 사서 모은다.


올해 국도에 참가한 출판사 중에 내가 주목한 출판사는 ‘까치(까치글방)’와 ‘워크룸프레스’다. 까치는 1977년에 설립된 인문 ·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다. 철학, 과학, 역사,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만들었고, 지금도 팔리는 스테디셀러도 여러 권이다. 올해 49세인 까치가 국도에 참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까치 출판사의 책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과거의 책들은 ‘까치글방’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까치 출판사의 책들은 주로 서평을 쓰기 위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그래서 아주 조금만 읽은 책들이 많다.















* [결정판] 스티븐 호킹, 김동광 옮김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까치, 2021년)

 

* [개정판] 빌 브라이슨, 이덕환 옮김 《거의 모든 것의 역사 2.0》 (까치, 2026년)

 

* [제4판] 토머스 새뮤얼 쿤, 김명자 · 홍성욱 옮김 《과학혁명의 구조》 (까치, 2021년)




까치 출판사는 스테디셀러가 된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의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빌 브라이슨(Bill Bryson)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토머스 S. 쿤(Thomas 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 등을 펴냈다.















* 브라이언 클레그, 제효영 옮김 《책을 쓰는 과학자들: 위대한 과학책의 역사》 (을유문화사, 2025년)




과학자들이 쓴 과학 도서들의 역사를 정리한 브라이언 클레그(Brian Clegg)의 《책을 쓰는 과학자들》에 까치 출판사가 자랑하는 스테디셀러 과학 도서 3권이 언급된다.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는 물리학 개념의 배경 설명이 부족하고 술술 읽히는 책이 아닌데도 가장 많이 팔린 대중 과학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을 깬 과학책이 2003년에 나온 《거의 모든 것의 역사》다.







까치는 과학 도서를 꾸준히, 잘 만드는 출판사다. 과학 주제가 다양하다. 물리학(아인슈타인, 양자역학), 화학(로얼드 호프만), 수학, 우주론(킵 손), 생물학(닉 레인), 동물학(데이비드 애튼버러, 데즈먼드 모리스), 의학(싯다르타 무케르지) 분야의 책들을 펴냈다. 
















* 아닐 아난타스와미, 노승영 옮김 《기계는 왜 학습하는가: AI를 움직이는 우아한 수학》 (까치, 2025년)

 

* 댄 레빗, 이덕환 옮김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 나를 이루는 원자들의 세계》 (까치, 2024년)

 

* 데이비드 애튼버러, 이한음 옮김 《경이로운 지구의 생명들》 (까치, 2023년)
















* 빌 브라이슨, 이한음 옮김 《바디: 우리 몸 안내서》 (까치, 2020년)

 

* [개역판] 로얼드 호프만, 이덕환 옮김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까치, 2018년)

 

* [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 옌 웡 함께 썼음, 이한음 옮김 《조상 이야기: 생명의 기원을 찾아서》 (까치, 2018년)

 















* [절판] 데이비드 보더니스, 이덕환 옮김 《아인슈타인의 일생 최대 실수》 (까치, 2017년)

 

* 케네스 W. 포드, 이덕환 옮김 《양자: 101가지 질문과 답변》 (까치, 2015년)

 

* 킵 손, 전대호 옮김 《인더스텔라의 과학》 (까치, 2015년)

 













* [절판] 데이비드 애튼버러 · 에롤 풀러 함께 썼음, 이한음 옮김 《낙원의 새를 그리다: 극락조의 발견, 예술, 자연사》 (까치, 2013년)

 

* [절판] 빌 브라이슨 엮음, 이덕환 옮김 《거인들의 생각과 힘: 과학과 왕립 학회 이야기 》 (까치, 2010년)

 

* [절판] 리처드 포티, 박중서 옮김 《런던 자연사 박물관》 (까치, 2009년)



김동광, 김명남, 노승영, 이덕환, 이한음, 전대호, 홍성욱과 같은 번역 경험이 많은 번역자들이 까치 출판사의 과학책들을 만들었다. 물론, 번역자들도 사람인지라 오역하거나 오탈자를 못 고칠 때가 있다.















