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물고기
레오노르 콩피노 지음, 임혜경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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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점  ★★★★☆  A





동심은 신이 나서 팔딱거린다. 어린이는 놀기 좋아하는 동심이 이끄는 대로 세상을 여행한다. 어린이는 새로운 것과 친해지고 싶어 한다. 지칠 줄 모르는 동심을 품은 어린이는 놀면서 한 뼘씩 계속 자란다. 동심은 어린이가 어른으로 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른은 동심을 가두는 감옥이다. 꼼짝 없이 어른에 갇힌 동심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어른으로 변한 어린이는 자신의 가슴속에 살고 있었던 동심이 죽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프랑스 극작가 레오노르 콩피노(Léonore Confino)의 생각은 다르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본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다. 비록 동심을 만나지 못했지만, 콩피노는 동심 찾기를 실패로 단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안의 어린아이가 아직 죽지 않았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콩피노의 희곡 벨기에 물고기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동심을 다시 만나라고 부추긴다벨기에 물고기에 나오는 인물은 40대 중년 어른과 10대 어린아이. 그랑드 므시외(Grande monsieur)는 혼자 사는 크로스드레싱(Crossdressing)이다. 생물학적 성별은 남성이지만, 평소에 여성의 옷을 입는다. 그랑드 므시외는 잊을 수 없는 불행한 과거를 안고 살아간다. 그는 과거에 한 명의 자식을 둔 유부남이었다. 아내는 여성의 옷을 입는 동성애자 남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린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프티 피유(Petit fille)는 정신분석가로 활동하는 부모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그랑드 므시외를 만난다. 친한 성소수자 외에 타인을 경계하는 그랑드 므시외는 프티 피유를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아이를 양육한 경험이 없는 그랑드 므시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프티 피유의 말과 행동에 쩔쩔맨다프티 피유는 특이한 인물이다. 자신이 물고기라고 주장한다. 그녀의 양쪽 옆구리에 아가미가 있다그랑드 므시외는 프티 피유의 부모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고아가 된 프티 피유는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데, 한 번 나온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프티 피유가 흘린 눈물은 어항을 한가득 채울 수 있는 양이다.


이 극작품에 튼튼한 금붕어가 나온다. 그랑드 므시외는 프티 피유를 위해 특별한 상중 의식을 치른다.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눈물로 채운 어항에 집어넣는다. 일주일 동안 물고기와 함께 산다. 일주일이 지나면 물고기를 방망이로 한 번에 때려서 기절시킨다. 빈사 상태가 된 물고기를 튀겨서 먹으면 상중 의식은 끝이 난다. 하지만 그랑드 므시외와 프티 피유는 튼튼한 금붕어를 죽이지 못한다. 빗자루로 여러 번 내려쳐도 금붕어는 죽지 않는다. 두 사람은 금붕어와 함께 산다.


벨기에 물고기에 묘사된 시공간은 어른어린이의 경계가 없다. 그랑드 므시외는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성장하는 인간이다. 그랑드 므시외는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고독한 어른이다. 프티 피유를 만난 이후부터 그는 가족과 타인과 함께 사는 삶의 소중함을 느낀다죽지 않는 튼튼한 금붕어살아서 움직이는 동심을 상징한다. 동심은 단순히 어린이만 가지고 있는 백지상태의 마음이 아니다. 어린이와 함께 책을 읽는 일을 하는 작가 김소영동심을 어린이의 세계’라고 표현한.[어린이의 세계는 계속 커진다. 어린이의 세계 안에는 어린이가 세상을 만나면서 얻게 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속에 즐겁고 유쾌한 추억만 있는 건 아니다. 눈물과 상처도 있다. 어린이의 세계는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자양분이다. 성장이 멈춘 어른은 어린이의 세계를 잊어버린다. 하지만 어린이의 세계를 소중히 간직하는 어른은 날마다 달라지는 세상과 친해지려고 열심히 배우는 인간이다. 낯설고 새로운 것을 환대할수록 그들의 정신은 끊임없이 성장한다. 따라서 동심은 계속 자라는 마음이다.


