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길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2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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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복음 6:36)

 

 

 

작은 아들은 결국 떠났다. 녀석의 말은 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 장차 내게 돌아올 재산의 몫을 미리 주십시오.” 결국 녀석의 몫을 주었다. 떠나버렸다. 먼 타국으로. 멀리서 온 객들에게 간간이 아들의 소식을 듣는다. 흥청망청 돈을 쓰고 창기와 몸을 섞는 방탕한 삶을 살고 있단다. 타들어가는 이 마음, 큰 아들은 결코 알지 못하리라. 큰 아들은 묵묵히 집안을 세우고 있다. 들에 나가 종일 일하고 돌아온다. 믿음직스런 녀석이다. 그러나 큰 아들은 내 마음을 모른다. 집 떠난 작은 놈을 향한 나의 간절한 마음을. 차라리 일을 팽개치고 미친 듯이 동생을 찾아 나서기를 내심 바랬다. 그 놈의 귀향을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매일 밖으로 나갔다. 하염없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늙어가고 있다.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1668년

 

기적과도 같이 아들의 귀향 소식을 들었다. 아비에게 아들의 귀향, 그것은 기적이었다. 먼발치에서 거지꼬락서니를 하고 둘째가 터덜터덜 걸어온다. 체면 무시하고 달려갔다. 어린 아들을 두 팔로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놈은 말했다. “아버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대해 주세요.” 아비 마음 모르기는 첫째나, 둘째나 매 한가지다. 하인들에게 명했다. “어서 좋은 옷을 가져다가 내 아들에게 입히라.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줘라. 발에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잔치를 열자. 내 아들이 돌아왔다. 죽은 줄 알았던 내 아들이 돌아왔단 말이다.”

 

하지만 이를 본 큰아들은 “아버지를 여러 해 섬기고 따랐지만 내게는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다”며 반발한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타이른다.

 

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조금 각색했다. 신자들은 말할 것 없고 비신자들도 이 이야기는 한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한량없는 아버지의 마음이 가슴 아련하게 다가온다. 이 내용을 기초로 렘브란트는「탕자의 귀향」 이란 그림을 그렸다.

 

‘나는 탕자인가, 아님 그의 형?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읽을 때면 대부분의 이들은 작은아들인 탕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런데 네덜란드 출신의 가톨릭 사제였던 헨리 나우웬은 달랐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점점 변해갔다. “내가 바로 작은아들이었고, 큰아들이었으며, 이제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나우웬은 렘브란트의 한 폭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몇 날 며칠을 꼬박 그 그림에 푹 빠져있었다고 고백한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1983년에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당시 그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을 종식시키지 위해 크리스천 공동체들이 무엇이든 힘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누비는 고단한 순회강연을 마치고 막 돌아왔을 즈음이었다.

 

그는 프랑스 트로즐리에 있는,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따듯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라르쉬(L'Arche) 공동체에서 몇 달 머물고 있던 중, 공동체 안에 있던 친구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방문에 붙여놓은 커다란 포스터를 발견하고는 그 그림에 매료되고 만다.

 

그로부터 3년 후, 러시아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원작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탕자의 귀향」을 묵상했고,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봤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실물보다 크게 그린 거대한 「탕자의 귀향」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던 나우웬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음미했다. 그리고는 그는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렘브란트와 자신의 삶을 투영시켜 정밀하게 해석해 책에 옮겼다.

 

그는 자식이 자기 유산을 챙겨 집을 나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짚어내고, 작은아들의 낡은 샌들과 새 신발, 반지가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을 감싸고 있는 빛 그리고 아버지와 맏아들 사이의 공간이 갖는 의미, 아버지와 큰아들의 닮은 외적 요소들이 암시하는 바 등을 세밀하게 하나씩 탐색해 이 책에 옮겼다.