* 그레이엄 핸콕, 이경덕 옮김 《신의 지문: 사라진 문명을 찾아서》 (까치, 2017년)

 

* 그레이엄 핸콕, 이종인 옮김 《신의 사람들: 사라진 문명의 전달자들, “신의 지문”의 속편》 (까치, 2016년)




그런데 까치 출판사는 외계인이 고대 문명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그레이엄 핸콕(Graham Hancock)의 책들도 펴냈다. 현재 판매 중인 핸콕의 책은 그의 대표작 《신의 지문》과 속편 《신의 사람들》이다. 나머지 책들은 절판되었다. 《신의 사람들》의 번역자는 이종인이다. 핸콕의 초고대 문명설은 과학적 검증이 불가능하고, 근거가 빈약하다. 핸콕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재미있는 SF 소설로 인식하면서 읽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핸콕의 견해를 너무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은 과학적 사실과 역사를 모조리 부정한다. 국도 부스에 있는 까치 출판사 관계자를 만난다면 한 번 물어보고 싶다. 핸콕의 책이 지금도 잘 팔리냐고.







워크룸프레스는 그래픽 디자이너와 편집자가 함께 만든 출판사다. 그래서 전시 포스터와 다른 출판사의 책 표지를 만드는 일에 참여한다. 이 출판사가 기획한 ‘제안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비주류 문학 작품들을 모아 놓은 세계 문학 총서다.
















* D. A. F. 사드, 성귀수 옮김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워크룸프레스, 2014년, 사드 전집 1)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50번째 책]

* D. A. F. 사드, 성귀수 옮김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 (워크룸프레스, 2018년, 사드 전집 2)

 

* D. A. F. 사드, 성귀수 옮김 《알린과 발쿠르 혹은 철학 소설》 (워크룸프레스, 2025년, 사드 전집 3)




워크룸프레스는 국내 유일의 ‘사드(Sade) 전집’을 출간하고 있다. 인류애를 망가뜨리는 극단적인 에로티시즘을 표현한 사드의 문학 작품은 여전히 금서로 취급된다. ‘괴도 아르센 뤼뺑(Arsene Lupin) 시리즈’ 번역으로 유명한 번역자 성귀수가 혼자서 사드 전집 번역을 하고 있다. 








출판사가 계획한 사드 전집은 총 1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3권이 번역되었다. 사드 사후 200주년이었던 2014년에 처음 1권이 출간되었는데, 출간 속도가 더딘 편이다.







※ TMI: 성귀수 번역의 ‘아르센 뤼뺑 시리즈’를 처음 만든 출판사가 까치다. 까치 출판사 부스 바로 옆에 워크룸프레스 출판사 부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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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06-28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워크룸프레스 책 디자인 너무 좋아하는데 그래픽디자이너가 함께 책을 만들고 있었군요. 과학 쪽 책에 관심이 많아 번역자 관심 있게 보는데 까치 출판사도 과학 쪽 서적에 특화되어 있었다는 것 알아갑니다. 도서전 다녀오셨다니, 부럽습니다. 저는 엄두가 안 나던데 거기에서 사고 싶은 책들이 있어 부러워만 합니다.

cyrus 2026-07-05 22:15   좋아요 1 | URL
도서전에 처음 공개된 책들은 도서전이 끝나면 알라딘에 판매돼서 나중에 사도 되는데, 도서전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책들은 특별 한정판이라서 저는 이런 책들만 삽니다. 이번 도서전에는 딱 다섯 권만 샀어요. 이 정도면 적게 산 편입니다. ^^;;
 








 의심할 수 있는 자유는 과학에서 중요한 문제이며,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이 자유는 오랜 투쟁의 결과로 얻게 된 것이다. 의심할 수 있도록, 확신하지 않도록 허락받은 것 자체가 투쟁이었다. (중략)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유의 가치를 알리고, 의심이 결코 공포의 대상이 아니며, 인류의 새로운 잠재 능력을 가능케 하는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을 느낀다. 무엇이든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개선의 여지는 언제든지 열려 있다. 나는 미래 세대들에게 바로 이 자유를 요구하고 싶다.

 


(리처드 파인만, 《과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44~45쪽)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불완전한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텍스트는 불완전하다. 항상 어딘가 빠진 부분이 있다. 빈 부분에 대해서는 해석이 필요하다.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중에서, 203쪽) 



김 교수가 말한 ‘불완전한 텍스트’는 해석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경전을 뜻한다. 예를 들면 성경, 유대인 경전 <탈무드>, 유교 경전이다.
















