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수학은 공부할수록 더 어려워질까? 

 

어렸을 때 수학을 좋아했는데 점점 싫어하게 되는 아이들이 많다. 고등학생이 되면 ‘수포자(수학 포기자)’라는 말도 곧잘 듣게 된다. 수학은 대입 수능시험에서 입시의 당락을 좌우하기에 사교육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과목 중 하나. 혼자 공부하면서 느끼는 막연함과 단순암기식의 잘못된 공부 방법 때문에 어려움을 느낀다.

 

나도 고등학생 3년 동안 '수포자'였다. 1학년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봤지만, 성적이 영 신통치 않아서 점점 싫어하고, 포기하게 된 유형이다. 그래도 수학 공부를 위해 투자한 시간은 많았다. 수학 성적만큼은 잘 받고 싶어서 수업이 끝나도 수학 선생님 졸졸 따라다니면서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여쭤보고,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 공부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집중했다. 수학이 내신 성적과 입시 성적에 절대적으로 비중이 큰 과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간 이어진 수학과의 싸움은 완전한 패배로 허무하게 종결되었다. 수능시험에서 27점이라는 최악의 점수를 받고 말았다. 고등학생 3년 동안 치러진 모의고사 수학 성적과 통틀어 비고하면 너무 낮은 점수였다. 모의고사 때 평균적으로 수학 성적은 50점 중반 때 받곤 했다. 성적이 좋으면 60점 조금 넘었고. 제일 낮은 점수를 받아도 30점 이하로 받은 적이 없었다. 거의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수학에 대한 학창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왜냐하면 수학을 정말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이 "너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분명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적인 말을 들을 정도로 수학 성적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그래서 지금도 그 때 수학 공부를 한창 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리우면서도 아쉬울 때가 많다.

 

모든 사람들이 수학을 좋아해야 하는 법은 없지만, 잘못된 지도로 인해 수학적 흥미를 잃게 되는 아이들이 많아 안타깝다. 수학은 '문제를 풀어야 하는 과목'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 수많은 수학 공식을 암기해야 한다. 수학 공식을 외우고 문제를 푸는 단순한 교육 방식을 어려워한다. 배우는 양을 많아지고, 내용은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 수학 공부가 싫어서 대학 진학을 인문계열로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수학을 좋아한다고 선뜻 말하는 학생들이 많이 없다. 

 

그런데 국내 학생들의 수학 성취도는 42개국 가운데 1, 2위를 할 만큼 성적이 좋은데도 자신감과 흥미에 있어서는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또 수학을 잘한다고 해도, 수학자의 길을 가는 학생도 많지 않다. 우리나라는 2012년 열린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사상 처음으로 우승했는데 대표팀이었던 학생 5명 가운데 3명은 졸업 후 의대로 진학할 정도다.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다들 "수학 같은 거 배워서 어디에 써먹느냐?"며 아무 쓸모없다고 투덜댄다. 수학은 우리 삶에 쓸모도 없이 괜히 어렵게 만들어져 시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게 오랜 세월을 전 세계의 사람들이 쓸모없는 학문을 위해서 시간을 쓰고 개발을 하고 공을 들여온 것이라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Scene #2  수학은 예술처럼 아름답다   

 

수학을 왜 배우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학은 정말 필요하고 고마운 과목이다. 수학 문제를 풀려고 고민하면 논리적인 사고력과 문제 해결력이 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은 정말 재미없다. 수학을 무조건 다 이해를 할 때까지 시키고 또 시키면 질려버린다. 수학은 처음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학문이 아니다.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학문이다. 수학 문제를 풀려고 고민하면 논리적인 사고력과 문제 해결력이 늘게 되는데, 우리나라 수학 교육은 그러한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안 풀리는 문제와 씨름해야 할 상황에 배워야 할 내용은 점점 많아진다. 수학을 좋아할 만한 시간과 기회가 없다.

 

'수포자'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이구동성 말할 것이다. 우리나라 수학은 너무 어렵고, 재미없다고. 어른들은 수학을 포기하는 아이들의 심정이 공부하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게으른 변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학자 고드프레이 해럴드 하디라면 우리 수포자들의 절망적인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하디는 수학자로서의 길을 걷기 전까지만 해도 수학을 경쟁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수학자가 되기 전까지 여러 번의 수학 시험을 거쳤다. 그러다가 평소 가르침을 받던 수학교수가 추천한 수학책 한 권 때문에 수학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하디는 교수가 추천한 조르당의 『해석학 교정』을 읽으면서 수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느끼게 된다.

