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인문/교양 출판그룹 반비입니다. ^^


이번에 반비에서 책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이안 샌섬의 신간, 『페이퍼 엘레지』가 출간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종이와 책에 애정이 있다고 자부하시는 분이라면

이번 서평단 활동으로 종이사의 한 획을 그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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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엘레지』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책이 사라지는 시대, 

연약한 종이의 질긴 내구성을 탐구하다!  


 

이 책에서는 아주 장황한 방식으로 종이의 죽음이라는 말이 과장되었음을 보일 참이다. 종이를 잔뜩 머금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종이에 작별을 고한다고 함은 어느 날 글쓰기를 익혔다는 이유로 말하기를 멈춘다는 말과 비슷하다.” 

 

이 책에서 나는 종이가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비애감과 옛날 종이를 그리워하는 향수의 존재를 인지한다. 예전 종이의 두께감과 묵직함, 젊음의 이상이 담긴 너덜너덜해진 포스터들. 우리의 역사를 대변하는 이런 종잇조각이 점점 낡고 희귀해진다는 것. 한편 무엇보다도 종이의 역설, 종이의 쓰임에 내포된 아이러니, 이중적 의미, 가치, 광활한 범위와 규모를 다룰 참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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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퍼 엘레지』 서평단 모집 상세 내용


 

하나, 『페이퍼 엘레지』 서평단 모집 포스팅을 개인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 간단하고 성실하게 적어서 스크랩 링크와 함께 댓글로 올려주시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 2014년 9월 22일(월)부터 9월 28일(일)까지 입니다.


셋, 총 추첨인원 10명입니다. (최종 응모자 수에 따라 추첨인원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넷, 서평단 발표일 2014년 9월 29일 월요일입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10월 6일(월)부터 10월15일(수)까지 10일간입니다.


마지막, 첨된 서평단 분들은 서평기간인 10일간 예스24 개인 계정으로 서평을 작성한 후, 『페이퍼 엘레지』 서평단 발표 포스팅에 예스24 개인 블로그 및 그 외 블로그나 외부 채널 등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셔야 최종 서평이 완료됩니다.


 

※ 해당 기간 안에 서평을 작성하지 않을 시,

다음 서평단 모집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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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25년 간 『사이언틱 아메리칸』지의 수학 칼럼 편집 및 퍼즐 제작자로 활동하고, 루이스 캐럴 연구가로 유명한 마틴 가드너는 앨리스 2부작(『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은 어린이들이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책이라고 말했다. 일관성 없는 줄거리와 갑작스런 전환 때문에 독서 의욕을 잃게까지 할 수 있다. 더구나 작가의 해학과 역설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 또한 필요하다.

 

 

 

 

 

 

 

 

 

 

 

 

 

 

그래서 마틴 가드너는 1960년 ‘주석 달린 앨리스’를 처음 냈고, 1990년 ‘좀 더 주석 달린 앨리스’를 냈다가 2000년 결정판 ‘앨리스’를 출간했다. 이 결정판은 북폴리오에서 번역돼 나왔다. 꼼꼼한 주석뿐만 아니라 존 테니얼의 원본 삽화와 근래에 발견된 그의 연필 스케치 그리고 존 테니얼의 반대로 『거울 나라의 앨리스』 첫 번째 판본에 실렸다가 삭제된 ‘가발을 쓴 말벌’이 수록되어 있다. 마틴 가드너의 『앨리스』 결정판은 앨리스 마니아가 꼭 읽어야 하는 책이었으나 현재 절판되었다.

 

 

 

 

 

 

 

 

 

 

 

 

 

 

 

마틴 가드너는 20대가 돼서야 앨리스 2부작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 후, 『사이언틱 아메리칸』에 수학 퍼즐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역시 수학 퍼즐이나 마술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루이스 캐럴에게 정신적인 친밀감을 느꼈다. ‘좀 더 주석 달린 앨리스’를 발간한 지 6년 뒤에 가드너는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이 아닌 ‘수학 레크레이션 전문가’ 루이스 캐럴를 소개하는 책을 쓰게 된다. 책 제목은 『The Universe in a Handkerchief

: Lewis Carroll’s Mathematical Recreations, Games, Puzzles, and Word Plays 』. 우리말로 직역하면 ‘손수건 속의 우주’이다.

