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헌책방이나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면 황금가지 출판사의 ‘환상문학전집’ 시리즈를 구입한다. 2002년에 환상문학전집 첫 번째 책인 E.T.A. 호프만의 『악마의 묘약』을 시작으로 고딕문학에서 현대 SF까지 총 40여 권 이상의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하지만 초창기에 나온 시리즈 일부는 절판되어 헌책방에서도 구하기가 쉽지 않은 희귀본이라서 온라인 중고서점에 정가보다 엄청 높은 가격으로 책정되고 있다. 정말 그 책을 읽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거금을 지르는 결단력을 내리기도 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고작 책 한 권으로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다. 그래서 아주 싼 가격에 책을 구입하게 되면 정말 운이 좋은 것이다. 이런 걸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면 ‘개이득’이다.

 

 

 

 

 

 

 

 

 

 

 

 

 

 

 

 

 

 

(※ 왼쪽은 1998년에 나온 구판) 

 

 

 

환상문학전집 세 번째 작품 에드거 앨런 포의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은 올해 구입한 책들 중에서 운이 많이 따라줬다. 두 달 전에 포의 단편 전집을 읽고 있을 때 알라딘 대구점에서 구입했다.

 

『아서 고든 핌의 모험』(줄여서 ‘아서 고든 핌’)은 1838년에 발표한 포의 장편소설이다. 단편소설과 시를 많이 남긴 작가의 이력이 장편소설의 가치를 가리고 있지만, 단편소설에서 보여준 괴이한 공포 분위기와 그 속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물의 심리 묘사는 장편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간략한 작가 이력 소개에 보면 『아서 고든 핌』을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라고 썼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1) 1840년에 포는 『The Journal of Julius Rodman』라는 잡지에 연재되는 모험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The Journal of Julius Rodman』은 1792년에 처음으로 로키 산맥을 넘어 미국 서부 황야 지역을 탐험한 Julius Rodman의 일기를 소설로 재구성한 내용이다.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어 오랫동안 잊히고 있었다가 1947년에 재출간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아서 고든 핌』은 환상소설의 특성을 가미한 모험소설이다. 1830~1840년대 모험소설은 독자들로 하여금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도전 정신을 고취시키는 통속적인 내용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포의 『아서 고든 핌』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공포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남극으로 가는 긴 바닷길을 장시간 항해를 하면서 겪게 되는 불의의 재난 사고와 이성이 말살되는 끔찍한 살육 현장은 여행의 긍정적 호기심과 도전 정신에 감춰진 어두운 단면이다. 특히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파괴하는 거대한 폭풍과 파도 앞에서 두려워하는 핌의 심리는 『아서 고든 핌』발표 3년 후에 나온 단편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다’를 예고한다. 이 작품에 포는 무시무시한 소용돌이 파도의 위력을 묘사했다. 

 

여기에 『아서 고든 핌』의 간략한 줄거리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알라딘 책 소개에 아주 친절하게도 줄거리가 요약되어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서 고든 핌과 나머지 생존한 동료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만나는 공포의 난파선이다. 어렸을 때 아동도서에서 많이 나오는 미스터리 에피소드인 ‘유령선’ 이야기가 생각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독자가 가장 몰입하게 되는 장면이 바로 ‘죽음의 제비뽑기’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핌과 동료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자 제비뽑기로 ‘음식’이 될 희생자를 정하게 된다. 이 잔인한 장면은 비록 4쪽에 불과하지만 생존의 한계에 부닥치는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광기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어렸을 때 아동용으로 만들어진 미스터리 모음집을 즐겨 본 사람이라면 『아서 고든 핌』의 ‘죽음의 제비뽑기’ 장면을 떠올리는 실제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884년에 영국의 미뇨넷 호라는 배가 희망봉 앞바다에서 난파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살아남은 선원은 단 4명. 이들은 작은 구명보트에 탑승한 채 열흘 이상 표류하게 된다. 하루하루 구조를 기다리지만, 점점 식수와 비상식량이 줄어들고 있었다. 구조선을 만나지 못하면 4명의 선원들도 굶어죽게 될 판이었다. 어느 날, 가장 나이가 어린 선원이 병에 걸려 몸이 약해지자 선장인 더들리는 나머지 두 명의 선원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바로 제비뽑기를 해서 한 사람을 희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의 선원은 선장의 제안을 거절한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어찌 동료를 죽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선장 더들리는 자신의 제안을 동의한 선원과 함께 어린 선원을 살해하고 그의 인육을 먹게 된다. 표류 24일 만에 더들리 선장과 두 명의 선원은 구조되었으나 영국으로 귀국한 후 그들은 계획된 살인이라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그 후에 미뇨넷 호의 생존자들은 특사에 의해 6개월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생존자들은 단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항변했으나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생존을 위해 인육을 먹은 것이 죄가 되는지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미뇨넷 호 사건이 흥미로운 화제가 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서 고든 핌』에 나오는 ‘죽음의 제비뽑기’ 내용과 아주 흡사한 점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미뇨넷 호에 희생된 어린 선원의 이름이 소설 속에서 희생된 인물의 이름과 같다는 것이다.*2)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소설은 제비뽑기에 걸린 선원이 살해되었고, 미뇨넷 호 사건의 경우는 제비뽑기 제안이 거부당하자 병이 들어 생존할 가능성이 희박한 선원을 살해했다. 단지 희생자의 이름이 같다는 우연한 사실에 지금까지도 포의 소설과 미뇨넷 호 사건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다. 미뇨넷 호의 생존자들은 여태까지 『아서 고든 핌』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으며, 포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한다.*3)

 

『아서 고든 핌』의 초반부는 갑판 밑 창고에 숨은 핌이 밀실 공포와 악몽에 시달리고, 배가 난파되어 표류되는 상황을 그렸다면, 후반부는 영국 리버풀의 제인 가이 호에 구출되어 살랄 섬이라는 신비스러운 곳에서 겪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살람 섬에 대한 묘사는 이 소설에서 포의 상상력이 가장 돋보이는 내용이다. 핌은 살랄 섬 해안 부근에 정체불명의 육지 동물의 시체를 발견하고, 여러 가지 빛깔을 띠는 특이한 물을 신기하게 여긴다. 이에 대한 묘사는 문학작품 속 환상적인 장면을 모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까치, 1994년-절판)에도 소개되고 있다.