벨기에 물고기희미해진 어린이의 세계로 향하는 거울과 같은 희곡이다. 그랑드 므시외와 프티 피유가 주고받는 대화를 읽으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 했던 말버릇과 행동을 발견할 수 있다.맞아, 나도 저랬었지!’라고 느꼈다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동심이 꿈틀거릴 것이다. 동심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사계절,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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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를 쓰는 철학 연구자들은 ‘AD’위대한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로 강조한다. 철학사의 ‘AD’는 예수가 태어난 해(Anno Domini)를 뜻하는 서력기원의 약자가 아니다. 데카르트 이후(After Descartes)’를 뜻한다. 데카르트 철학이 등장한 이후부터 철학은 신학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개인의 주체성과 이성의 가치를 강조한 데카르트 철학은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AD’를 높이 평가한 철학 연구자들은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여겼다


















* 르네 데카르트, 이재훈 옮김 방법서설: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휴머니스트, 2024)

 

* 르네 데카르트, 이현복 옮김 방법서설: 정신지도 규칙(문예출판사, 2022)




코기토(cogito)’는 데카르트 철학의 핵이다이 단어 하나로 데카르트는 진리 앞에서 생각하고 의심하는 인간의 존재를 처음으로 깨달은 철학자로 알려지게 된다예전에 철학을 철학사 겉핥기식으로 배운 나(예전에 내가 쓴 글에 이런 유형의 사람을 철학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썼다)는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출발점에 서 있는 철학자로만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데카르트 철학을 제대로 읽어보면 데카르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그의 이름에 항상 따라붙던 최초또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떼어내야 할 낡은 꼬리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의 주저 방법서설생각하는 나’, 즉 데카르트 본인 스스로 철학을 하는 과정을 우화 형태로 쓴 책이다. 기존 철학사는 개인의 주체성을 처음으로 주목한 책으로 방법서설를 언급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데카르트가 말한 는 완벽에 가까운 합리주의적인 주체의 동의어가 아니다. ‘생각하는 나는 무지와 편견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이용할 줄 아는 존재이다데카르트는 방법서설6부 막바지에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지성은 유한하므로 모든 자연법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진리를 생각해 온 본인 역시 오류를 범할 수 있다면서 솔직하게 밝힌다.



 나는 사람들이 내 글들을 검토한다면 기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를 위한 기회를 더 많이 가지게 하려고 나는 내 글들에 관해 반대한 것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그 반론들이 수고스럽더라도 나의 출판사로 보내주시기를 간청한다. 출판사가 내게 그 반론들을 알려준다면 나는 나의 답변을 거기에 동시에 첨부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를 통해서 독자들은 두 가지를 함께 보면서 그만큼 더 쉽게 진리를 판단할 것이다. 실제로 나는 답변을 길게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내가 나의 오류를 인식한다면 그것을 아주 솔직하게 인정하겠다고 약속하며, 내 오류를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쓴 것을 변호하기 위해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간단하게 말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방법서설》 중에서, 163쪽, 이재훈 옮김)

 


방법서설에서 묘사된 생각하는 나는 합리주의적 인간이 아닌 회의주의적 인간에 더 가깝다전자는 너무나도 똑똑해서 이성을 사용할 줄 아는 존재라면, 후자는 무지해서 이성을 제대로 사용해야 하는 존재이다.

















* 미셸 드 몽테뉴, 심민화 · 최권행 옮김 에세(민음사, 2022)





신학과 고대의 고전 문헌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진리에 대해 검토하고 숙고하는 일을 실천한 철학자는 데카르트가 처음은 아니다. 데카르트보다 먼저 태어난 몽테뉴(Montaigne)가 이미 생각하는 나의 중요성을에세에 언급했다.


















