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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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Scene #1  호기심에서 시작된 책의 탄생

 

과학은 어느 시대라도 대중이 손쉽게,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과 과학 이론의 괴리는 갈수록 커지고, 지금은 과학자들끼리도 역사적 발견과 그럴 듯한 사기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게 됐으니 참 딱한 일이다.

 

빌 브라이슨은 영국에서 여행 전문기자를 오래 했고 썩 재미있고 이름난 여행책을 여러 권 썼다. 그는 양성자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쿼크와 퀘이사도 구분할 줄 모르는 ‘과학의 문외한’이었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500쪽이 넘는 과학서에 도전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오르면서 이 거대한 산맥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호주 평야에 텐트를 치고 누워 ‘저 수많은 별들은 어디서 만들어져 저렇게 밤하늘에 박히게 되었을까’ 하면서 호기심 어린 밤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누구나 한번쯤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우주는 얼마나 큰 세계이며 그 끝은 어디인가. 지구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또 지구의 생명체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는 이 긴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면 정말 궁금한 것들, 여러 가지 근원적인 호기심들에 대해 과학자들이 내놓은 답들을 정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이 한 권의 책이 탄생하게 됐다.

 

 

 

 Scene #2  호기심 많은 독자를 위한 과학 안내서     

     

저자의 호기심이 너무나도 많은 탓일까. 아니면 아무 곳이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여행자의 기질이 문장에서 드러나는 것일까. 쿼크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지구 이야기로 돌아오는 등 내용의 구성은 독자들로 하여금 방향타를 잃고 헤매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을 위해서 빌 브라이슨은 과학 도서들을 탐독하고 자료를 수집할 정도로 많은 준비를 했지만 과학이라는 광범위한 지대를 안내하기에는 ‘과학 여행가이드’로서는 아직 서툰 면이 있다. 브라이슨이 인용하고 참고한 책들은 당장 서점에 가면 구할 수 있는,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 과학 저술가가 쓴 것들이다. 좀 더 깊이있는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이 책 한 권을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 브라이슨이 인용한 참고도서를 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도표나 사진 한 점도 없으니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끝까지 읽어나가는 내내 머리가 아프게 느껴질지도. 여행을 위한 안내문 혹은 지도라고 할 수 있는 도표와 사진이 없으니 여행가이드 브라이슨의 문장을 잘 쫓아갈 수밖에. (방대한 분량의 원작을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청소년 독자를 위해서 쉽게 쓴 『그림으로 보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래서 긴 문장 곳곳에 저자의 유머와 재치가 살아 있다. 원자, 상대성 이론, 유전자, 생명의 진화 과정과 그 과학적 발견은 소설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양성자는 알파벳 i의 점에 해당하는 공간에 5,000억 개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다. 그런 양성자를 10억 분의 1 정도의 부피로 축소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작고 작은 공간에 어떻게 해서든지 대략 30㎚ 정도의 물질을 채워 넣는다고 상상해 보자. 이제 우주를 만들 준비가 된 셈이다.’ ‘지구 45억 년 역사에서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최근에 등장한 것인가를 더 잘 이해하려면 두 팔을 완전히 펴고 그것이 지구의 역사 전체를 나타낸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책은 크게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지구의 생성과 구성, 원자의 발견과 운동, 생명의 탄생과 진화, 유인원과 현생 인류의 등장까지 책 이름 그대로 일반인들이 과학과 관련해 궁금해 할만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는 첫 장에서는 대폭발(빅뱅) 이론과 팽창 이론이 등장하고, 이어 현대 물리학의 기초인 열역학, 양자론, 상대성이론, 소립자와 초끈 이론이 나온다.

