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인간관계 모두가 사이로 통하고 있다.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람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람은 사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이는 소통의 공간이며 시간 속에 존재한다. 또한 사이는 틀림이 아닌 서로 다름의 영역일 것이다. 사이가 망가지면 갈등이 발생하고 갈등은 왜곡된 신념으로 굳어져 공격적인 분노의식으로 표출되거나 우울감으로 빠져들 수 있다. 인간은 우주 속에서 인간, 시간, 공간의 삼간을 떨쳐버리고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섬에 가고 싶다’하여 희망을 가져볼 수 있겠지만 결국 섬이란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고립이라는 심리적 거리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누군들 고립이 두렵지 않을까. 고립을 피하는 길이 있다. 그런데 갈림길이다. 하나는 고립을 피해 경쟁하는 길이다. 경쟁에서 이기면 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섬에 갇힌 이들과 함께할 수는 없다.

 

또다른 길이 있다. 고립을 피해 연대하는 길이다.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나뿐만 아니라 너도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가시밭길이다. 그래서 우리들 다수는 두 눈 질끈 감고 이 길을 외면한다.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비겁에 익숙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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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서평단 모집]

논어는 재미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버려라! 

『한글 논어』퍼스트 서평단 모집(5/28~6/3)


 

안녕하세요. 파니파니 입니다 :) 요즘 유난히 자주 찾아뵙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신간소식과 함께 특별한 이벤트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바로바로 신간을 제일 먼저 만나볼 수 있는 퍼스트 서평단의 기회

(응? 별로라고요? 책소개를 보고 나면 달라지실걸요?!)


 

 

 


 

일단 책 소개부터 차근차근히 드려보겠습니다.

이제 딱 일주일 아..아니 2주 뒤면 출간될 예정인 판미동의 신간은

바로바로바로바로 『한글논어』입니다! 

(위에서 벌써 다 말해놓고 기대감 만들기 ㅋㅋㅋ )
 

파니파니가 표지 디자인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디자이너님께 달려가서 찍어 온 따끈따끈한 『한글논어』의 표지!

 

디자이너님의 말로는 지금은 시안이라 초록초록부분이 그냥 종이이지만

실제로 책이 나오면 저 부분이 무려 반짝반짝 (뭐..뭐라하죠? 금박?;;;)한 종이를 덧씌워서

완전 럭셔리하게 양장으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벌써부터 무지하게 기대됩니다)

 

『한글 논어』는 대한민국의 대표 인문학자!

고려대학교 신청호 교수님이 만든 논어의 한글독해 버전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뭐...뭐라? 논어가 뭐냐고요?!!!!

논어는 사서 중의 하나로 중국 최초의 어록입니다.

바로 우리가 너무나도 잘아는 공자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죠.


 

공자가 좋은 말을 많이 쓰신 건 알지만, 중국의 책이기에

한자로 쓰여져 있어 그 풀이를 쉽게 할 수 없었고 이해도 어려웠는데요.

저처럼 『논어』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진 책이

바로 『한글논어』인거죠! (책에 대한 관심이 마구마구 샘솟지 않으시나요?)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의 본론인 [퍼스트 서평단] 소식을 전하겠습니다!!(와아와아~)



 


[서평단 모집]

『한글논어』 퍼스트 서평단(리뷰어)를 모집합니다.


좋은 책일수록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 바로 파니파니의 마음! 

그래서『한글 논어』를 가장 빨리 만나볼 퍼스트(First) 서평단을 뽑기로 하였습니다.

 

▶ 대상 도서 : 논어는 재미없다는 편견을 버려라!『한글논어』

▶ 모집인원 : 『한글 논어』를 읽고 생생한 리뷰를 전달해줄 독자 딱 5명!


▶ 퍼스트 서평단 혜택 :

하나,『한글논어』양장본을 무료로 그것도 제일 먼저 받아볼 수 있다!

둘, 다음 판미동 신간도서를 조건없이 제일 먼저 받아 볼 수 있다!