* 김상욱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변화의 시대,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동아시아, 2026년)




학술 논문뿐만 아니라 과학 도서, 과학을 주제로 한 칼럼도 불완전한 텍스트다. 과학자들은 과학적 견해가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 검증한다. 과학자들도 가끔 틀리기도 하고,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 텍스트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과학이 부실한 학문을 뜻한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Richard Feynman)은 표현을 빌리자면, 과학은 ‘의심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스스로 교정하는 학문이다.

 







김 교수는 자신을 소개할 때 ‘모든 것에 의심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이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과학적 태도’를 널리 알린다고 했다. 이 과학적 태도가 바로 회의주의(skeptic)다.
















* 마이클 셔머, 류운 옮김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바다출판사, 2007년)


* [절판]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시간 여행은 가능한가: 한국 스켑틱 1호》 (바다출판사, 2015년)


*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마이클 셔머, 제임스 랜디 외 여러 명의 필자 참여), 김보은 · 류운 · 하인해 외 옮김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스켑틱 10주년 베스트 에세이》 (바다출판사, 2025년)




회의주의자는 모든 견해를 불신하거나 특정 신념에만 마음의 문을 닫는 사람이 아니다.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는 국내에서 발행된 지 11년이 된 잡지 <Skeptic>(스켑틱 코리아) 편집장이다. 그가 쓴 「회의주의 선언」(A Skeptical Manifesto)은 회의주의의 원칙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글이다.[주1] 셔머는 이 글에서 ‘올바른 회의주의자’를 특정 지식에 관한 주장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회의주의는 교조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다. 
















* 리처드 파인만, 정재승 · 정무광 함께 옮김 《파인만의 과학이란 무엇인가?》 (승산, 2008년)




올바른 회의주의자는 정직하다. 자신의 오류와 무지한 점을 인정한다. 파인만은 ‘정직해지려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과학적 사고라고 말했다. 파인만이 말한 ‘정직함’은 단순히 정확한 사실만 전달하는 태도를 뜻하지 않는다. 확실한 정직함은 다른 사람들이 과학적 사고를 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 이음 편집부 《과학 잡지 에피 Epi 36호: 펙트체커》 (이음, 2026년)




회의주의자는 ‘팩트체커(fact-checker)’다. 팩트체커는 AI가 만든 ‘진짜 같은 가짜 정보’를 의심해야 한다. 권석준 성균관대학교 화학공학부 교수는 과학자가 팩트체크에 동참하려면 ‘비판적 읽기(critical reading)’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주2] 학술논문의 결론을 의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 과정 전체를 꼼꼼하게 따지는 것이다. 과학의 팩트체크는 오류를 확인하고, 이를 수정해 나가는 과정이다.


과학 도서를 읽을 때도 팩트체크를 해야 한다. 김 교수의 글에 회의주의적 관점으로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 있다.



 지구상의 많은 동물이 양성생식으로 번식한다. 암수가 만나 둘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자식을 만든다는 뜻이다.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혼과 사랑의 불안한 동맹」, 103쪽)



생물의 생식 방식은 크게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이 있다. 무성생식은 암수 교배를 하지 않고, 자가 분열을 해서 새로운 개체를 생산한다. 그래서 무성생식을 한 생물종의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유전자는 동일하다. 















* 데이비드 베이커, 김숲 옮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섹스의 역사: 20억 년간 작동해온 생존과 욕망의 진화》 (RHK, 2026년)




암수 교배, 즉 유성생식으로 태어난 생물종은 암수 유전자 절반씩 물려받는다.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유전자가 섞이면 생물종이 다양해지며 급격하게 변하는 환경에 잘 적응한다. 섹스(sex, 성행위)는 단순히 성적 쾌락을 느끼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음란하고 불결한 행위인 것도 아니다. 섹스를 즐기는 우리는 섹스의 진화적 이점을 잘 모른다. 섹스는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김 교수가 표현한 ‘양성생식’은 유성생식과 동일한 의미다. 유성생식과 양성생식이 익숙한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생물학적 성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정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생물의 번식 방식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생물학자들은 성적 이분법(gender binary)을 반박한다.
















