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도 잊혀지지 않는 고통의 기억들, 마음을 여는 진실한 의사소통으로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받은 마음의 상처는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평생에 걸쳐 나타난다. 어린 시절에 겪은 불안과 좌절, 원망과 두려움은 아이의 신체와 정신에 각인되어 인생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아동심리학자 앨리스 밀러는 무조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종교적 관념과 부모에 대한 원망을 금기시하는 도덕적 규범이 학대받은 아이들의 정당한 분노를 억압하며, 자아의 혼란과 질병의 고통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어머니 눈 밖에 나서 발작이 멈추느니, 차라리 발작이 나더라도 어머니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고 싶어요.” (마르셀 프루스트,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평생 천식으로 고통 받았던 소설가 프루스트.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에 저항할 수 없었던 그의 처지와 천식이 무관하지 않다. 프루스트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조차 잃게 될까 봐 늘 전전긍긍했다. 어머니의 눈 밖에 나느니 차라리 발작을 택하겠다는 그의 태도는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아이의 애정에 대한 왜곡된 집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소설가 중에서도 기억력이 뛰어나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린 시절이 기억을 놀랄 만큼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그 기억력의 산물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하기까지 걸린 세월은 무려 14년. 일체의 소리가 스며들지 못하게 막아놓은 코르크로 둘러싼 밀실에 천식과 싸워가면서 소설을 써내려갔다. 흥미로운 사실은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 시기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였다. 프루스트의 지독하면서도 외곬에 가까운 추억을 묘사하는 진지함은 어쩌면 특출한 기억력이 아니라 어머니의 상실에서 비롯된 고통과 허전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천식 발작을 참을 수 있게 만들 정도로 허약한 자신을 지탱해주는 커다란 존재의 상실감은 38세의 젊은 프루스트에게는 감당하기에는 벅찼을 것이다. 몸과 마음을 조이는 천식 발작을 멈추기 위해서 죽은 어머니를 되살려야 했다. 그런 유일한 방법이 바로 소설을 쓰는 것. 결국 프루스트는 모든 기억을 토해내듯이 써내려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원고를 마지막까지 손보다가 세상을 떠났다. 14년 동안 이어진 코르크 밀실 속에서의 고행이 끝나는 순간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나’(마르셀)에게 어릴 적 기억과 감각을 되살려주게 만드는 추억의 매개물을 제공한다. 여기서 그 매개물이 바로 그 유명한 마들렌과 홍차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으로 기계적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면 고립시켰다. (85~86쪽)

 

찰나의 미각이 과거의 부활을 불러일으키는 이 감각적 전환의 장면은 단순히 우연히 맛보는 마들렌과 홍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마들렌과 홍차를 ‘나’에게 준 어머니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루스트 연구가에 의하면 프루스트 회상의 배경에는 어머니의 존재가 크다고 말한다. 프루스트가 단지 마들렌을 즐겨 먹을 정도로 좋아해서 추억의 매개물로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히 마들렌을 사오게 한 어머니의 모습을 프루스트는 잊지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프루스트의 각별한 애정이 없다면 우리는 마들렌과 홍차가 연출한 이 유명하고도 너무나도 섬세한 장면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연과 감성에서 비롯된 기억을 ‘비의지적 기억’이라 하면, 의지와 지성에서 비롯된 기억은 ‘의지적 기억’이라고 한다. 전자의 기억은 과거에 대한 총제적인 삶의 장면을 그려내지만, 후자의 기억은 단편적인 부분의 장면에 불과하다. 마르셀이 입 안에 홍차에 의해서 녹아드는 마들렌 조각에서 감미로운 회상에 젖어드는 것은 비의지적 기억이다. 어머니가 준 마들렌과 홍차를 통해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레오니 아주머니라는 분이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을 발견한다.

 

반대로 평생 프루스트의 삶에서 떨어지지 않은 어머니는 작가의 의지적 기억을 이끌어낸다. 프루스트는 소설을 쓰는 동안 어두컴컴한 밀실 속에 지내는 느낌에서 방에 홀로 어머니를 기다렸던 유년 시절의 그리움이 떠올렸을 것이다.