셋, 가장 생생한 리뷰를 작성한 단, 1명의 독자는 특별 선물까지 받을 수 있다!

(특별 선물은 비밀이오, 쉿쉿 나중에 공개할거에요)


★퍼스트 서평단 신청하기★

하나, 개인 SNS(블로그,페이스북,트위터)에 서평단 모집글을 공유한다!

둘, 공유한 URL과 함께 퍼스트 서평단이 되고 싶은 이유를 게시글에 댓글로 작성한다!


▶ 퍼스트 서평단 모집기간 : 5/28(수)~6/3(화) / 당첨자 발표 : 6/5(목)




 

삶의 지혜를 배울수 있는 논어책을 재미있게 읽자! 판미동 6월의 신간도서

『한글논어』많이 기대해주시고 퍼스트 서평단에도 많은 관심과 지원 부탁드립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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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존 암스트롱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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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참 빠르다. 벌써 5월 말이다. 젠장,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갔다니. 매번 시간의 끝에 서있으면 허덕거린다. 시간은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고, 아직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단하고 치열했던 지난날을 반추하고 나만의 영혼이 성숙되어야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투명한 유리벽에 갇힌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유리벽 밖으로 세상은 보이는데 정작 만져지지 않는 답답함은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인생이 답답하고 지치면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 가보자. 화보집을 연상시키는 크기의 책으로 들어서는 순간, ‘유리벽’에 둘러싸인 인생살이에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리벽 밖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좋은 비상구가 된다.

 

 

 

 

피에르 만초니  「예술가의 똥」  1961년

 

그러나 『영혼의 미술관』에 입장하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책이 두껍고 무거운 편이지만 여전히 ‘미술’이라는 단어가 어려워서 그 곳으로 들어가기가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미술을 왜 어려워하는 걸까. 나만의 생각일 수 있겠지만, 그건 결국 미술이 우리 삶에 밀착할 정도로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똥인지 작품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실제로 똥이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 현대미술이다. 피에르 만초니라는 예술가는 자신의 똥을 깡통으로 포장해서 ‘예술작품’이라고 규정했다. 제목은 ‘예술가의 똥’, 제목만 봐도 그의 예술적(?) 의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라는 단어가 없다면 그냥 똥이다. 미술작품이 될 수 없다.

 

현대미술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미 오래전에 마르셀 뒤샹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화장실 변기에 사인만 한 채 미술관에 전시했다. 데미안 허스트는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담긴 유리관에 죽은 상어 시체를 보관해 13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팔렸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적 의도와 상징성을 드러내는 걸 꺼려하면서 대중에게 자신의 작품을 이해해달라고 떼를 쓰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 세상에 없는 예술가의 작품일수록 대중은 더욱 곤혹스럽다. 뒤샹은 화장실 변기를 왜 예술작품이라고 우기는 걸까? 너무나 궁금해서 따지고 싶어도 예술가에게 직접 물어볼 기회가 없다. 죽은 예술가는 말이 없다.

 

우리가 예술을 멀리하게 만드는 가장 큰 문제는 주류 예술계가 예술을 비싸게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개인의 이해나 감성이 부족하다고해서 예술을 어렵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술은 예술가들을 위한 고결한 영역이 아니라 우리 삶을 위한 감상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예술에 대한 사람들마다 각각 인식의 차이가 있겠으나 그림을 보고 감상하는데 있어 정답이란 없다고 본다. 눈으로 그림을 보면서 머리로 예술가의 의도를 억지로 알아내려고 하면 예술이 어렵게 느껴진다. 예술가가 그림을 그린 이유와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상징성 등을 알면 좋지만, 오히려 감상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림을 보는 것과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색채와 묘사가 마음에 들어서 그림을 보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그림을 읽는 것이고, 후자는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림을 읽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을 좀 더 친근하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감정이 끌리는 대로 그림을 보는 것이 낫다. 괜히 똑똑하게 보이려고 그림 앞에서 힘 줄 필요는 없다. 우선 별 흥미를 못 느끼는 작품일지라도 그 시대 예술가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자신의 경험과 사고방식에 연결점을 찾는 것도 좋다.

