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in angulo cum libro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독일의 신학자 토마스 아 켐피스는 19세에 아그니텐베르크 수도원에 들어가 70년간이나 작은 골방에서 성경필사에 전념했다. 아 켐피스가 남긴 말로 알려진 저 라틴어 구절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년) 1권 서문 마지막에 인용되기도 했다. 에코(이윤기 선생의 번역으로)는 아 켐피스를 모방의 도사라고 소개했지만, 그는 성경 필사의 모범이다. 아 켐피스는 일생동안 성경을 네 번 필사했는데 아름다운 필체로 평가받고 있다.

 

 

 

 

 

 

 

 

 

 

 

 

 

 

 

 

 

 

필사. 그것은 단순히 ‘손으로 쓰는 글자’가 아니라 ‘손으로 쓰는 기도’이자 ‘손으로 쓰는 명상’ 그 자체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글자를 읽는 행위가 아니다. 눈으로 하는 명상이다. 책을 오랫동안 보면 눈이 피로하고 침침하지만, 마음은 편안해진다. 종이책 특유의 냄새가 감돌면서 눈에 활자가 보일 정도로 약간의 조명이 비치는 서재에서 책을 읽는다면 잠시나마 하루 동안 쌓인 고뇌를 잊을 수 있다. 아 켐피스는 성경을 필사하는 생활을 하면서 도서관에 보관된 수많은 장서도 읽어봤을 것이다.

 

내가 쉴 수 있는 '책이 있는 구석방'은 (헌)책방이다. 편히 앉을 수 있는 안락한 소파에, 겨울에 따뜻하게 누워서 책 읽을 때 편안한 전기장판까지 있는 서재도 책을 읽기에 좋은 공간이다. 하지만 컴퓨터와 TV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어서 독서를 몰입하는 데 방해된다. 온 사방에 수많은 책이 꽂혀 있거나 쌓여 있는 조용한 책방이 더 편할 수밖에 없다. 

 

내가 다니는 책방에 한 시간 이상 책을 꼼꼼하게 확인하면서 읽는 손님이 많이 없다. 그런 손님이 있더라도 나만큼 정말 오랫동안 책방 서가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둘러보고, 내 무릎 높이까지 쌓인 먼지 묻은 책들을 만지작거리는 손님은 없을 것이다. 책 한두 권을 살려면 무조건 두 시간 이상 책방에 머무른다. 내가 고른 책이 오래오래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확인한다. 절대로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책 한 권 한 권을 만져보면서 훑어볼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한적한 분위기는 '책아일체'(冊我一體)가 되게 해준다. 

 

주말의 시작인 토요일에 책방에 방문하는 것이 제일 좋다. 특히 '무한도전' 방송이 시작되는 시간대 이전인 오후 2시부터가 적당하다. 점심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면, 이제 책방에서 마음의 양식으로 지식에 허기진 두뇌를 채운다. 아니면 재미있는 소설을 읽으면서 한 주 동안 스트레스로 뭉쳐져 딱딱해진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준다. 내가 원하는 책을 찬찬히 고르면 된다.

 

책방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간다. 먹고 살기 넉넉한 경제적 수준이라면 주말마다 책방에 가는 것이 소원이다. 많이 가는 편은 아니지만, 방문할 때마다 책방에 두 세 시간 오래 있는 일상이 익숙해지다 보니, 책방 서가에 어떤 분야의 책이 꽂혀 있는지 알고 있다. 이제 책방이 편해서 내 서재 같은 느낌이 난다.

 

오늘 책방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내 나이와 비슷하거나 어린 젊은 커플이 방문했다. 책방에서 젊은 커플을 보게 되다니. 혼자 책 읽고, 혼자 밥 먹을 정도로 혼자 노는 생활이 편한 나도 약간 마음이 위축되었다. 책방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비좁아서 커플이 책을 고를 수 있도록 내가 몇 발 뒤로 물러서서 딴 곳으로 이동했다. 내가 있든 없든 커플은 거들떠보지 않겠지만. 그래도 남자는 연세가 많은 손님이 주로 찾는 책방에 자신처럼 젊은 남자가 혼자 책 읽는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내가 그 남자의 눈과 딱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서로 못 본 척 시선을 회피했다. 커플은 생각보다 꽤 오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얼른 떠나기를 내심 바랐다. 커플의 등장으로 조용한 독서를 할 수가 없었다. 커플은 어떤 책을 찾고 있었다. 둘이 딱 붙어서 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약간은 질투가 났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원래 책방에 처음 오는 손님은 책방 주인에게 자신이 찾으려는 책이 있는지 먼저 물어본다. 원하는 책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그냥 돌아간다. 그런데 저 커플은 꽤 오랫동안 서가를 관찰했다.