 

 

 

 

우리는 또한 호손 나무처럼 붉은 열매가 달린 관목도 건져 올렸으며, 이상하게 생긴 육지 동물의 시체도 건져 올렸다. 길이는 90센티미터였지만 키는 180센티미터였고, 아주 짧은 네 다리가 있었는데, 발은 산호같이 선명한 진홍빛이었다. 몸은 곧고 순백색의 비단 같은 털에 덮여 있었다. 꼬리는 쥐처럼 서 있었고 45센티미터 정도였다. 머리는 귀를 제외하고는 고양이를 닮았는데, 귀는 마치 개의 귀처럼 꺾여 있었다. 그리고 이빨은 발과 마찬가지로 선명한 진홍빛이었다. (『아서 고든 핌의 모험』 중에서, 175쪽)

 

 

『아서 고든 핌』의 결말은 이야기가 도중에 끊겨버리는 것처럼 급작스럽게 끝나버리고 만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포다운 결말이다. 포는 결말마저도 수수께끼를 남겨두었다. 이러한 방식은 주인공이 미지를 개척하는데 성공하게 된다는 기존의 모험소설 결론과 차별화되는 시도이다. 포가 어떤 수수께끼를 남겨두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한다.

 

포의 수수께끼 결말은 수많은 모험소설을 써서 유명해진 쥘 베른(1828~1905)을 매혹시켰다. 포에 의해 사라진『아서 고든 핌』의 결말을 상상하여 ‘빙원의 스핑크스’라는 제목의 속편을 썼다. ‘빙원의 스핑크스’는 황금가지에 나온 『아서 고든 핌』에 수록되었다. 황금가지 판본이 희귀본이 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장편을 주로 쓴 베른의 짧은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다른 책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황금가지판『아서 고든 핌』이 다시 서점에 등장할 확률은 희박하지만, 혜원출판사 세계문학전집 21번째 책인 『검은 고양이』에 ‘아서 고든 빔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왜 ‘핌’ 아닌 ‘빔’이라고 표기했을까? 원어명은 ‘Pym’이기 때문에 ‘핌’이라고 해야 한다.

 

 

 

 

*1) 한국판 위키피디아의 ‘에드거 앨런 포’ 항목에 나오는 작품 목록에 보면 ‘The Unparalleled Adventures of One Hans Pfall’를 장편소설로 소개하고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한스 팔의 환상 여행’이다. 『우울과 몽상』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분량은 50쪽도 채 되지 않는다. ‘장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2) 『아서 고든 핌』의 ‘죽음의 제비뽑기’에서 희생된 인물 그리고 미뇨넷 호에 희생된 실제 인물의 이름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에 이름을 언급했다면 책을 읽지 않은 독자에게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이지성의 『꿈꾸는 다락방』1권 서문에 『아서 고든 핌』의 ‘죽음의 제비뽑기’와 미뇨넷 호 사건에 관한 미스터리 에피소드가 언급된다. 저자는 꿈을 글로 기록해서 시각화하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기 위한 사례로 이 미스터리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포가 미래의 어떤 사건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보듯 생생하게 꿈꾸면서 그것을 글로 적었다”(9쪽)라고 썼다.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은 좋으나, 사실인 것처럼 쓴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소설 속 장면과 미뇨넷 호 사건에서 어느 부분 일치한 점은 있지만, 그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할 수도 있다. 포라는 인물 자체가 특이한 기행(奇行)에, 시대를 앞서가는 상상력을 구사하는 위대한 작가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포가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예언하듯이 소설을 썼다는 저자의 주장은 과장에 가깝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소설 속 희생자와 미뇨넷 호의 희생자의 이름만 같을 뿐이지 살해되는 과정은 다르다. 이지성은 미뇨넷 호의 희생자가 소설의 내용처럼 제비뽑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썼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다. 심지어 소설 제목도 ‘아서 고든 빔’으로 잘못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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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장인, 몸으로 부딪쳐! - 열혈 청춘을 위한 진로 이야기
강상균.조상범 지음 / 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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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자신에게 자기 인생을 건 젊은 장인들

 

‘물건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 장인(匠人)의 사전적 의미다. 이처럼 사전에는 딱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 사전적인 의미와는 달리 우리들에겐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동안 내공을 가지고 묵묵히 일하는 존경 받을 만한 사람들에게 붙는 영예스런 칭호다. 보통 ‘장인’의 칭호는 나이 지긋한 분들이 많지만 2, 30대도 ‘장인’으로 불릴 만한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 남들과 차별되는 아이디어와 도전하는 정신으로 무장한 젊은 장인들이 있다.

 

『젊은 장인, 몸으로 부딪쳐!』(줄여서 ‘젋은 장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젊음을 불태우는 열혈 청춘 장인 6명의 인생 스토리를 담았다. 방송사를 그만두고 유럽여행을 하다가 수제노트의 매력에 푹 빠져 수제노트 1인 기업 복면사과노트컴퍼니를 설립한 김영조 대표, 파스타를 파는 포장마차로 이름을 알리고 지금은 건대 근처 심야식당으로 유명해진 ‘소년상회’의 채낙영 셰프, 국내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손으로 만드는 자전거’ 장인 김두범, 최연소 장제사(裝蹄師, 말의 편자를 만들고 발굽에 부착하는 사람) 윤신상 & 장원, 최연소로 대목수 시험을 합격한 김승직 대목수. 이들은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면서 자신의 열정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순간 엄청난 노력가로 변신했다. 타자가 아닌 자신에게 자기 인생을 걸었다. 평탄치 않은 삶 속에서 자신의 열정을 진정 하고 싶은 일에 바쳤다.