 

 

 

 

『실비와 브루노, 결말 짓다』에 실린 삽화, 마인 헤어가 뮤리엘 양에게 안과 밖이 없는 손수건을 만드는 방법을 보이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특이하고 재미난 놀이나 게임을 알려주는 캐럴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삽화는 마틴 가드너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27쪽에 인용함) 

 

 

‘손수건 속의 우주’는 루이스 캐럴의 또 다른 작품 『실비와 브루노』의 속편 『실비와 브루노, 결말 짓다』에서 나오는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는 손수건을 의미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마인 헤어라는 교수가 뫼비우스의 띠를 설명하면서 이와 유사한 3차원 단면을 만들었는데 ‘포추나터스의 지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것으로 전 우주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루이스 캐럴은 앨리스 2부작뿐만 아니라 『실비와 브루노』『실비와 브루노, 결말 짓다』『스나크 사냥』 같은 소설을 남겼다. 이 세 작품은 앨리스 2부작의 명성에 비해 국내에 덜 알려져 있지만, 수수께끼 시, 언어유희, 수학 퍼즐 등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걸작이다. 생전 캐럴은 『실비와 브루노』가 자신의 역작이라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앨리스 2부작과 마찬가지로 캐럴 연구가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는 텍스트이다.

 

 

 

 

 

 

 

 

 

 

 

 

 

 

 

 

마틴 가드너의 『The Universe in a Handkerchief』는 캐럴이 쓴 소설, 편지, 각종 팸플릿에 찾아낸 각종 수학 퍼즐, 수수께끼, 마술 등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한다. 단순히 캐럴의 삶을 조명했다기보다는 그동안 앨리스에 가려진 캐럴의 수학적 재능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국내에 번역된 책의 제목이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푸른미디어, 2000년, 절판)이다. 국내에 출간 당시, 책 제목을 원제 그대로 옮겨 썼다면, 이 책이 루이스 캐럴에 관한 내용을 다룬 건지 독자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실비와 브루노』가 아직 번역되지 않았으니까. 『실비와 브루노』는 속편과 함께 2011년에 페이퍼하우스에서 최초로 출간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캐럴의 소설이기에 출간 소수의 캐럴 마니아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으나 어느새 이 책도 품절되었다.

 

 

 

 

 

 

마틴 가드너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그동안 캐럴의 전기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흥미롭운 내용이 가득하다. 수학 퍼즐뿐만 아니라 그가 어린이들을 위해 만든 단순한 오락에서 암호와 농담이 들어 있는 수수께끼 시와 편지 내용을 소개한다. 앨리스를 즐겨 읽은 독자라면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시에 캐럴이 암호를 숨겨 놓은 사실을 알 것이다. 각 행의 첫 번째 글자들을 모으면 캐럴이 좋아했고, 앨리스의 실제 모델인 소녀의 이름이 된다. 캐럴은 이와 유사한 형태의 시를 자주 쓰곤 했다.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미친 모자쟁이가 내는 수수께끼는 답이 없는 걸로 유명하다. “까마귀와 책상이 같은 점이 무엇일까?”

 

 

 

 

 

캐럴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내성적인 성격에다가 말더듬이였다. 그러나 그는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능력은 있었다. 손수건과 냅킨으로 다양한 물체를 접을 수 있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가 만든 종이 딱총 접는 법은 종이접기를 꽤 해본 사람들이라면 알만한 단순한 접기 방식이다. 나는 초등학생 때 캐럴이 만든 방법처럼 종이 딱총을 접어본 적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이런 단순한 종이 접는 법을 캐럴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랍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수학 퍼즐리스트의 양대 산맥인 샘 로이드(1841~1911)와 헨리 듀드니(1857~1930)를 꼽으며 그들의 계보를 이은 사람이 마틴 가드너이다. 그러나 세 사람 이전에 캐럴은 이미 자신만의 수학 퍼즐을 만들고 있었다. 퍼즐리스트로서의 업적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그가 만든(혹은 오래전에 알려진 문제를 그가 문서로 언급한) 문제들 중에 최근에 TV나 영화를 통해 알려져서 유명해진 것이 있다. 정답은 글 제일 밑에 있다.

