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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의 예술한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지음, 이세진 옮김 / 북노마드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Scene #1 "선을 많이 그려보게."
"드가는 드로잉을 참으로 사랑했다."
1917년에 세상을 떠난 에드가 드가의 묘비명이다. 드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의 묘비에 이런 문장을 새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정말 드로잉을 지나치게 사랑했다. 그의 연필, 그의 파스텔, 그의 붓은 결코 포기를 몰랐다. 그의 묘선(描線)은 그가 원하는 것에 충분히 가까워져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한없이 그림에 달라붙어 그걸 한장 한장 모방하고, 다시 모방하여 더 심화시키고, 옥죄이고, 감쌌다. 그에게 하나의 작품은 결코 끝이 났다고 말할 수 없었다.
드가가 드로잉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 계기는 무명시절에 만난 '대가'의 조언에서 시작되었다. 1855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드가에게 '대가'는 이렇게 말했다. "선을 그리게. 기억을 되살려서든 자연을 보고서든 선을 많이 그려보게." 이때부터 드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항상 드로잉에 충실했으며 지금까지도 방대한 드로잉 작품이 남아 있다.
드가가 만난 '대가'는 바로 고전주의의 대가 앵그르였다. 앵그르는 회화에서 형식을 중시하는 소묘파의 거두였다. 회화에서는 소묘파와 그림의 중심은 색이라고 말하는 색채파 간에 오랜 논쟁이 있었다. 푸생과 라파엘로로 대표되는 소묘파는 그림의 기초인 데생이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했고, 루벤스로 대표되는 색채파는 회화의 생명은 색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전자의 소묘파는 앵그르로 이어지고, 색채파는 낭만주의 대표 화가인 들라크루아로 그 계보를 잇는다. 그러나 젊은 드가가 앵그르를 만났던 시기는 소묘파가 색채파의 힘에 밀려 약화되고 있었다. 젊은 들라크루아는 데생과 형식을 고집하는 앵그르를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화가라고 비난했다. 그렇지만 앵그르는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을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물을 보는 최고의 방식으로 데생을 수없이 강조했다. 결국 앵그르의 데생 사랑은 드가에게로 이어졌으며 피카소의 누드작품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Scene #2 “내 화실에 문패를 단다면 나는 ‘데생 교실’이라고 내걸 테다.”
드로잉. 데생·소묘라고도 불리는 드로잉은 일반적으로 밑그림으로 인식되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그림 이전의 단계라는 이야기다. 그런 드로잉이 예술표현 수단으로 독자적인 자리매김을 한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이르러서였다. 18세기 이후엔 드로잉 위작이 나돌 정도였으니 이미 수집가들의 수집대상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앵그르 역시 드로잉 수집가 대열에 합류하여 르네상스 회화 같은 세밀한 고전적 묘사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앵그르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래서 피가 도는 사람인지 아니면 저 먼 고대의 이상적인 대리석 조각인지 모호할 정도로 어여쁜 여성상을 많이 그렸다. 아름다운 선과 정확한 형태는 대상을 아름답게 재현하는 예술적 방법이었다.
예술적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앵그르는 자신만의 노트에 따로 기록했다. 1867년 제자들에 의해 편집돼 세상에 공개된 『앵그르의 예술한담』은 생전 그가 흠모했던 고대 예술의 대가들부터 음악, 연극 관련 주제까지 일관성 없이 잡다한 생각들이 적혀 있다. 그의 데생 사랑은 생전에 공개되지 않은 비밀노트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앵그르가 기록한 짤막한 글에서 젊은 드가에게 데생의 중요성을 알려준 대가의 목소리가 생상하게 들려온다.
데생은 단순히 윤곽선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데생은 그저 선으로만 되는 게 아니다. 데생은 표현, 내부 형태, 면, 양감이기도 하다. (44쪽)
앵그르 「학생들에게 선사한 반신 자화상」 18세기기경
만약 내 화실에 문패를 단다면 나는 ‘데생 교실’이라고 내걸 테다. 그리해도 내가 화가들을 키워낸다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45쪽)
아펠레스는 선 하나도 긋지 않고 보내는 날이 하루라도 있으면 안 된다 하였다. 그가 이 말을 통해서 가르치고 싶었던 바를 내가 여러분에게 거듭 말하겠다. 선은 데생이고, 데생은 전부다. (47쪽)
알렉산더 대왕의 전속 화가로 활동했던 아펠레스는 윤곽선을 매우 중시했고, 매일 선 긋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앵그르도 아펠레스처럼 매일 선 긋는 연습을 했는데 그 결과 꽤 많은 드로잉 작품을 남겼다. 그리다 만 형태로 남은 앵그르의 드로잉 작품은 지금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앵그르에게는 드로잉은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과정일 뿐이었다.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는 스승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예술적 경지에 이른 순간에도 앵그르는 데생이라는 기본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비밀노트는 앵그르의 미술 세계가 꾸밈이나 자기검열 없이 그대로 보존된 귀중한 문헌이다. 앵그르가 생각나는 대로 기록한 내용에는 무한한 데생 사랑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앵그르의 그림을 아는 독자라면 그가 남긴 그림들이 희미한 실루엣처럼 떠올릴 수 있다.