 

 

 

 Scene #2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진로 이야기  

 

 

 

 

 

 

『젊은 장인』속 이야기는 2005년에 나온 일본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의 『청춘표류』(예문, 품절)를 떠오르게 한다. 『청춘표류』는 다치바나 다카시가 11명의 젊은이를 만나 인터뷰를 나누고 쓴 책이다. 원숭이 조련사, 산속에서 매를 부려 사냥하는 수할치, 레코딩 엔지니어, 나이프 제작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다치바나 다사키는 자신의 꿈을 쫓아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 선배다운 충고를 한다. 자신 있게, 그리고 대담하게 살라고. 인생에서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은 청춘이면서도 정신은 '노인'이 되어버린 청년들을 따갑게 질책한다.

 

반면, 『젊은 장인』은 젊은 독자들을 향해 훈계하는 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방황하는 청춘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우는 달콤한 사탕 같은 책도 아니다. 『젊은 장인』의 공동 저자는 뻔한 진로희망을 위해 취업 준비하는 청춘들에게 또 다른 인생의 진로가 있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독자에게 청년 장인들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독자가 직접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인터뷰 픽션’이라는 생소한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6명의 청년 장인들과의 인터뷰를 소설의 전개 방식으로 변형시켜 한 편의 이야기를 보는 느낌이 든다. 한창 진로에 고민을 많이 하게 될 고등학생 3학년 수험생인 주인공 민우는 6명의 청년 장인들을 만나 진짜 꿈에 대한 의미를 찾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청년 장인들이 걷는 길에 흥미가 있는 도전적인 독자를 위해 직업 관련 정보도 소개하고 있다. 책 제목처럼 새로운 진로에 흥미를 느낀 독자들이 장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직접 몸으로 부딪힐 수 있게 도와준다. 이처럼 『젊은 장인』은 민우와 같은 고등학생 독자에게 유용한 교육 도서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경력이 있는 스토리텔링 전문가와 <타짜, 신의 손> 시나리오 작가가 의기투합하여 만든 재미있는 진로 이야기다. 

 

 

 

 Scene #3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진짜 '진로'(進路)일까, '험로'(險路)일까? 

 

진로를 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진로는 곧 어른이 되기 위한 어려운 관문을 지나가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진로라는 길은 혼자 가기에 순탄하지 않다. 도전의 패기가 넘치는 청년이 창업하겠다면 “대기업 취업이나 해라”고 핀잔을 듣는다. 가족부터 한사코 뜯어말린다. 가족은 자식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는 것을 원한다. 그럴싸한 아이디어를 내도 사회에서 푸대접을 받기 일쑤다. 정부는 “창업이 창조경제의 핵심”이라고 강조했지만, 한편에선 창업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은 부실한 보상체계와 지원 탓이 크다. 실패에 대한 부담이 큰데도 그에 따른 사회의 평가와 대가는 형편없다는 인식에 기반을 둔다. 이렇다보니 창업의 ‘도전’이 사라지고 있다.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은 실업의 공포에 떨며 안정된 직장을 붙잡는데 사활을 건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승부해야할 젊은이들이 너나없이 공무원 임용과 대기업 취업에만 목을 매는 사회는 미래가 어두워진다.

 

우리 청년들은 꿈을 잃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당연하면서도 쉬운 생각임에도 우리는 어렵고 무모한 도전으로 치부한다. 우리는 ‘취업진로’라는 길에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렸다. 조금만 더 주위를 돌아보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이 있는데도 차마 그 쪽으로 발을 내딛는 것을 꺼려한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내가 가고 있는 ‘취업진로’를 향해 직진만 할 뿐이다. 벌써부터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서 있는 이 길이 ‘진로’(進路)가 맞는지 고민해야 한다. 고민도 없이 남들이 가고 있는 ‘진로’를 따라 간다면 내가 원하는 직업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똑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 지나갈 틈이 없다. 시간만 허비하고 발전은 더디게 된다. 어른들은 이것을 미래를 위한 성장통이라고 위로를 하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을 더 방황하게 만드는 험로(險路)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취업진로’를 지나가고 있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젊은 자전거 장인 김두범은 청년들이 선택하는 진로가 진짜 좋아하는 길인지 아니면 험난한 길인지 스스로 고민해보라고 조언한다.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면 그것이 올바른 길인지 고민이 시작될 거야. 그게 중요해.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건 무책임할 수 있거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버는 게 즐거울 수도 있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며 부자가 되는 게 바람직한 일일까? 언제낙 자신도 당할 수 있는데? 결국 옳은 일을 하지 못하면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모두 무의미해지는 거야. 남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 그 길을 맞지 않는다고 얘기하고 싸우고 흔들어 깨울 수 있어야 해. 그러니까 내가 그런 길을 가고 있는지 항상 자신을 돌아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124~125쪽)

 

누군가는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이미 세상을 발을 내딛는 어른도 아이처럼 늘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흔들리기 때문에 도망치거나 망설이거나 휘둘리지 말고 정확하게 바라본 뒤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한다. 그렇지만 어른의 진동은 자연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아닌지 스스로 흔들려고 하지 않는다. 자전거 장인의 말처럼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본 뒤에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어떻게든 붙잡고 흔들어야 한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길을 걷는 나를 대담하게 한 번이라도 제대로 흔들어야 좋은 직업을 가진 어른이 될 수 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을 확실하게 정했다면 이제 두려움 없이 직진하면 된다. 실패를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 도전에는 실패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실패를 영원한 실패로 치부하면 낭비다. 실패 경험은 미래 성공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다. 실패한 이도 지원을 받을 기회가 있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 사회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라고 수없이 강조하지만, 실패를 성공을 위한 경험의 밑거름으로 보지 않는다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싹 틔우기가 어려운 황무지로 남을 것이다. 실패해도 자유롭게 다시 도전해 성공을 꿈꿀 수 있다. 실패를 통해 얻는 노동의 가치는 소중한 발전을 위한 자산이 될 뿐만이 아니라 훗날 1인 창업을 위해 도전하는 청년들을 위해 길을 밝혀주는 빛나는 자산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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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 정치사상  