 

양치기가 양, 늑대, 양배추와 함께 강을 건너야 한다. 양과 늑대를 남겨두면 늑대가 양을 잡아먹고, 양과 양배추를 남겨두면 양이 양배추를 먹는다. 전부 다 무사히 가지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캐럴의 문제는 양치기, 여우, 거위, 옥수수 자루가 등장한다. 무한도전 스피드 특집에서 엘리베이터 문제로 나왔으며 그 이전인 2007년에 개봉한 스페인 영화 ‘페르마의 밀실’에 먼저 나왔다.

 

 

 

 

 

캐럴은 20대 초반에 미로도 만들었다. 도대체 캐럴의 재능은 어디까지인가? 이 책에 수록된 캐럴의 미로는 상당히 복잡하다. 단 한 사람의 머리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결정판 『앨리스』에 비해 분량은 얇지만, 난이도 높은 캐럴의 수학 퍼즐과 문제들을 수학을 어려워하는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역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캐럴에 대한 관심과 전문 연구가 부족한 시기에, 그것도 마틴 가드너의 결정판 『앨리스』보다 먼저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국내 캐럴 마니아라면 읽을 가치가 높은 책이다. 만화, 영화, 축약본 등 숱한 앨리스 텍스트 때문에 제대로 읽지 않고도 다 안다고 착각하는 독자들에게 진짜 앨리스, 아니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을 즐겁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앨리스와 캐럴을 다시 만나는 길을 이제 찾기 힘들어졌다. 마틴 가드너의 결정판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그리고 『실비와 브루노』까지 서점에 구하기 힘든 책이 되었다.

 

 

 

 

 

 

 

 

 

 

 

 

 

 

 

 

 

그나마 캐럴 마니아에게 유일한 위안이 된다면 캐럴의 『스나크 사냥』(이북코리아, 2013년)은 전자북으로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참에『스나크 사냥』도 단행본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  양치기, 양, 늑대, 양배추 문제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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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턱없이 분주한 세상이올시다. 기실 나 남 할 것 없이 몸보다는 마음이 더 분주한 세상이올시다.”  (김용준, 「매화」 중에서, 『마음을 비우는 지혜』 303쪽)

 

 

『근원 수필』를 쓴 김용준 선생은 황폐한 일제 강점기에 이렇게 매화에 대해서 이토록 발랄하고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화의 적막한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면 가난한 살림도 운치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생의 친구는 한가롭게 매화 구경을 하는 선생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바쁜 세상에 꽃구경을 하는 선생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선생은 매화를 바라보는 여유가 없는, ‘냉회(冷灰) 같이 식어버린 우리네 마음’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선생이 살았던 조선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기만 하다. 선생의 글을 읽으면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 이다지도 바빠졌는가’를 조소하게 된다.

 

옛날 선비들은 자연을 벗 삼아 욕심을 버리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여유로운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풍족한 속세의 기억을 잊지 못해 시골로 낙향하고 싶은 마음을 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도시에서 점점 꽃과 나무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꽃과 나무가 있었던 자리에는 어느새 콘크리트로 된 길바닥 위에 회색빛 건물들이 우뚝 서 있다. 이런 곳에서 살수록 우리는 자신만의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방법을 잊고 만다. 나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루만 스마트폰 전원을 끄고 것도 어려워졌다. 왠지 자기 혼자 세상에서 뒤처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제는 독서마저도 하기 힘든 분주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책 읽을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책 읽을 수 있는 자신만의 시간이 없을 뿐이다. 24시간 중에 나 혼자 여유로운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빠른 삶의 속도에 이끌리지 않고, 잠시 혼잡한 일상을 제쳐둘 수 있는 지혜를 잊어버린 채 사는 건 아닌지 스스로 되돌아봐야 한다.