 

그는 먼저 작은 아들의 방탕한 삶과 귀환을, 다음엔 큰 아들의 깊은 상실감과 분노, 그 다음엔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을 깊이 파고들고 있다. 이는 나우웬이 경험한 영적 여정의 단계들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둘째아들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착실하게 집을 지키고 있었던 첫째아들로, 그래서 질투와 분노, 완고한 태도, 무엇보다 교묘한 독선에 사로잡혔던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가 그 그림을 통해 결론적으로 깨닫게 된 세계는 내가 ‘탕자’라는 것, 그러면서 또 ‘큰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결국은 ‘아버지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축복을 받는 자리’에서 ‘은총을 베푸는 자리’로 나아가자고 촉구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길을 잃은 탕자라면, 그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인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하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과 주변인들에 대한 관찰력, 각 인물들의 내면 심리 묘사, 아버지의 두 손이 서로 다르다는 것 등을 감지해내는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가 이 그림에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깊이 있게 감상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림에 빨려 들어갈 듯한 깊은 감상을 통해 열린 더욱 깊은 묵상은 놀라움을 줌과 동시에 감동과 큰 은혜를 선사한다.

 

저자는 자신의 모습을 탕자에서 큰아들의 모습으로 빗대는 순서를 거쳐, 끝내 슬픔과 용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징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받아들이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대부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부르심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우웬은 이보다 ‘더 큰 부르심’을 듣게 한다. 용서하고, 화해하며, 치유하고, 잔칫상을 내미는 두 손이 바로 우리의 손이어야 한다는 소명이다.

 

우린 매일, 매시간 떠나고 돌아오길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힘겨운 시간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 뭔가를 해보려다 쓰러진 자녀를 비웃지 않으신다. ‘귀향’의 조건으로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채 잘못을 고백하는 걸 요구하지도 않으신다. 예수는 한없는 관용과 용서로 자녀를 안타깝게 떠나보냈다가 돌아오기만 하면 반가이 집안으로 맞아들이신다.

 

꿇은 아들을 감싸 안은 늙은 아버지의 그 사랑. 고향에서 기다리는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다. 조건을 뛰어넘는 그 사랑, 자격과 상관없이 받을 수 있는 그 사랑. 하늘 아버지가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이 사랑이리라. 귀향길은 화해의 길이다. 사랑의 길이다.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아들로서 사랑을 받는 길. 그 길은 배움의 길이다. ‘아버지처럼 용서하고,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삶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선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일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여정에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참을성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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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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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과 만나는 일도 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람에 날려 온 홀씨가 바늘 끝에 내려앉는 말도 되지 않는, 그 기가 막힌 확률로 수많은 책 가운데 하나가 독자와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 과장이 심한 걸까.

 

저자의 이름을 다른 책에서 우연히 자주 보게 된다거나 번역을 맡은 사람을 다른 매체에서 보게 되면 이내 그 책을 구하게 된다.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도 그렇게 만난 책이다. 

 

 

여느 소설에 등장하는 미남미녀는 온데간데없고,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보편적이지 못한 외모나 성격을 가진 채로 묘사되고 있다. 아밀리아는 사팔뜨기 회색 눈에 키가 6척이나 되는 장신이며 남자보다 힘이 센 여자다. 라이먼은 작은 키에다가 폐병까지 지닌 곱추등이다. 마빈 메이시는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포악한 성격 때문에 멋진 외모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다.

 

어느 날 사료 창고로 쓰이던 카페에 지저분한 몰골의 라이먼이 찾아온다. 그 후 카페는 새 단장을 하여 고단하고 지친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으로 위안을 주고 마을에 유일한 사교 장소가 된다. 인색하기 이를 데 없던 아밀리아는 라이먼에게 새 옷을 입히고 정성껏 보살펴주는데, 이 같은 아밀리아의 행동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놀라는 눈치다. 아밀리아는 보잘것없는 라이먼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돈 밖에 모르던 아밀리아는 이전에 없던 활력으로 세상을 대하게 된다. 그렇게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이어서 카페는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찾는 안락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게 4년 동안 평화는 지속되었지만 어느 날 나타난 마빈 메이시로 인해 카페는 슬픈 운명을 맞게 된다.

