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첫 번째 단편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에 ‘왜 그러는 거니, 얘야?’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다. 혹시 카버의 소설을 읽어 본 독자 분들께서는 이 글을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가. 무척 궁금하다. 만약에 내가 독서토론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면, 독서토론을 위한 지정도서로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아무래도 카버의 소설을 즐겨 읽은 독자라면 소설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 싶다. 특히 내가 여기서 소개하려는 ‘왜 그러는 거니, 얘야?’ 같은 글은.

 

‘왜 그러는 거니, 얘야?’는 서간체 형식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외동아들을 둔 어머니가 미지의 인물로부터 의문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 내용은 어머니의 아들에 대해서 묻는 건데 어머니가 답장을 쓰기 시작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답장에 아들에 관한 내용이 언급된다. 과거를 회상하듯이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면서까지 아들이 자라면서 겪은 경험들을 어머니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카버의 소설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독자는 다음 소개되는 줄거리를 읽지 마세요)

 

 

그런데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특이하다. 어머니는 아들을 두려워한다. 아들은 평소 착한 성격이지만, 가끔 충동적으로 감정을 폭발하거나 거짓말을 서슴없이 일삼는 행동을 한다. 아들이 열다섯 살쯤 되었을 때, 자신의 집에 기르는 고양이를 끔찍한 방법으로 죽인 적이 있었다. 그 장면을 남편이 목격했지만 어머니는 믿지 않았다. 아들이 가족처럼 여기던 고양이를 끔찍하게 죽일 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은 미심쩍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아들은 처음으로 일을 하게 되어, 월급을 받았는데 어머니에게 80달러를 받았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자신보다 돈을 많이 버는 아들의 모습을 기특하게 여겼으나, 이 말이 ‘뻥’이었음을 알게 된다. 빨래를 하다가 아들의 주머니 속에 28달러짜리 급료 수표를 발견했다.

 

아들은 학교 성적이 우수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그러나 점점 밖으로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아졌고, 어머니가 밖에 나가서 무엇을 했냐고 물어봐도 아들은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일도 아니라 듯이 대답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다. 심지어 아들은 자신이 구입한 엽총과 사냥칼을 자기 차의 트렁크에 넣기도 했다. 도대체 저런 위험한 물건을 구입해서 차에 보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아들이 친구와 사냥을 하고 난 뒤에 다음 날 아침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아들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살펴봤다. 그 곳에서 진흙이 잔뜩 묻은 아들의 신발을 발견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차 트렁크 속에 피가 묻힌 채 둘둘 말려진 셔츠도 발견했다. 지금까지 이 모습을 쭉 지켜본 아들은 어머니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코피가 심하게 나서 묻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낯설게 느껴져만 갔다. 한 번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따뜻한 차 한 잔 마실 건지 물어보려고 아들의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들은 무엇을 숨기려다가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어 크게 놀란 사람처럼 서랍 하나를 '꽝‘하고 닫으면서 어머니에게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나가요, 엄마가 엿보는 데 진절머리가 나요!”

 

갑작스러운 아들의 분노에 어머니는 무척 속상했다. 아들이 아닌 서로 남남처럼 지내는 하숙인처럼 취급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들은 어젯밤의 분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음 날 저녁, 한동안 밖에 나갔다가 들어온 아들이 식사를 준비했다. 어젯밤에 소리를 지르던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용기를 내어 아들에게 다가가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할 것을 요구했다. 그동안 밖에 나가면 무엇을 했으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러는 거니, 얘야?”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쳐다보다가 침묵했던 입을 열었다. “무릎을 꿇어요. 무릎을 꿇으라구요. 그게 첫째 이유예요.”

 

어머니는 아들의 대답에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문을 잠갔다. 아들은 그 날 밤 집을 떠났다. 그 이후로 어머니와 아들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모자(母子)가 아니라 남남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소원해졌지만, 아들은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수한 성적과 최우수 졸업논문으로 학교를 졸업했고, 해병대를 제대하고 난 뒤에 정치에 도전했다. 아들은 텔레비전과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주지사에 출마해 당선도 했다.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아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는 그의 주소를 알아내 몇 달에 한 번씩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어머니의 걱정과 두려움은 더욱 쌓여만 갔다. 결국, 어머니는 이름과 전화번호부를 바꾸면서까지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로 어머니는 누군가로부터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편지의 말미에 늙은 어머니는 자신이 이 나라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어머니이지만 두렵다고 밝혔다. 그리고 편지를 보내는 미지의 인물에게 어떻게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냈는지 궁금하다면서 물어보면서 소설은 끝난다.

 

“당신이 어떻게 제 이름과 주소를 알아냈는지 묻고 싶군요. 아무도 모르기를 기도해왔는데 말입니다. 왜 그러셨죠? 제발 좀 알려주세요.  -당신의 충실한 벗 드림” (292쪽)

 

카버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평범한 소시민이지만, 그들은 평온하고 행복하기보다는 항상 불안과 두려움을 달고 산다. 역시 ‘왜 그러는 거니, 얘야?’에 나오는 어머니의 삶은 불안하다. 아들 또한 평범하지 않다. 아들은 자신을 의심하고 꼬치꼬치 캐묻는 어머니가 불편하다. 평범했던 모자 관계는 사소한 의심과 갈등으로 점점 어긋나기 시작하다가 아들로부터 진실한 대답을 원했던 어머니의 요구로 인해 위태로웠던 그들의 관계가 무너져버린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원래대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신의 감정이 깊어졌다. 아들을 그리워하면서도 그의 이중적인 면을 두려워하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하소연이 더욱 처량하게 느껴진다.