* 미셸 옹프레, 곽동준 옮김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 (인간사랑, 2011)


* 미셸 옹프레, 변광배 · 김중현 옮김 《아리스토텔레스의 악어들: 그림으로 읽는 철학사》 (서광사, 2022)




피에르 샤롱(Pierre Charron)은 몽테뉴와 데카르트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의 철학자다. 그는 몽테뉴와 교류를 맺었는데, 이로 인해 샤롱이 1601년에 발표한 저서 <지혜에 대하여>는 몽테뉴의 에세의 아류작 또는 모방작으로 알려졌다. 비주류 철학자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철학 세계로 이루어진 () 철학사를 쓰는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지혜에 대하여>세속 도덕의 출생 신고서라고 평가한다. 이 책의 글머리에 샤롱은 신의 지혜가 아닌 인간의 지혜를 위해 글을 썼다고 밝힌다. 샤롱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출간되기 30여 년 전에 신학과 구분되는 철학을 지지했다.


반 철학사를 쓰는 철학자답게 옹프레는 프랑스 철학의 시조 격으로 평가받는 데카르트에 낀 거품을 제거한다. 이 거품은 주류가 된 철학자들만 모여있는 철학사가 만든 것이다. 이 두꺼운 거품에 둘러싼 데카르트가 많이 주목받은 바람에 데카르트 이전에 태어난 몽테뉴가 철학자였다는 사실이 잊혔다.







몽테뉴와 데카르트는 고전을 꾸준히 탐독했지만, 그 속에 담긴 진리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진리를 의심했다. 주류 철학자들만 기억하는 철학도들은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우대했고, 몽테뉴를 은둔하는 수필가로 취급하여 철학자들의 전당에 초대하지 않았다. 철학사를 사랑하는 철학 공부는 철학자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철학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에 맞지 않는 철학자들을 무시한다자신의 입맛에 맞는 철학자들만 졸졸 따라다닌다반면에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철학자를 숭배하지 않는다. 철학이 현재 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의심하고 숙고한다소크라테스(Socrates)가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진리를 검토했듯이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 짓지 않고, 철학자들의 글을 두루두루 만난다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안다. 몽테뉴와 데카르트가 순수하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Philosopher)’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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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보면 희곡

멀리서 보면 연극


No. 8









6회 실험극 페스티벌 in 골목 실험 극장 작가 시대

(1018~113)


<갈망>

 

창작19(일구다) & 살판협동조합

· 연출 강현욱

공연 장소: 골목 실험 극장

 

20241019일 오후 7시 공연 관람

 





열쇠가 없어서 열 수 없는 술병 진열대탄탈로스(Tantalus)’라고 한다. 탄탈로스는 그림의 떡과 비슷한 뜻의 관용어다. 열쇠를 잃어버린 술병 진열대의 주인도 탄탈로스로 변한다. 그는 진열대에 보관된 술을 꺼내서 마실 수 없다. 탄탈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다. 그는 신들만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술을 훔친 죄로 지옥에서 끔찍한 형벌을 받는다. 눈앞에 음식과 물이 있는데도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탄탈로스의 마른 입술이 음식과 물에 닿으려고 하면, 음식과 물은 저 멀리 도망가 버리거나 사라진다. 탄탈로스는 영원히 갈증과 굶주림에 시달린다.








6회 실험극 페스티벌 첫 번째 참가작 <갈망> 탄탈로스의 기갈(飢渴)’과 같이 만남과 대화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인간관계를 음악, , 오브제(무대 소품)로 표현한 작품이다극은 드럼(연주 김재영)과 베이스(연주 강현욱, <갈망> 창작자 겸 연출가)에서 흘러나오는 사이키델릭(Psychedelic)풍 음악이 흐르면서 시작된다. 음악에 맞춰 무용수(하서정)가 춤을 춘다여자(양지선 분)는 우연히 만난 남자(도윤호 분)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녀는 남자와 매일 만나면서 대화를 나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질수록 여자의 방에 남자와 관련된 물건이 하나둘씩 놓인다여자의 방은 한 남자를 위한 갤러리가 된다(이 작품의 다른 제목이 <누구의 갤러리_갈망>이다).