 

커플이 서가를 둘러본 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그들은 주인에게 자신이 찾는 책이 있는지 물어봤다. 도대체 커플이 찾으려는 책이 무엇일까. 나는 책방에 오는 손님들이 원하는 책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몰래 살짝 귀띔한다. 커플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찾고 있었다. 주인은 그 책이 있는지 잘 모르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직접 서가에 찾아보기로 했다. 책방을 오래 운영한 주인도 셀 수 없이 많은 책무더기 사이에 손님이 원하는 책을 바로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나는 책방 전체를 오랫동안 관찰했던 터라 커플이 원하는 『인간 실격』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알고 있었다. 책방에 있는 『인간 실격』은 1995년에 웅진출판사가 찍은 것이었다. 출판연도가 좀 오래됐어도, 책 상태는 거의 새 책에 가까웠다.

 

나는 서가 한구석 모퉁이에 꽂혀 있는 『인간 실격』을 빼서 주인에게 건네줬다. 그러자 커플과 주인은 1분도 채 안 돼서 『인간 실격』을 발견한 내 모습에 놀랐다. 커플은 연신 '대박!'이라고 말하면서 고마워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별말씀을요'라고 간단히 말하면서 계속 서가에 책을 고르는 척 했다. 사실 커플이 책을 사고 돌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책을 찾아줬다. 커플은 『인간 실격』을 찾게 돼서 너무나 기뻐했다. 남자는 기쁨에 떨면서 『인간 실격』을 감명 있게 읽었다면서 책방에 같이 온 여친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내가 읽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같이 읽고 공유하는 모습. 정말 보기 좋았고, 더 질투가 났다. 다시 마음 편히 책을 읽으려는 갑자기 안구는 촉촉해지는 것일까. 너무 오랫동안 활자를 봐서 눈이 침침한 것이겠지... 음, 기분 탓일 거야...

 

 

 

 

 

 

오늘 세 시간동안 고르면서 구입한 책은 총 세 권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구판(문예출판사, 1995년), 『세계 러브스토리 걸작선』(도솔, 1993년), 레미 드 구르몽의 소설 『색, 색, 색』(문지사, 1993년)이다.

 

 

 

 

 

 

 

 

 

 

 

 

 

 

 

 

 

 

 

 

 

 

 

 

 

 

 

 

 

 

 

 

러셀의 책은 올해 같은 출판사에서 새 표지로 복간되었다. 황문수 님이 번역했는데, 복간본도 구판처럼 같은 번역자의 손을 거쳤다. 복간본이 나오면서 황문수 님이 번역을 새롭게 손을 봤는지 잘 모르겠다. 일단 두 권을 같이 비교해서 읽어보려고 한다. 『세계 러브스토리 걸작선』은 알라딘 검색, 심지어 중고샵에서도 찾을 수 없는, 완전 유령이 되고 만 책이다. 영미 작가들이 쓴 사랑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국내에 널리 알려지거나 작품이 많이 소개된 작가의 작품도 있다. 『인간 희극』(문예출판사, 2006년) 또는 『휴먼 코미디』(2012년, 문학동네)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윌리엄 사로얀, 『수선공』(동인, 2009년-품절)의 버나드 맬러머드, 『나의 안토니아』(열린책들, 2011년)의 윌라 캐더, 존 업다이크 그리고 미국 단편소설의 대가 오 헨리까지 책에 수록된 작가 라인업이 괜찮다.

 

마지막 책으로 『색, 색, 색』은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오는 시 「낙엽」을 쓴 레미 드 구르몽의 소설이다. 우리나라에서 구르몽은 「낙엽」의 시인으로 많이 알려졌는데, 『색, 색, 색』은 국내에 유일하게 번역된 그의 소설이다. 프랑스어 원제는 『Couleurs, Contes Nouveaux Suivi de Choses Anciennes』. 1908년에 발표되었다.

 

구르몽은 젊은 나이에 결핵의 일종인 낭창에 걸려 얼굴이 추해지자 아파트 서재에 파묻히듯이 살았다. 심지어 말을 더듬는 습관도 있어서 구르몽은 집에 틀어박혀 지낼 정도로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외출하지 않고, 서재 속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지냈다. 서재에서 같이 지내는 유일한 그의 친척이라면 반려묘. 구르몽은 책이 가득한 서재를 '나의 헛간'이라고 불렀다.