 

니콜로 마키아벨리만큼 엇갈리는 평가를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는 정치사상가는 없다. 어떤 사람은 마키아벨리를 정치적 사기꾼, 냉소주의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권력사용을 옹호한 사람으로 혹평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를 ‘근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문을 연 선구자’,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상가’로 높이 평가하는 상반된 시각도 동시에 존재한다. 어떤 편에 서든 마키아벨리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적 저작을 남긴 서양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사상사에 있어서 마키아벨리의 공적은 정치영역이 윤리나 종교 등 다른 영역과 구분된다. 나아가 정치행위가 종교적 규율이나 도덕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함으로써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대변한 데 있다. 오늘날의 정치에서도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 통찰은 의연히 관철되고 있다.

 

비합리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에 대해, 사악한 행위가 선한 행위에 대해 승리하는 것이 정치세계다. 『군주론』을 통해 그 비정한 격류 속에서, 오히려 합리적인 것과 선한 행위를 보호하기 위해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전개하는 마키아벨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Scene #2  비르투, 역량 혹은 자질?

 

 

 

 

 

 

 

 

 

 

 

 

 

 

 

 

작년은 『군주론』이 쓰인 지 5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군주론』 출간 50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에서도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재조명되었다. 올해도 마키아벨리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5월에 진보학계의 대부로 불리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적 도전과 성취’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 서문을 썼고, 그의 제자 후마니타스 출판사 박상훈 대표가 번역을 맡았다. 최근에 동양 고전을 현대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해온 신동준 21세기정경연구소장도 『군주론』 번역에 가세했다. 신 소장의 은사인 故 김영국의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서울대학교출판부, 1995년)을 새롭게 손질을 본 개정판이다.

 

 

 

 

 

 

 

 

 

 

 

 

 

 

 

 

 

 

신동준의 번역본을 포함한다면 이탈리어어 원문을 가깝게 『군주론』 은 총 3권이다. 나머지 2권은 강정인, 김경희 공역의 『군주론』(까치글방, 2008년)박상섭의 『군주론』(서울대학교출판부, 2013년)이다. 그러나 신 소장은 두 권의 번역본에 문제점을 제기한다. 『군주론』의 중요 개념인 ‘비르투’(Virtu)와 ‘포르투나’(Fortuna)를 다양한 의미로 번역하는 바람에 독자에게 혼동을 줄 수 있다. 신동준은 이 두 개념을 한 가지 의미로 통일시켜 ‘비르투’를 ‘자질’, ‘포르투나’를 ‘운’이라고 번역했다.

 

반면 강정인은 ‘비르투’를 ‘역량’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각 장마다 언급되는 ‘비르투’를 역량 이외에도 다른 용어로 번역한 곳이 보인다.

 

시라쿠사의 왕이 되었던 시칠리아의 아가토클레스는 평민 출신으로, 그것도 아주 미천하고 영락한 가문의 태생이었습니다. 그는 도공(陶工)의 아들로서 항상 방탕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악행에도 불구하고 심신의 기백(Virtu)이 넘쳤기 때문에 군대에 들어가서 모든 단계를 거쳐서 결국은 시라쿠사 군대의 사령관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강정인 번역 『군주론』 제8장 중에서, 60~61쪽)

 

동료 시민을 죽이고, 친구를 배신하고, 신의가 없이 처신하고, 무자비하고, 반종교적인 것을 덕(Virtu)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강정인 번역 『군주론』 제8장 중에서, 62쪽)

 

그들은 그들의 용맹(Virtu)을 포기하고 이탈리아의 전쟁 관습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강정인 번역 『군주론』 제12장 중에서, 89쪽)

 

로마 제국에서 나온 활력(Virtu)을 고트 족이 흡수했던 것입니다. (강정인 번역 『군주론』 제13장 중에서, 98쪽)

 

강정인은 마키아벨리가 ‘비르투’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도 문맥에 따라 ‘기백’, ‘덕’, ‘용맹’, ‘활력’으로 번역했다. 박상섭과 박상훈은 ‘비르투’의 의미를 언급하면서 발음 표기 그대로 옮겼다. 후자의 번역 방식이 개념의 의미를 더욱 헷갈리게 만든다. 특히 박상훈은 ‘포르투나’를 ‘운명’, ‘운명의 힘’, ‘운명의 여신’으로 옮겼고, 원어의 느낌을 살려야 하는 부분에는 ‘포르투나’로 표현했다.

 

마키아벨리 전공자도 ‘비르투’를 우리나라 말로 간단하게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마키아벨리 비전공자인 신동준은 ‘비르투’와 ‘포르투나’를 과감하게 한 가지 의미로 통일되게 번역하는 시도를 했다. ‘비르투’와 ‘포르투나’는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다양하게 해석될 수도 있고, 왜곡될 우려가 있다. 앞으로도 ‘비르투’와 그 밖의 개념(‘포르투나’, 네체시타(Necessita, 강정인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절대 내지 무조건적인 필요성’과 ‘조건부적인 필요성’으로 파악했다))을 둘러싼 번역 논쟁이 예상된다.