 

‘왜 그러는 거니, 얘야?’는 훌륭한 아들을 두고도 만나지 못하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사연을 그린 소설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어 보면 독자는 어머니처럼 아들의 행동을 의심하게 된다. 단일한 구성에, 시간적·공간적 배경을 최소화시키는 카버의 글쓰기는 등장인물이나 소설의 결말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켜주고, 여기에 독자의 다양한 해석을 나오게 만든다. 

 

 

 

 

 

 

 

 

 

 

 

 

 

 

 


일단 눈치가 밝은 독자라면 이 소설에 나오는 아들이 ‘사이코패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이코패스의 특징은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고 일상생활도 잘해 가족조차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사소한 충동으로 자제력을 잃게 되면 잔인하고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른다. 또 다른 특징은 자기가 한 잔혹한 행위나 거짓말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이 없다. 충동적이고 무책임하며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한다.

 

아들이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죽이고 난 후에 드러나는 행동은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모습에 가깝다. 『진단명 사이코패스』의 저자 로버트 헤어는 사이코패스가 유년기부터 끊임없는 거짓말과 방화, 동물 학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또 자기합리화에 능숙하다. 고양이가 죽은 사실을 어머니에게 듣게 된 아들은 아무렇지 않게 태연한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고양이가 죽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날 저녁 제가 트루디(죽은 고양이의 이름)에 대한 얘기를 하자 그애는 놀라고 충격을 받은 것처럼 굴었고, 우리가 현상금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애는 뭔가 타자기로 치고는 그걸 학교에 게시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그날 밤 자기 방으로 가면서 그애는 엄마, 그 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트루디는 늙었어요. 고양이 나이로는 예순다섯이나 일흔쯤이었으니까 오래 산 거예요. 라고 말하더군요.” (284~285쪽)

 

이 소설의 또 다른 의문점. 아들의 어머니를 감시하고, 어머니의 집 주소를 알고 편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이 모든 일들이 아들이 주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은 이름과 집 주소가 바뀐 어머니의 안부가 궁금해서 감시한 것은 아니다. 주지사가 되어서 성공의 길을 걷고 있는 아들은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어머니의 존재가 껄끄러울 것이다. 어머니가 공개석상에서 주지사의 어머니라고 밝히는 순간, 아들의 차 트렁크 안에 발견한 피 묻은 셔츠의 비밀 또한 공개될 수도 있다. 아들은 과거에 연루된 살인 사건이 내막이 한 치라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의심을 막아야 한다. 아마도 아들은 어머니에게 익명으로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동안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의중을 떠보고 싶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과거에 있었던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고 꺼림칙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잊지 않고 있다면, 감시자에게 청부살인을 시켰을지도 모른다. 즉, 어머니의 답장은 아들이 계획한 무시무시한 살인의 함정일 수도 있다.

 

소설의 해석이 너무 상상력이 지나친 것도 있지만, 이 정도 범행을 충분히 생각해볼 가능성이 있다. 범죄자라면 자신의 범죄 행위를 목격한 증인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어머니는 언젠가 자신도 아들에게 살해당할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만약에 아들이 무릎을 꿇으라고 말했을 때 방으로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의 운명을 어떻게 되었을까? 살인자 또는 사기꾼이 된 아들을 잉태하고 키운 어머니로서는 살아도 산 것 같지 않다. 아들의 하수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면서 어머니는 고립되어 간다. 아들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어머니의 마음은 애가 탄다. “왜 그러는 거니, 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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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스티븐 코비 지음, 김경섭 옮김 / 김영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평소 많이 연락하는 친구들 중에 나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성격을 가진 이가 없다. 그 친구들은 학창 시절부터 책과 공부에 담을 쌓았고, 술 먹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나에게 한 권의 책을 선물로 줬다. 그는 내가 독서를 좋아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독서를 잘 하지 않는다. 노는 것 엄청 좋아하는 친구인 줄 알았는데 나에게 책 선물을 할 줄이야. 그런데 나에게 책을 선물하게 된 이유를 더 자세히 알게 된 순간, 감동의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친구가 일하는 회사가 직원들에게 독서를 권장하기 시작했는데 회사가 매달 책 한 권을 직원들에게 제공해준단다. 그러면 월말에 회사에서 지정한 책에 대해서 직원들이 모여 간단히 독서토론을 한다. 책을 읽고 독서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인사고과에 반영한다. 친구는 회사에서 주는 책을 더 이상 읽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책을 준 것이다. 선물인듯 선물 아닌 선물 같은 책이다. 