 

책방에서 나의 동지를 우연히 만났다. 구르몽의 고독, 그리고 속세를 멀리하여 자신만의 유일한 안식처가 있는 이 고독한 시인에게 연민이 느껴지면서도 동질감이 느껴졌다. 세상을 완전히 단절하는 밀폐된 은둔이 아닌 가능한 한 내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고 성찰할 수 있는 건강한 고독. 그런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곳은 바로 내가 쉴 수 있는 책방이 아닐까 싶다. 이제부터 자주 가는 책방을 '나의 헛간'이라고 불러야겠다. 나의 지적 헛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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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 늘 있을 것 같은 가족,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 빈자리에 밀물처럼 오는 공허감과 슬픔을 견디기 힘들다. 죽음은 누구나 한번은 맞이해야 하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게 된다. 이런 우울한 날에 가라앉은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특별한 장례식을 열 수 있도록 유언을 남기기도 한다. 미국의 브라스밴드 리더는 조문객들이 관 속에 누워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싫어서 살아 있는 상태처럼 지팡이를 짚고 서서 조문객을 맞이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이 떡 하니 서서 조문객과 함께 있는 것이다! 생전 모습 그대로.

 

또 어떤 고인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테이블에 앉아 조문객을 맞았는데, 한 손에는 맥주잔을,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었다. 고인은 맥주를 즐겨 마시고, 끽연가였다고 한다. 비록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이지만, 죽어서도 생전 모습을 조문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조문객들의 슬픔을 덜어내려는 고인의 배려가 돋보인다. 이러한 이색 장례식은 조문객들이 고인을 특별하게 애도하는 날로 기억하게 되지만, 강심장이 아닌 이상 시체를 가까이 보는 것은 엽기적이다.

 

 

 

 

 

 

 

 

 

 

 

 

 

 

 

 

 

 

과연 고인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상태로 장례식을 치른다면, 조문객들의 슬픔을 덜어줄 수 있을까. 만약에 그런 방법이 실용화된다면? 19세기 후반 프랑스 상징주의 작가 빌리에 드 릴아당의 소설집 『잔혹한 이야기』(물레, 2009년)에 수록된 단편 ‘마지막 숨의 화학성분 분석기’는 죽음에서 비롯된 인간의 슬픔 감정을 무뎌지게 만드는 장난감이 등장한다.

 

단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난감의 이름이 특이하다. 마지막 숨의 화학성분 분석기. 사용 방법은 간단하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내뱉은 숨을 장난감에 모아둔다. 장난감은 숨의 화학성분을 분석해 죽음이 임박하는 신호를 포착한다. 살아있을 때 나오는 숨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숨의 성분을 장난감이 분석하고, 구별한다. 즉, 장난감이 사람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신호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신호를 확인했다면 가슴 아픈 일을 미리 확인할 수 있으며 고인을 떠나보내도 침울한 감정의 늪에 오랫동안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장난감을 발명한 사람은 이것을 어린이들이 많이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을 어른에 비해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발명가는 이 장난감이 인류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진보적인 물건이라고 자화자찬을 늘어놓는다. 소설은 이 특이한 장난감을 광고하는 듯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릴아당은 인류의 감성을 지배할 정도로 커져만 가는 당시 과학기술의 위력을 경계한다.

 

과학의 섬세한 기술이 인류의 원초적인 감정마저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된다면 영 달갑지 않다. 그리고 이런 장난감이 실제로 세상에 나온다면, 실용화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든다. 발명가는 숨 분석기가 연말연시에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이라고 강조한다. 글쎄, 썩 유쾌한 장난감은 아니다. 내가 죽게 되는 시점을 이 장난감이 정확하게 맞추는 것은 아무래도 꺼림하다. 오히려 장난감을 받는 사람이 더 우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발명가는 이 보석 같은 발명품을 할아버지 생신 기념 식사 때 주면 좋다고 말하는데,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이 장난감을 당장 부수거나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장난감은 실생활에 쓰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다. 이 장난감에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성분이 들어있는데 폭탄에 들어가는 주재료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이 예정된 죽음 날짜보다 더 빨리 저승사자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면, 이 장난감에 약간의 충격을 주면 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건강하고 멀쩡했던 사람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기 마련인데 죽을 운명은 죽음의 신만이 점지해준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이 우리의 마음을 엄습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고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살아남은 자들은 그렇다. 고인이 너무 그리워서 유품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고인의 채취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유품을 간직한다면 잠시나마 슬픔을 달랠 수도 있다.