 

 

 

 Scene #3  혼동하기 쉬운 메디치 가 사람들

 

그리고 신동준은 강정인과 박상섭은『군주론』의 헌정대상을 잘못 소개하는 오류를 범했음을 지적했다. 원래 마키아벨리는 공직에 복귀하기 위해서 느무르의 공작 줄리아노 디 로렌초 데 메디치(1479~1516)에게 헌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느무르의 공작이 1516년에 급사하는 바람에 헌정대상이 권력을 이어받은 교황 레오 10세의 조카인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1492~1519, ‘소(小) 로렌초’ 또는 ‘로렌초 2세’라고 부름)가 되었다.

 

그런데 강정인은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마키아벨리가 원래『군주론』을 헌정할 대상이라고 썼다(『군주론』 인명 해설, 198쪽). 하지만 줄리아노 데 메디치(1453~1478)는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 로렌초 일 마니피코)라고 불린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1449~1492)의 동생이다.

 

메디치 가문은 15~16세기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시민 가문이었고, 대대로 이어지는 엄청난 가계도는 피렌체의 역사와 연관성이 깊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를 중심으로 한 『피렌체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Scene #4  다양한 판본으로 남아있는 『군주론』 

 

『군주론』원문은 다양한 판본이 존재한다. 마키아벨리가 사망하고 난 뒤에 출간된 『군주론』은 원본에 많이 수정된 내용이다. 그동안 마키아벨리 연구가들은 원본에 가까운 『군주론』 원고를 찾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옮겨 쓴 필사본들도 참고했는데 그 가운데 19개 정도가 원본에 가깝다는 결론이 나올 정도다. 이러한 텍스트를 중심으로 다양한 판본이 나오게 되었는데 내용에 차이가 있다.

 

강정인과 박상섭은 현재 『군주론』의 최종결정판으로 평가받는 ‘잉글레제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마찬가지로 신동준 역시 잉글레제본을 선택했지만, 강정인의 ‘잉글레제본’과 차이가 있다. 강정인은 1995년에 나온 잉글레제본을, 신동준은 10년 후에 나온 2005년 잉글레제본을 참고했다. 그밖에도 강정인은 영어 본으로 퀜틴 스키너와 러셀 프라이스가 편집한 책을 선택했는데 이탈리아어 원문에 어긋나는 오역이 있다는 단점으로 인해 예전에 비해 많이 읽히지 않는다. 박상훈은 이탈리어 본으로 ‘마조니․카젤라본’을, 영어 본으로  ‘마조니․카젤라본’와 ‘잉글레제본’의 내용을 수용한 코넬본을 선택했다.

 

지금까지 강정인, 박상섭, 박상훈 그리고 신동준의 『군주론』 번역의 차이점을 정리했다. 그렇다고 어느 번역본이 가장 믿을만한 판본이라고 선택할 수 없다. 사실 이탈리아어로 구성된 다양한 판본들마저도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판가름하기가 어렵다. 내용상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 소개된 네 권의 『군주론』도 마찬가지다.

 

 

 

 Scene #5  최고의 번역은 없다

 

『군주론』를 읽기 위해서는 주요 개념을 이해하는 것도 좋지만, 마키아벨리가 『군주론』를 집필하게 된 이탈리아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책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전반적인 내용의 흐름을 파악할 수 없다. 가장 좋은『군주론』의 구성 방식은 1) 이탈리아 역사 개관 2) 『군주론』용어해설 3) 마키아벨리의 생애 및 사상 요약 4) 『군주론』에 등장하는 인물 열전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세의 침입에 잦고, 지방 국가로 분열된 15세기 이탈리아 지도까지 이 다섯 가지 요소가 완벽하게 갖춰져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친구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서한까지도 부록으로 실려 있는 것도 좋다. 이 서한은 『군주론』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문헌자료이다. 네 권의 『군주론』은 기본 구성 방식을 다 갖추고 있고, 각각 역자들마다 특색 있는 생각이 드러나 있는 훌륭한 번역본들이다. 만약에 두 세 개 이상이 빠져 있다면 마키아벨리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번역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군주론』 원본이 100% 보존된 판본이 발견되지 않겠지만, 『군주론』에 관한 고증과 연구는 멈추지 않을 것이며『군주론』 이탈리아어 본이 새롭게 나올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학계와 대중의 관심이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서는 외국의 최신 연구 결과와 개정판을 토대로 새로운 완역 결정판이 계속 나와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열망하는 마음으로 『군주론』를 완성했다. 글을 쓰는 내내 외세의 침입과 내전을 거듭하면서 지리멸렬해가는 조국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래서 나라를 통일시킬 수 있는 강력한 군주의 등장을 염원했다. 결국 이탈리아는 1861년에 완벽하게 통일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통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있다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최대한 원본에 가깝도록 복원되는 작업일 것이다. 과연 다양한 언어와 수십 개 넘는 판본들로 나누어진 『군주론』을 단 한 권으로 정리된 결정판으로 새롭게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당분간 몇 년 동안은『군주론』완역 결정판을 펴낼 강력한 연구자의 등장을 기다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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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리요 2023-04-19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군주론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책이 좋을까요?
 
르루주 사건 - 고전추리걸작
에밀 가보리오 지음, 박진영 엮음, 안회남 옮김 / 페이퍼하우스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Scene #1  추리소설 탐정의 조상 

 

 

 

 

1887년에 아서 코난 도일이 발표한 『주홍색 연구』는 최초로 셜록 홈즈가 등장한 작품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부상을 입고 송환된 군의관 왓슨 박사가 친구의 소개로 셜록 홈즈의 룸메이트가 된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문 탐정 홈즈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처음 만난 왓슨의 이모저모를 알아맞혀 왓슨을 놀라게 한다. 왓슨은 홈즈의 비범한 추리력을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자 탐정인 오귀스트 뒤팽이 연상된다고 추켜세운다. 그러나 홈즈는 뒤팽을 수준 낮은 탐정에 불과하다며 돌직구 디스(Diss)를 시전한다. 그러자 왓슨은 에밀 가보리오(1832~1873)가 쓴 탐정 소설 시리즈의 주인공 르코크(르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다. 르코크 또한 홈즈의 디스를 피하지 못했다. 심지어 뒤팽보다 더 심하게 까였다.

