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지식총서 예술-인간 정신의 위대한 발현 세트 - 전5권 -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살림지식총서
권용준 외 지음 / 살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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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 그리스 미술 이야기(노성두 저, 살림지식총서 114)

 

 


 Scene #1  그림의 기원은 그림자다

 

램프 하나가 어둠을 밝히고 있는 방 안에서 옆모습의 여인이 남자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고, 반쯤 앉은 자세로 여인을 부둥켜안은 남자의 얼굴은 위로 젖혀져 있다. 오른쪽에 있는 램프 불빛으로 여인의 옷과 목덜미가 환하게 빛나고 있고, 여인의 옆얼굴과 남자의 몸은 절반가량 어둠에 잠겨 있다. 왼편 벽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데, 여인은 연인의 등 너머로 벽에 비친 그림자의 윤곽선을 따라 남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이별을 앞두고 자기 애인을 그림으로나마 간직하기 위해 벽에 비친 연인의 그림자를 그대로 따라 그리고 있는 여인은 고대 그리스의 도공 부타데스의 딸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플리니우스는 저서 『박물지』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보조물로 그림자를 잡아두는 여인의 이야기가 서양회화의 시초를 알리는 것이라고 전한다.

 

‘실제 대상-그림자-회화’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 속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그림 그리기, 나아가 예술적 표현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전제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적 표현은 사적 욕망의 구체화라는 것,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욕망의 대상에 다가가고자 하면 할수록 그 대상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시간의 퇴적 속에서 예술적 표현의 방식이 보다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면서 이제 우리는 예술에 대한 원초적 욕망을 그저 희미한 화석으로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Scene #2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제욱시스의 포도 그림 주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묘사한 상상도

 

 

어느 문명,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미술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낼 때 ‘실물처럼 생생한’이라는 표현을 써 왔다. 신라시대의 화가 솔거에 대한 기록을 보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각종 새들이 진짜로 알고 날아들다가 부딪쳐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일견 상투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동물이든 사람이든 간에 관객의 눈을 속일 만큼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는 화가나 조각가의 놀라운 기술을 강조하는 이러한 일화들은 동,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자주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경쟁 이야기는 서양 미술사에서 특히 유명하다. 제욱시스는 포도를 너무도 잘 그려서 새들이 쪼아 먹으려고 달려들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너무나 자랑을 하자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를 불러다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 위에 천이 드리워져 있어서 이를 걷으려던 제욱시스는 천 자체가 파라시오스의 그림인 것을 뒤늦게 알고 감탄하면서 새를 속인 자신보다 화가를 속인 파라시오스가 한 수 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림들 모두가 현재 우리들의 눈에도 실물로 착각될 정도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었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화가는 대상으로부터 그것을 그것이게 만드는 것, 즉 대상의 본질을 뽑아내 화폭 위로 끌어온다. 그리고 대상에 우연히 덧붙여진 부수적인 요인들을 걸러내 제거한다. 본질이 아니면, 가장 인상적이고 강렬한 것, 그것을 미메시스(mimesis)는 드러낸다. 무명으로 알려진 도공의 딸부터 시작해서 고대 그리스 화가들은 가상의 공간 속에 현실을 옮겨놓는 예술적 미메시스를 시도했다.

 

플라톤은 예술적 미메시스가 현상을 모방해서 사람을 현혹하게 만든다고 부정했으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왜곡의 속임수로 여기지 않고, 미메시스의 원리 속에서 회화 창작의 본질을 밝혀주었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림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추론하여 그림을 건너 대상 자체로 간다. 대상과 그림의 동일성을 파악하는 순간, 감상자는 그림이 포착한 대상의 본질을 배우며, 그림에 대한 미학적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Scene #3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다

 

 

 

 

 

(왼쪽) 벨베데레의 아폴론 / (오른쪽) 폴리클레이토스  「큰 창을 든 남자」

그리스 고전기 조각의 걸작인 밀로의 비너스는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함께 이상적인 인체비례로 유명하다. 즉, 고전기의 걸출한 조각가인 폴리클레이토스가 ‘카논(canon)’이라고 부른 황금비율(0.618:0.382)이 적용된 것이다. 이는 비너스 상의 머리에서 배꼽까지가 전체 신장의 0.382, 배꼽에서 발끝까지가 0.618에 이르는 비율이다.