 

 

 

 

 

 

 

 

 

 

 

 

 

 

 

 

 

지금도 죽음의 공포와 슬픔을 덜어줄 수 있는 기술이 나오고 있다. 최근에 고인의 유품과 그가 생전에 남긴 흔적들을 영원히 보존하는 소셜 네트워크까지 등장했다. 리브스온(LivesOn)이라는 앱은 고인 대신에 소셜 네트워크를 관리한다. 고인이 과거에 남긴 기록들을 분석해서 이것과 유사한 내용의 글과 사진을 올린다. 고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나 가족은 리브스온이 올려주는 고인의 게시물을 확인할 수 있다. 리브스온은 고인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다. 그야말로 컴퓨터 알고리즘이 사람 흉내를 낸다. 고인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서비스가 될 수 있다. 리브스온 개발자는 이 서비스를 활성화해서 고인의 쌍둥이를 만들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쌍둥이라기보다는 죽은 자를 온라인 공간에서 복제한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죽은 사람이 온라인 공간에서 살아남는다? 아무리 알고리즘으로 작동된다고 하지만, 이런 서비스가 과연 죽음이라는 우울한 사건을 덜 비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죽은 사람을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서 생전 모습을 기억할 수 있어서 좋지만, 진정한 애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죽은 자를 떠나보내기 싫은 마음이 벌써 두려워서 즐거운 잔치로 장례식을 치른다거나 컴퓨터가 고인의 생전 모습을 흉내 내도 깊은 슬픔을 덜어줄 수 없다.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고인을 애도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고인과의 이별에 슬퍼하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고인을 기릴 수 있는 살아남은 자의 예의다. 슬픔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계에 의존하는 모습은 진정한 애도라고 볼 수 없는 상식에 벗어난 행동이 된다. 물론 식음을 전폐하고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릴 정도로 깊은 슬픔에 헤어나지 못한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몽테뉴는 나이가 들어서 이가 갑자기 빠지듯이 우리가 맞이해야 할 죽음도 자연스러운 삶의 단계라고 말한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도 모르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몽테뉴의 말을 곱씹어본다면, 상대방이 죽으면 어떻게 감정을 다스려야 할지 몰라서 두렵더라도 거기에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걱정에 집착하면 마음만 병들 뿐이다. 누구나 겪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생을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게 착실하게 살아간다면 미리 죽음에 겁먹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어진다. 천상병 시인의 유명한 시구처럼 죽음을 소풍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삶의 순리라고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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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소리 없이 가버렸다
김향아 지음 / 책과나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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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중에서)

 

 

윤동주 시인은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부끄러워했다. 삶의 어려움과 엄숙함에 쓰인 자신의 시가 진실한 것인지 자아 반성을 통해 얻은 시인의 결론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러나 시인이 떠나면서 남기고 간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는 지금도 우리 가슴을 뛰게 할 정도로 순수한 심성을 지니고 있다.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이타적인 시인의 시선은 언제나 주변인을 향한 연민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시는 쉽게 써져서 나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세상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감성이 아니면 이런 주옥같은 시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김향아 시인의 제1시집 『세월이 소리 없이 가버렸다』은 인생 살기 어려운 시대에 나온 쉽게 쓰인 시다. 시는 대체로 단조로운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이 긴 시는 많아야 두 쪽 이상 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시집에 시적 감정을 질질 끌면서 길게 쓴 시가 없다. (이 시집에서 제일 긴 내용으로 이루어진 시가「울 오빠」이다) 그리고 시인은 난해하면서도 추상적인 단어를 쓰지 않는다. 시구 한 줄 한 줄에 여성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 있어 독자의 눈과 마음에 단숨에 박혀 버리게 만든다.

 

 

그냥 당신이 좋아요
왜냐고 묻지 마세요
이유가 없거든요

 

그래도 알고 싶다면
지나가는 바람에게
살며시 물어보세요

 

혼자 하는 독백을
스치던 바람이
들었을 것 같군요

 

당신이 보고플 땐
하늘을 보았어요
떠 있는 뭉게구름이
알려 주겠군요

 

당신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묻는다면
"그냥"이라 말하겠어요

 

 

(「당신이 좋은 이유」, 76쪽)

 

 

김향아 시인의 시는 원태연, 용혜원, 이정하의 사랑시처럼 독자에게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자신이 그리워하는 대상 또는 그와 함께한 시간을 그리워한다. 대상을 향한 보고 싶은 감정을 절제하지 않는다. 시에 드러나는 주제는 단순하고, 어디에서 본 듯한 상투적인 표현이 많이 보이게 된다. 시는 쉽게 읽혀지더라도 시인의 개성이 돋보이지 않는다.