극은 남자와 여자가 남남에서 연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단순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남자는 무대 위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두 개의 텔레비전 화면에만 나온다. 여자는 텔레비전에 갇힌 남자와 대화한다. 이때 텔레비전 한 대에 남자가 말하는 영상이 나오고, 다른 텔레비전 화면은 ‘의문의 영상을 보여준다얼굴이 아닌 여성의 상체를 클로즈업한 영상남자의 말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성적 욕망을 암시한다. 하얀 가면을 쓴 수수께끼 인물의 얼굴도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데, 상대방에게 잘 보이려고 거짓으로 꾸민 자아로 해석할 수 있다두 사람은 인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불길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갈망>에 묘사된 대화는 두 사람의 관계가 애초부터 어긋난 채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여자의 방에 놓인 남자의 물품 중 하나인 피노키오 인형진실하지 않은 감정 또는 중독에 가까운 성적 욕망을 상징한다.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할수록 그의 코는 커진다. 대화를 많이 해도, 남자가 여자의 방에 자주 들어와 몸으로 섹슈얼한 대화를 해도,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잘 모른다. 상대방을 알고 싶어서 자주 만나고 대화를 시도해 보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못한다반복된 만남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텅텅 비어 있고, 친밀감은 서늘하다.


극 중간에 관객들에게 간식과 음료를 주는 퍼포먼스가 있다. 관객들에게 제공한 음료 중에 도 있다(이 공연은 만 19세 이상 관객만 볼 수 있다). 아주 짧으면서도 달콤한 인터미션(intermission, 쉬는 시간)일 수 있겠지만, 간식과 음료에 입을 댄 관객들도 무대 밖에 있는 배우가 된다. 몇몇 관객이 간식을 먹은 후에 배가 고프군,’ ‘간식 하나 더 먹고 싶은데라고 느꼈을 수 있다. 그런 감정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생리적인 갈망이다. 갈망의 형태는 다양하. 어떤 사람은 물질에 대한 강렬한 갈망을 가지며 어떤 이는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성공했는데도 계속 성공하고 싶은 갈망을 느낀다. 인간관계가 지속되기를 갈망하는 이들도 있다하지만 갈망이 너무 커지면 원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진다<갈망>은 관객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알려준다인간은 지옥에 가지 않고도 탄탈로스가 될 수 있다자꾸만 갈망을 부추기는 이 세상이야말로 지옥이다.







<Trivia>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연출가가 긴 글이 적힌 종이를 나눠주었다. 글 위에 아래의 시를 읽어주세요라는 지시문이 있다. 시는 사라 케인(Sarah Kane)<갈망>(crave)이다. 여기서 케인의 글이 시로 소개되어 있지만, 사라 케인은 시인이 아니다. 영국의 극작가 겸 연출가다. 그녀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해럴드 핀터(Harold Pinter)의 극찬을 받은 동시에, 파격적인 표현과 연출을 선보여서 논란을 일으킨 극작가다. 케인은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총 다섯 편의 희곡과 영화 한 편을 남긴 채 1999년에 자살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8세였다. <갈망>1998년에 초연된 케인의 단막극이다. 종이에 적힌 케인의 글은 <갈망>에 나오는 ‘A’라는 인물의 독백 대사다. 사라 케인 원작의 <갈망>2012년 우리나라에 초연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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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 번 연속으로 글머리에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나올 줄 이야. 요번 글은 레비나스를 위한 글이 아니다. 연극 공연 일정을 소개한 글이다. 그래도 레비나스가 한 말을 언급하면서 이 글을 시작해야겠다.

















에마뉘엘 레비나스김도형 · 문성원 · 손영창 함께 옮김

전체성과 무한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그린비, 2018)



 작품은 언제나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한 행위다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중에서, 342)



레비나스가 말한 작품은 만든 물품이다. 일하면서 나오는 결과물, 즉 제작물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술 작품과 다르다그렇지만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 또한 노동이다. 그림 그리기, 조각품 만들기, 작곡하기. 극장 안에도 예술가가 있다. 그들 모두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공연 무대를 설치하는 무대 감독과 조명 기사. 만들어진 무대 위에 어떻게 연기할지 고민하면서 연기 연습하는 배우들. 배우들이 자신의 배역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지휘하는 연출가.