 

초기 그리스 조각은 수직적이고 딱딱한 이집트 조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집트 조각은 지나치게 규칙이 엄격하고 자세가 경직돼 그리스 조각가들의 표현 욕구를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이집트 조각도 인체의 수와 비례관계를 정해두고 설계도에 있는 그대로 똑같이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가의 순수한 창작욕을 마음껏 발산할 수 없었다.

 

이집트식 카논대로 조각을 만들었던 그리스 조각가들이 입장에서는 더욱 답답했을 터. 그리스 조각가들이 원하는 것은 조각에서 느낄 수 있는 ‘움직임과 생명’이었다. 그들은 여인의 조각상을 진짜 살아있는 여인이 되기를 비너스 여신에게 소원을 빌었던 갈라테이아가 되고 싶었다.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조각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자유로운 자세의 조각상을 만들려고 했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소크라테스는 조각가를 ‘조각에 살아숨쉬는 듯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자’라고 언급한다. 그리스 조각가의 능력을 넘어서 세계 미술의 진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식 카논을 높이 평하는데 적합한 최고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가 새와 사람을 속일 정도로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무명의 그리스 조각가들은 눈속임을 넘어서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줄 알았다. 표현의 자유를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동시에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리스 조각가들은 끌과 망치를 가지고 자신의 확신을 이처럼 아름다운 조각 작품으로 실현했다. 후대의 미술가들이 밀로의 비너스를 보면서 닿지 못할 아름다움의 영원한 이상이 지상에 구현되었다고 찬사를 보낸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Scene #4  한 인간에게는 작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이다

 

그리스 미술을 빼놓고 서양미술사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예술가와 미술애호가들은 그리스 미술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 후대의 미술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스 미술에 대한 숭배와 향수,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과 전복의 욕구야말로 서양미술사를 움직여온 원동력이다. 그리스 미술은 이처럼 서양미술사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미술은 근대 서양인에 의해 미화되고 왜곡된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대체로 그리스 미술을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관찰되었다. 그러므로 비너스나 많은 여신의 나신상들은 단지 옷을 벗은 여인의 아름다운 조각상만으로 받아들여졌고 파르테논 신전 같은 건축물들도 구조, 기둥모양, 비례 같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건축적인 요소만이 부각되었다.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자국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이다’, 달에 첫 발자국을 남긴 닐 암스트롱의 말을 떠올려 보자. 도공의 딸이 연인의 그림자를 보고 따라 그린 것이 한 인간에는 작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서양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큰 도약이다. 모방이라는 첫 발걸음을 시작해서 생동감이 느껴지게 만드는 카논까지 고대 그리스 미술은 작지만 큰 여러 번의 도약을 통해서 미술은 물론이고 뛰어난 문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고대 그리스 미술 또한 그렇다. 무명의 예술가들은 단순히 상상력에 기대지 않고, 실제로 자연을 관찰하고 비교함으로써 예술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리고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미술은 서양 미술 문명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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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미술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114
노성두 지음 / 살림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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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그림의 기원은 그림자다

 

램프 하나가 어둠을 밝히고 있는 방 안에서 옆모습의 여인이 남자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고, 반쯤 앉은 자세로 여인을 부둥켜안은 남자의 얼굴은 위로 젖혀져 있다. 오른쪽에 있는 램프 불빛으로 여인의 옷과 목덜미가 환하게 빛나고 있고, 여인의 옆얼굴과 남자의 몸은 절반가량 어둠에 잠겨 있다. 왼편 벽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데, 여인은 연인의 등 너머로 벽에 비친 그림자의 윤곽선을 따라 남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이별을 앞두고 자기 애인을 그림으로나마 간직하기 위해 벽에 비친 연인의 그림자를 그대로 따라 그리고 있는 여인은 고대 그리스의 도공 부타데스의 딸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플리니우스는 저서 『박물지』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보조물로 그림자를 잡아두는 여인의 이야기가 서양회화의 시초를 알리는 것이라고 전한다.