 

마빈 메이시는 아밀리아의 전 남편이었다. 마빈 메이시는 아밀리아를 사랑했지만 아밀리아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고작 열흘간의 결혼 생활은 파탄을 맞았다. 마빈 메이시는 잘생긴 외모를 가졌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을 정도로 못된 짓만 하고 다녔으므로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났으니 마을은 긴장할 수밖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라이먼은 마빈 메이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외로운 사람이 바로 아밀리아다. 라이먼 때문에 그토록 싫어하는 마빈 메이시를 쫓아낼 수도 없는 상황. 예전처럼 홀로 외롭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마빈 메이시와 같은 공간에서 지낼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결투를 신청하게 되고, 결과는 라이먼과 마빈 메이시의 승리로 끝이나 그 둘은 마을을 떠나게 된다. 아밀리아에게 크나 큰 고통을 안겨준 채로.

 

그 후 카페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가엾은 아밀리아는 슬픈 카페에 홀로 갇혔다. 스스로 목수에게 부탁해서 모든 문을 판자로 막아버린 것이다. 더 이상 카페에서 예전의 평화로움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으로 바뀌어 아무도 카페를 찾지 않게 되었다. 사랑이 떠난 삭막한 아밀리아의 마음처럼 흉측하게 변한 카페로.

 

 

 

 

우리는 대부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연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아무리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한 모든 관계를 맺기를 갈망한다.

 

소설을 보면 그 모든 말에 수긍하게 된다. 도대체 누가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그래서 세상이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제멋대로 생기더라도 성격적으로 장애가 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의미 없는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마술 같은 사랑의 힘을, 사람을 변하게 하는 사랑의 존재를 이야기하면서도 사랑의 덧없음 또한 감추지 않는다. 짧은 사랑이 지나가면 영원한 고통만 남는다는 이치를 말해주고 있다. 작가의 사랑론을 인용해 본다.

 

“사랑이 신비로운 이유는 사랑은 서로 주고받는 상호적 경험이 아니라 혼자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요, 외로움을 더욱 심화시키는 일이다.”

 

故 장영희 교수가 ‘그로테스크(grotesque)’하다고 표현했듯, 사랑에 고통 받는 등장인물들은 어딘가 조화롭지 못하다. 그러나 작가는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의 신장에서 나온 돌로 장식한 시곗줄을 선물하거나 콜라 병에 꽂아놓은 백합처럼 등장인물의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사랑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지를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5쪽)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슬픈 카페의 노래』는 사랑 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들의 사랑이야기다. 사랑하는 일이 사랑 받는 일보다 더 큰 괴로움을 안겨줄 지라도 기꺼이 사랑에 빠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물음표 하나를 던져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싶은가?’라고.

 

 