 

친구가 나에게 준 책 선물 1호는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개정증보판이다. 친구는 농담으로 내가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서 이 책을 줬다. 사실 집에 1994년에 나온 구판을 가지고 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개정증보판도 가지게 되었다. 이 책은 CEO들이 가장 많이 추천하는 자기계발서의 고전이다. 나는 구판을 중학생 때 처음 읽었다. 초등학생, 중학생 학급문고에 이 책이 꽂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책이었다. 그런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내용은 어린이들이 읽기에는 수준이 높다. 기업 같은 사회조직의 구성원이 된 어른이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도대체 나는 어떤 분야에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에 이 책을 읽었을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땐 세상 물정을 잘 몰랐기에 '성공'의 의미를 단순하게 생각했다. 돈만 많이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른이 된 지금, '성공'의 의미를 되짚어보면 딱히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기 어렵다. 성공의 사전적 정의는 ‘목적이나 뜻을 이룸’이다. 낮은 자가 높은 지위를 얻게 되고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며, 시합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어 부와 명예를 가진 것도 성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성공에 대한 개념이 바뀌기 시작했다.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생리적 욕구, 안정의 욕구, 소속의 욕구를 뛰어넘어 타인에게 존중받고 싶어 하고 자신의 자아실현을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돈보다 명예를 원하고, 자신이 잘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일에 충실하려고 한다.

 

7가지 습관의 핵심은 원칙중심의 가치관 확립과 개인차원의 신뢰성 확보에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 원칙이란 과거 수백 년 전에도 현재도 그리고 수백 년 후에도 변하지 않을 가치로써 인간행동의 지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정직·성실·신용 등이 될 것이다. 신뢰성의 기준은 성품과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신뢰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능력과 성품의 조화를 보고 판단한다고 할 수 있다. 코비는 인간에게 있어서 남에게 보이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내면의 성품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하여 강조하고 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변화시켜 내면으로부터 시작된 성공을 외부로 이끌어내는 접근법이다. 외적 대인관계에서의 승리를 이끌기 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개인적 승리’가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패러다임을 이러한 내적 성품 효과성 원칙에 맞춘다면 잠재역량과 능력을 키울 뿐만 아니라 인생을 더욱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인생의 성공은 자아 정체성의 확인에서 출발해 ‘우리’라는 공동체적 가치관의 중요성에 따라 이해당사자 간 타협이나 절충보다 상호 협조적인 승(勝)을 위한 제3의 대안을 찾아내고 관계 개선에 기여함으로써 집단의 응집력을 증대시키는 데 있다.

 

인생의 풍요로움은 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바탕으로 사회에 공헌하고 헌신하는 삶에서 꽃필 수 있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신나고 의미 있는 일들을 수행할 때 인생의 풍요로움은 배가된다. 급변하는 환경과 개인이 우선시되는 사회 풍조 속에서 우리 모두의 승리를 주장하는 이 책의 가치는 남다르다. 내가 성공하고 싶어서 이 책을 읽는다면 과연 그 '성공'이 '나'에게만 초점을 맞춘 것인지 아니면 '나를 포함한 전체'를 위한 것인지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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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의 예술한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지음, 이세진 옮김 / 북노마드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Scene #1  "선을 많이 그려보게."

 

 

"드가는 드로잉을 참으로 사랑했다."

 

 

1917년에 세상을 떠난 에드가 드가의 묘비명이다. 드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의 묘비에 이런 문장을 새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정말 드로잉을 지나치게 사랑했다. 그의 연필, 그의 파스텔, 그의 붓은 결코 포기를 몰랐다. 그의 묘선(描線)은 그가 원하는 것에 충분히 가까워져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한없이 그림에 달라붙어 그걸 한장 한장 모방하고, 다시 모방하여 더 심화시키고, 옥죄이고, 감쌌다. 그에게 하나의 작품은 결코 끝이 났다고 말할 수 없었다.

 

드가가 드로잉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 계기는 무명시절에 만난 '대가'의 조언에서 시작되었다. 1855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드가에게 '대가'는 이렇게 말했다. "선을 그리게. 기억을 되살려서든 자연을 보고서든 선을 많이 그려보게." 이때부터 드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항상 드로잉에 충실했으며 지금까지도 방대한 드로잉 작품이 남아 있다.

 

드가가 만난 '대가'는 바로 고전주의의 대가 앵그르였다. 앵그르는 회화에서 형식을 중시하는 소묘파의 거두였다. 회화에서는 소묘파와 그림의 중심은 색이라고 말하는 색채파 간에 오랜 논쟁이 있었다. 푸생과 라파엘로로 대표되는 소묘파는 그림의 기초인 데생이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했고, 루벤스로 대표되는 색채파는 회화의 생명은 색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전자의 소묘파는 앵그르로 이어지고, 색채파는 낭만주의 대표 화가인 들라크루아로 그 계보를 잇는다. 그러나 젊은 드가가 앵그르를 만났던 시기는 소묘파가 색채파의 힘에 밀려 약화되고 있었다. 젊은 들라크루아는 데생과 형식을 고집하는 앵그르를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화가라고 비난했다. 그렇지만 앵그르는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을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물을 보는 최고의 방식으로 데생을 수없이 강조했다. 결국 앵그르의 데생 사랑은 드가에게로 이어졌으며 피카소의 누드작품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Scene #2  “내 화실에 문패를 단다면 나는 ‘데생 교실’이라고 내걸 테다.”