 

‘실제 대상-그림자-회화’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 속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그림 그리기, 나아가 예술적 표현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전제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적 표현은 사적 욕망의 구체화라는 것,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욕망의 대상에 다가가고자 하면 할수록 그 대상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시간의 퇴적 속에서 예술적 표현의 방식이 보다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면서 이제 우리는 예술에 대한 원초적 욕망을 그저 희미한 화석으로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Scene #2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제욱시스의 포도 그림 주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묘사한 상상도

 

 

 

어느 문명,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미술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낼 때 ‘실물처럼 생생한’이라는 표현을 써 왔다. 신라시대의 화가 솔거에 대한 기록을 보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각종 새들이 진짜로 알고 날아들다가 부딪쳐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일견 상투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동물이든 사람이든 간에 관객의 눈을 속일 만큼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는 화가나 조각가의 놀라운 기술을 강조하는 이러한 일화들은 동,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자주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경쟁 이야기는 서양 미술사에서 특히 유명하다. 제욱시스는 포도를 너무도 잘 그려서 새들이 쪼아 먹으려고 달려들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너무나 자랑을 하자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를 불러다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 위에 천이 드리워져 있어서 이를 걷으려던 제욱시스는 천 자체가 파라시오스의 그림인 것을 뒤늦게 알고 감탄하면서 새를 속인 자신보다 화가를 속인 파라시오스가 한 수 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림들 모두가 현재 우리들의 눈에도 실물로 착각될 정도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었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화가는 대상으로부터 그것을 그것이게 만드는 것, 즉 대상의 본질을 뽑아내 화폭 위로 끌어온다. 그리고 대상에 우연히 덧붙여진 부수적인 요인들을 걸러내 제거한다. 본질이 아니면, 가장 인상적이고 강렬한 것, 그것을 미메시스(mimesis)는 드러낸다. 무명으로 알려진 도공의 딸부터 시작해서 고대 그리스 화가들은 가상의 공간 속에 현실을 옮겨놓는 예술적 미메시스를 시도했다.

 

플라톤은 예술적 미메시스가 현상을 모방해서 사람을 현혹하게 만든다고 부정했으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왜곡의 속임수로 여기지 않고, 미메시스의 원리 속에서 회화 창작의 본질을 밝혀주었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림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추론하여 그림을 건너 대상 자체로 간다. 대상과 그림의 동일성을 파악하는 순간, 감상자는 그림이 포착한 대상의 본질을 배우며, 그림에 대한 미학적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Scene #3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다

 

 

 

 

 

(왼쪽) 벨베데레의 아폴론 / (오른쪽) 폴리클레이토스  「큰 창을 든 남자」

 

 

그리스 고전기 조각의 걸작인 밀로의 비너스는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함께 이상적인 인체비례로 유명하다. 즉, 고전기의 걸출한 조각가인 폴리클레이토스가 ‘카논(canon)’이라고 부른 황금비율(0.618:0.382)이 적용된 것이다. 이는 비너스 상의 머리에서 배꼽까지가 전체 신장의 0.382, 배꼽에서 발끝까지가 0.618에 이르는 비율이다.

 

초기 그리스 조각은 수직적이고 딱딱한 이집트 조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집트 조각은 지나치게 규칙이 엄격하고 자세가 경직돼 그리스 조각가들의 표현 욕구를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이집트 조각도 인체의 수와 비례관계를 정해두고 설계도에 있는 그대로 똑같이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가의 순수한 창작욕을 마음껏 발산할 수 없었다.

 

이집트식 카논대로 조각을 만들었던 그리스 조각가들이 입장에서는 더욱 답답했을 터. 그리스 조각가들이 원하는 것은 조각에서 느낄 수 있는 ‘움직임과 생명’이었다. 그들은 여인의 조각상을 진짜 살아있는 여인이 되기를 비너스 여신에게 소원을 빌었던 갈라테이아가 되고 싶었다.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조각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자유로운 자세의 조각상을 만들려고 했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소크라테스는 조각가를 ‘조각에 살아숨쉬는 듯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자’라고 언급한다. 그리스 조각가의 능력을 넘어서 세계 미술의 진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식 카논을 높이 평하는데 적합한 최고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가 새와 사람을 속일 정도로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무명의 그리스 조각가들은 눈속임을 넘어서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줄 알았다. 표현의 자유를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동시에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리스 조각가들은 끌과 망치를 가지고 자신의 확신을 이처럼 아름다운 조각 작품으로 실현했다. 후대의 미술가들이 밀로의 비너스를 보면서 닿지 못할 아름다움의 영원한 이상이 지상에 구현되었다고 찬사를 보낸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Scene #4  한 인간에게는 작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이다