사랑할 수 없는 여자, 사랑받을 수 없는 남자의 사랑이야기는 슬프기에, 그래서 더 아름다운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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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도 잊혀지지 않는 고통의 기억들, 마음을 여는 진실한 의사소통으로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받은 마음의 상처는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평생에 걸쳐 나타난다. 어린 시절에 겪은 불안과 좌절, 원망과 두려움은 아이의 신체와 정신에 각인되어 인생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아동심리학자 앨리스 밀러는 무조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종교적 관념과 부모에 대한 원망을 금기시하는 도덕적 규범이 학대받은 아이들의 정당한 분노를 억압하며, 자아의 혼란과 질병의 고통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어머니 눈 밖에 나서 발작이 멈추느니, 차라리 발작이 나더라도 어머니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고 싶어요.” (마르셀 프루스트,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평생 천식으로 고통 받았던 소설가 프루스트.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에 저항할 수 없었던 그의 처지와 천식이 무관하지 않다. 프루스트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조차 잃게 될까 봐 늘 전전긍긍했다. 어머니의 눈 밖에 나느니 차라리 발작을 택하겠다는 그의 태도는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아이의 애정에 대한 왜곡된 집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소설가 중에서도 기억력이 뛰어나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린 시절이 기억을 놀랄 만큼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그 기억력의 산물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하기까지 걸린 세월은 무려 14년. 일체의 소리가 스며들지 못하게 막아놓은 코르크로 둘러싼 밀실에 천식과 싸워가면서 소설을 써내려갔다. 흥미로운 사실은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 시기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였다. 프루스트의 지독하면서도 외곬에 가까운 추억을 묘사하는 진지함은 어쩌면 특출한 기억력이 아니라 어머니의 상실에서 비롯된 고통과 허전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천식 발작을 참을 수 있게 만들 정도로 허약한 자신을 지탱해주는 커다란 존재의 상실감은 38세의 젊은 프루스트에게는 감당하기에는 벅찼을 것이다. 몸과 마음을 조이는 천식 발작을 멈추기 위해서 죽은 어머니를 되살려야 했다. 그런 유일한 방법이 바로 소설을 쓰는 것. 결국 프루스트는 모든 기억을 토해내듯이 써내려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원고를 마지막까지 손보다가 세상을 떠났다. 14년 동안 이어진 코르크 밀실 속에서의 고행이 끝나는 순간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나’(마르셀)에게 어릴 적 기억과 감각을 되살려주게 만드는 추억의 매개물을 제공한다. 여기서 그 매개물이 바로 그 유명한 마들렌과 홍차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으로 기계적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면 고립시켰다. (85~86쪽)

 

찰나의 미각이 과거의 부활을 불러일으키는 이 감각적 전환의 장면은 단순히 우연히 맛보는 마들렌과 홍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마들렌과 홍차를 ‘나’에게 준 어머니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루스트 연구가에 의하면 프루스트 회상의 배경에는 어머니의 존재가 크다고 말한다. 프루스트가 단지 마들렌을 즐겨 먹을 정도로 좋아해서 추억의 매개물로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히 마들렌을 사오게 한 어머니의 모습을 프루스트는 잊지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프루스트의 각별한 애정이 없다면 우리는 마들렌과 홍차가 연출한 이 유명하고도 너무나도 섬세한 장면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연과 감성에서 비롯된 기억을 ‘비의지적 기억’이라 하면, 의지와 지성에서 비롯된 기억은 ‘의지적 기억’이라고 한다. 전자의 기억은 과거에 대한 총제적인 삶의 장면을 그려내지만, 후자의 기억은 단편적인 부분의 장면에 불과하다. 마르셀이 입 안에 홍차에 의해서 녹아드는 마들렌 조각에서 감미로운 회상에 젖어드는 것은 비의지적 기억이다. 어머니가 준 마들렌과 홍차를 통해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레오니 아주머니라는 분이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을 발견한다.

 

반대로 평생 프루스트의 삶에서 떨어지지 않은 어머니는 작가의 의지적 기억을 이끌어낸다. 프루스트는 소설을 쓰는 동안 어두컴컴한 밀실 속에 지내는 느낌에서 방에 홀로 어머니를 기다렸던 유년 시절의 그리움이 떠올렸을 것이다.