 

 

 

 

 

 

 

 

 

 

 

 

 

 

 

 

 

정민 교수의 『마음을 비우는 지혜』(솔출판사, 1997년, 절판)는 삶의 근심을 잊고, 생활 속에서 소박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싶은 독자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우리 식의 짧은 격언에 해당되는 ‘청언(淸言)을 한문 원문과 함께 우리말로 옮겼다. 이 책은 정민 교수가 최초로 펴낸 문장 모음집이다. 이 책을 펴내기 전에 정민 교수는 『한시 미학 산책』(초판: 솔출판사, 1996년/개정판: 휴머니스트, 2010년)으로 대중들에게 한시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이미 1993년에 정민 교수는 한시와 평설을 함께 엮은 『꽃 피자 어데선가 바람이 불어와』(교학사, 1993년, 절판)의 공동저자로 참여했지만 정민 교수 개인의 평설을 곁들인 형식으로 쓴 첫 번째 문장 모음집은 『마음을 비우는 지혜』이다.

 

 

 

 

 

 

책에 수록된 청언소품들은 중국의 명말청조 시기 때 나온 홍자성의 『채근담』, 여곤의 『신음어』, 장조의 『유몽영』 등에서 가려 뽑은 것이다. 특히 『유몽영』은 『생활의 발견』을 쓴 중국의 수필가 린위탕이 최고의 찬사를 보낸 책이다. 『유몽영』은 1997년에 '자유문고 동양학총서' 34번째 시리즈로 번역되었고, 2001년에 정민 교수가  『유몽영』의 속편  『속유몽영』을 포함한 내용을  『내가 사랑하는 삶』(태학사, 2001년)이라는 제목으로 국역해서 소개했으나 절판되었다.

 

 

 

 

 

 

 

 

 

 

 

 

 

 

 

정제되고 간결한 글이지만 격조 있고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어 옷깃을 여미고 곱씹게 만든다. 때론 그윽한 수묵담채화를 떠올리는 영상이 문장 속에 농축돼 있다.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의 정취, 세심한 관찰력에서 현현하는 인생의 참 뜻,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독서 취미에 이르기까지 주제와 소재의 폭은 실로 다양하다.

 

바쁘게 사는 우리들을 부럽게 만드는 몇 대목만 읽어보자.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을 그냥 눈으로 바라보기가 아깝다. 흥취를 돋우는 맛 좋은 술이 있어야 한다.

 

누각 위에서 산 구경하기, 성 머리에서 눈 구경하기, 등불 앞에서 달 구경하기, 배 위에서 노을 구경하기, 달빛 아래 미인 바라보기, 이 모두 특별한 운치가 있는 정경들이다. (『유몽영』에서 인용, 54쪽)

 

옛 선비들이 할 일이 없어서 한가한 것이 아니다. 김용준 선생이 할 일이 없어서 매화 구경을 하는 것이라고 선생의 친구들은 비웃었다. 하지만 한가로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속세로 인해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 단지 놀기 위해서 한가한 생활을 원한다면 그건 소인의 한가로움이다. 

 

사람이 한가함보다 즐거운 일은 없다는 말은 아예 할 일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가하면 책을 읽을 수가 있고, 명승을 찾아 노닐 수도 있으며, 유익한 벗과 사귀기도 하고, 술을 마실 수도 있고, 책을 저술할 수도 있다. 천하의 즐거움 가운데 이보다 큰 것이 있으랴. (『유몽영』에서 인용, 98쪽)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는 스무 살 전후는 시간을 아껴 공부해야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서 1년 유급을 해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옛날 어르신들도 젊은 시절에 학문 연마하기 위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젊은이는 세상일 때문에 책 읽기를 흐트러뜨려서는 안 된다. 마땅히 책을 읽어 세상일에 통달해야 한다. (『암서유사』에서 인용, 182쪽)

 

그러나 독서만이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세상 견문을 넓히지 않고 책으로 배우기만 해서는 글을 쓸 수 없고, 좁은 식견을 가진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고 만다. 한창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기에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한 독서에 의존하면 정작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면 구설을 멀리할 수가 있다. 한가로이 독서하면서 적막함을 달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늙어 할 일 없는 사람에겐 으뜸가는 보약이지만 젊은이가 이를 배우려 하면 잘못이다. (『자술』에서 인용, 182쪽)

 