 

드로잉. 데생·소묘라고도 불리는 드로잉은 일반적으로 밑그림으로 인식되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그림 이전의 단계라는 이야기다. 그런 드로잉이 예술표현 수단으로 독자적인 자리매김을 한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이르러서였다. 18세기 이후엔 드로잉 위작이 나돌 정도였으니 이미 수집가들의 수집대상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앵그르 역시 드로잉 수집가 대열에 합류하여 르네상스 회화 같은 세밀한 고전적 묘사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앵그르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래서 피가 도는 사람인지 아니면 저 먼 고대의 이상적인 대리석 조각인지 모호할 정도로 어여쁜 여성상을 많이 그렸다. 아름다운 선과 정확한 형태는 대상을 아름답게 재현하는 예술적 방법이었다.


예술적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앵그르는 자신만의 노트에 따로 기록했다. 1867년 제자들에 의해 편집돼 세상에 공개된 『앵그르의 예술한담』은 생전 그가 흠모했던 고대 예술의 대가들부터 음악, 연극 관련 주제까지 일관성 없이 잡다한 생각들이 적혀 있다. 그의 데생 사랑은 생전에 공개되지 않은 비밀노트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앵그르가 기록한 짤막한 글에서 젊은 드가에게 데생의 중요성을 알려준 대가의 목소리가 생상하게 들려온다. 

 

 

 

 

데생은 단순히 윤곽선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데생은 그저 선으로만 되는 게 아니다. 데생은 표현, 내부 형태, 면, 양감이기도 하다. (44쪽)

 

 

 

 

 

앵그르 「학생들에게 선사한 반신 자화상」 18세기기경

 

만약 내 화실에 문패를 단다면 나는 ‘데생 교실’이라고 내걸 테다. 그리해도 내가 화가들을 키워낸다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45쪽)

 

아펠레스는 선 하나도 긋지 않고 보내는 날이 하루라도 있으면 안 된다 하였다. 그가 이 말을 통해서 가르치고 싶었던 바를 내가 여러분에게 거듭 말하겠다. 선은 데생이고, 데생은 전부다. (47쪽)

 

알렉산더 대왕의 전속 화가로 활동했던 아펠레스는 윤곽선을 매우 중시했고, 매일 선 긋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앵그르도 아펠레스처럼 매일 선 긋는 연습을 했는데 그 결과 꽤 많은 드로잉 작품을 남겼다. 그리다 만 형태로 남은 앵그르의 드로잉 작품은 지금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앵그르에게는 드로잉은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과정일 뿐이었다.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는 스승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예술적 경지에 이른 순간에도 앵그르는 데생이라는 기본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비밀노트는 앵그르의 미술 세계가 꾸밈이나 자기검열 없이 그대로 보존된 귀중한 문헌이다. 앵그르가 생각나는 대로 기록한 내용에는 무한한 데생 사랑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앵그르의 그림을 아는 독자라면 그가 남긴 그림들이 희미한 실루엣처럼 떠올릴 수 있다.

 

 

 

 

 

앵그르  「물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 1848년

 

우리가 실질적으로 조각가들처럼 작업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조소적인 그림을 그려야 한다. (50쪽)

 

 

 

 

 

앵그르  「세 개의 팔을 가진 여인, '터키탕' 습작」

 

좀더 상세한 크로키를 그릴 짬이 있거든 애정을 품고 모델을 취하고, 그 모델을 관찰하고, 온갖 형태로 그려보라. 모델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들어앉을 만큼, 모델이 무슨 소유물처럼 머릿속에 처박힐 만큼. (55쪽)

 

 

 

 

 

앵그르  「도송빌 백작부인의 초상」  1848년

 

인물화를 잘 그리려면 우선 그리고자 하는 얼굴에 깊이 빠져야 한다. 그 얼굴을 오랫동안, 주의깊게, 모든 면에서 숙고해야 한다. 첫 번째 포즈 시간은 아예 거기에 다 할애해야 할 정도다. (69쪽)

 

앵그르의 그림은 부드럽다. 특유의 섬세한 필치는 여인의 곡선을 띤 몸에 누구보다도 잘 어울렸으며 실제로도 그는 벗은, 특히 목욕하는 여인의 몸을 잘 그렸다. 앵그르의 스승 다비드는 “미술이란 자연을 가장 아름답게,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이며 미술 작품의 목적은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앵그르는 이 가르침을 그림 속에서 엄격한 리얼리즘으로 승화시켰다. 그리하여 강조와 비례의 미묘한 변화, 우아함과 사실적 깊이로 19세기 고전주의 미술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앵그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 1808년

 

나는 우연히 거울을 통해 내가 그린 오이디푸스의 허벅지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하얀 옷감이 따뜻한 금빛 살갗의 색상과 나란히 놓이니 더욱더 눈부시고 아름답게 보였다! (63쪽)

 

앵그르는 1808년에 완성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가 본인에게 있어서 가장 완벽한 그림으로 보였을 것이다. 앵그르의 비밀노트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회화의 대가의 그림들을 칭송하는 글이 많은데 앵그르 자신의 그림을 자찬하는 내용으로는 이 글이 유일하다. 앵그르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를 보라. 선이 만들어낸 세련된 남성 육체의 관능미가 느껴지는가. 남자인 내가 봐도 오이디푸스의 튼실한 허벅지가 이렇게 섹시하게 느껴질 수가. 여성 관람객이라면 당연히 오이디푸스의 허벅지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갈 것이다.