 

고단한 세월에 단단하게 뭉쳐진 마음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는 예술의 역할은 가장 중요하다. 그림을 볼 때 자신만의 자유롭고 엉뚱한 시선도 괜찮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자아와 타자 등 이분법적 논리에 갇힌 ‘유리벽’을 파괴시킬 수만 있다면.

 

예술에 관심을 가진다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삶이 고단할수록 아름다운 그림은 우리를 더 감동시킨다. 아름다운 그림이 슬픔을 전달해서가 아니다. 그림을 볼 때 그 아름다움과 대비되는 삶의 고단함과 슬픔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인생의 고난을 겪으며 성숙해질 때 예술의 아름다움을 더욱 더 음미할 수 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해변의 암초」  1825년경

 

“예쁜 미술작품의 쾌감은 불만족에서 기인한다. 만일 인생이 고되지 않다고 느낀다면, 아름다움은 현재와 같은 호소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20쪽)

 

 

예술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 삶의 조건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특히 낭만주의적 의미로 숭고함을 지닌 작품들이 그러하다. 별이나 대양, 거대한 산맥이나 대륙의 단층을 묘사한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암초」를 마주하면 삶의 좌절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라는 광대한 세상의 부분적인 과정임을 알게 된다. 그 앞에서 우리는 즐거운 공포에 휩싸이고 영원의 존재 양상에 비해 인간의 불행이란 게 얼마나 사소한지 느끼면서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깨닫는다.

 

드 보통은 예술의 7가지 기능으로 기억, 희망, 슬픔, 균형 회복, 자기 이해, 성장, 감상을 분류한다. 『영혼의 미술관』의 전시실은 드 보통의 분류대로 7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나쁜 기억을 교정해 주고, 희망을 주며 삶에서 슬픔이 차지하는 정당한 위치를 깨닫게 해서 슬픔에 대한 내성을 키우게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하며 자기 자신을 좀 더 이해하도록 이끌고,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 노릇을 한다. 마지막으로 감수성을 회복하고 옛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도록 이끌어준다. 전시 순서(목차)대로 보는 것보다는 마음 가는대로 평소 관심 있는 전시실에 들어가도 좋다. 슬픔을 견디기 어렵다면 ‘슬픔’ 전시실에 가면 되고, 이번 기회에 자신을 성찰하고 싶다면 ‘자기 이해’ 전시실로 간다. 『영혼의 미술관』은 그저 그림을 보기 위한 엄숙한 곳이 아니다. 우리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자유롭고 편안한 곳이다.

 

‘균형 회복’이라는 이름이 붙인 전시실에 가면 삶에 허전한 부분을 채우고 보완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예술이 주는 균형감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질서를 다시금 확인하게 하며, 우리의 열정을 자극시킨다. 예술은 우리의 어떤 타고난 약점들, 심리적 결함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약점들을 보완해준다. 『영혼의 미술관』에 가면 반갑게도 한국의 백자 항아리를 만날 수 있다. 드 보통은 백자를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본다. 한국의 백자는 완벽하게 이상적인 타원형으로 이루어지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시선에서 한 발 벗어나 있다. 스스로를 특별하게 봐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니콜로 피사노  「목가시 : 다프니스와 클로에」  1500~1501년경

 

