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분명히 말해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에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4~25쪽 -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시인처럼 온통 책과 문자의 세계에 빠져 살아왔다. 그러다가 특별한 기회로 처음으로 제주도를 포함한 몇 몇 지역을 4박 5일 동안 여행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여행이라고 해봤자 당일치기 혹은 1박 2일이 고작이었다. 특히 제주도는 정말 좋았다. 워낙에 유명한 관광지라서 그 곳에 가본 횟수가 많은 사람이라면 이제는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겠지만, 역시 사람들이 왜 제주도를 찾는지 알 것 같다. 단순히 그 곳 날씨가 따뜻하고 풍경이 좋아서만 찾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여행을 가본 사람들은 안다. 여행이라는 삶의 행위 자체가 자유라는 것을. 자유로운 경유 과정에서 마주하는 특별한 풍경은 여행자를 자유 그 자체다. 4박 5일의 여행은 도시의 속박을 잊게 만들며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서 행복하다. 제주도의 사진을 다시 보면서 푸른 하늘과 대기가 충만했던 자유로운 시간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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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3-28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멋져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제주 바다인가요?

cyrus 2014-03-28 21:03   좋아요 0 | URL
네, 우도에서 찍은 겁니다. 제주도 중에서 가장 경치 좋고, 구경거리 많은 곳을 고르라면 우도를 최고로 꼽고 싶어요. ^^
 
사람들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질까 - 당당한 나를 위한 관계의 심리학
크리스토프 앙드레 & 파트릭 레제롱 지음, 유정애 옮김 / 민음인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Scene #1  “난 아무것도 아니야...”

 

공포증이란 특정 대상이나 상황에 국한돼 공포를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무서워하는 대상이나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 하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두려움이 유발되는 것이다. 공포증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특정 사물이나 상황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과거의 경험에 기인한다. 신경학적으로는 불안을 매개하는 신경회로의 이상이 특정 공포증의 발병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학습 이론적으로는 부모나 타인으로부터 공포반응을 배워서 체득한 것이라고도 알려진다.

 

공포증의 종류 중에 ‘사회공포증’이라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바보스러워 보인 사회 불안이나 창피를 경험한 후 상황을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당했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 '사회공포증'이라는 증상이 나타난다. 많은 사람 앞에서의 발표나 갑작스러운 주위의 시선에 대해 얼굴이 붉어지는 경험 때문에 사람을 회피한다. 증상에 특징의 차이가 있지만 이와 유사한 불안의 형태가 ‘회피성 인격장애’가 있다.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인격은 일상생활 가운데 드러나는 개인의 정서적이고 행동적인 특징의 집합체를 이른다. 실제로 인격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그러니까 사회적 관계에서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문제는 인격이라는 것이 간혹 자신에게만 국한돼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를 정신의학계에서는 ‘인격 장애’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인격 장애는 청소년기 또는 초기 성인기에 시작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여러 상황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장애현상이라고 분석한다.

 

 

 

 

만화 <피너츠>에 나오는 찰리 브라운이 회피성 인격장애 증상에 가깝다. 그는 조용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아이다. 어디서나 튀려하지 않고 자신보다는 상대방에 맞추려 하며 항상 친구들을 위한 모습을 보인다. 회피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부끄러움이 많고 자신감과 자존감이 없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싫어할까 봐 항상 눈치를 본다. 자칫하면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지금 내 욕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나는 이성들 앞에 서면 작아진다. 바짓가랑이에 위치하고 있는 ‘그것’이 커지지 못해서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작아지고 위축된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가 나 역시 특정 대상에 대한 공포증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성 공포증’이라고 해야 되나. 부끄럽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소개팅을 해본 적도, 아직 여자 한 명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이 없다. 이성 앞에만 서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초조해진다.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할까, 내가 이런 옷을 입고 왔는데 마음에 들어 할까, 갑자기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면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을까 등등 쓸데없는 불안감에 앞서 이성 만나기가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작년에 한 번 관심 있는 이성이 있어서 먼저 연락처를 알아내서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고, 단 둘이서 식사를 하는 등 이성 공포증에서 벗어나도록 나름 노력했지만 두려움이 재발하고 말았다.