연극은 실패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다. 연출가와 배우는 무대에 올릴 희곡을 철저히 읽고 분석하면서 희곡에서 드러난 메시지를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하지만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공연이 끝나는 경우가 있다. 관객들은 공연이 난해하다고 느끼면 당혹스러워한다. 연출가, 배우, 극작가는 극장에서 실패를 맞닥뜨리는 예술가들이다.


















안톤 체호프강명수 옮김 갈매기》 (지만지드라마, 2019)



 

유명한 연극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는 단막극을 발표하면서 극작가로 성공했다. 그는 야심 차게 장막극 갈매기를 선보였지만, 첫 공연 때 참담한 결과를 눈앞에서 지켜봤다. 이 작품 발표 이후로 체호프는 한동안 장막극을 집필하지 않았고, 갈매기두 번째 공연을 만든 연출가의 제안을 처음에 거부하기도 했다. 그래도 체호프는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꿋꿋하게 갈매기를 썼다그는 실패를 두려워했지만, 실험은 두려워하지 않았다기존 장막극과 다르게 등장인물의 수를 늘렸으며 관객들의 상상력이 펼칠 수 있는 다소 독특한 결말로 극의 마무리를 지었다.








10월은 대구 연극인들이 작품을 선보이는 달이다. 한 달 동안 대구 대명 공연 거리의 분위기는 뜨겁다. 10월 초에 이미 씨어터 페스티벌 실패주의가 개최되었다. 이번 공연 페스티벌의 표제어는 실험을 뜻하는 엑스페리먼트(experiment).


첫 번째 공연작은 부산에 활동하는 극단 극예술실험집단 초 <20000원 내고 우리 작품 보러 올 바에 차라리 그 돈으로 치킨을 한 마리 사 먹겠다>.








 









* 장태준 《6월 26일》 (지만지드라마, 2019)


* 레오노르 콩피노, 임혜경 옮김 《벨기에 물고기》 (지만지드라마, 2019)




두 번째 공연작은 대구 극단 열혈단<626>이다.

 

세 번째 공연작은 대구 극단 연극저항집단 백치들 <벨기에 물고기>.









10월 중순에 또 다른 공연 페스티벌 6회 실험극 페스티벌 in 골목실험극장이 개최된다. 페스티벌 표제어는 작가 시대.


10월 중순에 또 다른 공연 페스티벌 6회 실험극 페스티벌 in 골목실험극장이 개최된다. 표제어는 작가 시대.

 

 

첫 번째 공연작은 창작 19살판협동조합이 함께 만든 <갈망>이다.

 

두 번째 공연작은 투드림<백열등: 주광성 벌레들>이다.

















* 안톤 체호프, 박현섭 옮김 《상자 속의 사나이》 (문학동네, 2024)


* [절판] 안톤 체호프, 안지영 옮김 《사랑에 관하여: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대표 단편들》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세 번째 공연작은 창작집단 진창극단 골목이 함께 만든 <롯실드의 바이올린>이다. 원작은 체호프의 단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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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0-19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든 첫번에 성공하는 건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지. 설혹 성공한다고 해도 다음번엔 어쩔거야? 근데 우리의 체홉 아저씨 너무 자신을 과신하셨나 보다. ㅋ
실험극 페스티벌도 하는구나. 난 이해가 안되면 막 화가 나거나 실망하게 되더라. 갖다오면 후기 오려 봐. ㅋ

cyrus 2024-10-20 12:13   좋아요 1 | URL
어젯밤에 <실험극 페스티벌> 첫 번째 참가작 공연을 봤고요, 오늘 오후 3시에 <실패주의 페스티벌> 마지막 참가작 공연을 봐요. 시간상으로 여유가 있어서 어제 공연 감상문 썼어요. ^^