 

하디는 수학은 아름다운 것이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수학은 미술이나 음악, 시와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디가 예찬하는 순수 수학이다. 하디는 수학을 순수 수학(참된 수학)과 응용 수학(사소한 수학)으로 구분하는데 실용성에만 중점을 두는 응용 수학을 비판한다. 그의 주장에 수학의 실용성을 예견하지 못한 한계가 있고, 지나치게 순수 수학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수학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까? 사실 하디가 강조하는 수학적 아름다움은 수학에 두려워하고 질린 사람에게는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학을 진지하게 공부한 사람들은 안다. 수학 문제를 푸는 증명 과정에서 논리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a²+b²=c² ‘어떤 삼각형의 한 각이 직각이면, 빗변의 제곱과 직각을 낀 두 변의 길이의 제곱의 합은 같다.’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피타고라스 정리다. 중학생도 아는 이 공식에 관해 유클리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인슈타인 같은 당대의 수많은 석학들이 자기만의 증명법을 도출하기 위해 연구했다. 왜 이들은 단순해 보이는 이 정리에 그렇게 열광하고 매달린 걸까. 피타고라스 정리는 ‘문명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이 뿌리를 통해서 도형과 직각의 개념이 줄기를 올렸고 그것을 통해 건축과 과학기술이 꽃을 피워 고대 피라미드에서 컴퓨터까지 출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복잡다단한 거대한 문명의 발전을 떠받치고 있는 간결하면서도 결코 훼손될 수 없는 진리. 이것에서 수학자들은 고귀한 아름다움을 느꼈을 것이다.

 

 

 

 

 

 

 

 

 

 

 

 

 

 

 

 

올해 한국에서 열린 세계수학자대회에 참가한 수학자 세드릭 빌라니가 볼츠만 방정식에서 특별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필즈상 수상에 근접한 최고의 수학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어느 기자에게도 말한 바 있지만 볼츠만 방정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정식이다! 나는 어릴 때, 그러니까 박사논문을 쓸 때부터 이 방정식에 빠져들었고 그 후 이 방정식의 모든 면을 연구했다. 이 방정식에서 비롯된 수학적 세계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세드릭 빌라니 『살아 있는 정리』중에서, 11쪽)

 

괴짜 수학자로 유명한 폴 에어디쉬는 이미 타당한 증명을 얻고서도, 타당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한 증명을 얻기 위해 다시 도전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수학의 아름다움을 결과적 성공에서 발견할 수 있다.

 

 


 Scene #3  순수와 응용을 아우르는 생활수학  

 

우리나라 수학은 수학을 공부해야 할 의미를 이해하는 과정을 무시한 채 문제를 푸는 방식부터 접근해서 가르친다. 문제를 잘 푸는 것이 수학 교육의 일차적 목표다. 문제를 푸는 과정만 반복되는 수학에서 어떻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문제를 풀지 못하면 수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학습 낙오자로 인식하는 것도 문제 있다. 수학 공부에 대한 패배감이 클수록 '수포자'가 되어 시험 전선을 스스로 이탈하고 만다. 

 

하디는 수학의 미적 매력은 선택된 몇몇 사람들에게만 실감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학은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 수포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수학을 알아야 한다.

 

수학은 세상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의 기초다. 수학의 실용성을 무시한 채 수학의 아름다움을 논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실용성은 문제 푸는데 만 초점을 맞추는 엘리트 수학에 가까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실생활에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사회를 변화시키게 만드는 생활수학으로서의 실용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생활수학은 하디가 구분한 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을 아우를 수 있는 최적의 학문이다. 아름다움과 실용성 그리고 논리적 지식이 공존한다. 단순암기와 문제풀이에서 벗어나 수학이 가진 아름다움을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스스로 깨닫는 교육을 통해 수학에 대한 원리에 접근해야 한다. 간단한 공식과 규칙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에서 수학을 즐길 수 있고, 수학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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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광기 - 왜 예루살렘이 문제인가?
제임스 캐럴 지음, 박경선 옮김 / 동녘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Scene #1  평화롭기보다는 살벌한 예루살렘

 

인간은 늘 무언가를 갈망하고 소원하며, 신을 향해 애절하게 울부짖는다.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가슴 아린 현실을 내 안의 그분만은 알아주길 간절히 원하면서.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고, 유대교인이 되고, 불자가 되는 길을 찾아 나선다. 예루살렘은 가슴 아픈 역사와 분열의 중심인 동시에 구원과 희망의 성지다.