 

에세이스트가 쓴 글답게 책에는 인간적인 냄새가 묻어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과학에 앞서 사람 얘기다. 과학자는 근엄한 공식과 이론을 만드는 전형적 인물이 아니라, 경쟁자의 성공에 배 아파하고 자기 연구결과에 우쭐대며 종종 괴벽을 가진 인물들로 묘사된다. 원자나 태양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그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고 때론 집착했던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먼저 발견하고도 영어권 저널에 발표하지 않아 인정받지 못한 과학자들에 대한 연민도 잊지 않았다. 그의 과학사에는 승자만이 살아남는 공식 역사에 가려진 약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배어있다.

 

저자는 다윈과 헉슬리의 동상을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외진 커피숍으로 밀어내고 중앙 홀 계단에 서 있는 리처드 오언의 동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공룡’이란 말을 만든 오언이 얼마나 속 좁고 악랄한 화석연구자였는지를 그는 사료를 뒤져 낱낱이 드러낸다. 판 구조론의 원형인 대륙이동설을 주장한 알프레드 베게너가 지질학이 아닌 기상학자인데다 독일인이란 이유로 그의 탁월한 발상을 반세기 동안이나 애써 묵살한 동시대 지질학자들을 마음껏 야유한다.

 

또 과학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대체 과학자들은 그런 사실들을 어떻게 알았을까’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특장은 지구의 내부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현대인들은 교과서에 실린 지구 내부 그림이 외워야 할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지만, 실제로는 아직 지구 내부에 대해 많이 알려져 있지 못하다. 지표면에 직접 구멍을 뚫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은 지구 밀도를 계산하고 지진이나 지자기 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론해낸 결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자는 밝힌다.

 

 

 

 Scene #3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존재, 그 무엇  

 

수금지화목토천해명. 누군가 내게 태양계에 관해 물으면, 툭 튀어나온 대답이 늘 그랬다. 항성(태양)을 중심에 둔 행성의 공전, 자전, 태양 빛을 받는 행성과 위성 간 그림자가 빚는 현상 등 여러 이야기가 대답에 내재됐으되 기계적으로 ‘학창시절에 외웠던 것’을 꺼냈다.

 

과학 선생님께서 외우기 쉬운 방법이라며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직접 제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험에도 나올 거다”는 각인 작업과 함께였다. 명왕성이 행성 자격을 잃었으니 지금은 ‘수금지화목토천해’겠다.

 

뇌리에 ‘그림 한 장’이 떠오른다. 태양을 중심에 둔 채 태양으로부터 떨어진 거리 순서대로 행성을 늘어놓은 그림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본 우주 그림은 속임수다. 종이 한 장에 모든 것(태양계)을 그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속임수.

 

충격이었다. “실제로 상대적인 크기까지 고려해서 태양계를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저자의 서술이 부른 충격이라기보다 늘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되뇐 나의 입버릇에 깜짝 놀랐다. 타성, 오랫동안 새로움을 꾀하지 않아 나태하게 굳어진 습성에 놀란 거다. 처음 놀랐을 때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라고 마음을 다독거리려 했다. 쪽을 넘길수록 ‘존재, 그 무엇’은 너무 무거워 가슴 깊숙이 가라앉았다. 과학의 방대한 역사 속에서 깨달은 것은 인간은 다만 우주와 자연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엄청난 행운을 얻은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이라는 소박한 진실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자들은 자연의 신비 대부분을 밝혀냈다는 만족감에 젖었다고 저자는 기록한다. 하지만 그들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다. 오늘도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인간의 끈질긴 연구와 탐사를 기다리고 있다. 작은 만족과 순간의 좌절에 머무르지 말고 줄기차게 앞으로 나아갈 일이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순수의 전조’라는 시에서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 들판에 핀 한 송이 꽃에서 천국을 본다 /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고 노래한다. 이렇게 한 알의 모래와 한 송이의 꽃을 관찰하고 호기심을 갖게 되면서 과학은 시작되었고 그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간 과학자들은 자연과 우주의 신비에 감탄한다.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질문과 상상력을 통해 발전해 왔으며 과학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무지한 인간에게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차츰 그것은 극복해야 할 삶의 조건으로 바뀌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길고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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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살림지식총서 418
노태헌 지음 / 살림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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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루빈슈타인 - 쇼팽 '녹턴 No.1'

 

 

"행복의 비결은 바로 삶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좋은 삶이든 나쁜 삶이든 말이지요.”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삶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는 무대에 오르는 것을 즐겼고, 무대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진정한 로맨티스트였다.