 

 

셜록 홈즈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르콕은 형편없는 인물이지요.” 그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게 봐줄 만한 것은 그의 의욕뿐입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정말 속이 뒤집혔습니다. 문제는 죄수들 중에서 어떻게 범인을 찾아내느냐는 것이었지요. 나라면 그런 문제는 24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르콕에게는 여섯 달이 걸렸습니다. 그 책은 탐정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가르치는 교본으로 쓰일 수는 있겠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  『주홍색 연구』 중에서, 황금가지, 37쪽)

 

 

왓슨은 자신이 좋아하던 소설 속의 두 주인공이 홈'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의 준말)에 가까운 홈즈의 독설에 만신창이 되는 모습에 속상해한다. 오귀스트 뒤팽과 르코크. 이 두 사람은 셜록 홈즈를 비롯한 추리소설 탐정의 조상님이다. 뒤팽은 『모르그 가의 살인』에 처음 등장했다. 르코크는 국내 독자에게 생소한 탐정이다. 『르루주 사건』이 첫 등장 작품이며 그 후로 르코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나왔다. 발표연도는 포의 뒤팽이 빠르지만(『모르그 가의 살인』은 1841년, 『르루주 사건』은 1866년) 두 작품 다 세계 최초의 추리소설로 인정한다. 포는 세계 최초의 단편 추리소설, 가보리오는 세계 최초의 장편 추리소설을 썼다.

 

도일은 자신의 첫 탐정소설에 포의 뒤팽과 가브리오의 르코크를 이제 막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홈즈와 비교당하는 과감한 장면을 삽입했다. 홈즈 시리즈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포와 가브리오의 작품들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아마도 이 두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면 도일의 홈즈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홈즈에 의해 처참히 짓밟히는 대접을 받게 되지만, 도일은 탐정소설의 원조를 잊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결국 홈즈의 탄생이 뒤팽과 르코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Scene #2  “나도 한때 홈즈보다 인기가 많은 시절이 있었다오.”  

 

추리소설을 즐겨 읽은 지 얼마 안 된 독자라면 르코크는 ‘듣보잡’으로 보이겠지만, 추리소설 덕후 수준의 독자라면 르코크를 기억해야 한다. 사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추리소설이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홈즈가 아니라 르코르였다. 그리고 홈즈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인기 많은 탐정이 가보리오의 르코크였다.

 

신소설 작가 이해조(1869~1927)가 1913년에 『르루주 사건』을 『누구의 죄』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였다. 그 후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1878~1926)의 아들 안회남(1910~?)이 1940년에 다시 소개했다. 조선일보사 계열의 출판사인 조광사에서 내놓은 ‘세계 걸작 탐정 소설 전집’의 첫 번째 책이었다. 르코크의 한국 정착(?)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추리 소설가 김내성이 1948년에 『마심 불심(魔心 佛心)』이라는 제목으로 ‘번안’ 작품을 썼다. 6.25 전쟁 중인 1952년에 『르루주 사건』은 재등장한다. 제목은『복면 신사』. 안회남의 번역본을 제목만 바꾼 채 그대로 재출간했는데 1960년대 초반까지 재판이 나왔다. 그런데 책은 안회남이라는 이름 석 자를 볼 수 없고 다른 번역자의 이름이 남아 있다. 이유는 그가 월북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월북 작가나 예술가는 실명 그대로 공식석상에 거론될 수 없었다.

 

이렇듯, 르코크의 국내 번역 역사는 홈즈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르코크 시리즈는 가정 비극에 치우친 소재와 멜로드라마의 요소가 곁들인 이야기의 전개가 큰 특징인데 국내 독자의 취향을 저격하기에 적당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홈즈와 그 밖의 탐정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르코크는 퇴역하는 형사가 된 것처럼 한물 간 주인공이 되었다. 조상 대접 받지 못한 르코크를 2011년에 안회남의 번역으로 되살렸으나 이 책마저도 품절되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르코크가 재평가를 받고, 더 이상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출간했다고 밝힌 머리말이 무색해지고 말았다. 

 

 

 

 Scene #3  『르루주 사건』의 주연은 타바레다

 

작품은 르루주라는 과부가 피살되면서 의문의 사건이 시작된다. 예심판사 다브롱, 제르롤 경부 그리고 주인공 르코크 형사가 이 사건을 맡는다. 사건이 점점 미궁에 빠지자 티모클레어라는 ‘경시청의 숨은 고문’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다. 티모클레어는 가명이고, 원래 이름은 타바레이다. 그는 탐정을 취미로 하는 괴짜 노인이다. 어떤 사건을 해결하면 그에 대한 금전적 대가를 받지 않는다. 괴이한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오락이다.

 

『르루주 사건』은 르코크의 등장을 알리는 첫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직접 작품을 읽어보면 가장 비중이 많은 진짜 주인공은 르코크가 아니라 타바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르코크는 조연에 불과하다. 르코크는 소설 초반부에 자신의 스승인 타바레를 사건 해결의 조력자로 불러들이고, 중간에 르코크가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르코크가 타바레의 조수임에도 불구하고 홈즈를 껌딱지처럼 붙어서 따라다니는 왓슨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다. 즉, 이 소설에서 르코크의 등장 횟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도일은 『주홍색 연구』에서 르코크를 언급했고, 탐정 소설의 역사를 정리하고 관련 작품들을 분석한 월러드 헌팅턴 라이트(1888~1939, 파일로 밴스를 창조한 추리소설가 S.S. 밴 다인의 원명. S.S. 밴 다인은 라이트의 필명)마저 르코크를 뒤팽을 훌륭하게 계승한 『르루주 사건』의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탐정 소설』 북스피어, 49쪽) 반면 르코크 시리즈 첫 작품에서 사건을 해결한 타바레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다. 가보리오가 쓴 범죄소설 시리즈의 주인공은 르로크를 기억해야겠지만, 『르루주 사건』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타바레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 타바레의 존재가 있었기에 그 다음 시리즈물에서 아마추어 풋내기 형사 르코크가 훌륭한 탐정으로 성정할 수 있었다. 