정민 교수의 『마음을 비우는 지혜』는 내면의 삶은 더 황폐해진 시대에 등불이 되는 문장들로 가득하다. 비록 그 등불은 켜지지 않은 상태이지만(현재 책은 절판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어두운 삶의 근심을 밝게 해주는 생명력이 문장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선인의 지혜를 찾는다면 이 등불은 언제든지 켜지게 될 것이다. 선인들의 관심사가 지금 우리 고민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잘 들여다보면 현실의 이야기가 옛 사람들 이야기와 포개지는 지점이 있다. 『마음을 비우는 지혜』라는 등불을 켠다면 시대를 초월하는 사람들 내면 풍경의 보편성, 그리고 지금 사람들에게도 와 닿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훤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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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에는 항상 권력관계가 존재해 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더 힘없고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피해자라는 것이다. 특히 경제적 권력관계에서 성적 피해는 더욱 심각하다. ‘피해자는 법적 권리를 보장받으며 가해자는 처벌된다’는 평범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 유명 자기계발서를 낸 ‘샘앤파커스’가 수습사원을 성추행한 일로 시작한 상무를 복직시킨 결정은 여전히 직장 내 여성노동자들이 성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문제의 상무는 업무력 테스트를 빙자해 정규직 전환을 앞둔 수습사원들에게 술자리를 요구했고, 심지어 자신의 오피스텔로 데려가 옷 벗을 것을 요구하면서 성추행을 저질렀다.

 

갑을관계의 부당성이 성범죄 영역에서 드러나는 것이 직장 내 성추행, 성폭행이다. 비정규직 여성이 보호받지 못하는 이유는 지위 관계가 전제되는 직장의 특성상 갑과 을이 존재하고, 이들이 ‘을’이기 때문이다. 작년 온 나라를 들끓게 하였던 ‘윤창중 사태’를 보도한 뉴욕타임스는 “직장에서 남성 상사들이 여성인 부하 직원들을 술을 핑계로 괴롭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한국의 풍토에도 부분적인 이유가 있다”라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비정규직’과 ‘성범죄’는 어떠한 고용 구조와 환경에서 발생하느냐에 따라 해당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큰 차이가 있다. 비정규직은 항상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차별적 조건에서 일해야 한다. 대개 이들에겐 노조라는 울타리가 없어서 부당한 일이 생겨도 호소할 곳이 없다.

 

직장 내의 갑은 비정규직의 ‘불안’을 볼모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들은 승진 혹은 정규적 전환 조건이라는 미끼를 내세워 부하 여직원들의 옷을 벗게 만든다. 그런데도 기업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눈 감아버린다. 정규직은 법에 호소할 안전장치라도 있지만 비정규직은 무방비 상태이다. 그들에겐 더 가혹하고 비열한 권력의 종속관계가 존재한다. ‘을’의 입장에 있는 피해자들은 문제 제기를 할 경우 바로 해고되거나 직장 내 진급이 어려워지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반면,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라고 협박한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부조리극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는 왜곡된 성의식 때문이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비상식적인 인식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재판부의 ‘성편향적인 객관성’에 근거한 판결은 용기 내어 고소하고, 고통스러운 수사와 재판 과정을 겪어낸 피해자들을 절망케 한다. 최근에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로 보는 판결들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폭행과 협박에 얼마나 저항했는지를 피해자가 증명해내야 하는 ‘최협의설’이 적용된다. 서울서부지검은 문제의 상무가 옷을 벗으라는 요구를 하고 키스를 한 점 등은 인정하지만, 피해자의 저항이 없어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이런 판결은 반(反)성폭력 운동의 흐름에 역행하는 결과이다.

 

우리나라 법은 성폭력이라는 끔찍한 범죄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필사의 저항’을 요구한다. 저항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는 피해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름에 불구하고, 법은 ‘목숨을 건 사투’ 아니면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는 이분법으로 성범죄 여부를 판단한다.

 

어느 경우든 갑의 부당한 횡포와 우월적 지위의 남용에 의한 권력형 성범죄는 근절되어야 한다. 이 비인도적인 범죄를 침묵하는 출판사는 끔찍한 범죄를 묵인하고 있는 공범일 수밖에 없다. 사내 성폭력을 눈 감는 출판사에 나온 책을 불매 운동을 한다고 해서 끝날 일은 아니다. 언론에 노출되는 성범죄를 보면서 ‘나와는 상관없다’고 거리두기를 하는 우리의 인식이 바꿔야 한다. 성범죄는 상대적으로 권력 있는 사람이 약자에게 행사하는 성적 폭력이다. 우리가 성범죄에 둔감할수록 정당한 문제 제기도 어려운 비상식적인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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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9-18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만드는 사람들이 어찌 이런 짓들인지...(책 만든다고 그렇게 크게 다를 바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요.)