 

4살 때부터 한번 들은 멜로디를 기억할 정도로 '신동' 소리를 들으면서 성장했다. 젊은 루빈슈타인의 즉흥 연주는 청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나 비평가들은 그의 연주 테크닉에 부족함을 지적하면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재능을 믿고 있던 루빈슈타인은 이러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감을 느꼈을 터. 이때부터 루빈슈타인은 노력형 천재로 변신한다.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습했다. 그의 쇼팽 연주가 무미건조하다는 평도 들었으나 루빈슈타인은 쇼팽을 향한 음악적 애정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테크닉은 곡예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탁월한 전달력이다. 초인적인 포르티시모에 이어서 펼쳐지는 서정적인 패시지는 비할 바 없이 맑고 섬세하다. 그는 항상 열정적이고, 유쾌하고, 부드럽다. 그는 어떤 곡이든 구조와 논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음악혼의 정수를 명료하게 청중의 마음으로 전달한다. 지성과 감성의 완벽한 조화다. 그의 레퍼토리 중심에는 쇼팽이 있다.

 

루빈슈타인이 쇼팽을 좋아했다면 여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은 모차르트를 사랑했다. 구부정한 자세, 헝클어진 잿빛 머리. 그녀의 모습은 마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녀가 두 손을 건반 위로 올려놓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영롱한 선율, 그것은 천상의 소리였다.

 

하스킬은 가혹한 운명을 타고났다. 눈부신 재능과 탁월한 감성으로 세계 음악계의 샛별로 떠오른 18살의 그녀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불행이 닥친다. 다발성 신경경화증. 뼈와 근육, 세포가 엉겨 붙는 무서운 병이었다. 허리는 구부러졌고 한창 피어나야 할 얼굴은 노파처럼 변해버렸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과 같은 고독과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차르트 연주는 역경 속에서 오히려 더 빛을 발했다. 찰리 채플린은 그녀를 아인슈타인, 처칠과 함께 3대 천재로 꼽을 정도였다. 하느님과 모차르트는 곁에 두고 그녀의 음악을 듣고 싶었을까. 그녀는 지하철 계단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친 뒤 66세를 일기로 무거웠던 몸의 짐을 벗었다.

 

글렌 굴드는 기존의 피아니스트와는 다르게 기존의 정형화된 연주 관습을 파격적으로 뛰어넘은 혁신적이고 개성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지금도 음악사에서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남겼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 녹음은 클래식 음악계에 선풍적인 바흐 붐을 불러일으켰다.

 

역사적인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도 유명하지만 파격적인 기행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굴드의 모습은 독특하다. 갈색 뿔테 안경을 눌러쓰고 자신이 직접 제작한 낮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온 몸을 피아노 앞에 바짝 붙이고 손가락을 눕혀 건반을 어루만지듯이 연주했다. 하지만 그는 1964년 이후로는 일체의 공개적인 콘서트를 갖지 않고, 녹음실에 틀어박혀 자신의 의도대로 되풀이해 연주 편집할 수 있는 스튜디오 작업에만 전념했다.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20세기 가장 빛난 9인의 피아니스트들을 엄선하여 소개한 책이다. 그들의 연주 스타일은 물론 음악에 미친 영향력과 소소한 삶의 이야기들까지 다루어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의 웃음과 눈물을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특히 저자가 직접 추천한 명반 리스트가 더해져 더욱 피아노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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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8-29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음악에도 조예가 있으시네요! 굿뜨!

cyrus 2018-09-01 11:01   좋아요 1 | URL
한때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어요. 요즘은 책이 더 좋아서 클래식 음악을 안 듣는 날이 많아졌어요. ^^;;
 
살림지식총서 예술-인간 정신의 위대한 발현 세트 - 전5권 -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살림지식총서
권용준 외 지음 / 살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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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루빈슈타인  - 쇼팽 '녹턴 No. 1'

 

 

“행복의 비결은 바로 삶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좋은 삶이든 나쁜 삶이든 말이지요.”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삶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는 무대에 오르는 것을 즐겼고, 무대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진정한 로맨티스트였다.