 

그리스 미술을 빼놓고 서양미술사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예술가와 미술애호가들은 그리스 미술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 후대의 미술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스 미술에 대한 숭배와 향수,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과 전복의 욕구야말로 서양미술사를 움직여온 원동력이다. 그리스 미술은 이처럼 서양미술사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미술은 근대 서양인에 의해 미화되고 왜곡된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대체로 그리스 미술을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관찰되었다. 그러므로 비너스나 많은 여신의 나신상들은 단지 옷을 벗은 여인의 아름다운 조각상만으로 받아들여졌고 파르테논 신전 같은 건축물들도 구조, 기둥모양, 비례 같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건축적인 요소만이 부각되었다.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자국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이다’, 달에 첫 발자국을 남긴 닐 암스트롱의 말을 떠올려 보자. 도공의 딸이 연인의 그림자를 보고 따라 그린 것이 한 인간에는 작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서양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큰 도약이다. 모방이라는 첫 발걸음을 시작해서 생동감이 느껴지게 만드는 카논까지 고대 그리스 미술은 작지만 큰 여러 번의 도약을 통해서 미술은 물론이고 뛰어난 문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고대 그리스 미술 또한 그렇다. 무명의 예술가들은 단순히 상상력에 기대지 않고, 실제로 자연을 관찰하고 비교함으로써 예술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리고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미술은 서양 미술 문명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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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다이어트를 성공하는 방법

 

 

 

 

 

 

 

 

 

 

 

 

 

 

 

‘극기’란 자신을 이긴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기 통제력은 지능과 더불어 성공적인 인생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다. 자기 통제력이 있어야 학업과 사회생활 등 개인의 노력과 의지가 요구되는 일을 잘 해낼 수 있습니다. 누구나 꾸준히 훈련하면 능숙하게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다스릴 수 있다.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온 기간만큼이나 오랫동안 사람들은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애를 써왔다. 현대 사회에서 자제력은 더더욱 중요한 것이다. 자제력이 없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 먹고 마시며 너무 많은 돈을 쓰고 비디오 게임에 중독될 것이다. 우리는 깨어 있는 시간의 4분의 1을 욕망과 싸운다. 가장 보편적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욕망은 식욕, 수면욕, 쉬고자 하는 욕망, 성욕의 순서다. 특히 체중 조절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식욕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다. 다이어트 목표를 세우면 당분간 기름진 야식과 술, 과자를 멀리 해야 한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한다. 첫째 절대로 다이어트를 하지 말 것, 둘째 절대 초콜릿이나 다른 음식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지 말 것, 셋째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과체중과 의지력 부족을 절대 동일시하지 말 것. ‘말이 되는 소리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다이어트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를 ‘아무렴, 어때 효과’로 정리한다. 전문용어로는 ‘역규제적 섭식 경향’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은 보통 하루에 섭취하는 최대 칼로리에 대한 일정한 목표가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목표치를 초과할 경우 그날의 다이어트를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며 평소보다 많이 먹는다는 것이다.

 

잠이나 섹스, 그리고 소비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는 데는 비교적 성공했지만 TV를 보거나 웹사이트를 둘러보는 것처럼 일하는 시간에 휴식하고자 하는 욕구를 억누르는 데는 약했다. 평균적으로 의지력을 동원해 유혹을 이겨내는 정도는 절반 정도였다.

 

개인과 사회를 통틀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기 절제를 못한 데에서 비롯된다. 강박적 소비와 대출, 충동적 폭력과 학업성적 부진, 직장에서의 게으름, 술과 마약의 남용, 건강하지 못한 식습관과 운동 부족, 만성적 불안과 폭발적 분노가 바로 그러한 예다.