 

어린 마르셀은 잠들기 전에 어머니의 키스를 받고 싶어 한다. 어머니의 키스는 마르셀에게는 유일한 삶의 위안이다. 늦은 저녁식사 때문에 어머니가 자신의 방에 찾아오지 않거나 어머니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모습에 어린 마르셀은 무척 괴로워한다. 앞에서 언급한 밀러의 주장대로라면 어머니의 키스를 원하는 어린 마르셀의 모습은 어른이 돼서도 어머니의 애정에 집착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프루스트는 어머니의 키스를 그리워하고, 어머니가 자신의 곁을 떠나면서 생기는 유년기 특유의 불안감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잠을 자러 올라갈 때 내 유일한 위안은 내가 침대에 누우면 엄마가 와서 키스해 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녁 인사는 너무도 짧았고 엄마는 너무 빨리 내려갔기 때문에, 엄마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문짝이 두 개 달린 복도에서 밀짚을 엮어 만든 작운 술이 달린 푸른빛 모슬린 정원용 드레스가 가볍게 끌리는 소리가 들릴 대가 내게는 정말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다음에 올 순간을, 엄마가 내 곁을 떠나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을 예고해 주었기 때문이다. (32쪽)

 

어머니가 자신의 방으로 오는 소리만 들어도 어린 마르셀은 벌써부터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고독을 예감했고, 무척 견디기 어려웠다. 마르셀은 어머니의 키스로만으로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 곁에만 있어주길 원했다.

 

비의지적 기억은 한 번 떠올리게 되면 그 때 그 미묘한 감정적 변화의 순간을 재현할 수 없다. 마르셀은 또다시 마들렌과 홍차를 먹어보지만, 순간적으로 밀려온 특별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 반면 의지적 기억은 금방 잊혀질 수 있는 단편적인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다. 어머니에 대한 프루스트의 비의지적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하게 만드는 중요한 소재이면서도 동시에 평생 작가를 괴롭힌 병적 집착이다. 유년 시절 속 어머니를 묘사하기 위해서 프루스트는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서랍에 깊숙이 숨겨왔던 기억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태양도 끝날 날이 있을까. 작가 이병주는 중편소설 ‘예낭 풍물지’의 맨 마지막 문장을 “태양도 끝날 날이 있다”로 끝맺는다. 감옥에서 나온 폐병환자인 주인공에게 어머니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주인공은 “어머니가 숨을 거두는 날, 나는 지구도 그 맥박이 멎을 것을 확신한다”며 비통해 한다. 어머니의 부재(不在)는 곧 태양이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가 없으면 태양이 시들고, 지구가 시시해진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하늘이자 땅이다. 엄마 없는 유년은 빈방처럼 썰렁하고, 찬밥처럼 시들하다. 엄마를 기다리는 기형도 시인의 유년 풍경이 그렇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

 

 

그리운 어머니는 항상 늦게 온다. 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에서처럼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안 오시는 것이 엄마다. 프루스트는 방으로 찾아오는 어머니의 발걸음 소리에 불안감을 예감했다면, 기형도는 그리워하는 존재의 등장을 암시하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은 상황에 초조해하고 불안에 떤다. 어머니의 부재가 만든 상실감을 잊기 위해서 어린 시인은 혼자 엎드려 훌쩍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리운 것은 사라진 자리에서만 그 실체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기형도의 이 시에 대한 김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년 시절에 느낀 엄마 걱정은 무섭고 괴로웠지만, 성인이 된 시점에서는 그리움으로 받아들인다.

 

죽은 어머니의 모습과 그녀의 존재를 통해서 느꼈던 불안하고 괴로웠던 부정적 기억을 프루스트도 소설로 그리움으로 환기시키는 동시에 치환시킨다. 그렇다고 부정적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때 그 기억의 장면이 마음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프루스트와 기형도는 ‘어머니’라는 여백에 남아있는 허전한 추억을 소설과 시로 채우고 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은 항상 이렇게 늦다. 사라지고 나서야 어머니를 떠올린다. 사실 떠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떠났기 때문에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없음으로 해서 있었던 사실을 각인시키는 부재의 역설이다. 없는 자리, 사라진 자리에서야 그 존재의 지극함을 깨닫는 애통함은 모든 ‘있는 것’이 있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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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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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Scene #1  호기심에서 시작된 책의 탄생

 

과학은 어느 시대라도 대중이 손쉽게,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과 과학 이론의 괴리는 갈수록 커지고, 지금은 과학자들끼리도 역사적 발견과 그럴 듯한 사기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게 됐으니 참 딱한 일이다.