올려주신 성명문을 읽어보니 가해자 당사자도 그렇고, 회사 전체적으로도 문제가 많군요. 어떤 책을 냈나 살펴보니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류의 책은 없지만 불매운동이라도 해야하는 거 아닌지..

cyrus 2014-09-18 22:21   좋아요 0 | URL
오늘 해당출판사가 자사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어요. 그런데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에 사과문은 올리지 않았어요. 어쨌든 출판사측은 이번 사건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데 여전히 반응은 썩 좋지 않더라고요. 동종업계 출판업자들도 실망스럽게 생각하고요.

올해 출판업계에 연이어 좋지 않은 소식이 터지네요. 사재기 의혹이 있는 출판사 몇 군데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까지 터졌으니 말이죠... 하필이면 문제의 출판사들이 자기계발서를 펴내는 곳입니다.

마태우스 2014-09-18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좋지만 무엇보다 제목이 멋지네요 자사 베스트셀러로 샘앤파커스의부도덕을 비판하는제목이라니요 마니배우고가요

cyrus 2014-09-20 23: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마태우스님. 부족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스피 2014-09-2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와 관련된 조직이 항상 은폐하는것이 문제더군요.가정 정직하고 도덕적인줄 알았던 전교조의 성폭행 미수사건도 이를 은페하려다 문제가 된 케이스죠ㅡ.ㅡ

cyrus 2014-09-25 17:1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조직은 끔찍한 사건을 숨기거나 단순한 일로 무마하면 쉽게 넘어갈거라 생각하는데 나중에 밝혀지면 범죄에 동조하는 걸로 보여지게 됩니다. 비록 조직의 이미지가 좋지 않더라도 확실하게 사과하고 다음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방지해야 합니다.
 
알코올 열린책들 세계문학 120
기욤 아폴리네르 지음, 황현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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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여기 또 한 명의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있소.”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은 소설 『날개』가 시작되는 구절을 통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 ‘살아있지만 죽은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박제란 낱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갖게 하고 다가가기보다 한걸음 물러서게 하는 외면의 상징물이다. 삶이 박제되었다는 것은 생명력을 상실한, 그래서 사고력과 행위를 상실한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상징한다.

 

여기 박제가 된 천재가 또 한 명이 있다. 기욤 알베르 둘치니. 이름이 무척 낯설다. 그렇다면 기욤 아폴리네르는 아시는가? ‘세계의 명시’ 모음집을 읽어 본 독자라면 알 것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 되새겨야만 하는가”로 시작되는 「미라보 다리」를 쓴 시인이다. 기욤 알베르 둘치니와 아폴리네르는 이름만 다른 동일 인물이다. 첫 번째 이름은 시인의 본명이며 ‘아폴리네르’는 세례명이다. 그런데 「미라보 다리」는 익숙해도 정작 시를 쓴 시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폴리네르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그리고 미술평론가로도 꽤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20세기 문학사와 미술사에서 큰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초현실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이 아폴리네르였다. 그는 21세기를 주도할 새로운 미술의 등장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 흐름을 주도하게 될 몇몇 예술가들을 눈여겨봤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파블로 피카소다. 아폴리네르는 사람들로부터 점점 인정을 받기 시작하는 가난한 예술가들을 지원했고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아폴리네르의 실제 삶은 뛰어난 업적에 비하면 기구하고 불운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있지만 죽은 것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살면서 시인으로 활동했지만, 사실은 무국적자에 가까웠다. 또 출생 과정도 좋지 않았다. 미지의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폴리네르는 평생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다. 아폴리네르의 어머니는 한 곳에 가만히 안주하지 못하는 성격에 허영심이 상당히 강한 도박꾼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소년 아폴리네르는 평번한 또래 아이들처럼 부모로부터 사랑을 제대로 받으면서 자라지 못했다. 아마도 이때부터 아폴리네르는 너무 오랫동안 허기진 상태가 계속된 마음을 충족시켜 줄 사랑이 필요했음을 느꼈을 것이다.