 

『르루주 사건』에 등장하는 타바레는 홈즈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완벽한 탐정형 인물이다. 아니, 도일의 홈즈가 타바레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바레가 사건 현장을 관찰하는 모습을 보라.

 

그(타바레)는 경쾌한 걸음으로 뛰어 들어가듯이 구석방으로 들어가서는 약 반 시간 동안이나 걸려 차근차근히 검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밖으로 뛰어나갔다가는 뒤로 물러서고 또 나갔다가는 들어가고 재삼재사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혹시 범인의 작은 냄새라도 남아있지 않은가 코를 쫑긋거리는 모양은 마치 짐승을 쫓아 도는 사냥개와 같았다. (『르루주 사건』 중에서, 36쪽)

 

홈즈도 정상적이지 않는 모습으로 진지하게 사건 현장을 관찰한다. 『주홍색 연구』에서 피의자가 독극물로 살해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입 냄새를 맡고, 주변 현장을 개가 기어가듯이 엎드린 채 범죄와 관련된 흔적이나 증거를 찾는다. 홈즈가 사건 현장을 살피면 그 누구도 건드리거나 말을 걸 수 없다. 분주하면서도 산만하게 보이지만, 홈즈는 경찰도 찾지 못하는 증거를 정확하게 발견한다.

 

런던 경시청은 자신들이 맡은 사건이 해결하기 어려우면 가끔 경시청의 능력을 무시하는 독설을 서슴없이 하는 홈즈를 꼭 찾는다. 그래서 간혹 그의 사건 해결을 탐탁지 않게 보는 경찰 관계자도 등장한다. 『르루주 사건』에서 제브롤 경부는 타바레를 싫어한다. 그의 사건 해결 방식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과 비교될까봐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타바레의 또 다른 취미는 범죄에 관한 문헌자료나 서적을 수집하는 것이다. 홈즈도 범죄 관련 기록을 스크랩하고 사건 기록물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타바레는 독신인데다가 하녀 마네트가 가사를 맡는다. 여자를 싫어하는 ‘차도남’ 독신 홈즈 그리고 그가 사는 하숙집 주인이자 가정부인 허드슨 부인이 연상된다. 이 정도 되면 타바레도 탐정으로 거론되어야 한다.

 

 

 

 Scene #4  어설프지만 인간미가 느껴지는 탐정

 

르코크와 홈즈. 이 두 사람은 서로 성격은 비슷하나 사건 해결 방식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홈즈는 과학적인 수사 기법과 논리력을 동원하여 사건의 실마리를 깔끔하게 푼다면, 르코크는 특정 인물이 연루된 스캔들이나 음모를 차분하게 하나하나씩 파헤치고 증명한다. 두 사람 간의 탐정 능력을 비교하고, 한 쪽을 더 우월하게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도 굳이 홈즈와 비교를 하자면 타바레는 사건 해결 과정 중에 헛다리 짚는 실수를 한다. 르코크도 마찬가지. 다음 작품에서 르코크는 스승처럼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잘못된 추리를 하고 만다. 냉철한 논리력과 판단을 중시하는 홈즈의 눈에는 르코크가 아마추어 탐정의 티를 벗지 못한 형편없는 수준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재수사하는 타바레의 모습에서 따뜻하고 친숙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꺼려하는 괴팍한 노인이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끝까지 도와주면서 해결 방안을 제시해주는 현자(賢者) 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다. 겸손하면서도 남을 돕는 착한 타바레의 성품은 ‘동방예의지국’의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할 정도로 세상은 몰라 볼 정도로 많이 변했다. ‘동방예의지국’은 옛말이 되었고 이제는 ‘예의’보다는 ‘능력’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아무리 ‘예의’가 좋은 사람이더라도 ‘능력’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이 대접받는다. 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의 취향도 시대에 따라 변화되는 것 같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예의’가 있고, 조금 미숙하게 보이는 아마추어 타바레보다는 완벽한 ‘능력’을 보여주는 홈즈 같은 프로를 선호한다. 일반적으로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홈즈가 가장 먼저 떠오르고, 탐정이 되려면 홈즈와 같이 똑똑하게 머리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점점 타바레는 잊혀만 간다. 가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이웃 할아버지 같은 타바레 같은 탐정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지금 현실로 봐서 이루어지기가 어렵겠지만,『르루주 사건』복간과 나머지 르코크 시리즈 출간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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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엘레지 -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이언 샌섬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1970, 80년대 중고교를 다녔다면 영어사전을 씹어 먹는 친구가 한 명쯤은 있었을 것이다. 영어 단어를 다 외운 페이지를 쭉 찢어 입에 넣는 장면은 당시 청소년 드라마나 영화에도 종종 등장했다. 하지만 이제는 영어단어를 외울 때 사전을 씹어 먹기 위해서 종이를 찢을  수가 없다. 전자사전의 보급으로 이 우스갯소리는 옛 말이 되어버렸다. 영어 사전을 찢어 먹는 풍경이 사라진 요즘 교실에서는 전자사전 어플리케이션이 있는 스마트폰에 이어폰을 꽂고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자습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종이로 더 이상 출간되지 않는다. 브리태니커 종이사전은 1768년 첫 선을 보인 지 244년 만인 2012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 등 인터넷 혁명에 밀려난 결과다. 1년에 70달러만 내면 각종 정보와 휴대전화용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운영 중이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상징적 유산이었던 브리태니커 종이사전의 쓸쓸한 퇴장은 모바일 시대의 빅뱅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종이책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종이신문 시대도 종말을 맞았다고 말한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실제 대다수 젊은 세대는 인터넷, 스마트폰, 아이패드 등의 기기를 통해 각종 정보를 습득하고 소통한다. 그 결과 출판 산업과 신문 산업은 어려움에 처해 있고, 저마다 전자책과 인터넷신문 발행 등의 신사업으로 활로를 개척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종이는 인류가 기록을 남기고 정보를 전달하며 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발명한 최고(最古)의 기록 재료이다. 종이의 역사는 매우 길다. 중국의 갑골문자나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의 점토문자 같은 종이 발명 이전의 기록매체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현대 종이의 원형은 5000년 전 이집트의 파피루스에서 시작 하였으며 종이는 기원전 108년에 중국의 채륜에 의해 발명된 이후, 2000년 동안 인류문명과 문화의 꽃을 피워왔다.