 

시를 즐겨 읽고, 시 작문을 오래 해본 사람이라면 이 시집을 야박하게 평가했을 것이다. 이게 과연 정말 시라고 쓴 것이며 독자에게 떳떳하게 보여줄 수 있을 수준이 되는지 시인의 능력에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시인은 대한문인협회에 등단했다. 하지만 시를 냉정하게 문학성 위주로 평가한다면, 기교와 표현력이 부족한 ‘아마추어’ 수준에 벗어나지 못한다. 시를 너무 쉽게 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면 「비가 내리는 날」은 감수성이 충만한 독자라면 매력적인 시로 보겠지만, 비가 내리면서 느끼게 되는 센티멘털을 전달하는 비유가 새롭지 못하다.

 

 

비가 내린다
마음에도 내린다

 

창문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이내 사라지지만

 

마음으로 내리는 비는
차곡차곡 쌓인다

 

쌓이고 쌓여 강을 이루면
그대 내게 올 수 있도록
작은 종이배 하나 띄우렵니다

 

 

(「비가 내리는 날」, 21쪽)

 

 

비는 하늘에서 뚝뚝 떨어진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우울해지고, 잊고 있던 감성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갑자기 울고 싶어진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얼굴에 내리는 슬픈 감정의 눈물로 대치되는 비유법으로 묘사할 수 있다. 이러한 비유는 시를 쓰지 않는 사람도 생각할 수 있다. 참신한 비유도 너무 흔하게 사용되면 독자의 딱딱한 마음을 녹이는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시를 쓰게 되면 다양한 비유법을 알아야 하고, 기존에 볼 수 없는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시는 모든 감정을 문장으로 술술 풀리듯이 써내려가는 쉬운 글이 아니다.

 

시인의 첫 시집은 문학적인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많이 받지 못할 만큼 부끄럽다. 그렇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쉽게 썼다는 점에서 시인의 노력을 높게 사고 싶다. 약간 오글거리는 면은 있으나, 대체로 시가 귀여우면서도 순수하다. 반면에 슬픈 여운이 느껴지는 시도 있다. 시집에 병으로 쓰러진 오빠를 걱정하는 각별한 애정(「울 오빠」) 그리고 어머니의 따듯한 품을 그리워한다(「늦은 눈」).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 없든 같이 있든 그를 영원히 잊지 않으려는 지고지순한 사랑 감정을 과감하게 표출하기도 한다(「당신이 좋은 이유」「님이시여!」「기다림 2」「그거 알아요?」「꿈」)

 

 

어디쯤 와 있을까?
지금 나의 위치는
세월이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달려왔다
잠시 뒤돌아본 나의 삶에는
참으로 많은 사연들이 빌딩처럼 서 있구나!

 

행복했던 시절들
멈추고 싶었던 순간들
너무나 슬펐던 기억들
지우고 싶은 시간들

 

내 곁에 머물렀던 그리운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갔을까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버린
보고 싶은 사람들......

 

 

(「삶」, 116쪽)

 

 

하지만 시인은 그들을 그리워하기보다는 그들과 함께했던, 이제는 소리 없이 지나가버린  세월의 흔적을 만나고 싶어 한다. 시인에게 시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추억의 대상(어머니,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 등)들을 다시 불러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시인의 마음으로 되돌아온 것들은 문장으로 형성되어 독자들 앞에서 복원된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잊고 산 건 아닌지 자아 반성을 한다.

 

평범한 시를 읽었다고 해서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혹시 시인이 첫 시집이 흡족하지 않더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점점 더 인생 살기 어려워지는 요즘, 이런 쉽게 쓰인 시가 나는 더 반갑다. 쉽게 감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순수한 표현을 구사하는 시인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 순수한 감정 그대로 다음 시집에서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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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에 다니구치 지로의 『고독한 미식가』(이숲, 2010년)를 보면서 싱거운 음식을 먹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혼자 밥을 먹으면서 음식의 맛을 음미하는 주인공 고로의 삶은 내 취향에 가까워서 공감은 했지만, 맛을 느끼는 고로의 표정이 단순하게 그려져서 그런지 음식들이 맛있게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는 그렇지 않다. 『고독한 미식가』에 나오는 식당들은 만화 원작자인 구스미 마사유키가 직접 가보고 음식을 먹어 본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일부 식당들은 운영되고 있다. 드라마 에피소드 한 편 끝나면 원작자가 에피소드의 배경이 된 실제 식당에 가서 음식을 소개하는 내용의 방송코너가 나온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음식이 나오는 드라마 한 편이 끝난 뒤에 이어서 ‘찾아라! 맛있는 TV’가 방영되어 맛집을 소개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드라마에 나오는 진짜 음식들이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는 이야기가 있는 ‘먹방’이다.