 

 

 

 Scene #2  운명은 천재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청년이 된 아폴리네르는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줄 사랑의 동반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21살에 독일의 한 부잣집 딸의 프랑스어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영어를 가르치는 애니 플레이든을 만나게 된다. 만남의 시작은 좋았으나 두 사람의 연애 진도는 좀처럼 나아가지 않았다. 결국 애니가 미국으로 떠나버림으로써 시인의 첫 번째 사랑은 불행하게 끝나고 말았다. 실연 이후로 아폴리네르는 자신의 시에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사랑의 기억들을 곳곳에 숨겨놓았고, 간간이 심장에서 솟구쳐 오르는 슬픔과 분노를 시로 표출했다.

 

두 번째 사랑은 입체파 화가들에 영감을 준 ‘몽마르트르의 뮤즈’ 마리 로랑생이었다. 둘은 서로 공통점이 많았다. 사생아 출신이었으며 서로의 예술에 대해 공감했다. 함께 손을 맞잡고 미라보 다리를 건널 정도로 두 사람의 사랑은 당장 결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가까웠으나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그들의 사랑을 방해했다.

 

1911년 아폴리네르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그가 명화 도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과정은 정말 불운했다. 아폴리네르의 비서 제리 피에르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고대 흉상을 빼돌려 아폴리네르의 집에 숨겨둔 것이 화근이 되었다. 아폴리네르의 집에 숨겨둔 흉상이 발견되면서 아무 죄도 없는 아폴리네르는 ‘모나리자’ 절도 혐의로 상떼 감옥에 구속 수감된다. 아폴리네르가 억울한 누명을 씌우게 만든 비서는 국외로 탈출한 상태였다.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을 정도로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다행히 아폴리네르는 기소 각하로 구속된 지 일주일 만에 석방된다. 그러나 석방 이후의 아폴리네르 곁에는 그를 지지해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난 상태였다. 로랑생과의 사랑은 끝났고,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사회는 무국적자이자 명화 도난 사건 혐의를 받은 시인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일부 언론은 그의 출생 이력과 무명 시절에 쓴 외설적인 포르노 소설을 트집 잡아 비난했다. 젊은 천재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채 박제가 되었다. 프랑스 사회는 야박했다.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가 자유롭게 숨 쉬는 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상떼 감옥에서 보낸 일주일은 아폴리네르에게 정말 잊고 싶은 사건 중의 하나였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자유가 억압되었고, 왕성한 창작의 기력이 한 풀 꺾이고 말았다. 수감 당시에 느꼈던 괴로운 감정은 시 「상떼 감옥에서」에서 구구절절 표현하고 있다.

 

 

감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알몸이 되어야 했으니
어느 불길한 밤새 소리 울부짖는다
기욤 너 이게 무슨 꼴이냐고

 

(중략)

 

태양이 창살을 비집고
      걸러 들어와
빛살이 내 시구 위에서
      광대놀음을 벌이네

종이 위에서 춤을 추네
      귀 기울여 들어 봐야
누군가가 발로 둥근 천장을
      구르는 소리

 

한 마리 곰처럼 땅굴 속에서
아침마다 나는 어슬렁거리네
돌자 돌자 마냥 돌자
하늘은 수갑처럼 시퍼렇구나
한 마리 곰처럼 땅굴 속에서
아침마다 나는 어슬렁거리네

 

 

(「상떼 감옥에서」중에서, 175~179쪽)

 

 

그가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된 것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대가로 아폴리네르는 드디어 무국적자의 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대전은 문학 천재가 다시 비상(飛上)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힘든 시기였다. 1916년 3월, 아폴리네르는 전선에 참전하다가 두뇌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는 몹시 위험한 수술을 받고서도 용케 살아남았지만, 그 총상에서 회복되던 중에 독감에 걸려 종전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Scene #3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은 시들을 모은 작품이 아니다. 여기 한 권에 그의 삶 자체가 농축되어 있다. 그는 이 시집만큼은 자신보다 더 많이 사랑받기를 원했다. 성(性)과 국적, 신분이 제각각 다른 일곱 사람만 읽어도 스스로 만족했다.

