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self-portrait)은 ‘발견하다’라는 의미가 담긴 라틴어 protrahere 앞에 ‘자신’을 뜻하는 self를 붙인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자화상을 보면 그들의 삶과 예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자화상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인 셈이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는 연인에게 버림받고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미셀이 확장 개보수 중인 루브르박물관에서 늙은 스탈렌의 어깨 위에 올라앉아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감독 레오 카락스는 시력을 잃어가는 미셀에게 왜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게 했을까?

 

렘브란트는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 인기 작가였던 젊은 시절부터 고독했던 말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는데, 자신의 얼굴을 결코 감추려 하지 않았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면 시간 변화에 따른 느낌들이 아주 잘 표현되어있다. 그래서 자화상의 표정을 보면 그 당시 렘브란트의 재정 상황이나 심리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옷도 화려하고 얼굴도 여유롭고 느긋하며 사람을 아래로 내려 보는 각도의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대중들로부터 인정받으며 한창 돈과 명예의 정점에 있을 때이다. 자신의 재주와 천재성에 열광한 사람들이 그림을 주문해와 거만과 선택으로 그림을 그릴 시기이다.

 

 

 

 

 

 

렘브란트  「자화상 」 1640년 / 「미소 짓는 자화상」  1665년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세월이 흐를수록 자화상에는 어두운 색과 그늘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림과 렘브란트의 일들을 맞추어 보면 그림 속 어둠이 이해가 간다. 렘브란트는 말년에 아주 비참한 생활을 했다. 과거 화려한 부귀영화를 뒤로 한 채 늘그막에 그림을 그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꾸밈도 가식도 없는 자신의 모습. 어쩌면 미셀이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통해 보려고 한 것도 자신이 아니었을까?

 

편지에 "카라바조와 루벤스로부터 벗어나 나의 내면을 응시한다. 삶은 힘들지만 오히려 정신적으로 성숙되고 깊어진다. 이제 제대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 같다"라고 적고 있다. 천재화가가 말년에 이르러 그림의 본원으로 회귀하는 그때의 심경을 「미소 짓는 자화상」이 담고 있다.

 

 

 

 

루벤스  「자화상 」  1623년 /   「자화상 」  1639년

 

 

 

렘브란트만큼은 아니지만 루벤스도 인생의 전환기에 맞춰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예순두 살에 그린 자화상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완성한 그림으로 주름진 화가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자화상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강렬한 눈빛과 섬세한 수염, 정면을 당당하게 응시한 얼굴에서 느껴지는 세세함과 내면의 표출은 그림을 처음 대하는 사람도 그림 속 인물이 범상한 사람은 아니었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한다.

 

당시 윤두서는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다. 셋째형은 귀양 중에 죽고 큰형과 자신은 모함에 연루되어 죽을 정도의 고문을 당해 모든 것을 접고 낙향했을 시기다. 이 그림을 그릴 시기가 대략 46세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윤두서  「자화상 」  17세기 후반

 

 

이력을 비추면서 그림을 대하면 먼 곳에서 돌아와 한 부분을 접은 듯 고뇌와 초탈의 정서가 느껴진다.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모든 것을 잃고 꿈도 야망도 포기한 채 낙향한 선비, 26세때 진사에 합격에 남다른 야망을 품었던 선비가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때의 심정이 배어있다. 자화상은 이런 것이다. 성격과 심성도 표현하지만 살아온 그 사람의 굴곡과 명암이 녹아있어야 비로소 훌륭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외형의 섬세함과 내면의 흐름이 형태와 조화를 이루면서 표현되어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그릴 때는 무엇보다 솔직함이 우선해야 한다. 자화상은 자서전과 같은 자신을 돌아보며 쓴 글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서전은 변명과 자랑으로 되어 있다. 표현주의 대가인 코코슈카는 렘브란트의 「미소 짓는 자화상」을 가장 나약하고 추하고 힘없을 때 그 모습을 그대로 옮기는 것,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을 렘브란트의 기적, 자화상의 기적이라고 말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깊은 심중의 뜻이 배어나오는 듯, 성찰과 결단 선비로서의 자존감과 의기가 담겨 있다. 동양이 선으로 뜻을 살려 담아냈다면 서양은 색으로 그 느낌을 담았다. 선의 섬세함이 의기와 성찰을 표현하고, 색의 다채로움이 희로애락의 풍상을 담아 낸 것이다.

 

“명화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화가의 모습이 담긴 자화상부터 감상하라”는 말이 있다. 때로 예술은 자유로운 생의 찬미이면서 부자유스러운 생에 대한 찬악(讚惡)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 자화상의 미학은 자신을 조형적으로 표현하고자하는 인간 욕구의 발현일 것이다.

 

흔히 자화상을 많이 그리는 화가는 불안한 영혼의 소유자라고 한다.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존재를 되물어 자신의 정체를 확인해야 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발견과 자기성찰이 동시에 요구되는 시대이다.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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