그는 여기서도 ‘사랑’을 얘기한다. 전작에서도 ‘사랑’을 주제로 글을 쓴 만큼 ‘사랑’을 논하지 않는 드 보통은 그의 벗겨진 머리처럼 허전하다. 사랑. 우리 인생에 있어서 행복과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뜨거운 마음이 식어버리면 치명적인 상처로 변해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사랑에 쉽게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 두 단어로 이루어진 감정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사랑이 없는 삶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허허벌판의 사막과 같다. 그 곳 한가운데에 서 있기만 하면 갈증이 생긴다. 사랑은 곧 우리 메마른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준다. 그래서 사랑을 느끼기 위한 우리의 호기심과 노력은 멈출 줄 모른다. 니콜로 피사노의 그림 「목가시 : 다프니스와 클로에」 는 그동안 살아가면서 잊고 있었던 사랑의 감정을 되살려준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예술이 어렵다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예술을 찾게 된다. 우리 삶에서 사랑이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결국 예술도 우리 삶에서 때려야 뗄 수 없다. 예술은 세상의 유리벽에 갇혀 훌쩍해진 영혼을 살찌우게 만든다. 예술은 사랑의 교훈을 담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우리의 마음 앞에 붙들어놓는 역할을 한다.

 

이제 예술로서 우리가 잊고 있던, 잃어버린 삶의 일부를 찾아야 한다. 그림을 통해 치유와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숟가락 하나라도 품격 있는 것을 고르는 일부터 주거. 도로 등 환경을 개선하는 일까지, 광범위하면서도 구체적인 생활상의 일들이다. 『영혼의 미술관』을 전체적으로 다 둘러봤다면 이런 문장이 적힌 출구로 나가면 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필요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232쪽)

 

과유불급이라고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예술에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일상과 동떨어지게 된다면 ‘치유를 위한 예술’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되고 만다. 예술 자체가 인생의 최고 목적이 아니다. 예술지상주의는 현실 지향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스스로 예술이라는 벽에 갇히게 된다. 과연 드 보통의 생각대로 예술작품이 덜 필요해지는 세계가 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세상은 점점 더 각박해져만 가고, 지친 현대의 영혼들은 또다시 『영혼의 미술관』으로 찾으러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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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슬픈 편지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치지 못한 채 서랍 한쪽 구석에 보관된 편지도 있을 것이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에게 부치는 편지도 있다. 편지라고 해서 꼭 편지지에 쓰라는 법은 없다. 가끔 누군가에게 책 선물을 할 때 하얀 속종이가 편지지가 되기도 한다.

 

감성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 사랑하는 이성에게 주는 책에 편지를 쓰는 것은 무척 낭만적이다. 책을 받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게 된다. 그런데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때 책에 편지 쓰는 것은 좋지만, 분위기를 파악해야 한다. 책을 깨끗하게 읽고 보관하는 성격의 사람이라면 선물 받은 책에 누군가의 글씨체가 있으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책 편지를 쓰기 전에 상대방이 책을 다루는 습성은 알고 있어야 한다. 편지를 쓰고 싶다면 차라리 속종이에 쓰는 것보다는 작은 엽서나 편지지에 써서 책 사이에 끼워 넣는 것이 낫다. 

 

중요한 편지가 아닌 이상 오래 보관하기 힘들다.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으면 정성껏 쓴 편지도 슬프게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경우도 있다. 책 편지는 책 속에 적힌 글이기 때문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가능성은 없지만, 문제는 책이 오래 보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책은 헌책방에 팔 수 있다. 헌책방에 가면 속종이에 편지가 적힌 책을 가끔 발견한다. 책을 팔기 전에 편지를 확인했을까? 오랜 세월이 지나서 책 속에 적힌 편지를 기억 못한 채 팔 수 있다. 그리고 책 선물을 준 사람을 잊기 위해서 일부러 헌책방에 파는 것일 수도... 그래서 헌책방에 이런 책 편지를 보게 되면 꼼꼼하게 읽어본다. 편지 속에 숨겨진 사연이 무척 궁금하다. 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몸속에 편지를 쓴 사람이, 그리고 그 편지를 읽은 사람이 누군지를.

 

만약에 헌책방에서 우연히 자신이 쓴 편지가 적힌 책을 발견하면 어떤 심정일까? 과거에 썼던 편지가 오랜만에 보게 되면 감회가 새로울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씁쓸할 것이다. 아무리 책을 보관하기 힘들고, 안 읽는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받은 책 선물을 쉽게 파는 것은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 될 수 있다. 작년에 도올 김용옥 선생이 홍준표 의원에게 선물했던 책이 헌책방이 발견돼 홍 의원이 사과한 적이 있었다. 그 문제의 책이 하필 도올 선생이 쓴 『동경대전』이었다. 속표지에 도올 선생의 친필 사인과 ‘홍준표 의원님께’라는 글씨가 있어서 딱 걸리고 만 것이다.