앵그르 「물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 1848년
우리가 실질적으로 조각가들처럼 작업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조소적인 그림을 그려야 한다. (50쪽)
앵그르 「세 개의 팔을 가진 여인, '터키탕' 습작」
좀더 상세한 크로키를 그릴 짬이 있거든 애정을 품고 모델을 취하고, 그 모델을 관찰하고, 온갖 형태로 그려보라. 모델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들어앉을 만큼, 모델이 무슨 소유물처럼 머릿속에 처박힐 만큼. (55쪽)
앵그르 「도송빌 백작부인의 초상」 1848년
인물화를 잘 그리려면 우선 그리고자 하는 얼굴에 깊이 빠져야 한다. 그 얼굴을 오랫동안, 주의깊게, 모든 면에서 숙고해야 한다. 첫 번째 포즈 시간은 아예 거기에 다 할애해야 할 정도다. (69쪽)
앵그르의 그림은 부드럽다. 특유의 섬세한 필치는 여인의 곡선을 띤 몸에 누구보다도 잘 어울렸으며 실제로도 그는 벗은, 특히 목욕하는 여인의 몸을 잘 그렸다. 앵그르의 스승 다비드는 “미술이란 자연을 가장 아름답게,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이며 미술 작품의 목적은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앵그르는 이 가르침을 그림 속에서 엄격한 리얼리즘으로 승화시켰다. 그리하여 강조와 비례의 미묘한 변화, 우아함과 사실적 깊이로 19세기 고전주의 미술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앵그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 1808년
나는 우연히 거울을 통해 내가 그린 오이디푸스의 허벅지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하얀 옷감이 따뜻한 금빛 살갗의 색상과 나란히 놓이니 더욱더 눈부시고 아름답게 보였다! (63쪽)
앵그르는 1808년에 완성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가 본인에게 있어서 가장 완벽한 그림으로 보였을 것이다. 앵그르의 비밀노트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회화의 대가의 그림들을 칭송하는 글이 많은데 앵그르 자신의 그림을 자찬하는 내용으로는 이 글이 유일하다. 앵그르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를 보라. 선이 만들어낸 세련된 남성 육체의 관능미가 느껴지는가. 남자인 내가 봐도 오이디푸스의 튼실한 허벅지가 이렇게 섹시하게 느껴질 수가. 여성 관람객이라면 당연히 오이디푸스의 허벅지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갈 것이다.
앵그르 「호메로스 예찬」 1827년
호메로스는 문학에 있어서나 미술에 있어서나 온전한 아름다움의 원칙이자 모델이다. (97쪽)
고전주의 미술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고대 그리스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신화나 비극 같은 고전 문학작품들도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앵그르도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감명 깊게 읽었다. 시간을 초월한 고전의 가치를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발견했다. 이러한 고전주의 예술에 대한 앵그르의 신념은 1827년에 완성된 「호메로스 예찬」에서도 드러난다. 앵그르는 이 그림을 통해 위대한 시인을 신격화한다.
앵그르 「그랑드 오달리스크」 1814년
모델의 목이 가늘더라도 굵게 고쳐 그리지는 말라. 그러나 그 가느다란 느낌을 과장하는 것도 삼가라. 특징을 잘 표현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과장은 허용된다. 특히 아름다움의 요소를 확 터뜨리거나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할 때가 그렇다. (128쪽)
들라크루아의 후예들은 앵그르가 전통을 고집한 보수적인 화가라고 폄하했으나 앵그르는 정통파의 양식을 어느 정도 고수하면서도 해부학적 묘사를 고의적으로 거부했다. 허리뼈가 세 개나 더 있다는 조롱을 받은 「그랑드 오달리스크」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모델은 큰 엉덩이 때문에 허리는 비정상적으로 잘록해 보인다.
Scene #3 “나는 혁명가가 되고 싶다.”
앵그르는 자신의 비밀노트가 제자들에게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앵그르의 속마음은 그랬을까. 그의 문체는 노트가 자신이 죽은 뒤에 언젠가 읽어보게 될 후손 또는 제자들에게 직접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비밀노트를 생전에 공개하지 않았을까?
노트를 영원히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던 앵그르의 모습에서 발자크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에서 완벽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싶었던 주인공 프렌호퍼를 보는 듯하다. 완벽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프렌호퍼는 완성이 되지 않은 ‘미지의 걸작’을 공개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앵그르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계속 고민하고 아무렇게 쓴 노트를 누구에게도 공개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완벽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정답을 끝끝내 찾을 수 없었기에.
앵그르에게는 이 노트가 단순히 다음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생각해낸 아이디어 모음집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앵그르는 입체적인 형태 표현과 세밀한 소묘, 매끄러운 기교 등이 완벽한 구도와 함께 조화를 이루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술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선만으로는 부족했다. “예술은 지금 변혁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러한 혁명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앵그르는 스승 다비드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묘사를 시도한다. 신체 비례가 왜곡된「그랑드 오달리스크」와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일관성 없는 기록은 표현에 대한 화가의 자기모순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앵그르의 노트는 어설픈 내용이 있는 기록으로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위대한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고전주의의 대가가 수없이 고민하고 기록한 변증법적 탐구의 흔적이다. 여기에 고전주의의 대가로만 머물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술의 혁명가가 되고 싶은 앵그르의 뜨겁고 치열한 예술혼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