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공부 - 김수행 교수가 들려주는 자본 이야기
김수행 지음 / 돌베개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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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사회주의인지 막걸리인지  

 

 

“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기,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막걸리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 그 양반...”

 

 

채만식의 소설 「치숙」에서 ‘사회주의인지 막걸리인지’라는 표현이 있다. 사회주의 즉 마르크시즘의 막걸리의 막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착안한 말이다. 이 표현에 화자의 사회주의에 대한 심리가 간결한 표현 속에 담겨 있다. 이야기의 화자는 어린 조카로 되어 있다. 주인공 ‘나’는 보통학교 4학년밖에 못 다녔지만, 일본인 가게 주인의 눈에 들어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아저씨에게 오촌 조카는 조곤조곤 따지고 든다.

 

 

“아저씨! 경제라 껏은 돈 모아서 부자되라는 거 아니요? 그런데 사회주의라 껏은 모아둔 부자 사람의 돈을 뺏아 쓰는 거 아니요?”

 

 

조카는 사회주의를 부자의 재물을 빼앗는 불한당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아저씨의 한심한 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대학교에서 5년 동안 경제학 공부를 하면서도 돈 한 번 제대로 벌지 못하고 사회주의 운동에 빠진 아저씨를 조롱한다. 조카는 경제가 돈 모으는 활동이니까 경제학은 돈 모으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어서 삼촌이 경제학을 잘못 공부했다고 돌직구를 날린다. 하지만 아저씨는 오히려 조카가 세상 물정, 즉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모른다고 말한다.

 

 

 

 Scene #2  “여러분, 부자 흉내 내세요!”

 

마르크스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소 먹이는 일을, 그리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토론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굳이 하나의 직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사회가 일반적인 생산을 규제하고 생산력은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에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정신적, 물질적으로 부자일 수 있다는 상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던 공산주의 사회는 실패한 실험이었다.

 

 

 

 

 

한때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라는 광고카피가

최고의 덕담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런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2014년 대한민국. 이곳에서 지금 누구나 부자를 열망한다. 돈만을 좇는 속된 삶이 아니라도 돈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다며. 십 여 년 전에 모 카드회사의 광고 문구 “여러분, 부자 되세요.”는 최고의 덕담이 됐다. 그렇다고 모두 부자일 수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는 소수다. 나머진 부자가 되고 싶어서 부자 흉내를 냈다. 그런데 부자 흉내의 결과가 심각하다. 펀드니 연금이니 뭐니 투자를 해봤지만 남은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빚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청년실업이 단기적인 사회문제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용불안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들이 가정을 꾸리면 청년실업이 ‘가족의 위기’로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 경기침체로 청년들이 일자리를 잃고 삶의 목표를 상실한다.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소득수준의 급속한 향상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행복은 제자리걸음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 한계에 이른 데다가 돈으로 사기 어려운 행복의 주된 원천은 자본주의 시장의 힘으로 잠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Scene #3  호황이면 소비 열기, 불황이면 자본론 공부 바람이 부는 법  

 

국경을 넘어 퍼부어지는 자본의 융단폭격. 온 세계를 무한경쟁으로 휘몰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사회와 직장은 물론 우리 안방에까지 침투해 있다. 삶을 초토화하는 그 기세는 마치 대지를 휩쓰는 메뚜기 떼의 공격 같다. 자본은 자꾸 부자가 되어가지만, 노동자와 서민은 대량해고·비정규직·실업 등으로 빈곤과 불안의 깊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대공황에 버금갈만한 2008년 뉴욕 월 스트리트가 발 금융파탄으로 야기된 세계 불황이 장기화하고 있어 어느 나라든 저소득층의 생활은 더 피폐해지고 있다.

 

경제위기가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경제 상황 속에서 금융자본주의가 상위 1%의 이익에만 충실하다는 비판적 시각이 재확산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시작된 ‘反 월 스트리트 시위’의 영향으로 현 지배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한층 높아졌다. 자본주의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부의 분배’ 문제도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21세기 자본』(글항아리, 2014년)을 통해서 경제적 불평등을 배태한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따졌다. 피케티 하나를 두고 세계가 들끓고 있는 와중에 오랫동안 사회학 교과서 활자 속에 갇혀 있던 공산주의, 아니 마르크스의 유령도 돌아왔다. 마르크스의 부상은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인류의 불안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들고만 다녀도 구속감이었던 ‘빨갱이 경제학’의 교과서 『자본론』에 대한 공부 열기도 살아나고 있다. 자고로 호황이면 소비 열기가, 불황이면 공부 바람이 부는 법. 불황 효과일까? 하지만 IMF 위기 때와 비교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IMF 위기는 아시아만 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 제도 자체에 의문을 갖게 한다. IMF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다면 지금의 위기는 ‘공포’ 수준이다. 사람들은 이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근본 원리를 알아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마르크스’라고 하면 금세 떠오르는 것이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도식이다. 붉은 깃발 아래 낫과 망치가 먼저 떠오르다 보니 일단 거부감부터 생기는 것이 사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거론하는 데는 여전히 용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아무리 법적으로는 사상의 자유가 보장됐다고 해도 오해나 왜곡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분단과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깊이 남아 있는 우리 현실에서는 합리적인 설명조차 도저히 먹혀들지 않는 반(反)사회주의적 감정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 ‘빨갱이’에서 ‘종북’으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이름으로 한번 낙인이 찍히면 더 이상 이성적인 논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Scene #4 자본가들은 부유해지는데 노동자들은 왜 가난한가?