 

 

 

 

 

고로 역을 맡은 배우 마츠시게 유타카는 정말 음식을 맛있게 잘 먹는다. 그를 촬영하는 카메라 앵글은 배고픈 시청자를 유혹한다. 카메라는 음식을 먹는 고로의 모습을 최대한 가까이 촬영한다. 절대로 야식이 당기는 야심한 밤에 드라마를 보면 안 된다. 특히 일본에 오래 살아서 그곳 음식의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생각하기에도 보는 사람의 미각을 자극하게 만드는 먹방을 가장 잘 표현한 만화를 꼽는다면, 오가와 에츠시의 『신 중화일미』(학산문화사, 2004년-절판)다. 1999년에 국내에 첫 선을 보인 TV 애니메이션 ‘요리왕 비룡’의 원작이다.

 

 

 

 

 

 

 

1995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이 만화를 알 것이다. 올해 스무 살인 친구들은 이 만화를 잘 모를 수도 있다. 이 만화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세대 차이를 느끼게 된다. 당신이 요리왕 비룡 만화를 꼬박꼬박 챙겨봤고, 음식을 맛볼 때마다 흘러나오는 웅장한 중국풍 BGM를 콧소리로 낼 수 있다면 아저씨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아저씨 축에 들어간다. 만화 전문 케이블 채널에 질리도록 방영해준 재방송도 챙겨봤다. 

 

 

 

 

 

 

중국 음식이 나오는 만화가 이렇게 큰 인기를 얻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특히 중국무협영화에 나올법한 휘황찬란한 요리 기술과 음식 맛에 깜짝 놀라는 인물들의 과장된 묘사는 수많은 패러디와 유행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하찮은 요리 재료마저 최상급의 별미 음식으로 만드는 비룡은 ‘사기캐’(흠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완벽한 캐릭터를 뜻하는 은어)에 가깝다. 비룡은 절대미각의 소유자다. 음식을 한 번 맛을 보면 거기에 들어간 모든 재료, 심지어 조미료마저 다 맞춘다. 어렸을 때부터 비룡은 자신이 어머니이자 음식점 국화루의 주방장인 미령이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자랐는데,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만든 음식의 맛을 정확하게 기억해 자신이 직접 만들기도 한다.

 

 

 

 

 

 

"아.. 아니! 맛이 살아있다!" (『신 중화일미』)

 

만화는 동네 중국집에서 절대로 볼 수 없는 화려한 중국 음식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요리기술을 가진 주인공이 대결구도에 뛰어드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런 만화를 어찌 안 볼 수가 없겠는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비룡의 요리 능력은 향상된다. 이제는 ‘전설의 요리 도구’까지 등장하면서 만화는 점점 산으로 간다. '요리 만화'가 점점 ‘요리 판타지 무협 만화’로 요상하게 변한다. 그리고 비룡이 만든 음식을 맛보면서 지나치게 감탄하거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인물들의 표정은 만화가의 신의 한수. 눈으로 볼 수 없는 미각을 시각화하는데 성공했다. 비룡이 만든 음식들이 상상 속에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먹음직스러운 느낌이 나는 것이다. 실제로 오가와 에츠시는 만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최대한 맛을 느끼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고 밝혔다. 비록 우스꽝스러운 면은 있지만, 만화를 보는 독자는 자신도 만화 속 음식을 직접 맛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한다.

 

 

 

 

 

 

천하의 비룡도 뛰어난 맛에 굴복해서 나오는 과장된 표정 굴욕을 피하지 못했다.

