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늘 있을 것 같은 가족,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 빈자리에 밀물처럼 오는 공허감과 슬픔을 견디기 힘들다. 죽음은 누구나 한번은 맞이해야 하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게 된다. 이런 우울한 날에 가라앉은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특별한 장례식을 열 수 있도록 유언을 남기기도 한다. 미국의 브라스밴드 리더는 조문객들이 관 속에 누워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싫어서 살아 있는 상태처럼 지팡이를 짚고 서서 조문객을 맞이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이 떡 하니 서서 조문객과 함께 있는 것이다! 생전 모습 그대로.
또 어떤 고인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테이블에 앉아 조문객을 맞았는데, 한 손에는 맥주잔을,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었다. 고인은 맥주를 즐겨 마시고, 끽연가였다고 한다. 비록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이지만, 죽어서도 생전 모습을 조문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조문객들의 슬픔을 덜어내려는 고인의 배려가 돋보인다. 이러한 이색 장례식은 조문객들이 고인을 특별하게 애도하는 날로 기억하게 되지만, 강심장이 아닌 이상 시체를 가까이 보는 것은 엽기적이다.
과연 고인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상태로 장례식을 치른다면, 조문객들의 슬픔을 덜어줄 수 있을까. 만약에 그런 방법이 실용화된다면? 19세기 후반 프랑스 상징주의 작가 빌리에 드 릴아당의 소설집 『잔혹한 이야기』(물레, 2009년)에 수록된 단편 ‘마지막 숨의 화학성분 분석기’는 죽음에서 비롯된 인간의 슬픔 감정을 무뎌지게 만드는 장난감이 등장한다.
단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난감의 이름이 특이하다. 마지막 숨의 화학성분 분석기. 사용 방법은 간단하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내뱉은 숨을 장난감에 모아둔다. 장난감은 숨의 화학성분을 분석해 죽음이 임박하는 신호를 포착한다. 살아있을 때 나오는 숨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숨의 성분을 장난감이 분석하고, 구별한다. 즉, 장난감이 사람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신호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신호를 확인했다면 가슴 아픈 일을 미리 확인할 수 있으며 고인을 떠나보내도 침울한 감정의 늪에 오랫동안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장난감을 발명한 사람은 이것을 어린이들이 많이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을 어른에 비해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발명가는 이 장난감이 인류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진보적인 물건이라고 자화자찬을 늘어놓는다. 소설은 이 특이한 장난감을 광고하는 듯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릴아당은 인류의 감성을 지배할 정도로 커져만 가는 당시 과학기술의 위력을 경계한다.
과학의 섬세한 기술이 인류의 원초적인 감정마저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된다면 영 달갑지 않다. 그리고 이런 장난감이 실제로 세상에 나온다면, 실용화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든다. 발명가는 숨 분석기가 연말연시에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이라고 강조한다. 글쎄, 썩 유쾌한 장난감은 아니다. 내가 죽게 되는 시점을 이 장난감이 정확하게 맞추는 것은 아무래도 꺼림하다. 오히려 장난감을 받는 사람이 더 우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발명가는 이 보석 같은 발명품을 할아버지 생신 기념 식사 때 주면 좋다고 말하는데,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이 장난감을 당장 부수거나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장난감은 실생활에 쓰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다. 이 장난감에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성분이 들어있는데 폭탄에 들어가는 주재료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이 예정된 죽음 날짜보다 더 빨리 저승사자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면, 이 장난감에 약간의 충격을 주면 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건강하고 멀쩡했던 사람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기 마련인데 죽을 운명은 죽음의 신만이 점지해준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이 우리의 마음을 엄습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고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살아남은 자들은 그렇다. 고인이 너무 그리워서 유품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고인의 채취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유품을 간직한다면 잠시나마 슬픔을 달랠 수도 있다.
지금도 죽음의 공포와 슬픔을 덜어줄 수 있는 기술이 나오고 있다. 최근에 고인의 유품과 그가 생전에 남긴 흔적들을 영원히 보존하는 소셜 네트워크까지 등장했다. 리브스온(LivesOn)이라는 앱은 고인 대신에 소셜 네트워크를 관리한다. 고인이 과거에 남긴 기록들을 분석해서 이것과 유사한 내용의 글과 사진을 올린다. 고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나 가족은 리브스온이 올려주는 고인의 게시물을 확인할 수 있다. 리브스온은 고인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다. 그야말로 컴퓨터 알고리즘이 사람 흉내를 낸다. 고인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서비스가 될 수 있다. 리브스온 개발자는 이 서비스를 활성화해서 고인의 쌍둥이를 만들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쌍둥이라기보다는 죽은 자를 온라인 공간에서 복제한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죽은 사람이 온라인 공간에서 살아남는다? 아무리 알고리즘으로 작동된다고 하지만, 이런 서비스가 과연 죽음이라는 우울한 사건을 덜 비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죽은 사람을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서 생전 모습을 기억할 수 있어서 좋지만, 진정한 애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죽은 자를 떠나보내기 싫은 마음이 벌써 두려워서 즐거운 잔치로 장례식을 치른다거나 컴퓨터가 고인의 생전 모습을 흉내 내도 깊은 슬픔을 덜어줄 수 없다.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고인을 애도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고인과의 이별에 슬퍼하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고인을 기릴 수 있는 살아남은 자의 예의다. 슬픔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계에 의존하는 모습은 진정한 애도라고 볼 수 없는 상식에 벗어난 행동이 된다. 물론 식음을 전폐하고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릴 정도로 깊은 슬픔에 헤어나지 못한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몽테뉴는 나이가 들어서 이가 갑자기 빠지듯이 우리가 맞이해야 할 죽음도 자연스러운 삶의 단계라고 말한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도 모르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몽테뉴의 말을 곱씹어본다면, 상대방이 죽으면 어떻게 감정을 다스려야 할지 몰라서 두렵더라도 거기에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걱정에 집착하면 마음만 병들 뿐이다. 누구나 겪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생을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게 착실하게 살아간다면 미리 죽음에 겁먹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어진다. 천상병 시인의 유명한 시구처럼 죽음을 소풍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삶의 순리라고 받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