 

인간은 영장류 중에서 전두엽이 가장 큰 동물인데 인간에게 자기 조절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전두엽을 통해 자기 조절의 의지력이 강화된다. 이것을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생각의 조절’이 그 첫째다. 우리는 훈련을 통해 집중하는 법을 배우며, 특히 동기가 강할 때 그 효과는 커진다. 둘째는 ‘감정 조절’을 들 수 있다. 기분에 특히 집중하는 것을 심리학자들은 정서 조절이라고 부른다. 셋째는 ‘충동 조절’로 사람들이 의지력과 가장 많이 연관시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행 조절’이라는 범주가 있다. 현재의 일에 에너지를 집중해 속도와 정확성을 기하고, 시간 관리를 잘하며, 그만두고 싶을 때도 강한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다.

 

 

 

 Scene #2  욕망을 이겨내기 위한 에너지, 의지력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의지력도 근육과 마찬가지로 너무 한꺼번에 사용하면 지친다는 것. 우리에겐 사용함에 따라 소진되는 일정한 양의 의지력이 있으며, 모든 종류의 과제를 수행할 때 똑같은 양의 의지력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직장에서 너무 의지력을 소모하면 집에 돌아와 자신의 감정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 분노를 폭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력을 연구한 로이 바우마이스터 교수는 '자아고갈'이라 명명했다. 욕망을 이겨내는 데는 에너지가 소모되며,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의지력은 점점 더 줄어든다는 것이다. 결국 하루 종일 수많은 유혹에 '안 돼'라고 외치다 보면 나중에는 저항하는 힘이 점점 약해져 결국 항복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정하게 의지력을 소진하고 나면 자기 절제력이 약화된다. 또한 의지력이 고갈되면 평소보다 더욱 강한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한편으로 자아 고갈은 간혹 우리의 이성적 판단을 흐려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냉철한 판단을 내려야 할 판사나 환자의 건강, 나아가 생명까지 다뤄야 할 의사들도 성급한 판단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성보다는 직관에 따랐던 탓이다. 대니얼 카너먼은 의사결정 인자를 두 개로 나눈다. 빠른 직관으로 구성된 시스템 1과 정확하지만 느리고 게으른 이성이 지배하는 시스템 2가 우리의 두뇌 속에서 상호 작용한다는 것이다. 시스템 2를 작동해 시스템 1를 자제하는 과정은 ‘자아고갈’에 이르게 할 만큼 정신적으로 매우 피곤한 과정이 된다.

 

 

 

 Scene #3  자기통제의 관건은 감정 조절

 

 

 

 

 

 

 

 

 

 

 

 

 

 

 

 

의지력이란 곧 정신력이다. 우리는 살면서 감정을 제어하는 자기통제도 정신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단순히 나태함만으로 의지력과 자기통제력이 떨어지는 원인으로 볼 수 없다. 시간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면 의지력이 소모될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너무 중요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면서 사는 동물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들이 바람직하게 여길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자아에 간극이 발생하는데 이것을 ‘사적자아’와 ‘공적자아’라고 한다. 사적자아란 '있는 그대로의 편한 내 모습', 예컨대 집에서 뒹굴뒹굴 거리는 내 모습이고 공적자아란 '사람들 앞에서의 내 모습', 예컨대 사회집단(직장, 학교 등)에서의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이런 사적자아와 공적자아의 간극이 클 경우 심리적으로 상당한 괴로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있다. 사적자아와 공적자아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작업은 에너지 소모가 많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들로 하여금 '원래의 모습'을 가리고 살도록 하는 각종 사회적 제약이 존재하는 경우 그 사회 구성원들의 사적자아와 공적자아의 간극은 커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정신을 집중하게 되면 정신적인 에너지, 즉 의지력도 감소된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편한 감정을 꾹 참고 마는 ‘억제’보다는 스스로 감정을 발산하면서 동시에 그 감정을 발생한 원인을 알고, 추스르는 ‘재평가’의 조절법이 중요하다. 감정을 발산하지 못한 채 강압적으로 억제한다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자아 고갈로 이어지게 된다. 심신이 지쳐 있는 상태에서 자기통제력을 발휘하기가 무척 힘들다.