* 강병철, 백조원, 이주원, 오승재, 효록 함께 썼음 《성소수자_LGBT(Q)》 (알마, 2018년)




이성애주의(heterosexism)는 남성과 여성이 사랑하는 것을 ‘정상’으로 규정한다. 이성애주의는 성적 이분법을 강화한다. 성적 이분법의 기준에 벗어난 동성애와 젠더퀴어(genderqueer)는 ‘비정상’이 된다. 앤 파우스토-스털링(Anne Fausto-Sterling)은 이성애주의를 옹호하는 생물학을 비판한 페미니스트 생물학자다.[주2] 파우스토스털링은 성적 이분법의 한계를 넘어선 ‘다섯 개의 성’을 제안했다. 다섯 개의 성 중에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의 성은 ‘간성(intersex)’이다. 간성은 여성과 남성의 몸을 모두 가진, 성별 구분이 모호한 사람이다. 과거에 간성을 ‘남녀한몸증’ 또는 ‘자웅동체’라고 불렀지만, 차별적인 의미가 반영되어 있어서 쓰지 않는다(《성소수자_LGBT(Q)》 용어집 참조).















   


* 앤 파우스토-스털링, 홍승효 옮김 《섹싱 더 바디: 젠더 정치와 섹슈얼리티의 구성》 (후마니타스, 2026년)

 

* 퍼트리샤 오노니우 케이시언, 노승영 옮김 《자연은 퀴어하다: 장소에 토박이가 된다는 것, 속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의 온갖 퀴어함에 관하여》 (에이도스, 2026년)

 

* 모로하시 겐이치로, 김종현 옮김 《자연은 성을 둘로 나누지 않는다》 (바다출판사, 2026년)




자연은 매일 ‘퀴어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자연스러운 퀴어 퍼레이드는 인간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캄브리아기에 살았던 원시 물고기는 턱이 없는 무악류인데, 이들은 정자와 난자를 모두 지닌 간성이었다. 대부분의 원시 척추동물 종은 양성애적 짝짓기를 했다.[주3]


만화영화 <니모를 찾아서>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물고기인 흰동가리는 무리 내 암컷이 죽으면 수컷은 암컷이 되어 알을 낳는다. 점박이하이에나는 암수 성기를 모두 가지고 있다. 홍학과 까마귀는 같은 성별의 새에게 구애하고, 함께 살아간다.


모든 생물이 자손을 최대한 많이 낳기 위해 유성생식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동물 개체군에 비(非)번식성 이성애를 하는 개체가 존재한다. 이들은 생물학자들이 관찰하면서 증명된 번식 주기를 따르지 않으며 새끼를 낳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몇몇 생물학자와 동물학자는 동물의 번식 욕구를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여기며, 동성애와 비번식 개체를 비정상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퀴어한 생물’을 연구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암묵적으로 은폐한다.


그래서 파우스토-스털링과 퍼트리샤 오노니우 케이시언(Patricia Ononiwu Kaishian)과 같은 페미니스트 생물학자와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생물학자들은 퀴어의 삶과 존재 방식을 잘 이해하기 위한 ‘퀴어 생물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 브루스 배게밀, 이성민 옮김 《생물학적 풍요: 성적 다양성과 섹슈얼리티의 과학》 (히포크라테스, 2023년)

 

* 조안 러프가든, 노태복 옮김 《변이의 축제: 다양성이 이끌어온 우리의 무지갯빛 진화에 관하여》 (갈라파고스, 2021년)

 

* 티에리 오케, 변진경 옮김 《셀 수 없는 성: ‘두 개의 성’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오월의봄, 2021년)


* [절판] 이음 편집부 《과학 잡지 에피 Epi 9호: 두 개로 나뉘지 않고 무한히 펼쳐지는, ‘젠더 스펙트럼’》 (이음, 2019년)




퀴어 생물학의 고전을 꼽으라면 나는 이 세 권을 소개할 것이다. 파우스토-스털링의 《섹싱 더 바디》(Sexing the Body, 2000년), 브루스 배게밀(Bruce Bagemihl)의 《생물학적 풍요》(Biological Exuberance, 1999년), 조앤 러프가든(Joan Roughgarden)의 《변이의 축제》(Evolution’s Rainbow, 2004년)다.