(『신 중화일미』)

 

만약에 오가와 에츠시가『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처럼 음식을 평소대로 식사하듯이 먹는 인물들의 표정을 그렸다고 상상해보라. 음식을 한 입 씹으면서 맛을 음미할 때 나오는 대사도 인물의 표정에 어울려야 만화의 재미가 산다.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그냥 입 안에 음식물을 씹으면서 ‘음.., 이거 정말 맛있어!’라고 조용히 말하는 사람(『고독한 미식가』)과 손을 쥔 숟가락이 멈추지 않을 정도로 우걱우걱 음식을 탐스럽게 먹으면서 “아니! 세상에 이런 맛은 처음이야. 마치 음식이 살아있는 것 같아. 정말 맛있어서 또 먹고 싶어!”라고 흥분하는 사람(『신 중화일미』). 두 사람의 대사 중에 어떤 사람이 더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방금 전에 『고독한 미식가』를 싱거운 음식으로 비유했다면, 『신 중화일미』는 환상의 진수성찬이다. 천국에 가면 맛 볼 수 있는 환상의 음식이다. 여기서 다만 『고독한 미식가』의 작품성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싱거운 음식은 조미료가 팍팍 들어가고, 순전히 자극적인 맛이 감도는 음식보다 맛이 떨어진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서 싱거운 음식을 찾는다. 이런 음식도 자주 먹으면 소중한 맛을 느낀다. 그동안 자신이 짠맛에 길들여졌음을. 짠맛이 덜한 음식도 맛있어 보인다. 상대방이 맛 없다고 느껴지는 음식이 내 입맛에 맞을 수도 있다.

 

『신 중화일미』에 나오는 음식들이 입맛 까다로운 상류층 사람들이 선호하는 고급적인 것만은 아니다. 비룡은 맛이 아닌 최상품의 재료와 화려한 장식으로만 내세우는 속물적인 요리를 싫어한다. 그리고 맛으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해치는 음식도 경계한다. 비룡의 목표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맛으로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비룡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초라한 재료로 훌륭한 맛을 내는 음식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값비싼 재료가 여러 가지 들어가고, 유능한 요리사의 손에 만든 음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맛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음식 중에는 먹는 사람의 건강을 망치는 것도 있다. 결국 『신 중화일미』도 결국 『고독한 미식가』처럼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서 잊고 있던 맛의 진정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소박한 음식도 맛이 있고,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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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4-12-01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독한 애서가가 고독한 미식가를 만나셨네요ㅋㅋㅋ 멋진데요ㅎ

cyrus 2014-12-01 22:11   좋아요 0 | URL
혼자서 밥 잘 먹는 만화 주인공이 혼자서 독서하는 제 모습이 비슷해서 호칭을 지어봤습니다. ^^
 

 

 

지난주에 우리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은 소식들이 많았다.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세상을 참 멋지게 살다 간 그를 떠나 보내야한다는 사실에 믿겨지지 않아 눈물을 흘렸고, 원칙과 정의가 무참히 짓밟히는 뉴스에 스트레스가 더 쌓여만 갔다. 생각해보니 우릴 기분 좋게 해준 좋은 행복한 뉴스는 없었던 것 같다. 아예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희락’(喜樂)보다 ‘노애’(怒哀)만 불러일으키는 세상에 익숙해진 탓일까. 마음이 어수선한 상황 속에 뜬금없이 ‘그’의 이름이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에 올랐을 때 세상이 제대로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말한 ‘그’는 바로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 찰스 맨슨이다.

 

그는 1969년 ‘맨슨 패밀리’로 불리는 자신의 일당을 데리고 35명을 직접 살해하거나 지시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45년째 캘리포니아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올해 맨슨의 나이는 80세인데 자신보다 무려 54세 연하인 20대 여성과 옥중 결혼을 올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레인 버턴이라는 이름의 20대 여성은 맨슨의 무죄를 주장하며 그의 방면 운동에 힘쓴 인물이다. 맨슨이 감옥에 갇혔어도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일부 세력이 남아 있다. 버턴도 맨슨 추종자의 한 사람이다.

 

희대의 살인마, 그것도 맨슨이 나이 차가 나는 여성과 옥중 결혼을 한다는 소식은 엄청난 충격이다. 한동안 잊고 있던 흉악범의 이름이 다시 주목받으면서 맨슨의 살인사건을 언급할 때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안타까운 인물도 같이 거론되었다. 1969년에 맨슨 패밀리의 침입으로 무참히 살해된 영화배우 샤론 테이트다.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였던 샤론은 살해 당시 임신 8개월 만삭이었다.
 