 

우리 정신에 활력을 불어넣는 의지력, 자기통제력은 건강한 삶을 위한 기초체력이다. 주말이 끝나자마자 두려움이 찾아오는 그 ‘월요병’은 정신 에너지의 부족 상태를 보여주는 증상이다. 피곤함, 무기력함, 우울함에 정신이 지쳐버리면 자기통제력, 의지력 또한 상실된다. 이러면 눈앞에 유혹하는 욕망 앞에서 쉽게 무너져버리고 만다. 결국 월요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말에 에너지 충전을 잘 해야 한다. 무조건 주말 내내 잠을 자거나 집에 틀어박혀 뒹굴어도 월요병을 쉽게 나을 수 없다. 몸만 쉬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도 쉬게 만들어야 한다. 한 주 내내 지쳐서 에너지가 바닥난 감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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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환자의 결함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상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능력을 거의 간과했다. (339쪽)

 

 

 


 Scene #1  눈은 멀쩡한데 아내가 모자로 보인다면... 

 

우리의 일상에서 시각 경험이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크다. 오죽하면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말까지 생겼겠는가. 이처럼 중요한 ‘보는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우리의 신체 기관은 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눈이 멀었다’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눈과 더불어 뇌가 있기 때문이다. 눈이 하는 일은 바깥세상의 이미지를 카메라처럼 찍는 것뿐이고 그 이미지를 뇌로 보내서 해석하는 과정이 진행되지 않으면 눈을 뜨고 있어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어느 날 뜻밖의 사고로 뇌를 다쳤다고 가정해 보라. 손상된 부분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으로 인지 기능에 이상이 온다. 사물에 대해 인식이 안 되거나 보이는 사물에 대해 시각적으로는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이 무엇인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의학에서 가장 낙후한 분야가 뇌와 관련된 각종 질병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인간의 뇌는 거대한 우주와도 같지만 뇌신경에 관한 한 달 착륙 수준에 도달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뇌신경은 머리와 마음이라는 분리할 수 없는 두 영역이 교차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첫 사례로 소개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시각인식 불능증 환자다. 환자의 직업은 음악교사.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기억력, 유머 감각의 소유자다. 시력은 바닥에 떨어진 바늘도 쉽게 찾아낼 만큼 좋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고 사물의 구체적인 형태를 변별하는 능력도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검사를 마친 그는 손을 뻗어 아내의 머리를 잡고서 자신의 머리에 쓰려고 했다.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뇌에서 시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역에 부분적인 손상을 입은 까닭에 자신의 아내와 모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당혹스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 눈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므로 사물의 부분적인 특성, 예컨대 뾰족하다거나 둥글다거나 길쭉하다거나 노란색이라거나 하는 것들은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전체적으로 사람의 얼굴인지 아니면 모자인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옷을 갈아입는지 그의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늘 두는 장소에 남편의 옷을 갖다놓지요. 하지만 뭔가 방해를 받아 맥이 끊기면 완전히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해요. 그이는 입으려던 옷을 뭔지 잊어버려요. 자기 몸조차도 알아보지 못한답니다. 하지만 노래를 흥얼거릴 때 만큼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갈아입지요.”

 

이 환자의 경우, 음악이 시각을 대신하고 있었다. 처방은 의외로 간단했다. “더욱 적극적으로 음악에 기대어 사는 것이 권고됨.”

 

 

 

 Scene #2  과잉과 결핍에서 오는 새로운 삶의 활력

 

비정상은 두 가지의 모습을 가진다. 하나는 결핍이고, 또 하나는 과잉이다. 생리학과 병리학은 이를 모두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정의한다. 장애는 대부분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예컨대 나에겐 걷거나 뛸 수 있는 운동 신경과 감각이 결핍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적인 결핍뿐만 아니라 호르몬과 에너지의 과잉 상태로 인한 장애도 있다. 대표적으로 틱 장애로 알려진 튜렛 증후군이 이에 해당되는데, 정신 의학은 이를 “시상, 시상하부, 변연계 그리고 편도에 일어난 임상학적, 병리학적 장애”로 설명한다.