 

갈릴리에 살던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죽기 전날 홀로 기도한 겟세마네 동산이 있고, 부활한 지 40일 만에 승천했다는 곳이 모두 감람산이다. 감람산 밑엔 유대인들이 최고 명당으로 꼽는 공동묘지가 펼쳐져 있고, 그 아래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직접 문을 열 것이라고 믿는 성벽이 굳게 닫혀 있다. 그 성벽 위엔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아들 이사악을 바치려 한 성전산이 있다. 이곳엔 무슬림의 황금사원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나란히 서 있다.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승천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탈무드』에 "아름다움의 척도 열 가지가 세상에 주어졌는데, 그중 아홉 가지를 예루살렘이 가졌다"고 했다. 하지만 아름다움보다는 번득이는 총구가 먼저 눈에 띈다. 더욱 성스러워야 할 이곳은 평화롭기보다는 살벌하다. 평화가 너무도 간절하기에 예루살렘인 것일까.

 

예루살렘에서 여전히 평화는 멀고 저주는 가깝다. 예루살렘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선지자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종교와 신화가 서린 이런 도시를 누가 지배하느냐였다. 정복자는 피지배자들의 신전을 허물고, 그 폐허 위에 그들이 믿는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웠다. 피지배자들은 허물어진 신전을 언젠가 다시 세우겠다고 맹세했고, 피가 피를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2천년 동안의 고난을 잊은 듯 보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고사시키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유대인과 아랍의 갈등이 지구상 최고의 ‘뜨거운 감자’라 하더라도 유대인과 기독교의 역사적 갈등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예수는 2천년 이래 유대인이 낳은 지상 최고의 슈퍼스타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만은 ‘지상 최악의 인물’이다. 예수에 대한 지구상 최고의 환호와 저주가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직과 수평의 십자가처럼 예루살렘에서 상극을 연출하고 있다.

 

 


 Scene #2  군인으로 변한 종교인 

 

야만적인 전쟁 행위에 흔히 신성(神聖)을 부여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다. 원시 부족들이 사냥이나 전투에 앞서 희생물을 바치는 종교의식에 그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 피 흘리며 죽이고 죽는 것을 무릅쓰도록 부추기고 인간의 선한 본성에서 나오는 죄의식을 씻어주는 집단 최면 효과를 얻는 셈이다.

 

전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종교’로 인해 일어난 전쟁 역시 수없이 많다. 종교 간 대립으로 인한 전쟁, 자신의 종교를 지키기 위한 전쟁 등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전쟁 속에서 군인으로 변모한 종교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000년 전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 서유럽이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11∼13세기 200년간 8차례에 걸쳐 감행한 십자군 성전(聖戰)은 잔혹한 살육과 약탈로 얼룩진 추악한 전쟁이다. 그 이면에 교황권 확대와 유럽인의 대외 팽창 욕구 등이 감춰져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역사의 흐름에서 십자군 전쟁이 끼친 긍정적 파급효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신앙을 가장한 인간의 탐욕이 빚은 부끄러운 만행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 정권이 자행했던 유대인 대학살 이후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위해 미국이 팔레스타인 땅 심장부에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했는데 이는 많은 무슬림의 가슴에 반미 감정을 각인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더욱이 미국의 막대한 군사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4차례의 중동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의 철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웃 아랍 국가들의 영토를 불법으로 점령하자 하마스, 헤즈볼라, 이슬람 지하드 같은 조직적인 무장저항단체가 생겨나 반 이스라엘 투쟁을 본격화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아랍어로 ‘알 쿠즈’라 부른다. 앞으로 언젠가는 세워질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도가 바로 알 쿠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1948년 독립을 선언할 당시 행정수도는 텔아비브였으나, 1950년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삼는다고 선포했다.

 

예루살렘 성지문제를 둘러싸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사이에 벌어진 유혈 충돌이 ‘눈에는 눈’식의 보복 전쟁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은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도 불안해 보이기 짝이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평화는 깨졌다’며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서로를 향해 펀치를 가하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어린이 놀이터에 폭격을 가해 9명의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죽는 잔혹한 일이 발생했다.

 

 

 

 Scene #3  ‘예루살렘 열병’을 치료해줄 ‘좋은 종교’ 어디 없나?

 

요즘 이스라엘에 의한 가자지구 공격 사태로 대체로 이스라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부정적이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팔레스타인이나 이슬람이 늘 피해자였던 것도 아니다. 팔레스타인은 일방적인 피해자도 아닐뿐더러, 이스라엘도 일방적인 폭력의 가해자도 아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 종교 모두가 종교에 의해 열병이 걸려 폭력을 정당화한다. '신의 계시'란 이름 아래 종교적 욕망, 군사적 욕망이 더해져 타 민족과 종교집단을 괴롭혔다. 그들의 시각에서 타 종교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존재다.