 

책의 전 주인에 관한 기록이 편지로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아무리 책의 내용이 좋아도 선뜻 구입하기가 망설여진다. 도올 선생의 책처럼 유명 인사의 사인이 있다거나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을법한 유명 인사의 편지가 적혀 있다면 몰라도 남이 쓴 편지가 내가 읽어야 할 책에 있다는 것은 영 탐탁치가 않다.

 

나는 편지가 적힌 책이 보존 상태가 만족스러우면 사는 편이다. 원래 책을 사기 전에 편지가 적혀 있는지 확인하는데 가끔 그걸 미처 확인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도 책의 전 주인의 흔적이 있다고 해도 괜히 편지가 적힌 부분을 오려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책은 한 사람의 주인 곁에 오래 있거나 아니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헌책방에 전전하는 운명, 그 둘 중 하나이다. 헌책방에서 책을 구입하는데 있어서 책 편지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편지 속 내용을 보면 감탄하게 된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감성이 느껴지는 시적 문장은 빛난다. 왜 이런 좋은 내용의 편지가 적힌 책을 파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괜히 내가 그 편지를 쓴 무명인의 심정처럼 씁쓸하고 약간의 슬픈 감정도 느낀다.  내가 발견한 책 편지들은 사랑하는 이성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같다. 

 

올해 초에 서울 청계천 헌책방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구입했는데 뜻밖에도 속표지에 짧지 않은 편지가 적힌 것을 발견했다.

 

 

 

 

 

‘승희’라는 이름의 여자에게 보낸 편지다. 문장으로 봐서는 필체가 상당한 걸로 보인다. 글씨도 무척 잘 쓴다. 내용으로 봐서는 승희는 어느 남자에게 음악 CD를 선물로 줬다. 승희는 솔로 가수가 아닌 여성 그룹의 멤버이며 2004년에 정식 데뷔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남자는 이 책을 선물했다. 아마도 마음속으로 사랑했던 여자였는데 가수가 되어서 상경했을 것이다. 남자 입장에서는 그녀의 성공이 기쁘고 자랑스럽겠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에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삶은 어쩔 수 없는 비극인가 보다’라는 문장에서 짝사랑으로 끝나버린 어느 남자의 슬픈 비극이 연상된다. 결국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사랑해’ 대신에 ‘행복해라’ 밖에 없다.


남성은 승희에게 고독하면 행복할 수 있다고 전한다. 무슨 의미일까? 참으로 역설적인 표현이다. 고독과 행복은 함께 공존한다...?  이 편지 속 사연이 무척 궁금하게 만드는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다. 10년이 지난 책 편지는 지나간 추억이 되어 망각의 감옥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걸 또 내가 영영 오랫동안 잊힐 뻔했던 망각의 감옥에서 구출한 것이다. 과연 승희는 어떤 가수였을까? 아마도 승희는 본명일 수도 있겠다.

 

지난주에 내가 자주 다니는 헌책방에서 책 편지가 있는 책을 구입했다. 이번에는 정현종 시인의 시집 『나는 별 아저씨』다. 이 시집이 출간된 지 꽤 오래됐고, 편지 또한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에 기록된 것이다.

