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회가 서구열강을 중심으로 세계 지배 구도와 세계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던 19세기까지도 이른바 ‘여류 작가’들은 자신을 숨기고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여자는 어린아이와 남자의 중간쯤에 있다 하시고, 새뮤얼 존슨 박사는 여자가 글을 쓰는 일은 ‘뒷다리로 걷는 강아지처럼 모양은 좋지 않아도 사람을 놀라게 한다’고 칭찬하시는 지경에 어지간한 용기나 배짱이 아니고서야 감히 ‘여류 작가’로 커밍아웃 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 한 칸’에 그토록 목을 매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이 투표권을 갖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위험하고 도발적인 일로 취급되었다. 왜냐하면 글을 쓴다는 것이야말로 한없이 무애한 영혼의 자유,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기만의 삶을 주장하는 일이기에.
울프는 여성이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균 열 세 명의 아이를 낳고 평생토록 가사 일을 전담해야 했던 당대 여성들은 그녀들의 어머니도, 어머니의 어머니도 언제나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운명에 놓여있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만약 그녀들이 가난하지 않았다면, 탐험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있는, 사색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과 모든 조건들이 구비되었더라면 그녀들 개인의 생은 물론이고 인류의 문화나 역사도 훨씬 풍성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난함으로써, 자기 소유의 재산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그녀들이 잃었던 것은 비단 작가적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독창성과 주체성뿐만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만의 생을 꾸려나갈 수 없는 현실에서 기인하는 무력감, 자신감의 상실, 타인(주로 남성)이 그들에게 부과한 수많은 편견, 왜곡된 인식의 불가피한 수용, 사회적 차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살아갔던 세월들이 있다.
“더욱이 앞으로 백년이 지나면 여성은 보호받는 성이기를 그만둘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한때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모든 행위와 능력 발휘에 참여할 것입니다. (중략) 여성이 보호받는 성이었을 때 관찰된 사실에 근거를 둔 모든 가정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62쪽)
울프는 백년 뒤 여성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생활의 자립을 꾀할 수 있는 ‘돈’과 방해를 받지 않고 사색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는 여성이 나올 것이라고 가정했다. 소득수준이 웬만한 남자들보다 월등히 높으며 성공한 지위와 명성을 가진 여성들, 소위 골드미스의 등장을 얼추 예언했을지 몰라도 현대의 혼자 사는 여성들은 자기만의 방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혼자만의 자유를 온전하게 누릴 수 있는 집을 꿈꾼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다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 ‘작업실’ 중에서, 『행복한 그림자의 춤』 13쪽)
앨리스 먼로의 단편 ‘작업실’은 어느 날 자기만의 작업실을 갖게 된 작가 지망생 주부가 맞닥뜨린 상황을 그려냈다. 작가를 꿈꾸는 ‘나’는 가부장적 남편에 꼼짝 못하고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하루하루를 보냈던 평범한 주부였다. 그런 일상의 반복은 일견 잔잔해 보이지만 돌멩이 하나가 던져지면서 미세한 균열이 생긴다. 혼자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바로 작업실을 구해 달라고 남편에게 요구한 것이다. 편안한 집을 놔두고 상가의 빈 사무실을 하나 얻어 통상적인 근무시간에는 사무실을 사용하지 않고, 주로 주말이나 평일 야간에 가끔 사용하는 작업실. 그것도 딱히 써야 할 무엇도 없는 상태에서 우두커니 앉아 벽만 바라보며 글쓰기를 시도한다.
그런 주인공에게 찾아오는 영감이 하나 있다. 월세집 주인인 영감은 전구를 돌려 빼는 법과 라디에이터와 창문 바깥에 설치된 차양 사용법 따위를 알려주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말을 시킨다. 처음에 독자들은 우호적이거나 어떤 미묘한 관계가 설정되는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계는 엇나간다. 시간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다고 여자가 아무리 옹골지게 굴어도 영감은 무슨 구실로든지 찾아와 자신이 겪은 돼먹지도 않은 별의별 얘기를 늘어놓는다. 날이 갈수록 영감과 주인공은 적대적인 사이가 되고, 건물 사용 등에 관련된 사소한 시비가 자주 빚어지면서 여성은 건물을 떠난다.