 

니체는 "기독교는 피정복자와 피압박자의 본능이 전면에 나타난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 불리는 권력자에 대한 감동이 늘 생생하게 살아난다"며 기독교 권력화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종교가 정치 권력화 되면서 나타나는 병폐는 기독교뿐만이 아니다.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 자임하는 유대인들은 성스러운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위해 그곳에서 수천 년간 거주했던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지금도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은 알라신의 계시라는 이름하에 타 종교와 대립하고 또한 자신의 육체를 신에게 맡기는 인간폭탄 테러도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다.

 

이 열병은 지독하다. 병명은 ‘예루살렘 열병’. 그 종교의 열병은 곧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배타적인 적대감으로 이어지고, 그 적대감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무자비한 살육을 가능케 했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고 타자를 희생물로 신에게 바치지 않으면 자신이 제물이 된다는 인식은 인간을 잔인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지독한 열병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성스러움과 폭력이 양립하는 종교의 모순을 목격한 제임스 캐럴은 ‘좋은 종교’로 발전하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종교’는 죽음 대신 삶을 찬미하고,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신이 이 땅에 임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로 규정한다. 그리고 종교는 구원이 아닌 계시에 관한 것이며 강요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역설적이게도 종교는 세속적 성격을 띨 수 있다.

 

종교의 근본주의 사상에서 가장 문제점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이다. 근본주의자들은 다양성이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세계관을 가졌다. 흑백논리에 점철된 그들의 주장은 타 민족을 학살하거나 억압할 때 정당화 하는 논리로 사용됐다. 희생양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 합리화를 택한다. 종교는 전쟁에 정통성과 정당성을 부여하고, 살생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 주었다. 종교적 광기가 정치권력을 장악할 경우 예루살렘은 절대로 ‘평화의 도시’가 될 수 없다.

 

“역사가 되풀이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 조지 버나드 쇼가 남긴 말은 ‘예루살렘 열병’의 환각 상태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나쁜 종교’를 조롱하는 듯하다. 이들의 끝없는 전쟁은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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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인가? 모 방송국에서 남녀 각 연령별로 이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이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었다. 남자 10~40대, 여자 10~30대가 가장 후회하는 일로 압도적으로 공부를 꼽았다. 70대에 이르러서도 남녀 모두 무엇 하나라도 배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학창 시절에 공부가 그렇게도 하기 싫고, 놀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그러다가 나이가 점점 먹을수록 그때 하지 못했던 공부가 하고 싶어진다. 마음잡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업무와 잦은 회식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다. 예전처럼 머리와 몸도 따라주지 않는다. 공부하면서 본 내용이 며칠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노안 때문에 책의 활자를 읽기가 어려워진다.

 

평소에 공부와 담을 쌓은 사람은 다시 손에 펜을 쥐고, 책을 펴서 글자를 뚫어지게 봐도 학습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은 대개 고등학생 때까지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공부하던 습관에 익숙하다. 대학생부터 공부 환경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어느 누구도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야 한다. 교수님이 가르치는 학교 공부만 해서는 안 된다. 바늘구멍만큼 좁다는 취업의 문에 들어서기 위해 스펙이라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강의실에서의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술집이 아닌 도서관으로 간다. 그곳에서 토익, 자격증 공부를 한다. 학교생활 절반을 강의실 또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다.  

 

 

 

 

 

 

20대까지만 해도 우리는 공부를 질리도록 한다. 10대는 입시 성적을 위해서, 20대 초중반은 취업을 위해서. 그러다가 30대에 직장을 얻게 되면 길고 길었던 공부 터널에서 탈출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직장인이 되어서도 공부는 멈출 수 없다. 고용과 노후에 불안을 느낀 직장인들이 안정된 전문직을 얻으려고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취업에 장기간 실패하거나 취업을 했더라도 적응하지 못한 채 인생역전을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셀러던트’가 등장했다. 그들은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공부에 미치라고 권한다. 우리는 공부 권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공부 소리만 들어도 피곤하고 질린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평생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부 비법을 전수해 주는 등의 공부 관련 도서는 베스트셀러 코너의 단골손님이다. 또 흥미로운 점은 위에 게시된 사진의 책들은 한 출판사에서 발간된 시리즈물이 아닌 각각 다른 출판사에서 발행된 것이다.