 

사회의 부와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자본가들은 더 부유해지는데 왜 우리는 더 가난한가?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수많은 노동자는 이런 의문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노동자들이 그 원인으로 생각한 것은 바로 기계였다. 기계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노동과정이 주로 노동자들도 숙련에 의존하였다. 따라서 숙련의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노동자들은 높은 보수와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기계의 도입은 비숙련공은 물론 심지어는 여성과 어린이들도 솜씨 좋은 숙련공처럼 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숙련공들의 보수는 곤두박질쳐 비숙련공이나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기계가 아니라 기계의 자본가적 사용이 자신들을 착취한다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노동자의 상품인 노동력의 수요자는 자본가다. 자본가는 자본주의 본질상 이윤을 추구할 수밖에 없으므로 노동자는 혹사당할 수밖에 없다. 기계가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된다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 강도를 낮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계가 자본가를 위하여 사용되면 노동시간은 더 늘어나면서 노동자들의 분배 몫은 반대로 더 줄어들 뿐이다. 이것이 『자본론』의 한 축이다. 단, 노동자 스스로 생산수단을 확보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하는 만큼 이윤은 그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그가 이윤에 집착하면서 또 다른 노동자를 채용하기 때문에 ‘이윤과 착취’라는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된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다.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표현을 썼다. 또한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중요시했다. 사회주의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자유’, ‘개인’, ‘연합’이다. 노동자가 해방의 주체가 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인가.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자본론 공부』에서 김수행 교수는 마르크스가 꿈꾼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치유하려는 고민 끝에 사회적 자각을 통해 도달하는 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스탈린 독재정치 시대의 구소련이나 마오쩌둥의 중국, 카스트로의 쿠바,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의 모델이 아니라고 말한다.

 

 

 

 Scene #5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면 갈등을 줄일 수 있을까?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자유주의자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마르크스는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원론으로 찾지 못한 답을 『자본론』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만, 『자본론』이 대학 강의실에서 주류경제학에 밀려 외면받지 않으려면 단순히 학문적 유행에 쫓는 목적으로 공부해서는 안 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적의 대안이 나올 수 있도록 마르크스를 바라보는 비판적 입장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일단 마르크스 경제학의 우선 과제, 어떤 식으로 대안을 마련하느냐 하는 큰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만약에 이 세상이 노동자 중심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이루어진다면 계급이 사라지고 갈등이 최소화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과연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의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이 즐겁게 자신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을까? 이런 사회가 이루어지려면 개인의 이윤을 올리기 위한 사적 이익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윤리적으로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마음속에 욕심이 생기면 어찌하든지 탐욕을 감추면서 자기의 유익을 도모해보려고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개인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 전체의 이익도 올라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명제는 너무 쉽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개별 자본가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공장 굴뚝에서 매연을 마구 뿜어낸다면 어떻게 사회 전체의 이익이 올라가겠습니까? (김수행  『자본론 공부』 중에서, 187쪽)

 

마르크스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사회 전체를 위한 공적 이익도 올라간다고 생각한 애덤 스미스의 명제에 윤리적 가정의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또한 윤리적 가정의 오류를 피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해서 이 사회에 탐욕과 갈등이 사라진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고, 탐욕을 조절할 수 있는 ‘위로부터의 규제’도 필요하다.

 


 Scene #6  마르크스와 막걸리의 공통점

 

채만식의 소설 『치숙』의 ‘나’는 마르크스를 막걸리라고 희화화했다. 부자의 돈을 빼앗는 사회주의를 우습게 비꼰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막걸리다. 우리가 즐겨 마시고, 몸에 좋은 막걸리. 마르크스와 막걸리는 서로 공통점이 있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더숲, 2014년)의 저자이자 빵집 ‘다루마리’을 운영하는 와타나베 이타루는 사람들은 경제가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투입하는 바람에 살찌게 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윤만 늘면 된다고 생각한다. 살이 쪄서 비대해진 경제는 균형을 되찾는 자정작용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거품붕괴다. 썩고 순환하지 않으면 자연은, 인간은 유지될 수 없다. 그는 『자본론』 공부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이것을 ‘부패하는 경제’라 명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패는 그가 빵집을 경영하면서 연구해 온 '효모', '누룩' 등 '균(菌)'의 순기능이다. 와타나베는 이스트, 설탕, 버터, 우유, 계란을 전혀 넣지 않고, 천연효모와 천연누룩균으로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균들은 원래 부패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물질마저도 음식으로 바꿔버리는 효능이 있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막걸리도 누룩을 효모로 발효시켜 만드는 원리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한국의 술이다. 와타나베가 시골빵집에서 『자본론』를 구웠다면, 우리는 막걸리를 통해 『자본론』를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가 제조되는 과정에 마르크스의 생각이 발효되어 작동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막걸리가 부침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 막걸리는 1970년대 중반까지는 전체 술 소비량의 70%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소주, 맥주, 양주에 밀려 한동안 외면받았다. 그러다가 최근 암의 발생이나 증식을 억제하는 항암물질이 들어있는 건강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마르크스의 책들은 1980년대 금서 중의 금서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 가운데 당당히 1위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최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막걸리가 우리 몸의 건강을 위해 마신다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본주의로 인해 거의 고장 나버린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 공부해야 한다. 독일어 초판 1000부 매진에 4년이나 걸릴 정도로 매우 초라하게 출발했지만 『자본론』은 인류 문명사를 바꾸어 놓은 저작임엔 분명하다. 더욱이 불평등 문제가 주목받음으로써 또다시 ‘가난’과 ‘노동’의 불일치가 가시화되는 작금에 『자본론』의 유효성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우리 체제인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자본론』 읽기는 필수적이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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