 

 

 

 

 

앵그르 「호메로스 예찬」  1827년

 

호메로스는 문학에 있어서나 미술에 있어서나 온전한 아름다움의 원칙이자 모델이다. (97쪽)

 

고전주의 미술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고대 그리스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신화나 비극 같은 고전 문학작품들도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앵그르도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감명 깊게 읽었다. 시간을 초월한 고전의 가치를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발견했다. 이러한 고전주의 예술에 대한 앵그르의 신념은 1827년에 완성된 「호메로스 예찬」에서도 드러난다. 앵그르는 이 그림을 통해 위대한 시인을 신격화한다.

 

 

 

 

 

앵그르  「그랑드 오달리스크」 1814년

 

모델의 목이 가늘더라도 굵게 고쳐 그리지는 말라. 그러나 그 가느다란 느낌을 과장하는 것도 삼가라. 특징을 잘 표현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과장은 허용된다. 특히 아름다움의 요소를 확 터뜨리거나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할 때가 그렇다. (128쪽)

 

들라크루아의 후예들은 앵그르가 전통을 고집한 보수적인 화가라고 폄하했으나 앵그르는 정통파의 양식을 어느 정도 고수하면서도 해부학적 묘사를 고의적으로 거부했다. 허리뼈가 세 개나 더 있다는 조롱을 받은 「그랑드 오달리스크」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모델은 큰 엉덩이 때문에 허리는 비정상적으로 잘록해 보인다. 

 

 

 

 Scene #3 “나는 혁명가가 되고 싶다.” 

앵그르는 자신의 비밀노트가 제자들에게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앵그르의 속마음은 그랬을까. 그의 문체는 노트가 자신이 죽은 뒤에 언젠가 읽어보게 될 후손 또는 제자들에게 직접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비밀노트를 생전에 공개하지 않았을까?

 

노트를 영원히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던 앵그르의 모습에서 발자크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에서 완벽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싶었던 주인공 프렌호퍼를 보는 듯하다. 완벽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프렌호퍼는 완성이 되지 않은 미지의 걸작을 공개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앵그르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계속 고민하고 아무렇게 쓴 노트를 누구에게도 공개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완벽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정답을 끝끝내 찾을 수 없었기에.

 

앵그르에게는 이 노트가 단순히 다음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생각해낸 아이디어 모음집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앵그르는 입체적인 형태 표현과 세밀한 소묘, 매끄러운 기교 등이 완벽한 구도와 함께 조화를 이루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술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선만으로는 부족했다.예술은 지금 변혁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러한 혁명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앵그르는 스승 다비드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묘사를 시도한다. 신체 비례가 왜곡된그랑드 오달리스크와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일관성 없는 기록은 표현에 대한 화가의 자기모순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앵그르의 노트는 어설픈 내용이 있는 기록으로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위대한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고전주의의 대가가 수없이 고민하고 기록한 변증법적 탐구의 흔적이다. 여기에 고전주의의 대가로만 머물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술의 혁명가가 되고 싶은 앵그르의 뜨겁고 치열한 예술혼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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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공부 - 김수행 교수가 들려주는 자본 이야기
김수행 지음 / 돌베개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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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사회주의인지 막걸리인지  

 

 

“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기,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막걸리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 그 양반...”

 

 

채만식의 소설 「치숙」에서 ‘사회주의인지 막걸리인지’라는 표현이 있다. 사회주의 즉 마르크시즘의 막걸리의 막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착안한 말이다. 이 표현에 화자의 사회주의에 대한 심리가 간결한 표현 속에 담겨 있다. 이야기의 화자는 어린 조카로 되어 있다. 주인공 ‘나’는 보통학교 4학년밖에 못 다녔지만, 일본인 가게 주인의 눈에 들어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아저씨에게 오촌 조카는 조곤조곤 따지고 든다.

 

 

“아저씨! 경제라 껏은 돈 모아서 부자되라는 거 아니요? 그런데 사회주의라 껏은 모아둔 부자 사람의 돈을 뺏아 쓰는 거 아니요?”

 

 

조카는 사회주의를 부자의 재물을 빼앗는 불한당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아저씨의 한심한 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대학교에서 5년 동안 경제학 공부를 하면서도 돈 한 번 제대로 벌지 못하고 사회주의 운동에 빠진 아저씨를 조롱한다. 조카는 경제가 돈 모으는 활동이니까 경제학은 돈 모으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어서 삼촌이 경제학을 잘못 공부했다고 돌직구를 날린다. 하지만 아저씨는 오히려 조카가 세상 물정, 즉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모른다고 말한다.

 

 

 

 Scene #2  “여러분, 부자 흉내 내세요!”

 

마르크스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소 먹이는 일을, 그리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토론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굳이 하나의 직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사회가 일반적인 생산을 규제하고 생산력은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에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정신적, 물질적으로 부자일 수 있다는 상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던 공산주의 사회는 실패한 실험이었다.