자기만의 공간을 찾았지만, 자기만의 공간이 되어주지 못하는 작업실, 혼자만의 공간인 줄 알았는데, 세상과 주변의 눈이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간섭을 행하는 작업실은 당시 여성의 현실이자 세상의 얼굴이기도 하다.
어쩌면 여성에게 작가로서의 글쓰기란 삶 전체를 대가로 하는 무모한 모험일 수 있겠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처럼 강명숙의 소설 『라이팅 클럽』의 주인공도 작가 지망생 주부(싱글맘)이다. 거기에 그녀의 딸도 작가를 꿈꾼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우리는 여자만 있는 그 집이 소설을 쓰기에 그 누구라도 방해받지 않는 아주 적합할 공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창작과정도 영 순탄치만 않다. 등단도 하지 못한 데다 내세울 만한 이력도 없는 싱글맘 김 작가는 동네에서 글짓기 교실을 운영하고 있고, 그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다만 글쓰기를 한다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딸 영인에게 김 작가의 ‘글짓기 교실’은 유치하고 경박한 장난이며, 동네 아줌마들의 글은 ‘쓰레기’일 뿐이다. 영인이 원하는 것은 ‘진짜 작가’가 되는 것. 영인은 많은 책들을 읽고 일기와 편지, 소설을 쓰지만 여전히 글쓰기의 어려움을 느낀다. 도무지 다가갈 수 없는 영역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소설은 영인이 글쓰기의 진짜 의미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는다. 그녀의 성장기는 평범하지 않다. 동성애와 열등감, 짝사랑 등으로 점철됐다. 어른이 됐어도 구질구질한 직장 생활, 친구의 죽음, 결혼과 이혼 등으로 인해 나락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영인은 그 가운데서도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 열의는 삶이 혹독해질수록 더욱 뜨거워진다. 그렇게 맹렬하게 이어가던 글쓰기가 어느덧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게 된다. 글을 쓰는 그 자체가 의미가 돼 버린 것이다.
영인에게 진정 모자랐던 것은 바로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열린 귀였다. 그녀는 비로소 엄마의 내공과 글짓기 교실의 진가를 알게 된다. 김 작가의 글짓기 교실을 통해 진정한 글쓰기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짚는다. 그것은 등단할 수 있다는, 일종의 실용적인 희망이 아니라 모두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는 글쓰기 자체의 순수한 기쁨이다.
비록 생전 울프가 살았던 시대의 여성들의 두 발은 현실 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울프는 어떤 경우에도 유머와 활력을 잃지 않았다. 그것만이 ‘여성 작가’가 아닌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 믿었다. 유년 시절에 겪은 성적 학대로 인한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생채기에 병마에 늘 시달리면서도 글을 통해 영혼을 구하려고 발버둥 쳤던 치열한 작가였다. 그것은 ‘삶’을 위한 진정한 글이었다. 울프처럼 먼로의 ‘작업실’의 나 역시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간섭하는 그 남자를 지워 없애는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울프는 남성은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지고, 여성은 아이들 말고 가진 것 없다고 푸념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진 지금, 이제 여성도 경제적 활동 참여도 높아지고, 남성처럼 능력이 좋으면 부와 명성을 가질 수 있다. 남성이 닫아버린 문을 이제 여성은 자유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열 수 있다.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물적 토대는 충분하다.
하지만 일부 남성은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으로 향할 수 있는 열쇠를 건네주면서도 그들의 자유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작업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부녀가 혼자서 글을 쓰는 행위를 아니꼽게 보는 남성의 편견적 시선. 아무리 여성이 교육을 잘 받고, 똑똑해도 한 번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 편견이 더욱 견고해질수록 여성의 예술적 활동에 또 다른 벽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여성 작가들이 왕성히 활동하는 시대다. 하지만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뒷다리로 걷는 강아지’로 취급받던 여류 작가들을 생각하면 키에르케고르의 저주가 역설적으로 되새김질된다. “여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 무슨 불행인가? 게다가, 여자이면서 자기가 그중의 하나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지독한 불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