 

4살 때부터 한번 들은 멜로디를 기억할 정도로 '신동' 소리를 들으면서 성장했다. 젊은 루빈슈타인의 즉흥 연주는 청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나 비평가들은 그의 연주 테크닉에 부족함을 지적하면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재능을 믿고 있던 루빈슈타인은 이러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감을 느꼈을 터. 이때부터 루빈슈타인은 노력형 천재로 변신한다.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습했다. 그의 쇼팽 연주가 무미건조하다는 평도 들었으나 루빈슈타인은 쇼팽을 향한 음악적 애정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테크닉은 곡예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탁월한 전달력이다. 초인적인 포르티시모에 이어서 펼쳐지는 서정적인 패시지는 비할 바 없이 맑고 섬세하다. 그는 항상 열정적이고, 유쾌하고, 부드럽다. 그는 어떤 곡이든 구조와 논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음악혼의 정수를 명료하게 청중의 마음으로 전달한다. 지성과 감성의 완벽한 조화다. 그의 레퍼토리 중심에는 쇼팽이 있다.

 

 

루빈슈타인이 쇼팽을 좋아했다면 여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은 모차르트를 사랑했다. 구부정한 자세, 헝클어진 잿빛 머리. 그녀의 모습은 마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녀가 두 손을 건반 위로 올려놓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영롱한 선율, 그것은 천상의 소리였다.

 

하스킬은 가혹한 운명을 타고났다. 눈부신 재능과 탁월한 감성으로 세계 음악계의 샛별로 떠오른 18살의 그녀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불행이 닥친다. 다발성 신경경화증. 뼈와 근육, 세포가 엉겨 붙는 무서운 병이었다. 허리는 구부러졌고 한창 피어나야 할 얼굴은 노파처럼 변해버렸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과 같은 고독과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차르트 연주는 역경 속에서 오히려 더 빛을 발했다. 찰리 채플린은 그녀를 아인슈타인, 처칠과 함께 3대 천재로 꼽을 정도였다. 하느님과 모차르트는 곁에 두고 그녀의 음악을 듣고 싶었을까. 그녀는 지하철 계단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친 뒤 66세를 일기로 무거웠던 몸의 짐을 벗었다.

 

글렌 굴드는 기존의 피아니스트와는 다르게 기존의 정형화된 연주 관습을 파격적으로 뛰어넘은 혁신적이고 개성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지금도 음악사에서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남겼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 녹음은 클래식 음악계에 선풍적인 바흐 붐을 불러일으켰다.

 

역사적인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도 유명하지만 파격적인 기행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굴드의 모습은 독특하다. 갈색 뿔테 안경을 눌러쓰고 자신이 직접 제작한 낮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온 몸을 피아노 앞에 바짝 붙이고 손가락을 눕혀 건반을 어루만지듯이 연주했다. 하지만 그는 1964년 이후로는 일체의 공개적인 콘서트를 갖지 않고, 녹음실에 틀어박혀 자신의 의도대로 되풀이해 연주 편집할 수 있는 스튜디오 작업에만 전념했다.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20세기 가장 빛난 9인의 피아니스트들을 엄선하여 소개한 책이다. 그들의 연주 스타일은 물론 음악에 미친 영향력과 소소한 삶의 이야기들까지 다루어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의 웃음과 눈물을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특히 저자가 직접 추천한 명반 리스트가 더해져 더욱 피아노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노태헌 저, 살림지식총서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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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회가 서구열강을 중심으로 세계 지배 구도와 세계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던 19세기까지도 이른바 ‘여류 작가’들은 자신을 숨기고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여자는 어린아이와 남자의 중간쯤에 있다 하시고, 새뮤얼 존슨 박사는 여자가 글을 쓰는 일은 ‘뒷다리로 걷는 강아지처럼 모양은 좋지 않아도 사람을 놀라게 한다’고 칭찬하시는 지경에 어지간한 용기나 배짱이 아니고서야 감히 ‘여류 작가’로 커밍아웃 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 한 칸’에 그토록 목을 매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이 투표권을 갖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위험하고 도발적인 일로 취급되었다. 왜냐하면 글을 쓴다는 것이야말로 한없이 무애한 영혼의 자유,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기만의 삶을 주장하는 일이기에.