 

 

 

 

 

한때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라는 광고카피가

최고의 덕담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런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2014년 대한민국. 이곳에서 지금 누구나 부자를 열망한다. 돈만을 좇는 속된 삶이 아니라도 돈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다며. 십 여 년 전에 모 카드회사의 광고 문구 “여러분, 부자 되세요.”는 최고의 덕담이 됐다. 그렇다고 모두 부자일 수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는 소수다. 나머진 부자가 되고 싶어서 부자 흉내를 냈다. 그런데 부자 흉내의 결과가 심각하다. 펀드니 연금이니 뭐니 투자를 해봤지만 남은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빚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청년실업이 단기적인 사회문제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용불안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들이 가정을 꾸리면 청년실업이 ‘가족의 위기’로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 경기침체로 청년들이 일자리를 잃고 삶의 목표를 상실한다.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소득수준의 급속한 향상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행복은 제자리걸음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 한계에 이른 데다가 돈으로 사기 어려운 행복의 주된 원천은 자본주의 시장의 힘으로 잠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Scene #3  호황이면 소비 열기, 불황이면 자본론 공부 바람이 부는 법  

 

국경을 넘어 퍼부어지는 자본의 융단폭격. 온 세계를 무한경쟁으로 휘몰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사회와 직장은 물론 우리 안방에까지 침투해 있다. 삶을 초토화하는 그 기세는 마치 대지를 휩쓰는 메뚜기 떼의 공격 같다. 자본은 자꾸 부자가 되어가지만, 노동자와 서민은 대량해고·비정규직·실업 등으로 빈곤과 불안의 깊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대공황에 버금갈만한 2008년 뉴욕 월 스트리트가 발 금융파탄으로 야기된 세계 불황이 장기화하고 있어 어느 나라든 저소득층의 생활은 더 피폐해지고 있다.

 

경제위기가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경제 상황 속에서 금융자본주의가 상위 1%의 이익에만 충실하다는 비판적 시각이 재확산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시작된 ‘反 월 스트리트 시위’의 영향으로 현 지배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한층 높아졌다. 자본주의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부의 분배’ 문제도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21세기 자본』(글항아리, 2014년)을 통해서 경제적 불평등을 배태한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따졌다. 피케티 하나를 두고 세계가 들끓고 있는 와중에 오랫동안 사회학 교과서 활자 속에 갇혀 있던 공산주의, 아니 마르크스의 유령도 돌아왔다. 마르크스의 부상은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인류의 불안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들고만 다녀도 구속감이었던 ‘빨갱이 경제학’의 교과서 『자본론』에 대한 공부 열기도 살아나고 있다. 자고로 호황이면 소비 열기가, 불황이면 공부 바람이 부는 법. 불황 효과일까? 하지만 IMF 위기 때와 비교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IMF 위기는 아시아만 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 제도 자체에 의문을 갖게 한다. IMF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다면 지금의 위기는 ‘공포’ 수준이다. 사람들은 이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근본 원리를 알아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마르크스’라고 하면 금세 떠오르는 것이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도식이다. 붉은 깃발 아래 낫과 망치가 먼저 떠오르다 보니 일단 거부감부터 생기는 것이 사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거론하는 데는 여전히 용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아무리 법적으로는 사상의 자유가 보장됐다고 해도 오해나 왜곡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분단과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깊이 남아 있는 우리 현실에서는 합리적인 설명조차 도저히 먹혀들지 않는 반(反)사회주의적 감정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 ‘빨갱이’에서 ‘종북’으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이름으로 한번 낙인이 찍히면 더 이상 이성적인 논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Scene #4 자본가들은 부유해지는데 노동자들은 왜 가난한가?

 

사회의 부와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자본가들은 더 부유해지는데 왜 우리는 더 가난한가?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수많은 노동자는 이런 의문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노동자들이 그 원인으로 생각한 것은 바로 기계였다. 기계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노동과정이 주로 노동자들도 숙련에 의존하였다. 따라서 숙련의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노동자들은 높은 보수와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기계의 도입은 비숙련공은 물론 심지어는 여성과 어린이들도 솜씨 좋은 숙련공처럼 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숙련공들의 보수는 곤두박질쳐 비숙련공이나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기계가 아니라 기계의 자본가적 사용이 자신들을 착취한다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노동자의 상품인 노동력의 수요자는 자본가다. 자본가는 자본주의 본질상 이윤을 추구할 수밖에 없으므로 노동자는 혹사당할 수밖에 없다. 기계가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된다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 강도를 낮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계가 자본가를 위하여 사용되면 노동시간은 더 늘어나면서 노동자들의 분배 몫은 반대로 더 줄어들 뿐이다. 이것이 『자본론』의 한 축이다. 단, 노동자 스스로 생산수단을 확보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하는 만큼 이윤은 그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그가 이윤에 집착하면서 또 다른 노동자를 채용하기 때문에 ‘이윤과 착취’라는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된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다.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표현을 썼다. 또한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중요시했다. 사회주의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자유’, ‘개인’, ‘연합’이다. 노동자가 해방의 주체가 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인가.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자본론 공부』에서 김수행 교수는 마르크스가 꿈꾼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치유하려는 고민 끝에 사회적 자각을 통해 도달하는 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스탈린 독재정치 시대의 구소련이나 마오쩌둥의 중국, 카스트로의 쿠바,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의 모델이 아니라고 말한다.