서니데이 2024-10-19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서점도 다녀오시고, 독서모임도 하시고, 공연관람도 하시려면 주말 시간이 많이 바쁘시겠는데요. 그래도 문화생활은 좋은 점이 많을 것 같아 부럽기도 합니다.
여기는 비가 오면서 기온이 내려가는데, 대구는 조금 덜 차가웠으면 좋겠네요.
cyrus님,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cyrus 2024-10-20 12:16   좋아요 1 | URL
주말 일정이 많아질수록 쓰는 돈도 많아져요. 교통비, 책 구입비, 공연비 등등.. ㅎㅎㅎ 어제 밤바람이 너무 차가웠어요. 긴 겉옷은 입고 있었는데, 속에 반팔티를 입고 있어서 추웠어요.. ^^;;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문학 작품을 디딤돌로 삼아서 철학을 펼친 철학자다. 레비나스의 문학 작품 해석은 작가의 의도를 밝히는 분석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레비나스는 문학 작품 속 인물들의 목소리에 자신의 철학적 목소리를 덧붙인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책에 언급된 문학 작품의 의미는 변하고 뒤집힌다. 정해진 해석과 교훈에 따라 문학을 흡수하는 독자들은 레비나스의 생각이 뒤섞인 문학 작품을 어려워할 수 있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책을 번역하려면 문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번역자는 레비나스가 참고한 문학 작품이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어떤 해석을 부여하면서 문학 작품을 언급했는지 정확히 밝히기 어려운 문장이 있다. 레비나스는 작품 제목을 언급하지 않고, 그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해서 설명할 때도 있다. 결국 번역자는 자신만의 해설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레비나스 읽기 모임 두 번째 도서 (8~10월)]

에마뉘엘 레비나스김도형 · 문성원 · 손영창 함께 옮김

전체성과 무한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그린비, 2018)


*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종철 옮김 맥베스(민음사, 2004)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비극 맥베스를 두 번 언급한다(213, 347). 그는 또 셰익스피어를 언급하는데, 이 문장은 애매모호하다.



* 399


 암시로 가득 찬 마녀들의 셰익스피어적 모임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 있다. 이것은 모든 진지함의 부재인 듯, 말의 모든 가능성의 부재인 듯, 말들의 정숙함 저편에 놓인다. 이 웃음은 양의적 이야기들의 웃음이다



번역자는 암시로 가득 찬 마녀들의 셰익스피어적 모임이라는 표현주석을 달았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경식 옮김 템페스트(문학동네, 2009)




* 옮긴이 주


 셰익스피어가 마법사를 등장인물로 내세우는 희곡으로는 폭풍(The Tempest)이 있다.

 



폭풍은 셰익스피어가 쓴 마지막 희곡이며 원래 제목인 템페스트로 불리기도 한다. 이 희곡에 나오는 마법사는 작품 주인공인 프로스페로를 가리킨다. 그런데 본문에 마녀들이라는 표현을 썼는데도 번역자는 주석에 마법사를 언급한다


마녀들이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맥베스. 반란군과의 전쟁을 승리로 끝낸 스코틀랜드 영주 맥베스는 귀환하기 위해 자신의 부관(副官) 뱅코와 함께 황야를 지나간다. 그곳에서 그는 세 명의 마녀를 만난다. 마녀들은 맥베스와 뱅코에게 예언을 들려준다. 맥베스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지만, 뱅코는 왕이 될 수 없고, 그 후손이 왕이 된다는 예언이다예언은 미래를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암시로 가득 찬 마녀들템페스트의 마법사 프로스페로가 아니라 맥베스의 세 마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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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4-10-13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저 구절은 당연히 맥베스를 연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cyrus 2024-10-19 08:41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적 모임’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낯선 데다가 본문과 주석 내용이 맞지 않아서 그냥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었어요.. ㅎㅎㅎ

마녀사냥에 희생당한 사람 중에 남성도 있었다고 해요. 그들은 마법사였거나 마법사로 오해를 받은 사람들이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