 

 

 

 

 

시집에 걸맞은 한 편의 시 같은 편지다. 편지를 쓴 사람은 평소에 시집을 많이 읽고, 좋아했다. 그래도 자신은 시를 잘 알지 못한다고 겸손의 표현을 썼다. 생일선물로 시집을 줬는데 시를 읽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느낄 것을 권한다. 참으로 좋은 편지 내용이다. 문장 속에 삶의 여유가 살짝 묻어있다. 1993년에 편지를 쓴 사람은 지금도 어디선가 변함없이 시를 즐겨 읽고, 그 시간을 통해 여유를 느끼면서 잘 지내고 있을까? 누군지 몰라도 이런 편지가 무척 고맙다. ‘객관적 상황이 열악하더라도 가슴 속에도 많은 여유가 찾아들기를 바란다’ 남이 쓴 편지는 전혀 관련 없는 다른 사람에게 삶에 힘을 불어넣는 좋은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시집에 있는 편지 덕분에 삶의 여유의 가치를 느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1년 전에 쓴 편지가 시간을 초월해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 읽게 되는 이 운명적인 만남. 이런 편지 한 통이 과거와 현재를 ‘감성적 공감’이라는 무언의 감정으로 연결될 때가 있다. 이래서 사는 게 참 재미있고 신기한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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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5-28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어떻게 도올 선생은 자기 책이 헌책방에서 딱걸렸을까?ㅎ
이 페이퍼 승희라는 가수한테 딱 걸리는 거 아닐까?
이맛에 헌책방을 다니기도 하겠지?
그런데 바로 이점 때문에 책에 자기 서명이나 인삿말이 들어가는 게 조심스러워져.
책선물에 밋밋하게 그냥 주기도 뭐하고.
나도 요즘 헌책방에 책을 내다 팔곤하는데
저자 사인본은 차마 못 팔겠더라.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팔자니 그렇고, 안 팔자니 그렇고...
그래도 가지고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 간직하고 있다만.ㅠ
그런데 진짜 저 준호라는 사람 글 잘 쓴다. ㅎ

cyrus 2014-05-28 22:43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가수 중에 '승희'라는 이름은 없는 것 같아요. 설마 이런 조용한 블로그를 보겠어요? ㅎㅎㅎ 저는 사인본은 절대로 팔지 않아요. 저자의 사인이 있는 책은 보통 책보다 가치가 높고, 특별하니까요. ^^
 

 

 

 

 

 

조르주 루오  「늙은 왕」  1936년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갖아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에서)

 

어떤 의미에서 왕 또는 리더가 된다는 것은 시인 홍사용이 노래한 것처럼 영원으로부터 추방된 인간이 시간 속의 삶이라는 무거운 고통의 짐을 지는 것과 비유할 수도 있다. ‘눈물의 왕’은 설움이 넘치는 모든 땅의 왕이다.

 

 

 

 

 

 

 

 

 

 

 

 

 

 

 

 

여기 그림 속 왕도 지금 슬픔에 빠져 있다. 조르주 루오의 『늙은 왕』은 전혀 왕의 권위나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다. 늙은 왕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지만, 그 역시 견디기 힘든 슬픔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것이다.

 

루오는 순종과 고통, 죽음과 부활 같은 종교적 주제를 화폭에 담았다. 『늙은 왕』에서도 루오가 평소 다루던 주제가 부각되어 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는 말이 있듯이 왕에게 권력은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 된다. 리더는 고독하다. 더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을 지고 고난의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 왕을 감싸고 있는 깊은 물속 같은 어두운 청록색은 침통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자신의 턱 밑 가까이 오게 될 죽음의 공포가 두렵고 생각만 할수록 잠이 오지 않는다.

 

‘어머님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에서) 왕은 남모르게 소리 없이 혼자 눈물을 흘릴 것이다. 눈물은 인간이 흘리는 생리적 액체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슬픔을 가장 잘 나타내는 침묵의 언어이기도 하다. 신하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면 자신이 나약한 왕임을 심어주어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잃을 수 있다.

 

'눈물의 왕‘과 늙은 왕은 절대 권력의 왕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슬픔과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껴안은 자다. 그의 삶을 지배하는 슬픔의 원인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왕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픔과 절망을 경험한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감상적인 지도자는 자칫 스스로의 존엄성을 잃게 만들 수 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냉정한 자세를 가져야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던 것처럼 눈물을 먼저 흘리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왕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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