 

 

 

 Scene #5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면 갈등을 줄일 수 있을까?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자유주의자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마르크스는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원론으로 찾지 못한 답을 『자본론』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만, 『자본론』이 대학 강의실에서 주류경제학에 밀려 외면받지 않으려면 단순히 학문적 유행에 쫓는 목적으로 공부해서는 안 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적의 대안이 나올 수 있도록 마르크스를 바라보는 비판적 입장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일단 마르크스 경제학의 우선 과제, 어떤 식으로 대안을 마련하느냐 하는 큰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만약에 이 세상이 노동자 중심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이루어진다면 계급이 사라지고 갈등이 최소화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과연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의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이 즐겁게 자신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을까? 이런 사회가 이루어지려면 개인의 이윤을 올리기 위한 사적 이익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윤리적으로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마음속에 욕심이 생기면 어찌하든지 탐욕을 감추면서 자기의 유익을 도모해보려고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개인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 전체의 이익도 올라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명제는 너무 쉽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개별 자본가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공장 굴뚝에서 매연을 마구 뿜어낸다면 어떻게 사회 전체의 이익이 올라가겠습니까? (김수행  『자본론 공부』 중에서, 187쪽)

 

마르크스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사회 전체를 위한 공적 이익도 올라간다고 생각한 애덤 스미스의 명제에 윤리적 가정의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또한 윤리적 가정의 오류를 피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해서 이 사회에 탐욕과 갈등이 사라진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고, 탐욕을 조절할 수 있는 ‘위로부터의 규제’도 필요하다.

 


 Scene #6  마르크스와 막걸리의 공통점

 

채만식의 소설 『치숙』의 ‘나’는 마르크스를 막걸리라고 희화화했다. 부자의 돈을 빼앗는 사회주의를 우습게 비꼰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막걸리다. 우리가 즐겨 마시고, 몸에 좋은 막걸리. 마르크스와 막걸리는 서로 공통점이 있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더숲, 2014년)의 저자이자 빵집 ‘다루마리’을 운영하는 와타나베 이타루는 사람들은 경제가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투입하는 바람에 살찌게 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윤만 늘면 된다고 생각한다. 살이 쪄서 비대해진 경제는 균형을 되찾는 자정작용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거품붕괴다. 썩고 순환하지 않으면 자연은, 인간은 유지될 수 없다. 그는 『자본론』 공부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이것을 ‘부패하는 경제’라 명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패는 그가 빵집을 경영하면서 연구해 온 '효모', '누룩' 등 '균(菌)'의 순기능이다. 와타나베는 이스트, 설탕, 버터, 우유, 계란을 전혀 넣지 않고, 천연효모와 천연누룩균으로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균들은 원래 부패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물질마저도 음식으로 바꿔버리는 효능이 있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막걸리도 누룩을 효모로 발효시켜 만드는 원리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한국의 술이다. 와타나베가 시골빵집에서 『자본론』를 구웠다면, 우리는 막걸리를 통해 『자본론』를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가 제조되는 과정에 마르크스의 생각이 발효되어 작동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막걸리가 부침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 막걸리는 1970년대 중반까지는 전체 술 소비량의 70%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소주, 맥주, 양주에 밀려 한동안 외면받았다. 그러다가 최근 암의 발생이나 증식을 억제하는 항암물질이 들어있는 건강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마르크스의 책들은 1980년대 금서 중의 금서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 가운데 당당히 1위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최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막걸리가 우리 몸의 건강을 위해 마신다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본주의로 인해 거의 고장 나버린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 공부해야 한다. 독일어 초판 1000부 매진에 4년이나 걸릴 정도로 매우 초라하게 출발했지만 『자본론』은 인류 문명사를 바꾸어 놓은 저작임엔 분명하다. 더욱이 불평등 문제가 주목받음으로써 또다시 ‘가난’과 ‘노동’의 불일치가 가시화되는 작금에 『자본론』의 유효성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우리 체제인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자본론』 읽기는 필수적이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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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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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일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일이다. 역사책을 읽을 것 같으면 기쁨보다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곳이 또한 즐거운 곳이다. (장조 『유몽영』중에서, 정민 『마음을 비우는 지혜』에서 인용, 181쪽)

 

 

오늘의 정치는 내일의 역사가 되고, 어제의 역사는 오늘의 정치를 지배한다. 요즘에는 이 말을 특히 실감한다. 내일의 역사를 자기편으로 서술하기 위한 정치싸움은 진행 중이다. 한쪽에선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에서 60년 만에 세계 11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라고 외친다. 나아가 이런 대한민국이 어찌 반쪽인가라고 반문하면서 대한민국 그 자체를 무(無)에서 창조한 기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쪽에서는 단독정부 수립으로 분단을 고착화하며 태어난 대한민국이 태생적으로 정통성을 갖추지 못한 국가이며, 38선 혹은 휴전선으로 갈라진 그 나머지 반쪽인 북한과 '민족통일'을 이루기 전에는 어떠한 경제적 성공도 완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두 개의 마주할 수 없는 극단적 시각이 엄존하는 셈이다. 물론 이런 양극단 사이에는 회색지대와도 같은 무수한 시각이 존재한다.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한 이런 시각은 비단 건국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 곳곳에서 충돌한다. ‘분단’의 시각에 선 쪽에서는 김구를 추앙하는 데 비해, ‘건국’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이승만을 ‘국부’로 간주한다. 전자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은 태어나서는 안 될 ‘절대악의 축’이지만, 후자에겐 ‘허리띠를 졸라매며 세계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에 산업화를 이룬 위대한 지도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이런 극단적인 대립은 급기야 대한민국 그 자체의 정통성 시비를 불러 일으켜, 그것을 부정하는 쪽에서는 대한민국사를 ‘뒤틀린 역사’로 간주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이승만 정부가 친일인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친일파 청산으로 대표되는 과거사 청산 운동이 거세게 분 것도 이런 대한민국 건국관이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독사신론』에서 “정신이 없는 역사는 정신없는 민족을 낳으며, 정신없는 국가를 만들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오,”라고 하여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고교 역사교과서 파동은 다수의 국민에게 심각한 우려의 눈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문제의 본질은 현재 역사학계의 편향적이고, 왜곡적인 역사시각을 감히 나서서 자정할 능력이 없다는 점에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유관순 열사에 대한 역사기술을 통해 왜곡집필의 심각성이 드러났다고 할 것이다. 유관순 열사는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런 유관순을 고교역사교과서에서 의도적으로 ‘실종’된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은 기가 막힌 역사학계의 수치다.