 

울프는 여성이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균 열 세 명의 아이를 낳고 평생토록 가사 일을 전담해야 했던 당대 여성들은 그녀들의 어머니도, 어머니의 어머니도 언제나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운명에 놓여있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만약 그녀들이 가난하지 않았다면, 탐험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있는, 사색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과 모든 조건들이 구비되었더라면 그녀들 개인의 생은 물론이고 인류의 문화나 역사도 훨씬 풍성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난함으로써, 자기 소유의 재산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그녀들이 잃었던 것은 비단 작가적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독창성과 주체성뿐만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만의 생을 꾸려나갈 수 없는 현실에서 기인하는 무력감, 자신감의 상실, 타인(주로 남성)이 그들에게 부과한 수많은 편견, 왜곡된 인식의 불가피한 수용, 사회적 차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살아갔던 세월들이 있다.

 

 

 

“더욱이 앞으로 백년이 지나면 여성은 보호받는 성이기를 그만둘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한때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모든 행위와 능력 발휘에 참여할 것입니다. (중략) 여성이 보호받는 성이었을 때 관찰된 사실에 근거를 둔 모든 가정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62쪽)

 

 

울프는 백년 뒤 여성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생활의 자립을 꾀할 수 있는 ‘돈’과 방해를 받지 않고 사색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는 여성이 나올 것이라고 가정했다. 소득수준이 웬만한 남자들보다 월등히 높으며 성공한 지위와 명성을 가진 여성들, 소위 골드미스의 등장을 얼추 예언했을지 몰라도 현대의 혼자 사는 여성들은 자기만의 방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혼자만의 자유를 온전하게 누릴 수 있는 집을 꿈꾼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다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 ‘작업실’ 중에서, 『행복한 그림자의 춤』  13쪽)

 

 

앨리스 먼로의 단편 ‘작업실’은 어느 날 자기만의 작업실을 갖게 된 작가 지망생 주부가 맞닥뜨린 상황을 그려냈다. 작가를 꿈꾸는 ‘나’는 가부장적 남편에 꼼짝 못하고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하루하루를 보냈던 평범한 주부였다. 그런 일상의 반복은 일견 잔잔해 보이지만 돌멩이 하나가 던져지면서 미세한 균열이 생긴다. 혼자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바로 작업실을 구해 달라고 남편에게 요구한 것이다. 편안한 집을 놔두고 상가의 빈 사무실을 하나 얻어 통상적인 근무시간에는 사무실을 사용하지 않고, 주로 주말이나 평일 야간에 가끔 사용하는 작업실. 그것도 딱히 써야 할 무엇도 없는 상태에서 우두커니 앉아 벽만 바라보며 글쓰기를 시도한다.

 

그런 주인공에게 찾아오는 영감이 하나 있다. 월세집 주인인 영감은 전구를 돌려 빼는 법과 라디에이터와 창문 바깥에 설치된 차양 사용법 따위를 알려주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말을 시킨다. 처음에 독자들은 우호적이거나 어떤 미묘한 관계가 설정되는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계는 엇나간다. 시간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다고 여자가 아무리 옹골지게 굴어도 영감은 무슨 구실로든지 찾아와 자신이 겪은 돼먹지도 않은 별의별 얘기를 늘어놓는다. 날이 갈수록 영감과 주인공은 적대적인 사이가 되고, 건물 사용 등에 관련된 사소한 시비가 자주 빚어지면서 여성은 건물을 떠난다.