 

책을 살펴보면 '10대 꿈을 위해 공부에 미쳐라'는 10대에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 그 이후의 삶이 달라진다며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비좁은 취업의 문에서 불안해하는 '88만원 세대' 20대들을 위한 자기계발서인 '20대 공부에 미쳐라', 직장인들이 익혀두면 좋은 실용적인 공부 기술을 쉽게 정리해 놓은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도 포함됐다. '40대 공부 다시 시작하라'는 지식 사회와 고령화 사회의 추세에 따라 평생 학습의 관점에서 40세 이상 중년의 공부를 다뤘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무슨 일에 미친 사람처럼 끈질기게 집중하고 몰두해야 목표한 바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부도 재미있어서 미친 사람처럼 집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데 우리는 공부가 너무 즐거워서 미쳤다기보다는 너무 많이 해서 미쳐버렸다. 그동안 남이 시키는 대로,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가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부도 즐겁게 느껴진다면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다. 늦게라도 공부의 재미를 알게 된다면 그때 시작해도 된다. 지난 주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소개된 82세 신문배달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80세가 넘는 고령인데다가 한쪽 손이 불편한 상태 속에서도 지난 35년을 한결같이 10시간동안 신문배달을 해왔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신문배달 일로 버는 월급 90만 원의 3분의 1 가량을 책 구매하는데 쓸 정도로 독서광이다. 할아버지가 구입하고 읽은 책만 해도 2000권 넘는다. 할아버지에게 신문 배달은 생계의 수단보다는 속죄의 과정이다. 술로 인해 멀어진 가족들과 이혼 후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지금까지 신문배달을 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쓸데없이 청춘을 낭비한 과거를 잊고 할아버지는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데 그를 일으켜 세운 준 것이 책이었고, 할아버지를 움직이게 만든 힘의 근원은 공부였다. 할아버지는 정신이 가난하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부를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 생각한다. 그래서 학교를 떠난 지금도 혼자 공부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싫증이 난다. 내가 궁금했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10대부터 은퇴하는 40대까지 시험과 승진을 위해서 공부한다. 이러니 공부에 대한 압박감은 나이가 들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공부하는 태도를 신체 활동으로 비유하자면, 쉬지도 못하고 계속 뜀박질하는 상태다. 호흡이 더욱 가빠지고, 몸은 지쳐간다. 특정 기간 안에 좋은 성적을 얻고, 승진하기 위해서 부랴부랴 공부를 시작한다. 무턱대고 너무나 많은 양을 공부하다가 힘들어서 중도에 포기해버린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너무나 급하게 공부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공부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지식을 완전히 습득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오히려 공부를 쉬엄쉬엄 하는 것을 게으른 방법이며 능력을 발전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공부는 깊은 호흡을 들어 마실 수 있는 상태처럼 되어야 한다. 교육학자 사이토 다카시는 ‘삶의 호흡이 깊어지는 공부’를 할 것을 주문한다. 사이토는 10년 전 큰 병을 앓은 뒤 ‘공부’를 삶의 방향으로 삼게 됐다고 한다. 당시 인생이라는 마라톤이 중간에 예고도 없이 끝날 수 있음을 실감한 그는 후회 없이 충실하게 보냈다고 느꼈던 시간을 떠올려봤다. 좋은 책을 다 읽은 날, 공부 재미에 완벽히 몰입했을 때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더 즐거운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호흡이 길어지는 공부란 철학, 사학과 같은 인문학, 물리학, 수학, 음악, 미술 등 순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깊이 있게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공부의 수준과 목표는 각자 자유롭게 정해도 되고, 단지 교양을 쌓는 공부여도 좋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인 공부를 하는 것이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 중에서, 62쪽)

 

‘삶의 호흡이 깊어지는 공부’는 인생을 풍요롭고 여유롭게 만든다. 일과 삶, 미래를 통찰하는 법을 일깨워 준다. 매일 꾸준히 많은 시간을 공부하는 것보다 하루에 30분씩이라도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시작해야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오래 공부할 수 있으며 평생 공부를 가까이 하면서 살 수 있다.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배운 대로 실천하는 것이 즐거움의 한 길임을 일러주고 있다. ‘진짜’ 공부는 일단 즐거워야 한다. 오랫동안 몸에 배인 ‘가짜’ 공부와 관련된 안 좋은 기억과 습관을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그동안 우리의 뇌를 죄어온 잘못된 사슬을 풀지 못하면 영영 공부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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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시경 2014-08-1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이 방송 봤는데~ 정신이 가난한 사람이 정말 불쌍한 사람이라는데 공감했어요~ 책을 통해 진짜 공부를 하는 삶이 되고 싶은데..쉽지 않은 일이네요,,