 

빌 브라이슨은 영국에서 여행 전문기자를 오래 했고 썩 재미있고 이름난 여행책을 여러 권 썼다. 그는 양성자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쿼크와 퀘이사도 구분할 줄 모르는 ‘과학의 문외한’이었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500쪽이 넘는 과학서에 도전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오르면서 이 거대한 산맥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호주 평야에 텐트를 치고 누워 ‘저 수많은 별들은 어디서 만들어져 저렇게 밤하늘에 박히게 되었을까’ 하면서 호기심 어린 밤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누구나 한번쯤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우주는 얼마나 큰 세계이며 그 끝은 어디인가. 지구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또 지구의 생명체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는 이 긴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면 정말 궁금한 것들, 여러 가지 근원적인 호기심들에 대해 과학자들이 내놓은 답들을 정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이 한 권의 책이 탄생하게 됐다.

 

 

 

 Scene #2  호기심 많은 독자를 위한 과학 안내서     

     

저자의 호기심이 너무나도 많은 탓일까. 아니면 아무 곳이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여행자의 기질이 문장에서 드러나는 것일까. 쿼크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지구 이야기로 돌아오는 등 내용의 구성은 독자들로 하여금 방향타를 잃고 헤매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을 위해서 빌 브라이슨은 과학 도서들을 탐독하고 자료를 수집할 정도로 많은 준비를 했지만 과학이라는 광범위한 지대를 안내하기에는 ‘과학 여행가이드’로서는 아직 서툰 면이 있다. 브라이슨이 인용하고 참고한 책들은 당장 서점에 가면 구할 수 있는,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 과학 저술가가 쓴 것들이다. 좀 더 깊이있는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이 책 한 권을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 브라이슨이 인용한 참고도서를 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도표나 사진 한 점도 없으니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끝까지 읽어나가는 내내 머리가 아프게 느껴질지도. 여행을 위한 안내문 혹은 지도라고 할 수 있는 도표와 사진이 없으니 여행가이드 브라이슨의 문장을 잘 쫓아갈 수밖에. (방대한 분량의 원작을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청소년 독자를 위해서 쉽게 쓴 『그림으로 보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래서 긴 문장 곳곳에 저자의 유머와 재치가 살아 있다. 원자, 상대성 이론, 유전자, 생명의 진화 과정과 그 과학적 발견은 소설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양성자는 알파벳 i의 점에 해당하는 공간에 5,000억 개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다. 그런 양성자를 10억 분의 1 정도의 부피로 축소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작고 작은 공간에 어떻게 해서든지 대략 30㎚ 정도의 물질을 채워 넣는다고 상상해 보자. 이제 우주를 만들 준비가 된 셈이다.’ ‘지구 45억 년 역사에서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최근에 등장한 것인가를 더 잘 이해하려면 두 팔을 완전히 펴고 그것이 지구의 역사 전체를 나타낸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책은 크게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지구의 생성과 구성, 원자의 발견과 운동, 생명의 탄생과 진화, 유인원과 현생 인류의 등장까지 책 이름 그대로 일반인들이 과학과 관련해 궁금해 할만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는 첫 장에서는 대폭발(빅뱅) 이론과 팽창 이론이 등장하고, 이어 현대 물리학의 기초인 열역학, 양자론, 상대성이론, 소립자와 초끈 이론이 나온다.

 

에세이스트가 쓴 글답게 책에는 인간적인 냄새가 묻어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과학에 앞서 사람 얘기다. 과학자는 근엄한 공식과 이론을 만드는 전형적 인물이 아니라, 경쟁자의 성공에 배 아파하고 자기 연구결과에 우쭐대며 종종 괴벽을 가진 인물들로 묘사된다. 원자나 태양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그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고 때론 집착했던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먼저 발견하고도 영어권 저널에 발표하지 않아 인정받지 못한 과학자들에 대한 연민도 잊지 않았다. 그의 과학사에는 승자만이 살아남는 공식 역사에 가려진 약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배어있다.