 

더욱이 문제투성이 역사교과서를 고등학생들이 읽고,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가 안 생길 수가 없다. 청소년 역사의식을 혼돈에 빠뜨릴 우려가 있다. 역사 교육은 미래를 이끌어 나갈 학생들에게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청소년들이 배우는 교과서 내용에서 단어나 문구를 가지고 역사학계에서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다투는 일이 벌어졌는지 안타까운 현실이다.

 

역사 가운데서도 현대사는 가장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킨다.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와 달리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피해자 또는 수혜자 등이 생존해 있기 때문이다. 한때 정치에 참여했던 이가 펴낸 현대사라면 논쟁은 더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유시민은 『나의 한국현대사』 프롤로그에서 역사는 본질적으로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역사 서술에서 핵심인 사실의 선택과 선택한 사실의 해석은 주관적 기록이 된다. 한마디로 책은 굵직한 현대사의 역사적 사건을 나열했다기보다 그 속에 이와 관련된 저자의 일상 체험이 곳곳에 녹아 있다.

 

이 책을 읽으면 문제투성이 역사교과서처럼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는다. 비록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아울러 삶의 기본적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게 만든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실려 있지만, 그 속에 오랜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쟁취해낸 국민들의 뜨거운 열정과 기쁨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저자는 심리학자인 매슬로우의 욕구단계 이론을 통해 한국현대사 55년을 분석한다. 욕구단계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적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욕망이다. 인간은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행동하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다는 것이다. 생리적인 욕구 단계부터 출발하여 존경에 대한 욕구를 거쳐 최종적으로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에까지 갈망하게 된다. 인간이 의식주를 먼저 생각하게 되고 이 욕구가 충족되면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게 되며 내적인 성장을 실현하려고 한다.

 

하지만 욕망은 너무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 왔다. 단군 이래 이렇게 잘 산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더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부정적인 폐해도 적지 않았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1971년 대연각호텔 화재사건,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사건,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9년 씨랜드 화재사고,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2010년 천안함 사건, 그리고 최근의 세월호 참사까지. 물질적 욕망의 질주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될 최악의 역사를 만들어 낸다. 여전히 많은 시민들은 물질에 대한 욕망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 있다. 정의를 외면하면서 생기는 불편함을 외면하고 털어내려고 한다.

 

자랑스러운 것만을 드러내려는 쪽, 부끄러운 것을 기억하려는 쪽, 어느 쪽이든 대한민국을 역사라는 ‘집단기억’에 기초한 공동체로 만들고자 하는 역사관에는 차이가 없다. 현대의 역사 이론들이 합창하는 것처럼, 역사서술은 근본적으로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행위이다. 이는 동일한 사료를 근거로 하더라도, 그것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고 취합하여 서술하느냐에 따라 해석과 평가가 극명할 수 있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해석이든 너의 해석이든 어느 것도 ‘객관적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성찰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유시민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 간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으로 읽는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두 세력을 거의 50대 50으로 인정해왔고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 모두 우리의 과거이며 따라서 둘 중 하나만을 인정하는 자세는 온전한 역사인식·현실인식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 어느 때보다 역사논쟁이 뜨거운 지금, 서로 다른 경험과 이해관계, 인생관을 가졌다 해도 충분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그 간극을 줄여나가려는 노력이 절실한 이유다.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할 것인가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와 정치의 문제였다. 서로 다른 시각과 세계관이 충돌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실관계에 대한 집착보다는 조정과 타협을 통해 합의에 도달해야만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가 서로 상반된 역사관에 비방만 할 것이 아니라 상대를 끌어들일 수 있는 대화와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역사교과서는 이런 차이와 다양성을 하나의 그릇에 담아내는 지혜로운 정치의 산물이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덕목으로 꼽히는 ‘공감’, 정치적으로는 세대별 전쟁 수준까지 갈라진 상황에 대해 싸우지 말고 현실 직시부터 해야 한다. 모든 역사엔 빛과 어둠이 있다. 역사 교과서에는 우리를 기쁘게 하는 최고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우리를 분노케하는 가슴 아픈 비극의 역사도 공존한다. 연구자와 학습자는 모두 역사 해석의 독단을 경계하고 끊임없는 소통과 교류를 역사 이해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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