cyrus 2014-08-14 23:08   좋아요 0 | URL
저도 방송 보면서 할아버지 말씀에 제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지금 저 또한 공부하는 삶을 지향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조금이라도 노력해봐야겠어요.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 에세이
강석기 지음 / Mid(엠아이디)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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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한여름 밤의 고민 중 하나는 과중한 업무로 몸은 피곤한데 쉽게 잠들 수는 없는 불면증이 아닐까? 끝날 것 같지 않은 업무, 야근, 회식까지 잠을 못자고 침대에서 뒤척거린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공짜 보약의 효과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하루 정도 수면이 부족한 일은 그렇다 쳐도, 수면이 부족한 날이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고 일주일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잠을 너무 적게 자는 날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늦게 잘 때 야식을 먹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체학적으로 인체는 수면 부족에 의한 스트레스를 포만감으로 해소하려는 특징이 있다.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면 식욕을 증가시키는 호르몬 분비가 많아져 과식을 하게 된다. 평소에 늦은 밤에 족발, 치킨 등을 시켜 먹던 것이 이젠 습관으로 자리 잡아 잠자리에 들기 전 무언가 먹지 않으면 잠이 들 수가 없다.

 

반대로 아침 식사는 줄어든다. 늦잠 자고 나서 일어나는 날에 아침 식사를 거를 때가 있다. 전날 밤 야식이 먹고 싶을 정도의 배고픔은 온데간데없고, 아침밥을 먹을수록 맛이 없게 느껴진다. 실제로 수면부족 집단과 충분한 수면을 취한 집단 간의 식사량을 비교한 실험에서 야식은 수면부족 집단이 수면을 취한 집단보다 더 많이 먹었지만, 아침 식사량은 적은 결과가 나타났다. 왜냐하면 수면유도호르몬인 멜라토닌의 농도가 잠에서 깨어난 상태에서도 높은 상태로 유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침 식사를 거르는 것도 건강에 악영향을 준다. 불쑥 찾아드는 공복감으로 인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폭식을 하게 되고 밤에는 야식을 찾게 된다. 잠을 제대로 못 자면 건강상 악순환이 이어진다.

 

부족한 수면 시간 때문에 건강을 해치기도 하고 오히려 일의 능률이 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적절한 낮잠은 하루의 활력을 충전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잠깐의 낮잠은 스트레스를 낮추어 업무 효율을 높여 주고, 혈압을 낮추고 심장병을 예방해 주는 등의 이점이 많다.

 

서울시에서는 서울시 공무원을 대상으로 이달부터 1시간 이내의 낮잠을 허용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그 대신 법정근무시간(8시간)을 지키기 위해 낮잠을 잔만큼 추가근무를 해야 한다. 서울시의 ‘낮잠’ 허용에 대해서 여전히 갑론을박 의견이 분분하지만, 낮잠의 의학적 효능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한창 성장하는 어린이들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면이 이루어져야 한다.

 

어른은 직장과 잦은 회식 때문에 수면이 부족하다면, 학생들은 학교에서 입시 학원으로 이어지는 빡빡한 공부 스케줄 때문에 잠자는 시간이 없다. 공부 혹은 인터넷에 날밤을 새우느라 저녁 수면시간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낮잠을 자게 하면 학습 능률이 높아진다. 심지어 기억력도 향상된다. 낮잠의 효과를 증명한 어떤 연구가는 어린이집에서 낮잠 시간을 빼는 커리큘럼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잠은 밤에만 잔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낮잠의 이점을 간과하고 있다. 하지만 두뇌에 낮에도 쉴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 점심 후 졸음이 밀려와 눈꺼풀이 푹푹 감겨도 꾹꾹 참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직장인은 졸다가 업무에 태만한 사람으로 찍힐까봐 참는다. 학생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졸음에 빠져드는 블랙홀 같은 무서운 시간대가 바로 바로 점심 후 수업시간이라는 것을.

 

세상은 어느새 낮잠 효용성을 인식하고 있고 낮잠을 허하는 기업이 생겨나고 있다. 기업뿐만 아니라 어린이집, 학교도 두 눈 쫑긋 모아 지켜볼 일이다. 개인적으로 학업에 스트레스 받는 아이들에게 낮잠 시간을 허용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 도서 참고내용 : '아이들에게는 낮잠도 수업시간!' (111~114쪽)