 

틱 장애를 가진 환자 레이는, 틱 장애로 인해 거칠고 돌발적이며 신경질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레이는 이 장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파민 수치를 낮추는 할돌(Haldol)을 처방받는데, 이후 틱 장애는 완화되었지만 정상적인 성격을 가진 자신의 모습이 진정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는 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틱 증상이 치료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라며 낙담한다.

 

일반 의사라면 이쯤에서 치료가 끝났을 터. 하지만 저자는 외적 질환을 고쳤어도 레이가 마음의 병을 얻었음을 알아봤다. 사실 병은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지만 장점도 있었다.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려는 의사들은 이들이 경험하는 과잉 상태가 건강한 상태에서 발현되는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기에 약물 등을 통해 정상 상태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질병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며, 병의 산물로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이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듯 환자는 병리 상태를 행복한 상태로 경험하며, 병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다.

 

튜렛 증상 충동으로 두들기던 드럼은 수준급의 재즈 연주로 발전해 인기를 모았다. 남들보다 매서운 반사신경은 탁구에서 빛을 발했다. 하지만 약물 투여 뒤 레이는 평범해졌다. 무엇보다 병을 앓는 동안 형성됐던 그의 유머와 사나이다움, 강한 정신력이 무뎌졌다. 그렇다고 회사마다 해고당하는 원인이 된 질병을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 저자와 환자의 결론은 ‘주중엔 약물 투여, 주말엔 중지’였다. 레이는 이후 평일엔 ‘진지하고 차분한 시민’으로, 휴일엔 ‘경박하고 열광적이고 영감에 가득 찬 인물’로 이중생활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장애는 결핍 상태이기에 이를 행복한 상태로 경험하기도 힘들며, 장애를 긍정적으로 이용하기도 힘들다. 결핍으로 인한 장애는 다양한 물리적인 고통을 수반할 뿐 아니라, 사회적, 제도적 제약으로 인해 불쾌한 상태를 경험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의 경험틀 내에서 장애는 실존적으로 개개인마다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장애는 고통과 불쾌함을 가져다주지만, 다른 측면에서 장애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다양한 경험들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Scene #3  뇌에 대한 경이로운 시선

 

저자는 단지 필력만 뛰어난 과학자가 아니다. 환자를 인간으로 대하는 훌륭한 의사이다. 그는 환자를 볼 때 질병에만 관심 갖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주체 즉 고뇌하고 고통 받고 병과 맞서 싸우는 주체’를 보려 한다. 병의 치료보다 인간을 돕는 것이 의사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신경 장애 환자들이 묘사하는 세계는 불가사의하다. 그들의 인생에는 탁월한 소설적 요소가 숨어 있다. 어떤 고전에도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인간의 원형으로 이 책에 언급된 환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엄청난 재앙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적응하거나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때로는 괜찮았을 때보다 더 완전해진 삶을 살기도 하고 때로는 실패로 끝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노력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강인한 극복의지다.

 

올리버 색스는 정신세계의 모호한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두뇌의 세계에 대한 성찰을 꾀한다. 그런 다양한 타자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많은 것들에 주의를 돌리게 된다. 신체와 정신,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해주고 있는 신체기관인 뇌에 대해서 경이로운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독자는 삶 자체에 대한 경외로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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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self-portrait)은 ‘발견하다’라는 의미가 담긴 라틴어 protrahere 앞에 ‘자신’을 뜻하는 self를 붙인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자화상을 보면 그들의 삶과 예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자화상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인 셈이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는 연인에게 버림받고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미셀이 확장 개보수 중인 루브르박물관에서 늙은 스탈렌의 어깨 위에 올라앉아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감독 레오 카락스는 시력을 잃어가는 미셀에게 왜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게 했을까?