 

자기만의 공간을 찾았지만, 자기만의 공간이 되어주지 못하는 작업실, 혼자만의 공간인 줄 알았는데, 세상과 주변의 눈이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간섭을 행하는 작업실은 당시 여성의 현실이자 세상의 얼굴이기도 하다.

 

 

 

 

 

 

 

 

 

 

 

 

 

 

 

어쩌면 여성에게 작가로서의 글쓰기란 삶 전체를 대가로 하는 무모한 모험일 수 있겠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처럼 강명숙의 소설 『라이팅 클럽』의 주인공도 작가 지망생 주부(싱글맘)이다. 거기에 그녀의 딸도 작가를 꿈꾼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우리는 여자만 있는 그 집이 소설을 쓰기에 그 누구라도 방해받지 않는 아주 적합할 공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창작과정도 영 순탄치만 않다. 등단도 하지 못한 데다 내세울 만한 이력도 없는 싱글맘 김 작가는 동네에서 글짓기 교실을 운영하고 있고, 그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다만 글쓰기를 한다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딸 영인에게 김 작가의 ‘글짓기 교실’은 유치하고 경박한 장난이며, 동네 아줌마들의 글은 ‘쓰레기’일 뿐이다. 영인이 원하는 것은 ‘진짜 작가’가 되는 것. 영인은 많은 책들을 읽고 일기와 편지, 소설을 쓰지만 여전히 글쓰기의 어려움을 느낀다. 도무지 다가갈 수 없는 영역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소설은 영인이 글쓰기의 진짜 의미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는다. 그녀의 성장기는 평범하지 않다. 동성애와 열등감, 짝사랑 등으로 점철됐다. 어른이 됐어도 구질구질한 직장 생활, 친구의 죽음, 결혼과 이혼 등으로 인해 나락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영인은 그 가운데서도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 열의는 삶이 혹독해질수록 더욱 뜨거워진다. 그렇게 맹렬하게 이어가던 글쓰기가 어느덧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게 된다. 글을 쓰는 그 자체가 의미가 돼 버린 것이다.

 

영인에게 진정 모자랐던 것은 바로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열린 귀였다. 그녀는 비로소 엄마의 내공과 글짓기 교실의 진가를 알게 된다. 김 작가의 글짓기 교실을 통해 진정한 글쓰기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짚는다. 그것은 등단할 수 있다는, 일종의 실용적인 희망이 아니라 모두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는 글쓰기 자체의 순수한 기쁨이다.

 

비록 생전 울프가 살았던 시대의 여성들의 두 발은 현실 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울프는 어떤 경우에도 유머와 활력을 잃지 않았다. 그것만이 ‘여성 작가’가 아닌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 믿었다. 유년 시절에 겪은 성적 학대로 인한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생채기에 병마에 늘 시달리면서도 글을 통해 영혼을 구하려고 발버둥 쳤던 치열한 작가였다. 그것은 ‘삶’을 위한 진정한 글이었다. 울프처럼 먼로의 ‘작업실’의 나 역시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간섭하는 그 남자를 지워 없애는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울프는 남성은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지고, 여성은 아이들 말고 가진 것 없다고 푸념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진 지금, 이제 여성도 경제적 활동 참여도 높아지고, 남성처럼 능력이 좋으면 부와 명성을 가질 수 있다. 남성이 닫아버린 문을 이제 여성은 자유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열 수 있다.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물적 토대는 충분하다.