                        '잠 부족하면 탄수화물 당긴다!' (121~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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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4-08-1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잠이 필요하단 생각에 공감을 하는데....학교에 침대가 있는것도 아니고 낮잠잔 시간만큼 늦게까지 공부한다면 참 거시기한단 생각이 들어요^^;;;;

cyrus 2014-08-13 19:57   좋아요 0 | URL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낮잠을 허용할 수 있지만, 고등학생은 낮잠 제도를 허용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카스피님 말씀처럼 학교가 학생들이 낮잠 잘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되니까요. 그냥 점심 먹고 나서 책상에 한 시간 정도 엎드려 자는 게 상책인 것 같습니다. ^^;;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 17명의 대표 인문학자가 꾸려낸 새로운 삶의 프레임
백성호 지음, 권혁재 사진 / 판미동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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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우리는 인문학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인문학 열기가 생각보다 오래 간다. 주위에서도 종종 인문학 강좌가 열리는 걸 볼 수 있고 서점가에서도 인문학 관련 서적들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있다. 동네 어귀의 작은 서점이든 번화가의 대형 서림이든, 인문학 서가의 표정은 한결같다. 흥미로운 것은 인문학의 위기도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위기란 산업혁명 이후 숨 가쁘게 달려온 물질문명의 폐해에 대한 인문학의 역할 부재를 비판하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오늘날 인류사회가 당면한 병리현상과 맥을 같이한다. 놀랍게도 현대 인문학의 위기를 가장 쉽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글은 제프 딕슨이라는 사업가가 쓴 칼럼이다. 칼럼 제목은 ‘우리 시대의 역설’이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고 소비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더 줄어들었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더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더 모자란다.” 칼럼 구절처럼 우리는 생활비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다. 그동안 외면 받아온 인문학의 핵심가치, 즉 인간성과 생명사랑 정신의 회복을 통렬하게 깨우쳐 준다.

 

우리는 인문학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인문이라는 말은 중학생 시절 실업계, 혹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나 쓰는 말이었다. 인문학에 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지조차 도통 기억에 없다. 돈 안 되는 인문학 대신, 돈과 맞바꿀 수 있는 다른 학업에 열정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인문학 강좌를 제공하는 단체가 인문학 학습자들을 연령별로 분석했는데 4050세대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한다. 40대 이상의 높은 연령층이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으로 교양과 힐링에 대한 니즈가 가장 컸다. 인문학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은 이유에 몸과 마음의 치유를 강조한 ‘힐링’ 대세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치유 받을 수 있는 방법에 인문학을 주목하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인간을 괴롭혔던 질병들은 의술의 발달로 두렵지 않은 병이 됐다. 절대 빈곤에서도 자유로워졌다. 그럼에도 현대인은 아프다. 결핍감, 상실감, 소외감은 예전보다 더 커졌고, 막연한 우울과 분노 무기력에 시달린다. 가난했던 시절보다 행복이 더 멀어졌다고도 한다. 이 같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데 인문학을 활용한다.

 

인문학은 더 이상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학자들만이 알 수 있는 학술용어와 이론을 걷어내어 남녀노소, 학력,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지적 자산이다. 그동안 인문학이 찬밥 신세가 되어 위기론이 불러온 이유가 학술용어로 지나치게 전달을 어렵게 하며 고립을 자초했던 학자들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 인문학의 가치를 전달하는 학자들이 강연가, 저술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대중이 인문학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소통을 지향한다. 

 

하지만 그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현상의 이면을 살펴봐야 한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길 원하는 ‘수요’가 많아질수록, 인문학 강연과 대중을 위한 인문학 서적으로 ‘공급’이 된다. 행복의 갈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은 지나치게 인문학 치료제에 의존한다. 아무리 좋은 약도 남용하면 해로운 결과가 나타나고, 꼼꼼히 따져보지 않으면 오용될 우려가 있다. ‘행복’과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그 본질이 너무 가벼워진 감이 있다. 대중의 입맛에 맞춘 저렴한 인문학이 등장한다.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TV 방송에 출연하고, 책 몇 권 써내면 인문학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수박이 되기 위해서 줄이 그어진 호박처럼 무늬만 인문학을 내세우는 사람과 책이 많다.

 

 


 Scene #2  행복한 인간도 상처받기 마련이다 

 

요즘 인문학 서적 출판의 흐름을 보면, 공동 저자로 내는 것이 많아졌다. 여러 음악가의 노래를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처럼 인문학을 주제로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책으로 한데 묶은 것이다. 이런 책들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인문학의 의미를 소개하고, 행복을 위한 인문학의 활용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는 유교 연구가, 건축가, 천문학자, 심리학자, 기생충학자, 시인 등 17인의 명사들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작년부터 중앙일보가 기획한 동명제목의 연재물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이들은 각자 행복의 의미를 말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형조 교수는 인간의 모든 상처와 불행은 자기중심으로부터 비롯되며,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행복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일단 그는 우리 사회에서 강조하는 힐링을 반대한다. 그가 연구하는 유교와 동양철학은 인생의 고통을 위로하는 힐링의 학문이 아닌 직접 고통과 대면하는 능동적인 학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괴로워하는 원인을 타인에게 탓하지 않고, 나를 본다. 즉, 고통스러운 증상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찾는 것이다. 이제 자신의 상황을 인식했다면 스스로 극복하면 된다. 이것이 곧 자기혁신이며 절망적인 상황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맷집’이 생긴다.