 

어린 마르셀은 잠들기 전에 어머니의 키스를 받고 싶어 한다. 어머니의 키스는 마르셀에게는 유일한 삶의 위안이다. 늦은 저녁식사 때문에 어머니가 자신의 방에 찾아오지 않거나 어머니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모습에 어린 마르셀은 무척 괴로워한다. 앞에서 언급한 밀러의 주장대로라면 어머니의 키스를 원하는 어린 마르셀의 모습은 어른이 돼서도 어머니의 애정에 집착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프루스트는 어머니의 키스를 그리워하고, 어머니가 자신의 곁을 떠나면서 생기는 유년기 특유의 불안감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잠을 자러 올라갈 때 내 유일한 위안은 내가 침대에 누우면 엄마가 와서 키스해 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녁 인사는 너무도 짧았고 엄마는 너무 빨리 내려갔기 때문에, 엄마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문짝이 두 개 달린 복도에서 밀짚을 엮어 만든 작운 술이 달린 푸른빛 모슬린 정원용 드레스가 가볍게 끌리는 소리가 들릴 대가 내게는 정말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다음에 올 순간을, 엄마가 내 곁을 떠나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을 예고해 주었기 때문이다. (32쪽)

 

어머니가 자신의 방으로 오는 소리만 들어도 어린 마르셀은 벌써부터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고독을 예감했고, 무척 견디기 어려웠다. 마르셀은 어머니의 키스로만으로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 곁에만 있어주길 원했다.

 

비의지적 기억은 한 번 떠올리게 되면 그 때 그 미묘한 감정적 변화의 순간을 재현할 수 없다. 마르셀은 또다시 마들렌과 홍차를 먹어보지만, 순간적으로 밀려온 특별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 반면 의지적 기억은 금방 잊혀질 수 있는 단편적인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다. 어머니에 대한 프루스트의 비의지적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하게 만드는 중요한 소재이면서도 동시에 평생 작가를 괴롭힌 병적 집착이다. 유년 시절 속 어머니를 묘사하기 위해서 프루스트는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서랍에 깊숙이 숨겨왔던 기억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태양도 끝날 날이 있을까. 작가 이병주는 중편소설 ‘예낭 풍물지’의 맨 마지막 문장을 “태양도 끝날 날이 있다”로 끝맺는다. 감옥에서 나온 폐병환자인 주인공에게 어머니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주인공은 “어머니가 숨을 거두는 날, 나는 지구도 그 맥박이 멎을 것을 확신한다”며 비통해 한다. 어머니의 부재(不在)는 곧 태양이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가 없으면 태양이 시들고, 지구가 시시해진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하늘이자 땅이다. 엄마 없는 유년은 빈방처럼 썰렁하고, 찬밥처럼 시들하다. 엄마를 기다리는 기형도 시인의 유년 풍경이 그렇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

 

 

그리운 어머니는 항상 늦게 온다. 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에서처럼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안 오시는 것이 엄마다. 프루스트는 방으로 찾아오는 어머니의 발걸음 소리에 불안감을 예감했다면, 기형도는 그리워하는 존재의 등장을 암시하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은 상황에 초조해하고 불안에 떤다. 어머니의 부재가 만든 상실감을 잊기 위해서 어린 시인은 혼자 엎드려 훌쩍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리운 것은 사라진 자리에서만 그 실체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기형도의 이 시에 대한 김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년 시절에 느낀 엄마 걱정은 무섭고 괴로웠지만, 성인이 된 시점에서는 그리움으로 받아들인다.

 

죽은 어머니의 모습과 그녀의 존재를 통해서 느꼈던 불안하고 괴로웠던 부정적 기억을 프루스트도 소설로 그리움으로 환기시키는 동시에 치환시킨다. 그렇다고 부정적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때 그 기억의 장면이 마음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프루스트와 기형도는 ‘어머니’라는 여백에 남아있는 허전한 추억을 소설과 시로 채우고 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은 항상 이렇게 늦다. 사라지고 나서야 어머니를 떠올린다. 사실 떠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떠났기 때문에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없음으로 해서 있었던 사실을 각인시키는 부재의 역설이다. 없는 자리, 사라진 자리에서야 그 존재의 지극함을 깨닫는 애통함은 모든 ‘있는 것’이 있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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