《생물학적 풍요》는 1,000쪽이 넘는 ‘벽돌 책’이지만, 지금까지 관찰된 퀴어한 도물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담았다. 그리고 동물 동성애 연구의 역사를 소개할 뿐만 아니라 동물학 연구 과정에 개입된 ‘동성애 혐오’를 지적한다. 조앤 러프가든은 트랜스젠더 생물학자다. 《변이의 축제》는 2010년에 원서 제목을 그대로 이어받아 《진화의 무지개》(노태복 옮김, 뿌리와이파리)로 출간된 적이 있다. 러프가든은 퀴어한 동물들을 설명할 때 배게밀의 책을 참고했다. 성적 이분법을 과학적으로 비판한 세 권의 퀴어 생물학 고전은 완독하기가 부담스러운 분량이다. 발췌 독서를 한다면 이 세 권의 책이 한 번 이상 인용되었거나 참고한 책들(《자연은 퀴어하다》, 《셀 수 없는 성》, 《과학 잡지 에피 9호》)을 읽으면 된다.


김상욱 교수는 ‘변하지 않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어서 충분히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제대로 알면 불확실한 변화의 방향이 대충 어디로 갈지 알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10년 후에도 배울 수 있다. 김 교수는 역사, 철학,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 수학, 물리, 화학, 생물학은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라서 맨 먼저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회의주의를 ‘변하지 않는 것’의 목록에 추가하고 싶다. 편견과 교조주의, 그리고 나쁜 일에 쓰이는 AI에 속지 않으려면 회의주의의 기본 원칙을 배워야 한다. 회의주의의 기본 원칙은 금방 배울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나도 틀릴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내 생각과 완전 정반대인 견해가 낯설고 불편해도 친절한 호기심을 발동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세상이 회의주의자를 속여도

그들은 계속 질문하고 항상 배운다.







 회의주의적 독자 cyrus의 주석

 







[주1] 「회의주의 선언」은 셔머의 저서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1부 1장 전체 내용이다. 2015년 한국판 <스켑틱> 창간호 특집 연재 ‘회의주의란 무엇인가’의 첫 번째 글로 게재되었다. <스켑틱>에 수록된 17편의 글을 선별한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서문으로 수록되었다. 셔머의 글이 있는 세 권의 책 모두 바다출판사가 펴냈다. 



[주2] 권석준, 「AI 과학자 시대, 팩트체크의 재정의」, 《과학 잡지 에피 Epi 36호: 펙트체커》, 이음, 2026년, 36쪽.


















* 폴라 보글, 이지훈 옮김 《운전 배우기》 (지만지드라마, 2019년)

 

* 질 돌런, 최석훈 옮김 《연극 그리고 섹슈얼리티》 (교유서가, 2025년)



[주3] 파우스토-스털링은 레즈비언이다. 그녀의 연인은 극작가 폴라 보글(Paula Vogel)이다. 보글의 희곡 《운전 배우기》는 작품성이 뛰어난 퀴어 연극으로 평가받았고, 1998년 퓰리처상 희곡 부문 수상작이다. 





[주4] 데이비드 베이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섹스의 역사》, RHK, 2026년, 52~57쪽.





*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68쪽




   

 1863년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드 마네가 <올랭피아>에서 특정 매춘부[주5]의 누드화를 그렸을 때, 그는 예술로서의 누드화 규칙을 깬 것이었다.



[주5] 마네(Édouard Manet)의 대표작 <올랭피아>(Olympia)는 매춘부의 누드를 그린 그림이 아니다. 


























<참고 문헌> 


* 스테파노 추피, 최병진 옮김 《마네: 전통에 반기를 든 근대의 화가》 (마로니에북스, 2009년)

 

* 자비에르 질 네레, 엄미정 옮김 《에두아르 마네》 (마로니에북스, 2006년)

 

* [개정판] 이주헌 《그리다, 너를: 화가가 사랑한 모델》 (아트북스, 2015년)

 

* [구판, 절판] 이주헌 《화가와 모델: 화가의 붓끝에서 영원을 얻은 모델 이야기》 (예담, 2003년)



마네는 매춘부를 연상시키는 여성의 누드를 그렸고, 당시 보수적인 비평가와 관람객들은 <올랭피아>를 매춘부를 그린 그림이라고 비난했다. 그림의 모델은 마네를 비롯한 여러 화가의 작업을 위해 모델이 된 빅토린 뫼랑(Victorine-Louise Meurent)이다. 뫼랑은 모델 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화가였다. 1876년에 뫼랑의 작품이 살롱에 전시되었고(마네는 이 해에 열린 살롱에 낙선되었다), 그 후로도 뫼랑은 여러 번의 전시회에 작품들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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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를 변호하다 - 트랜스젠더 변호사 박한희의 삶과 생각
박한희 지음 / 한티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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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큰 무지개가 가득히 떠오를 때면
작은 무지개들이 희망을 만들러 큰 무지개를 따라갔었죠.