 

 

 

 

 

세계 과학철학계의 석학 장하석 교수는 ‘쓰레기통’이 되라고 주문한다. 장 교수가 생각하는 불행의 원인은 폐쇄성이다. 세상의 모든 질문을 포용하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수용하는 개방성을 강조한다. 개방적인 쓰레기통은 단순히 학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자신이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어느 한쪽에 갇히지 않는 ‘열림’의 자세도 필요하다. 이런 ‘열림’의 중요성은 건축가 김개천은 ‘살아 있는 집’이라고 비유한다. 이것은 결국 다른 것을 품을 수 있고, 항상 자신을 상황에 맞게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삶이다.

 

국립생태원장 최재천 교수는 ‘아름다운 방황’을 강조한다. 새가 화려한 나방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단 먹는 것처럼 생존을 위한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병 증상을 외면하고 타인의 위로에만 의지하는 현대인의 불행한 모습은 마음 속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치료법을 찾지 못한 채 ‘위로’ 성분이 과다하게 들어간 ‘힐링’ 치료제를 찾기만 한다.

 

미학자 진중권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의 병을 치유했다고 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실수하게 마련이다.” 그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행복의 근원에 대한 물음의 답이 나왔다. 그가 인용한 <파우스트>의 구절을 빗대어 표현하자면, “행복한 인간도 한 상처받기 마련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빈곤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전 세계의 행복지수를 집계한 순위에서도 우리나라는 거의 하위에 머무르는 수준이다. 해마다 자살율도 늘어난다.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잘 먹고 잘 사는데도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이한 마음의 병은 단순히 유행하는 감기 정도가 아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만성질환이다. 

 

 


 Scene #3  마음의 상처 부위에 붙인 ‘힐링’ 반창고를 떼어내라 

 

여기 전문가들은 말한다. 마음의 병을 완전히 치료해주는 만병통치약은 없음은 물론이며 행복하기 위한 삶의 정답은 없다고. 오히려 행복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단순히 좋은 일만 가득한 감정 상태라고 생각한다. 이렇다보니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고 아프게 만드는 슬픔과 절망을 무시하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행복 찾기’라는 공허한 질문에 몰두하고, 그 대답을 ‘힐링’ 치료제를 파는 전문가에게 찾으려고 한다. 즉, 정답 없는 질문에 얽매이는 것이다.

 

사실 행복을 정의내리는 17인의 목소리도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는 독자들을 낫게 만드는 치료제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아름다운 방황’, 내적 상처를 스스로 마주하고 긍정하는 ‘맷집’을 기르는 덕분에 갑작스럽게 재발하는 마음의 병을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 싶으면, 인문학에게 묻지 마라. 먼저 ‘나’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왜 행복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딱지가 생긴 마음의 상처 부위에 오랫동안 붙여 있는 ‘힐링’ 반창고를 떼어내라. 조금 아플지라도 마음의 상처가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 봐야 한다. 그리고 이제 마음의 상처 부위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행복했던 경험을 기억해보라. 어쩌면 당신이 찾으려는 행복은 저 멀리 인문학에 찾을 필요도 없이 당신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인문학자로 대표되는 17인의 이야기는 올바른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지 행복한 삶을 알려주는 지도가 아니다.

 

인문학 공부는 현재의 삶에 대해 의심을 하고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일반 여가 문화나 자기 계발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물론 인문학을 통해 보다 효율적인 인간관계를 만들기도 하고,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얻으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과 해답의 공부다. 인문학을 통해 얻는 것은 스펙이 아니라 꾸미지 않은 자신의 민낯이다. 민낯을 보면서 그동안 애지중지해 온 인식과 잣대들이 많은 잣대 중 하나였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민낯이 사실은 그동안 찾아왔던 가장 아름다운 얼굴임을 알게 된다.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자본의 탐욕스러운 질주 안에서도 천천히 호흡하고 여유 있게 걷는 내공은 공부에서 나온다. 우리는 그런 공부를 인문학이라 부른다. 그래서 인문학은 단기완성으로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 평생에 걸쳐 자기 스스로 찾아가는 공부이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행복을 맛보는 흥겨운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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