 

저자는 다윈과 헉슬리의 동상을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외진 커피숍으로 밀어내고 중앙 홀 계단에 서 있는 리처드 오언의 동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공룡’이란 말을 만든 오언이 얼마나 속 좁고 악랄한 화석연구자였는지를 그는 사료를 뒤져 낱낱이 드러낸다. 판 구조론의 원형인 대륙이동설을 주장한 알프레드 베게너가 지질학이 아닌 기상학자인데다 독일인이란 이유로 그의 탁월한 발상을 반세기 동안이나 애써 묵살한 동시대 지질학자들을 마음껏 야유한다.

 

또 과학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대체 과학자들은 그런 사실들을 어떻게 알았을까’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특장은 지구의 내부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현대인들은 교과서에 실린 지구 내부 그림이 외워야 할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지만, 실제로는 아직 지구 내부에 대해 많이 알려져 있지 못하다. 지표면에 직접 구멍을 뚫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은 지구 밀도를 계산하고 지진이나 지자기 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론해낸 결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자는 밝힌다.

 

 

 

 Scene #3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존재, 그 무엇  

 

수금지화목토천해명. 누군가 내게 태양계에 관해 물으면, 툭 튀어나온 대답이 늘 그랬다. 항성(태양)을 중심에 둔 행성의 공전, 자전, 태양 빛을 받는 행성과 위성 간 그림자가 빚는 현상 등 여러 이야기가 대답에 내재됐으되 기계적으로 ‘학창시절에 외웠던 것’을 꺼냈다.

 

과학 선생님께서 외우기 쉬운 방법이라며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직접 제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험에도 나올 거다”는 각인 작업과 함께였다. 명왕성이 행성 자격을 잃었으니 지금은 ‘수금지화목토천해’겠다.

 

뇌리에 ‘그림 한 장’이 떠오른다. 태양을 중심에 둔 채 태양으로부터 떨어진 거리 순서대로 행성을 늘어놓은 그림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본 우주 그림은 속임수다. 종이 한 장에 모든 것(태양계)을 그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속임수.

 

충격이었다. “실제로 상대적인 크기까지 고려해서 태양계를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저자의 서술이 부른 충격이라기보다 늘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되뇐 나의 입버릇에 깜짝 놀랐다. 타성, 오랫동안 새로움을 꾀하지 않아 나태하게 굳어진 습성에 놀란 거다. 처음 놀랐을 때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라고 마음을 다독거리려 했다. 쪽을 넘길수록 ‘존재, 그 무엇’은 너무 무거워 가슴 깊숙이 가라앉았다. 과학의 방대한 역사 속에서 깨달은 것은 인간은 다만 우주와 자연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엄청난 행운을 얻은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이라는 소박한 진실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자들은 자연의 신비 대부분을 밝혀냈다는 만족감에 젖었다고 저자는 기록한다. 하지만 그들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다. 오늘도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인간의 끈질긴 연구와 탐사를 기다리고 있다. 작은 만족과 순간의 좌절에 머무르지 말고 줄기차게 앞으로 나아갈 일이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순수의 전조’라는 시에서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 들판에 핀 한 송이 꽃에서 천국을 본다 /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고 노래한다. 이렇게 한 알의 모래와 한 송이의 꽃을 관찰하고 호기심을 갖게 되면서 과학은 시작되었고 그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간 과학자들은 자연과 우주의 신비에 감탄한다.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질문과 상상력을 통해 발전해 왔으며 과학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무지한 인간에게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차츰 그것은 극복해야 할 삶의 조건으로 바뀌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길고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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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살림지식총서 418
노태헌 지음 / 살림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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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루빈슈타인 - 쇼팽 '녹턴 No.1'

 

 

"행복의 비결은 바로 삶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좋은 삶이든 나쁜 삶이든 말이지요.”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삶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는 무대에 오르는 것을 즐겼고, 무대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진정한 로맨티스트였다.

