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길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2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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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복음 6:36)

 

 

 

작은 아들은 결국 떠났다. 녀석의 말은 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 장차 내게 돌아올 재산의 몫을 미리 주십시오.” 결국 녀석의 몫을 주었다. 떠나버렸다. 먼 타국으로. 멀리서 온 객들에게 간간이 아들의 소식을 듣는다. 흥청망청 돈을 쓰고 창기와 몸을 섞는 방탕한 삶을 살고 있단다. 타들어가는 이 마음, 큰 아들은 결코 알지 못하리라. 큰 아들은 묵묵히 집안을 세우고 있다. 들에 나가 종일 일하고 돌아온다. 믿음직스런 녀석이다. 그러나 큰 아들은 내 마음을 모른다. 집 떠난 작은 놈을 향한 나의 간절한 마음을. 차라리 일을 팽개치고 미친 듯이 동생을 찾아 나서기를 내심 바랬다. 그 놈의 귀향을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매일 밖으로 나갔다. 하염없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늙어가고 있다.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1668년

 

기적과도 같이 아들의 귀향 소식을 들었다. 아비에게 아들의 귀향, 그것은 기적이었다. 먼발치에서 거지꼬락서니를 하고 둘째가 터덜터덜 걸어온다. 체면 무시하고 달려갔다. 어린 아들을 두 팔로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놈은 말했다. “아버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대해 주세요.” 아비 마음 모르기는 첫째나, 둘째나 매 한가지다. 하인들에게 명했다. “어서 좋은 옷을 가져다가 내 아들에게 입히라.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줘라. 발에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잔치를 열자. 내 아들이 돌아왔다. 죽은 줄 알았던 내 아들이 돌아왔단 말이다.”

 

하지만 이를 본 큰아들은 “아버지를 여러 해 섬기고 따랐지만 내게는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다”며 반발한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타이른다.

 

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조금 각색했다. 신자들은 말할 것 없고 비신자들도 이 이야기는 한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한량없는 아버지의 마음이 가슴 아련하게 다가온다. 이 내용을 기초로 렘브란트는「탕자의 귀향」 이란 그림을 그렸다.

 

‘나는 탕자인가, 아님 그의 형?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읽을 때면 대부분의 이들은 작은아들인 탕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런데 네덜란드 출신의 가톨릭 사제였던 헨리 나우웬은 달랐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점점 변해갔다. “내가 바로 작은아들이었고, 큰아들이었으며, 이제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나우웬은 렘브란트의 한 폭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몇 날 며칠을 꼬박 그 그림에 푹 빠져있었다고 고백한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1983년에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당시 그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을 종식시키지 위해 크리스천 공동체들이 무엇이든 힘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누비는 고단한 순회강연을 마치고 막 돌아왔을 즈음이었다.

 

그는 프랑스 트로즐리에 있는,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따듯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라르쉬(L'Arche) 공동체에서 몇 달 머물고 있던 중, 공동체 안에 있던 친구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방문에 붙여놓은 커다란 포스터를 발견하고는 그 그림에 매료되고 만다.

 

그로부터 3년 후, 러시아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원작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탕자의 귀향」을 묵상했고,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봤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실물보다 크게 그린 거대한 「탕자의 귀향」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던 나우웬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음미했다. 그리고는 그는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렘브란트와 자신의 삶을 투영시켜 정밀하게 해석해 책에 옮겼다.

 

그는 자식이 자기 유산을 챙겨 집을 나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짚어내고, 작은아들의 낡은 샌들과 새 신발, 반지가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을 감싸고 있는 빛 그리고 아버지와 맏아들 사이의 공간이 갖는 의미, 아버지와 큰아들의 닮은 외적 요소들이 암시하는 바 등을 세밀하게 하나씩 탐색해 이 책에 옮겼다.

 

그는 먼저 작은 아들의 방탕한 삶과 귀환을, 다음엔 큰 아들의 깊은 상실감과 분노, 그 다음엔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을 깊이 파고들고 있다. 이는 나우웬이 경험한 영적 여정의 단계들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둘째아들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착실하게 집을 지키고 있었던 첫째아들로, 그래서 질투와 분노, 완고한 태도, 무엇보다 교묘한 독선에 사로잡혔던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가 그 그림을 통해 결론적으로 깨닫게 된 세계는 내가 ‘탕자’라는 것, 그러면서 또 ‘큰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결국은 ‘아버지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축복을 받는 자리’에서 ‘은총을 베푸는 자리’로 나아가자고 촉구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길을 잃은 탕자라면, 그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인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하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과 주변인들에 대한 관찰력, 각 인물들의 내면 심리 묘사, 아버지의 두 손이 서로 다르다는 것 등을 감지해내는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가 이 그림에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깊이 있게 감상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림에 빨려 들어갈 듯한 깊은 감상을 통해 열린 더욱 깊은 묵상은 놀라움을 줌과 동시에 감동과 큰 은혜를 선사한다.

 

저자는 자신의 모습을 탕자에서 큰아들의 모습으로 빗대는 순서를 거쳐, 끝내 슬픔과 용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징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받아들이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대부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부르심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우웬은 이보다 ‘더 큰 부르심’을 듣게 한다. 용서하고, 화해하며, 치유하고, 잔칫상을 내미는 두 손이 바로 우리의 손이어야 한다는 소명이다.

 

우린 매일, 매시간 떠나고 돌아오길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힘겨운 시간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 뭔가를 해보려다 쓰러진 자녀를 비웃지 않으신다. ‘귀향’의 조건으로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채 잘못을 고백하는 걸 요구하지도 않으신다. 예수는 한없는 관용과 용서로 자녀를 안타깝게 떠나보냈다가 돌아오기만 하면 반가이 집안으로 맞아들이신다.

 

꿇은 아들을 감싸 안은 늙은 아버지의 그 사랑. 고향에서 기다리는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다. 조건을 뛰어넘는 그 사랑, 자격과 상관없이 받을 수 있는 그 사랑. 하늘 아버지가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이 사랑이리라. 귀향길은 화해의 길이다. 사랑의 길이다.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아들로서 사랑을 받는 길. 그 길은 배움의 길이다. ‘아버지처럼 용서하고,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삶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선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일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여정에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참을성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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