 

하지만 일부 남성은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으로 향할 수 있는 열쇠를 건네주면서도 그들의 자유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작업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부녀가 혼자서 글을 쓰는 행위를 아니꼽게 보는 남성의 편견적 시선. 아무리 여성이 교육을 잘 받고, 똑똑해도 한 번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 편견이 더욱 견고해질수록 여성의 예술적 활동에 또 다른 벽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여성 작가들이 왕성히 활동하는 시대다. 하지만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뒷다리로 걷는 강아지’로 취급받던 여류 작가들을 생각하면 키에르케고르의 저주가 역설적으로 되새김질된다. “여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 무슨 불행인가? 게다가, 여자이면서 자기가 그중의 하나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지독한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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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 살림지식총서 417
김문경 지음 / 살림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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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같지만 다른 곡의 해석

 

클래식 애호가들은 흔히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고 말한다.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평가받는 카라얀과 번스타인을 예로 들겠다.

 

같은 곡으로 오케스트라 연주를 지휘하는 이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게 되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들의 지휘 장면을 시간으로 재면 같은 부분을 연주하는 데 번스타인은 25초, 카라얀은 21초가 걸린다고 한다. 즉 템포가 다르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번스타인이 느릴 때는 느리게 빠를 때는 더 빠르게 하는 스타일이라면 카라얀은 전반적으로 빠르고 박력 있다고 볼 수 있다. 긴 교향곡 전체를 비교해서 듣는다면 이런 차이는 더 명확해질 것이다. 곡에 대한 해석은 물론 지휘자마다 표정도 손짓도 다양하다. 이처럼 직접 콘서트장에 클래식 음악 연주를 듣는다면 음반을 통해서 느낄 수 없는 지휘자의 음악적 해석을 만끽할 수 있다. 그들의 뛰어난 지휘가 없다면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고 심장을 울리게 만드는 연주가 되지 못했으리라. 

 

음악가들 중에서도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 위대한 음악가를 부를 때 마에스트로나 비르투오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악기 연주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테크닉과 실력을 가진 연주자를 비르투오조(Virtuoso, 명인 名人)라고 부르고, 특별히 지휘자일 경우에 그 사람을 가리켜 마에스트로(Maestro)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Scene #2  개성이 뚜렷한 20인의 지휘자 

 

클래식 음악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유명 지휘자 20명의 예술혼과 일생을 간략하게 조명하고 정리한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에는 그야말로 지휘봉 하나로 청중, 아니 전 세계인의 귀와 마음을 압도했던 명지휘자들이 등장한다.

 

흔히 지휘자라고 하면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먼저 떠올릴 것이다. 기인의 풍모가 느껴질 정도로 고집불통인데다가 남들 앞에서 독설을 마다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기 나오는 몇 몇 지휘자들은 상당히 억울함을 느낄 수 있겠다.

 

그래도 독선적이면서도 자신의 음악 세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완벽형’ 혹은 ‘독재자형'인 강마에의 스타일과 가까운 지휘자라면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일 것이다. 이탈리아판 강마에라고 보면 된다.

 

토스카니니가 추구한 음악세계는 완벽한 음(音) 자체였다. 그는 음의 멜로디와 세밀한 흐름까지 완벽하게 암기할 정도로 오로지 음악에 충실했다. 연주자 개인의 감정에 따른 군더더기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지는 음과 템포와 리듬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거부했다. 오직 작곡가의 의도에만 충실했다. 이로써 그의 지휘는 음악을 객관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 같은 지휘를 고집하는 그를 ‘독재자’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는 리허설 때 단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휘봉을 꺾거나 악보를 찢는 등 과격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지휘봉이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 손수건이나 윗옷을 찢기도 했다. 틀린 음이나 어설픈 음을 발견하면 ‘노! 노!’(No! No!)라고 불같이 호령을 토해냈고, 단원들은 그런 그를 ‘토스카노노’라고 불렀다. 그의 ‘No!' 성격은 진짜 독재자도 포기할 정도로 완고했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의 찬가 연주를 거부하여 그는 무솔리니의 눈 밖에 나서 미국으로 망명했으니 실은 무솔리니가 고집을 굽혔다는 일화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진실에 어떻든지 간에 아무리 권력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독재자도 지휘봉 하나로 음악을 호령하는 고집스러운 독재자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어쩌면 강마에를 뛰어넘을 정도로 독설을 입에 달고 사는 지휘자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세르지우 첼리비다케이다. 그의 독설을 겨냥하는 상대는 재미있게도 이 책에서 등장하는 명지휘자들이다. 그의 독설 집중 포격을 맞은 지휘자의 이름을 열거하면 혀를 내두른다. 토스카니니, 카를 뵘, 번스타인 심지어 ‘음악의 황제’ 카라얀까지도. 첼리비다케는 카라얀을 ‘유능한 비즈니스맨 아니면 귀가 먹은 인간’이라고 언급했다.