 

렘브란트는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 인기 작가였던 젊은 시절부터 고독했던 말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는데, 자신의 얼굴을 결코 감추려 하지 않았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면 시간 변화에 따른 느낌들이 아주 잘 표현되어있다. 그래서 자화상의 표정을 보면 그 당시 렘브란트의 재정 상황이나 심리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옷도 화려하고 얼굴도 여유롭고 느긋하며 사람을 아래로 내려 보는 각도의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대중들로부터 인정받으며 한창 돈과 명예의 정점에 있을 때이다. 자신의 재주와 천재성에 열광한 사람들이 그림을 주문해와 거만과 선택으로 그림을 그릴 시기이다.

 

 

 

 

 

 

렘브란트  「자화상 」 1640년 / 「미소 짓는 자화상」  1665년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세월이 흐를수록 자화상에는 어두운 색과 그늘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림과 렘브란트의 일들을 맞추어 보면 그림 속 어둠이 이해가 간다. 렘브란트는 말년에 아주 비참한 생활을 했다. 과거 화려한 부귀영화를 뒤로 한 채 늘그막에 그림을 그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꾸밈도 가식도 없는 자신의 모습. 어쩌면 미셀이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통해 보려고 한 것도 자신이 아니었을까?

 

편지에 "카라바조와 루벤스로부터 벗어나 나의 내면을 응시한다. 삶은 힘들지만 오히려 정신적으로 성숙되고 깊어진다. 이제 제대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 같다"라고 적고 있다. 천재화가가 말년에 이르러 그림의 본원으로 회귀하는 그때의 심경을 「미소 짓는 자화상」이 담고 있다.

 

 

 

 

루벤스  「자화상 」  1623년 /   「자화상 」  1639년

 

 

 

렘브란트만큼은 아니지만 루벤스도 인생의 전환기에 맞춰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예순두 살에 그린 자화상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완성한 그림으로 주름진 화가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자화상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강렬한 눈빛과 섬세한 수염, 정면을 당당하게 응시한 얼굴에서 느껴지는 세세함과 내면의 표출은 그림을 처음 대하는 사람도 그림 속 인물이 범상한 사람은 아니었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한다.

 

당시 윤두서는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다. 셋째형은 귀양 중에 죽고 큰형과 자신은 모함에 연루되어 죽을 정도의 고문을 당해 모든 것을 접고 낙향했을 시기다. 이 그림을 그릴 시기가 대략 46세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윤두서  「자화상 」  17세기 후반

 

 

이력을 비추면서 그림을 대하면 먼 곳에서 돌아와 한 부분을 접은 듯 고뇌와 초탈의 정서가 느껴진다.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모든 것을 잃고 꿈도 야망도 포기한 채 낙향한 선비, 26세때 진사에 합격에 남다른 야망을 품었던 선비가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때의 심정이 배어있다. 자화상은 이런 것이다. 성격과 심성도 표현하지만 살아온 그 사람의 굴곡과 명암이 녹아있어야 비로소 훌륭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외형의 섬세함과 내면의 흐름이 형태와 조화를 이루면서 표현되어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그릴 때는 무엇보다 솔직함이 우선해야 한다. 자화상은 자서전과 같은 자신을 돌아보며 쓴 글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서전은 변명과 자랑으로 되어 있다. 표현주의 대가인 코코슈카는 렘브란트의 「미소 짓는 자화상」을 가장 나약하고 추하고 힘없을 때 그 모습을 그대로 옮기는 것,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을 렘브란트의 기적, 자화상의 기적이라고 말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깊은 심중의 뜻이 배어나오는 듯, 성찰과 결단 선비로서의 자존감과 의기가 담겨 있다. 동양이 선으로 뜻을 살려 담아냈다면 서양은 색으로 그 느낌을 담았다. 선의 섬세함이 의기와 성찰을 표현하고, 색의 다채로움이 희로애락의 풍상을 담아 낸 것이다.

 

“명화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화가의 모습이 담긴 자화상부터 감상하라”는 말이 있다. 때로 예술은 자유로운 생의 찬미이면서 부자유스러운 생에 대한 찬악(讚惡)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 자화상의 미학은 자신을 조형적으로 표현하고자하는 인간 욕구의 발현일 것이다.

 

흔히 자화상을 많이 그리는 화가는 불안한 영혼의 소유자라고 한다.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존재를 되물어 자신의 정체를 확인해야 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발견과 자기성찰이 동시에 요구되는 시대이다.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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