 

“정보화 사회가 도래하면 종이없는(paperless) 사회가 올 것이다.” 1990년대 초 앨빈 토플러를 비롯한 미래학자들이 미래 인류사회의 변화상 가운데 가장 큰 특징으로 예견한 말이다. 과연 종이책이 사라진다면 종이의 시대도 종말을 고할까?

 

그러나 현재까진 이 예언이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종이에 글을 쓰는 소설가가 직업인 저자는 인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종이의 존재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발달로 종이의 사용이 줄고 있지만, 종이는 여전히 지식 전달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책 맛’이라는 게 있다. 검지에 침을 약간 묻혀 책장을 넘길 때 느껴지는 종이 질감. 밑줄이나 낙서, 접힌 부분 등 각 장의 여백에 남겨 있는 여러 순간의 다양했던 삶의 모양새들. 면지에 적힌 책에 얽힌 짤막한 메모 등은 종이책만이 줄 수 있는 별도의 선물이다. 여전히 책 맛을 느낄 수 있기에 ‘종이책 종말론’에 대한 비블리오필(bibliophil)의 걱정은 조금 사라졌다. 종이책의 종말을 재촉할 것으로 예상되던 전자책의 등장은 오히려 종이책이 지닌 매력을 극대화해주는 계기가 됐다.

 

종이책의 진화에서 결정적이지만, 유독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바로 종이다. 종이는 책의 얼굴이자 1차 광고라 할 수 있는 표지 이미지를 담는 그릇이며 질감과 색감, 두께와 무게 등으로 책의 기본 내용과 컨셉트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흔히 연상되는 종이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서류문서나 책 혹은 신문지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종이는 상상 이상으로 일상의 훨씬 더 많은 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선 돈거래에서 가장 환영받는 현금 지폐. 재료는 당연히 종이다. 그 밖에도 영화 필름, 포스트잇 메모지, 복권, 영수증 둥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물건들은 대부분 종이로 만들었다. 

 

『페이퍼 엘레지』에서 보여주는 종이의 존재는 단순한 물질이나 기록의 도구를 넘어 인류 문명과 역사 그 자체다. 저자 이언 샌섬은 종이를 ‘궁극의 인공물’이라고 부르며, 종이와 인간 문명의 관계를 넓고 깊게 파 들어갔다. 그의 책은 종이 자체의 역사만 다루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종이가 만들어 낸 문명에서 탄생된 물건들의 박물관이다.

 

과거의 세계경제는 실물의 가치에 기반을 두어 모든 거래가 이뤄졌다. 그러다가 경제가 커지면서 종이 돈, 즉 지폐의 시대가 열렸다. 지금은 가상의 지폐를 중앙은행의 컴퓨터가 창조해 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종이는 여전히 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하고 있다. 문명과 문명 간의 교류, 각종 탐험과 교역, 전쟁을 가능케 한 지도 역시 ‘종이’가 있었기 때문에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보급될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런 다양한 분야의 역사적 사실과 문헌 속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씨줄 날줄로 엮어가며 종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끝없이 감탄한다. 장인이 기술과 정성으로 만들어낸 종이 제품들에 대한 깊은 애정도 곳곳에서 드러낸다.

 

결국 우리는 지금까지 종이의 시대 속에 살고 있었다.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는 ‘종이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종이가 이 세상에 완전히 사라진다면 기계처럼 작동되는 문명이라는 기계에 중요한 나사 하나가 풀려서 빠진 것과 같다. 그만큼 종이는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생활, 아니 문명의 필수품이다. 앞으로 종이의 시대는 저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책의 제목은 좀 슬프다. ‘엘레지(Elegy)’는 죽음 사람에 대한 애도의 시를 의미한다. 종이에 대한 저자의 낙관적 전망과 정반대로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노랫말처럼 종이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고, 종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종이는 분명 우리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종이의 혜택을 마음껏 누릴수록 푸르른 나무들이 한 그루씩 쓰러져 간다. 종이책은 사라질 것이라 예측했던 시대적 분위기와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종이를 만들기 위해 무분별하게 산림을 파괴시켰다. 세계 종이 소비량은 점점 늘어난다. 하루에 전 세계 사람들은 100만 톤 정도의 종이를 사용한다. A4 용지 한 장을 만드는 과정에 전구 하나를 한 시간 동안 켤 때만큼의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물 한 컵이 필요하다. 환경 파괴 문제가 대두되면서 제지업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높아지고, 종이의 위상 또한 흔들린다. 저자는 숲과 종이가 함께 공존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이러한 근심이 깊어질수록 ‘종이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종이를 너무 쉽게 사용한다. 우리 몸의 일부나 다름없는 것을 한 번 쓰고 버린다. 저자의 생각대로 종이가 정말 영원할 것 같은가?만약에 종이 생산에 필요한 나무가 지구상에 사라진다면, 종이의 운명도 멈추게 된다. 종이의 가치를 확실하게 알게 된 이상, 지금부터라도 종이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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