(※ 조규찬이 부른 「무지개」의 노랫말을 바꿔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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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서평은 ‘배보다 배꼽이 큰 글’이다. 서평은 한 권의 책 속에 있는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비평한 글이다. 그런데 내가 서평을 쓰면 한 권의 책만 다루지 않는다. 서평으로 소개할 책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거나 그 책을 비판하기 위해 다른 책들을 끌어들인다. 배보다 배꼽이 큰 서평에서 ‘배꼽’에 해당하는 책을 정식 용어로 표현하면 ‘참고 문헌’이다. 읽고 싶어서 산 책보다 서평 한 편을 쓰기 위해 구매한 책이 더 많다. 















* 김상욱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변화의 시대,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동아시아, 2026년)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전공 이외의 학문이나 주제에 관한 글을 쓰면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는 것보다 참고 문헌에 의존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칼럼에 참고 문헌의 제목을 언급한다. 그는 또 참고 문헌이 어떤 내용인지 간략하게 소개하기도 한다. 김 교수의 칼럼은 ‘참고 문헌에 대한 한 줄 평’으로 볼 수 있다. 한 줄 평만으로 참고 문헌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글쓴이가 참고 문헌을 언급하는 것도 독자의 관심(과 구매욕)을 불러일으키는 북 큐레이팅(book curating)이다.


이번에 나온 김 교수의 신작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그동안 발표한 칼럼들을 모은 책이다. 김 교수의 칼럼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칼럼 한 편에 교수가 인용한 참고 문헌이 한두 권 나온다. 책의 뒤쪽에 참고 문헌 목록이 있다. 외국 저자가 쓴 책을 번역한 역자 이름이 빠져 있지만, 참고 문헌을 만든 출판사 이름과 발행 연도가 표기되었다. 그리고 참고 문헌 목록에 김 교수가 칼럼에서 언급하지 않은 책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정도면 잘 만든 참고 문헌 목록이다.
















* [개정판] 에드워드 윌슨, 이한음 옮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북스, 2011년)




그런데 칼럼에 언급되었는데도 참고 문헌 목록에 없는 책들도 있다. 책의 첫 번째 글 「우리는 왜 자꾸 남을 따라 할까」의 주제는 유전자-문화 공진화론(gene-culture coevolutionary theory)이다. 이 이론을 소개하기 전에, 김 교수는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의 대표작 《사회생물학》과 《인간 본성에 대하여》를 언급한다. 두 권의 책이 참고 문헌 목록에 없다. 


윌슨은 인간의 행동 방식에 진화론을 적용해서 분석하는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윌슨은 1975년에 발표한 《사회생물학》(Sociobiology: The New Synthesis)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사회행동이 유전적인 요인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는 진화생물학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논쟁의 시작점이 된다. 


《사회생물학》은 두 권의 번역본(이병훈 · 박시룡 함께 옮김 《사회생물학: 해파리에서 인간까지》, 민음사, 1992년)으로 출간되었지만 절판되었다. 도서관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희귀 도서다. 《인간 본성에 대하여》는 《사회생물학》을 어려워하는 대중을 위해 쉽게 풀어 쓴 개론서인 동시에 사회생물학 비판론자에 응수하는 반박서다.















 

* 스티븐 제이 굴드, 홍욱희 · 홍동선 함께 옮김 《다윈 이후: 다윈주의에 대한 오해와 이해를 말하다》 (사이언스북스, 2009년)


* 스티븐 제이 굴드, 김동광 옮김 《인간에 대한 오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잘못된 척도에 대한 비판》 (사회평론, 2003년)


* 앤 커 · 톰 셰익스피어 함께 씀, 김도현 옮김 《장애와 유전자 정치: 우생학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그린비, 2021년)




사회생물학 비판에 앞장선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사회생물학에서 지나치게 강조된 생물학적 결정론이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 제2의 우생학이 될 수 있다면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윌슨과 사회생물학을 비판한 굴드의 견해를 알고 싶으면 지금 절판되지 않은 굴드의 주저 《다윈 이후》의 32장 「생물학적 잠재력과 생물학적 결정론」과 《인간에 대한 오해》 7장 「적극적 결론-지금의 모습으로 머무르리라」를 참고하면 된다. 반(反)우생학 운동을 주도하는 장애학자들도 윌슨의 사회생물학을 비판한다. 《장애와 유전자 정치》는 유전공학을 만난 우생학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과정을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들은 현대 우생학 계보에 사회생물학을 추가했다.