 

4살 때부터 한번 들은 멜로디를 기억할 정도로 '신동' 소리를 들으면서 성장했다. 젊은 루빈슈타인의 즉흥 연주는 청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나 비평가들은 그의 연주 테크닉에 부족함을 지적하면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재능을 믿고 있던 루빈슈타인은 이러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감을 느꼈을 터. 이때부터 루빈슈타인은 노력형 천재로 변신한다.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습했다. 그의 쇼팽 연주가 무미건조하다는 평도 들었으나 루빈슈타인은 쇼팽을 향한 음악적 애정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테크닉은 곡예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탁월한 전달력이다. 초인적인 포르티시모에 이어서 펼쳐지는 서정적인 패시지는 비할 바 없이 맑고 섬세하다. 그는 항상 열정적이고, 유쾌하고, 부드럽다. 그는 어떤 곡이든 구조와 논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음악혼의 정수를 명료하게 청중의 마음으로 전달한다. 지성과 감성의 완벽한 조화다. 그의 레퍼토리 중심에는 쇼팽이 있다.

 

루빈슈타인이 쇼팽을 좋아했다면 여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은 모차르트를 사랑했다. 구부정한 자세, 헝클어진 잿빛 머리. 그녀의 모습은 마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녀가 두 손을 건반 위로 올려놓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영롱한 선율, 그것은 천상의 소리였다.

 

하스킬은 가혹한 운명을 타고났다. 눈부신 재능과 탁월한 감성으로 세계 음악계의 샛별로 떠오른 18살의 그녀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불행이 닥친다. 다발성 신경경화증. 뼈와 근육, 세포가 엉겨 붙는 무서운 병이었다. 허리는 구부러졌고 한창 피어나야 할 얼굴은 노파처럼 변해버렸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과 같은 고독과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차르트 연주는 역경 속에서 오히려 더 빛을 발했다. 찰리 채플린은 그녀를 아인슈타인, 처칠과 함께 3대 천재로 꼽을 정도였다. 하느님과 모차르트는 곁에 두고 그녀의 음악을 듣고 싶었을까. 그녀는 지하철 계단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친 뒤 66세를 일기로 무거웠던 몸의 짐을 벗었다.

 

글렌 굴드는 기존의 피아니스트와는 다르게 기존의 정형화된 연주 관습을 파격적으로 뛰어넘은 혁신적이고 개성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지금도 음악사에서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남겼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 녹음은 클래식 음악계에 선풍적인 바흐 붐을 불러일으켰다.

 

역사적인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도 유명하지만 파격적인 기행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굴드의 모습은 독특하다. 갈색 뿔테 안경을 눌러쓰고 자신이 직접 제작한 낮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온 몸을 피아노 앞에 바짝 붙이고 손가락을 눕혀 건반을 어루만지듯이 연주했다. 하지만 그는 1964년 이후로는 일체의 공개적인 콘서트를 갖지 않고, 녹음실에 틀어박혀 자신의 의도대로 되풀이해 연주 편집할 수 있는 스튜디오 작업에만 전념했다.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20세기 가장 빛난 9인의 피아니스트들을 엄선하여 소개한 책이다. 그들의 연주 스타일은 물론 음악에 미친 영향력과 소소한 삶의 이야기들까지 다루어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의 웃음과 눈물을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특히 저자가 직접 추천한 명반 리스트가 더해져 더욱 피아노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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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8-29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음악에도 조예가 있으시네요! 굿뜨!

cyrus 2018-09-01 11:01   좋아요 1 | URL
한때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어요. 요즘은 책이 더 좋아서 클래식 음악을 안 듣는 날이 많아졌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