 

 

 

 Scene #2  관계에 대한 불안도 심하면 병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불안 증세를 일시적인 증상으로 가볍게 여기기 쉽다. 혹은 자신이 심각한 불안 증세에 시달리는 것을 알면서도 정신치료를 부담스럽게 여겨서 피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면 심각한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면서 증상이 어느 정도 완화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일생동안 증상이 지속된다. 결국은 불안한 것이다. 불안하니 자꾸 그 상황을 회피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사회활동에까지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른바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것이다. 불안은 또 스스로의 마음을 더욱 닫게 해서 우울증을 초래하거나 심하면 공황발작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증상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진짜 자신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평범한 학생, 직장인부터 유명 연예인과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범위는 광대하다.

 

사회 공포증의 원인은 다양하다. 대뇌의 편도에 문제가 있는 경우 도파민, 세로토닌 등 신경 전달 물질의 이상 등의 생물학적 원인이 있다. 어린 시절 부모의 과잉보호 등으로 사회 기술을 배울 기회가 부족했던 경우,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 어린 시절 주변으로부터 받은 놀림이나 창피를 당한 경험이 큰 충격으로 남은 경우 등의 심리적 원인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

 

발표 차례가 다가올 때, 동료의 비난에 대응하고 싶을 때 말도 못하고 심장박동만 빨라지는 것은 모두에게 완벽하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관계 불안을 가진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명확한 근거 없이 자신에 대한 타인의 반응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존감이 낮으며 자신을 과소평가로 단정 짓는다. 이렇게 내면적으로 위축된 심리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은 관계 불안을 야기하는 자신의 단점을 타인에게 들키기 않으려고 혼자서 발버둥치는 꼴이다. 남을 의식하고, 남에게 자신을 완벽한 인간으로 잘 보이려고 한다. 불안한 상황을 일시적으로 극복할 수 있어도 지속적인 증상을 고칠 수는 없다. 단점을 최대한 가리면서 남들한테 성격의 결함이 없는 완벽한 존재로 보이려고 애쓴다면 계속 남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심리적으로 피곤함만 가중할 뿐이다.

 

관계 불안을 초래하는 원인을 알았다면 그것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내면에 자리 잡은 감정의 원인을 마주하는 것을 두렵거나 자꾸 숨기면 증상만 더 악화된다. 불안도 심하면 병이 되고, 정신 건강에 해롭다. 사회공포증이나 회피성 인격 장애는 전문가의 상담과 처방이 필요하다. 항우울제나 항불안제 등의 약물을 복용하는 약물치료와 대인공포증과 관련된 환자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들을 이해하고 교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행하는 행동치료가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각종 자율 신경계 증상(얼굴 붉어짐, 떨림 등)을 숨기려 하지 말고 오히려 상대에게 보이고자 노력하는 치료인 노출 기법도 활용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상황의 불안감을 인식한 상태에서 그 상황을 직접 스스로 노출시킨다. 말 그대로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나의 의식을 지배하는 불안의 원인을 잡기 위해서 내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자기주장 기법도 있다. 직면해야 할 특정 상황에 자신의 주장을 표현할 수 있도록 훈련한다.

 

 

 

 Scene #3  치료도 남의 눈에 의식하면 절대로 고칠 수 없다   

 

예방하기 위해서는 대인 관계를 비롯한 사회적인 상황에서는 다소의 긴장이나 불안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히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불안이나 가볍게 동반되는 수치심을 매우 치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공포증으로 발전하기 쉽다. 따라서 어려운 상황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다소 힘들더라도 피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지나친 걱정 등 잘못된 생각에 그 근본원인이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스스로 개선해 나가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자신을 향한 타인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은 현실이 아닌 자신이 만든 왜곡된 인지 형태이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진다고 해서 붉어지지 않게 하는 게 아니라 부끄러우면 붉어지는 게 당연하다는 걸 자각시키는 것이다. 경직된 생각을 한 번에 제거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오랫동안 방치한다면 심각한 증상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내면의 두려움을 직시하고 두려운 상황에 자신을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연습함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도 남의 눈에 의식한다면 절대로 고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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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가
죽은 개미를 물고간다
개미는
손가락이 없어
산 입에 송장을 문 게 아니다
슬픔을 메우느라
차라리 저 몸에 입을 묻은 것
우리, 저와 같아서 사랑한다
그 말이 슬픔을 문 듯하여
이 길
나는 너를 물고, 슬프다

 


- 서영식 ‘송시’ -

 


이별의 슬픔은 그 크기가 사랑의 깊이와 같다. 사랑이 깊을수록 이별의 슬픔은 견디기 힘들다. 만고에 빛나는 이별의 시가 있다. ‘송인’(送人)이라는 제목이 익숙한 정지상의 「대동강」이다.