 

토스카니니, 첼리비다케와 반대로 브루노 발터는 유순한 성격의 지휘자라고 보면 된다. 토스카니니, 푸르트뱅글러의 명성에 약간 가려진 면이 있지만, 그래도 당대의 여느 지휘자들보다 인간적이고 겸손했으며 이러한 그의 인품이 언제나 음악에 잘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적 해석은 상당히 온순하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든다.

 

푸르트벵글러는 탁월한 지휘 능력에 지금도 클래식 마니아 사이에 회자될 정도로 훌륭한 녹음의 명반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협력자’라는 낙인 때문에 명성마저도 흠 잡히고 마는 불행한 지휘자다. 그는 나치의 ‘제3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나치 친위대 공연이나 히틀러의 생일 축연을 지휘한 경력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 후 전범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음악 활동이 나치 선전의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사실을 알았기에 각종 핑계를 대면서 나치와의 관계에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무죄 판결을 받아 베를린필 상임 지휘자로 복귀해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그의 지휘 자세는 독특하다. 그의 지휘를 바라본 소프라노 가수는 ‘눈에 보이는 음악의 물결’이라고 표현했지만, 연주할 때 그의 손짓을 주목해야 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지휘자였다. 지휘 자세가 어색할 정도로 부자연스럽고 격정적인 동작은 흡사 경련에 가깝다. 그래서 단원들은 어디서 음을 내야 할지 난감할 정도였다고 한다.

 

 

 

 Scene #3  강마에가 그리워지는 이유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는 지휘자의 유명한 일화를 통해 그들의 예술성을 접근하고 있어서 지휘자의 세계를 알고 싶은 독자를 위한 흥미로운 클래식 음악 입문서로 적당하다. 그리고 20인의 지휘자별 디스코그래피 중에 들을만한 명반 CD와 연주 현황 녹음 영상과 일부 음반의 미흡한 부분까지 정리하고 있다. 생존해 있는 현역 지휘자들이 좀 더 추가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여기에 소개된 지휘자들은 꼭 기억해 두면 좋은 마에스트로들이다.

 

가끔 우리는 과거의 명장을 그리워할 때가 있다. 지금도 카라얀의 흔적을 그리워하고, 그의 명반과 연주 실황 영상을 감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거 명성을 날리던 옛 지휘자들을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꼭 옛날 지휘자라서 그런 걸까. 예술의 본령은 개성인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토스카니니, 카라얀, 번스타인 같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개성이 뚜렷한 지휘자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지휘자의 개성이 사라질수록 그 음악의 개성도 사라진다. 그저 ‘지휘’라는 행위만 남아있을 뿐이다.

 

지휘자를 바라보고 선호하는 이유는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진짜 위대한 지휘자는 곡을 철저히 분석하고 오케스트라를 혹독하게 훈련시킬 정도로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일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우리가 강마에의 모습을 그렇게도 열광했던 것일까. 과연 먼 훗날에 토스카니니나 첼리비다케처럼 강마에 같은 명지휘자가 등장하게 될까. 갑자기 드라마 속 가상의 지휘자인 강마에가 그리워진다. 오히려 그런 괴팍한 모습이 지휘자 본인에게는 오로지 완벽한 음악으로 빚어내기 위해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자신만의 역량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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