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 엘레지 -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이언 샌섬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1970, 80년대 중고교를 다녔다면 영어사전을 씹어 먹는 친구가 한 명쯤은 있었을 것이다. 영어 단어를 다 외운 페이지를 쭉 찢어 입에 넣는 장면은 당시 청소년 드라마나 영화에도 종종 등장했다. 하지만 이제는 영어단어를 외울 때 사전을 씹어 먹기 위해서 종이를 찢을  수가 없다. 전자사전의 보급으로 이 우스갯소리는 옛 말이 되어버렸다. 영어 사전을 찢어 먹는 풍경이 사라진 요즘 교실에서는 전자사전 어플리케이션이 있는 스마트폰에 이어폰을 꽂고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자습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종이로 더 이상 출간되지 않는다. 브리태니커 종이사전은 1768년 첫 선을 보인 지 244년 만인 2012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 등 인터넷 혁명에 밀려난 결과다. 1년에 70달러만 내면 각종 정보와 휴대전화용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운영 중이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상징적 유산이었던 브리태니커 종이사전의 쓸쓸한 퇴장은 모바일 시대의 빅뱅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종이책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종이신문 시대도 종말을 맞았다고 말한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실제 대다수 젊은 세대는 인터넷, 스마트폰, 아이패드 등의 기기를 통해 각종 정보를 습득하고 소통한다. 그 결과 출판 산업과 신문 산업은 어려움에 처해 있고, 저마다 전자책과 인터넷신문 발행 등의 신사업으로 활로를 개척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종이는 인류가 기록을 남기고 정보를 전달하며 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발명한 최고(最古)의 기록 재료이다. 종이의 역사는 매우 길다. 중국의 갑골문자나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의 점토문자 같은 종이 발명 이전의 기록매체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현대 종이의 원형은 5000년 전 이집트의 파피루스에서 시작 하였으며 종이는 기원전 108년에 중국의 채륜에 의해 발명된 이후, 2000년 동안 인류문명과 문화의 꽃을 피워왔다.

 

“정보화 사회가 도래하면 종이없는(paperless) 사회가 올 것이다.” 1990년대 초 앨빈 토플러를 비롯한 미래학자들이 미래 인류사회의 변화상 가운데 가장 큰 특징으로 예견한 말이다. 과연 종이책이 사라진다면 종이의 시대도 종말을 고할까?

 

그러나 현재까진 이 예언이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종이에 글을 쓰는 소설가가 직업인 저자는 인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종이의 존재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발달로 종이의 사용이 줄고 있지만, 종이는 여전히 지식 전달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책 맛’이라는 게 있다. 검지에 침을 약간 묻혀 책장을 넘길 때 느껴지는 종이 질감. 밑줄이나 낙서, 접힌 부분 등 각 장의 여백에 남겨 있는 여러 순간의 다양했던 삶의 모양새들. 면지에 적힌 책에 얽힌 짤막한 메모 등은 종이책만이 줄 수 있는 별도의 선물이다. 여전히 책 맛을 느낄 수 있기에 ‘종이책 종말론’에 대한 비블리오필(bibliophil)의 걱정은 조금 사라졌다. 종이책의 종말을 재촉할 것으로 예상되던 전자책의 등장은 오히려 종이책이 지닌 매력을 극대화해주는 계기가 됐다.

 

종이책의 진화에서 결정적이지만, 유독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바로 종이다. 종이는 책의 얼굴이자 1차 광고라 할 수 있는 표지 이미지를 담는 그릇이며 질감과 색감, 두께와 무게 등으로 책의 기본 내용과 컨셉트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흔히 연상되는 종이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서류문서나 책 혹은 신문지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종이는 상상 이상으로 일상의 훨씬 더 많은 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선 돈거래에서 가장 환영받는 현금 지폐. 재료는 당연히 종이다. 그 밖에도 영화 필름, 포스트잇 메모지, 복권, 영수증 둥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물건들은 대부분 종이로 만들었다. 

 

『페이퍼 엘레지』에서 보여주는 종이의 존재는 단순한 물질이나 기록의 도구를 넘어 인류 문명과 역사 그 자체다. 저자 이언 샌섬은 종이를 ‘궁극의 인공물’이라고 부르며, 종이와 인간 문명의 관계를 넓고 깊게 파 들어갔다. 그의 책은 종이 자체의 역사만 다루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종이가 만들어 낸 문명에서 탄생된 물건들의 박물관이다.

 

과거의 세계경제는 실물의 가치에 기반을 두어 모든 거래가 이뤄졌다. 그러다가 경제가 커지면서 종이 돈, 즉 지폐의 시대가 열렸다. 지금은 가상의 지폐를 중앙은행의 컴퓨터가 창조해 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종이는 여전히 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하고 있다. 문명과 문명 간의 교류, 각종 탐험과 교역, 전쟁을 가능케 한 지도 역시 ‘종이’가 있었기 때문에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보급될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런 다양한 분야의 역사적 사실과 문헌 속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씨줄 날줄로 엮어가며 종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끝없이 감탄한다. 장인이 기술과 정성으로 만들어낸 종이 제품들에 대한 깊은 애정도 곳곳에서 드러낸다.

 

결국 우리는 지금까지 종이의 시대 속에 살고 있었다.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는 ‘종이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종이가 이 세상에 완전히 사라진다면 기계처럼 작동되는 문명이라는 기계에 중요한 나사 하나가 풀려서 빠진 것과 같다. 그만큼 종이는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생활, 아니 문명의 필수품이다. 앞으로 종이의 시대는 저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책의 제목은 좀 슬프다. ‘엘레지(Elegy)’는 죽음 사람에 대한 애도의 시를 의미한다. 종이에 대한 저자의 낙관적 전망과 정반대로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노랫말처럼 종이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고, 종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종이는 분명 우리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종이의 혜택을 마음껏 누릴수록 푸르른 나무들이 한 그루씩 쓰러져 간다. 종이책은 사라질 것이라 예측했던 시대적 분위기와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종이를 만들기 위해 무분별하게 산림을 파괴시켰다. 세계 종이 소비량은 점점 늘어난다. 하루에 전 세계 사람들은 100만 톤 정도의 종이를 사용한다. A4 용지 한 장을 만드는 과정에 전구 하나를 한 시간 동안 켤 때만큼의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물 한 컵이 필요하다. 환경 파괴 문제가 대두되면서 제지업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높아지고, 종이의 위상 또한 흔들린다. 저자는 숲과 종이가 함께 공존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이러한 근심이 깊어질수록 ‘종이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종이를 너무 쉽게 사용한다. 우리 몸의 일부나 다름없는 것을 한 번 쓰고 버린다. 저자의 생각대로 종이가 정말 영원할 것 같은가?만약에 종이 생산에 필요한 나무가 지구상에 사라진다면, 종이의 운명도 멈추게 된다. 종이의 가치를 확실하게 알게 된 이상, 지금부터라도 종이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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