 

사실 「미라보 다리」와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아폴리네르의 시는 어렵다. 시 속에 시인의 삶 자체가 그대로 녹아들어있기 때문에 아폴리네르라는 시인을 모른다면 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시 중간에 나오는 고대 종교 및 중세 신화 속에 나오는 장면들은 독자들에게 상당한 배경지식을 요구한다. 즉, 한 문장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 시가 아니다. 『알코올』을 읽기 전에 역자 해설과 작가 연보를 먼저 읽을 것을 권한다. 아폴리네르를 전공한 불문학자 황현산 교수가 아폴리네르의 시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했다.

 

「미라보 다리」 다음으로 아폴리네르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는 시집에서 수록된 시 중 가장 긴 내용이다. 애니 플레이든과의 결별 이후에 쓴 작품으로 제목만 봐도 그 때 그 심정을 읊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정작 시 내용을 읽게 되면 감정을 문장으로 표출하는, 가슴 아픈 서정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시인은 고대 및 종교 신화에 나오는 장면을 인용하여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다. 아니, 일부러 그 가슴 아픈 기억을 감추는 듯하다. 시는 런던과 파리의 모습뿐만 아니라 행복한 왕들의 장면, 저주 받은 운명 그리고 익사한 왕의 장면 등 어지럽게 섞인 채 나타난다. 독자는 이 시에서 사랑받지 못한 사내, 즉 시인의 감정을 제대로 포착해내기 어렵다.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의 구성 방식은 입체파 화가들이 즐겨 제작하던 양식인 파피에 꼴레(Papier colle)가 연상된다. 화면에 현실감을 주기 위해 색지나 신문지, 악보, 상표, 벽지 등을 풀로 붙여 새로운 효과를 낸다. 아폴리네르는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끌어 모아 생경한 이미지를 만들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기억 전체를 환기시킨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기억이 추억이 되어 슬프고도 시인 자신을 괴롭게 만들지만, 아폴리네르는 점점 세월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그 추억의 한줄기마저 잡기 위해 힘겹게 시를 써내려간다. 그것이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시인을 알면서도.  

 

 


나날이 지나가고 주일이 지나가고
    지나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미라보 다리」중에서, 53쪽)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는 사랑의 변심과 좌절에 비롯된 회의감을 드러냈다면, 「미라보 다리」와 「고별」에서 시인은 이별의 고통을 묵묵히 견디면서 지나간 추억이라도 잊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내 언젠가 히스나무 이 가녀린 가지를 꺾어 두었지
가을도 가버렸으나 잊지는 말아라
우리는 이 땅에서 다시 보지 못할 거야
시간의 이 향기 히스나무의 이 가녀린 가지
그래 내 너를 기다리니 잊지는 말아라

 

(「고별」, 105쪽)

 

 

 


 Scene #4  시를 쓴다는 것은 외롭고도 황홀한 심사이어니.   

 

「미라보 다리」가 너무 많이 알려지는 바람에 아폴리네르는 서정시인으로 둔갑되어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사랑을 추억하다가 행복한 결실을 맺지 못하는 불행한 시인은 아니다. 비록 함께하는 기간은 짧았으나 빨강머리 자클린 콜브와 약혼하여 잠시나마 행복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아폴리네르에게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지고지순한 감정이 아니다. 고독한 삶의 여정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환기시켜주는 특별한 경험이다.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외롭고도 황홀한 심사’(정지용 「유리창 1」중에서)이다.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외로움은 황홀한 시적 감정에 의해 절제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아폴리네르. 그는 오늘도 세월의 박제가 되어 미라보 다리 밑에서 가슴 아픈 사랑의 추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팔 밑에 낡은 책을 끼고 센 강변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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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9-18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외국작품을 읽을 때는 역자해설을 자세히 읽으면 얻을 것이 많은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소홀히 여기더라고요.아폴리네르의 생애는 얼마나 비극적입니까.저는 역자해설을 정독하라고 늘 권합니다.

cyrus 2014-09-20 23:40   좋아요 0 | URL
최근에 헌책방에서 황현산 교수가 번역한 파스칼 피아의 <아폴리네르>도 구해서 같이 읽고 있습니다. 이 책 덕분에 아폴리네르의 문학을 한결 더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9-21 22:49   좋아요 0 | URL
광범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독서를 하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