 





















* 케빈 랠런드 · 길리언 브라운 함께 씀, 양병찬 옮김 《센스 앤 넌센스: 20세기를 뒤흔든 진화론의 핵심을 망라한 세계적 권위의 교과서》 (동아시아, 2014년)


* [절판] 존 올콕, 최재천 · 김산하 함께 옮김 《사회생물학의 승리: 다윈 에드워드 윌슨과》 (동아시아, 2013년)

 

* [절판] 최재천, 장대익, 전중환, 김동광, 이병훈 외 《사회생물학 대논쟁》 (이음, 2011년)

 

* [절판] 프란츠 M. 부케티츠, 김영철 옮김 《사회생물학 논쟁: 유전자인가, 문화인가》 (사이언스북스, 1999년)

 



생전에 윌슨은 사회생물학이 ‘악명 높은 우생학’으로 취급받는 것이 불편하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사실 그는 유전적 요인이 진화 과정에 더 강하게 작용한다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았다. 문화와 양육이 진화에 미치는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간 본성에 대하여》에서 언급했다. 《센스 앤 넌센스》, 《사회생물학의 승리》, 《사회생물학 대논쟁》, 《사회생물학 논쟁》은 사회생물학에 대한 지나친 오해를 한 꺼풀 벗긴 책이다.


《사회생물학 논쟁》은 오스트리아의 진화생물학자 프란츠 부케티츠(Franz M. Wuketits)가 쓴 책이고, 《사회생물학 대논쟁》은 최재천 교수를 포함한 국내 진화생물학자와 사회학자들이 함께 만든 책이다. 최재천 교수는 윌슨의 제자다. 이 책은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탄생 200주년이었던 2009년에 열린 사회생물학 관련 심포지엄에 발표된 여섯 편의 글이 실려 있다. 


















* 에드워드 윌슨 · 베르트 휠도블러 함께 씀, 임향교 옮김 《초유기체: 곤충 사회의 힘과 아름다움, 정교한 질서에 대하여》 (범양사, 2015년)


* [개정판] 에드워드 윌슨 · 베르트 휠도블러 함께 씀, 이병훈 옮김 《개미 세계 여행》 (범양사, 2015년)

 

* [절판] 에드워드 윌슨, 이병훈 옮김 《자연주의자》 (사이언스북스, 1996년)



당시 심포지엄에 참석한 이병훈 전북대학교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1세대 진화생물학자다. 이병훈 교수는 윌슨의 《사회생물학》, 《개미 세계 여행》, 《자연주의자》를 번역했다. 


윌슨은 곤충학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독일의 곤충학자 베르트 휠도블러(Bert Hölldobler)와 함께 개미를 연구했다. 1990년에 두 사람은 개미를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얻은 성과들을 정리한 <The Ants>를 발표했다. 이듬해에 이 책은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이 되었고, 윌슨은 1979년에 이어 두 번째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에게 첫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준 책이 1978년에 출간된 《인간 본성에 대하여》다. 《개미 세계 여행》은 대중을 위해 ‘쉽게 쓴 <The Ants>’다. <The Ants> 원서도 《사회생물학》 못지않은 ‘벽돌 책’이라서 두 학자는 <The Ants>의 핵심을 압축한 《개미 세계 여행》을 썼다.


‘초유기체(superorganism)’는 윌슨과 휠도블러가 만든 용어가 아니다. 두 사람은 개미와 꿀벌과 같은 사회성 곤충의 군집(群集)을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기 위해 초유기체라는 개념을 가져왔다. 사회성 곤충은 여러 개체가 협동하면서 살아간다. 이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집단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행동한다.


‘유전자냐, 환경이냐’로 갈라서서 서로 물고 늘어지는 논쟁은 끝난 지 오래 됐다. 오히려 모든 진화생물학자는 한쪽 요인이 우세하다고 강조하는 결정론을 비판하고 있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생물학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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