맨슨의 옥중 결혼 소식을 알리는 각종 언론 기사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샤론 테이트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충격적인 외신을 국내 어느 언론이 먼저 보도했는지 모르겠지만,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여러 언론들이 맨슨과 관련된 소식을 발 빠르게 전했다. 그런데 글자만 조금 다를 뿐이지, 대부분 맨슨 관련 기사들이 ‘복사하기+붙여넣기’(Crtl+C, Ctrl+V) 기능으로 후딱 만든 느낌이 났다. 무기징역으로 감옥에 갇힌 세기의 살인마의 옥중 결혼식 그리고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여배우 살인 사건까지 이 모든 내용들은 기사 조회수를 높이게 할 수 있는 적합한 소재들이다. 그리고 맨슨과의 결혼을 원하는 버턴을 '미모'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남성 독자들의 조회수를 높이도록 만들었다.  아마도 맨슨의 옥중 결혼 소식에 유독 호들갑을 떨었던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였을 것이다. 불과 일주일이 지났는데 맨슨을 언급하는 기사가 족히 400건 이상은 넘는다. 평소보다 과도한 취재 열기다. 불이 날 정도로 빠른 기자들의 타이핑과 센스가 넘치는 문장력 덕분에 ‘찰스 맨슨’의 이름은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당당히 1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정작 중요한 내용은 없고, 그저 맨슨 사건을 단편적으로 소개하는 기사가 많았다. 앵무새가 사람 말을 흉내 내는 것처럼 뻔히 아는 내용만 적었다. 이런 형편없는 기사를 읽는다는 것은 시간, 스마트폰 데이터 용량이 아깝다. 정확한 사건의 정보를 전달하기보다는 그저 조회수를 높이고 싶어한다. 도배에 가까울 정도로 별 쓸데없는 내용만 똑같이 옮겨 쓴 기사를 쓰는 사람들은 우리는 ‘기레기’(기자+쓰레기)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인간쓰레기를 소개하는 기레기라니.

 

 

 

 

 

기레기는 ‘기자’라는 명함이 아까운 존재이다. 그들이 쓰는 글은 정보의 정확성이 떨어진다. 오로지 특종을 위해서 사건의 실체가 사실(fact)인지 아닌지 검증하지 않은 채 보도한다. 샤론 테이트를 살해한 범인으로 맨슨이라고 소개하는 기사가 많은데, 이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다. 맨슨과 샤론 테이트가 함께 언급되는 글을 읽게 되면, 독자는 맨슨이 샤론 테이트를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특히 간결한 핵심 메시지로 압축된 헤드라인만 보면 맨슨을 모르는 독자들이 오해할 소지가 있다. 예를 들면 “여배우 샤론 테이트 살해, 찰스 맨슨 옥중 결혼식”이라거나 “샤론 테이트 살인마 찰스 맨슨, 54세 연하 여성과 옥중 결혼” 같은 비슷비슷한 문구의 헤드라인이 눈에 띈다. 아무 기사 하나 골라서 베끼면 기자가 아닌 누구나 기사를 작성하는 ‘기레기 코스프레’가 가능하다.

 

 

 

 

 

 

 

 

 

 

 

 

 

 

 

 

찰스 맨슨이 어떻게 살인마가 되었는지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콜린 윌슨의 『현대살인백과』(종합출판 범우, 2011년)이 참고하는 것이 좋다. 샤론 테이트가 살해되는 장면도 나름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샤론 테이트는 맨슨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맨슨 패밀리 소속인 수잔 앳킨슨과 텍스 왓슨 그리고 나중에 페트리시아 클렌윙켈까지 가담하여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이들은 맨슨의 살해 명령 지시를 받고 우연하게 샤론 테이트의 집에 침입하여 자신들만의 광기의 무대를 펼쳤다.

 

『현대살인백과』는『아웃사이더』(1997년, 범우사)의 저자가 1962년에서 1982년 사이에 일어난 세계 각국의 살인 범죄 사건을 모아 소개하고, 분석한 책이다. 비록 21년 전에 나온 책이라서 오래된 정보라는 점 그리고 하나의 범죄 사건을 정확하게 알기에는 분량이 약간 적은 감이 있다. 그래도 잔인한 범죄를 과도하게 묘사하지 않고 사건을 냉철하게 분석하려는 필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보도의 전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자라면 흉악범죄 사건을 윌슨처럼 최대한 중립적으로 소개해야 한다. 사건 담당 기자라면 살인자가 어떻게 피해자를 죽였는지 묘사하지 말고, 살인자가 왜 피해자를 죽이는 행동을 저질렀는지 심도 있게 분석하는 보도의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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