 


비 갠 긴 둑에 풀빛이 어여쁜데
님 보내는 남포에서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저 물은 언제나 마르려나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보내느니.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사랑은 그 사람의 가치에서 형성된다. 그 사람의 가치가 내 목숨과 같을 때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날수록 자신만의 가치를 더 중요시해 간다. 자신의 가치가 더 중요해질수록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별의 슬픔도 옛사람 같지는 않은 듯하다. 이별에 관한 절창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세상의 변화이다.

 

「송시」는 전혀 감정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개미들의 일상에서 이별의 슬픔을 훌륭하게 건져내고 있다. 너무 큰 슬픔은 울음도 부족하다. 울음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상실감 또한 어쩌면 절대상황일 수 있다. 사랑이 깊을수록 이별의 슬픔은 크고, 슬픔이 클수록 상처도 깊다. 상처가 깊을수록 사랑은 컸던 것이고, 이제 아름다웠던 사랑의 추억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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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그림책
헤르타 뮐러.밀란 쿤데라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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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3월 마지막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 영화는 반값 할인으로, 전시회는 무료로 볼 수 있다. 집에서 버스를 타면 1시간 이상 걸리는 대구미술관에서 그림을 구경했다. 생각보다 미술관에 관람객이 많이 오지 않아서 여유롭게, 천천히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살다보면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근사한 미술관에 가서 전시된 그림들을 볼 때, 한 그림에서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기가 무척 힘들고 아쉽다는 느낌에 젖는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한 그림 앞에 오래도록 그 그림이 주는 감동과 충격을 음미하고 싶은데 시간은 그걸 허락하지 않고 보아야 될 그림은 연이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

 

어쩌면 ‘책그림책’이란 책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흥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책을 주제로 그린 일련의 그림들에 현재 세계 문단을 주름잡는 작가들이 쓴, 때로는 시 같은 때로는 콩트 같은 짤막한 감상문을 덧붙인 책. 하지만 이런 산문적인 설명으로는 이 책의 진가를 전혀 전달하지 못 하는 게 아닐까. 오히려 이 책은 읽는다거나 페이지를 넘긴다기보다 그림 하나하나 혹은 글 한편 한편마다 오래도록 하염없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책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주제로 쓴 글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눈 덮인 광활한 들판을 가로질러 머나먼 지평선을 향해 가는 한 남자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책이 보이는가 하면, 지붕 위 하늘을 마치 마법의 양탄자라도 되는 양 책을 타고 비행하는 사람도 보인다. 때로 책은 길가의 천막이 되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잠시 쉬어가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높이 쌓아올려져 바깥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받침대 구실을 하기도 한다.

 

 

 

 

환상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를 연상케 한다. 서로 상관없는 낯선 오브제와 풍경이 기이하게 만나면서 동시에 현실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그림들은 모두 책―일부는 타자기나 종이―이 소재다. 달빛 아래 들판에 커다란 책을 이불처럼 덮은 소년, 푸른 평원 위에 중절모 신사가 잔뜩 쌓인 책 위에 걸터앉은 풍경, 사다리를 밟고 책 밖으로 튀어나온 책 속의 사내. 환상과 꿈이 뒤범벅된 그림들은 이렇게 묻는 듯하다. ‘당신에게 책이란, 삶이란 무엇인가.’

 

아까운 술을 조금씩 마시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든다. 예컨대 배에 책을 가득 싣고 수평선을 향해 노 저어 가는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 이르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고 강변에 놓인 책상에서 열심히 뭔가를 집필하고 있는 사람 주위에 모여든 이들은 훼방꾼일까, 아니면 조력자일까. 단순한 듯하면서도 그림은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고 상기시키고 또 상상하게끔 만든다. 책과 세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사람들은 현실에서 책으로 책에서 현실로 자유롭게 미끄러져 들어가고 나온다.

 

누구는 시나 소설을, 누구는 찰나의 단상과 송곳처럼 벼린 우화를 보내왔다. 이해하려 들면 점점 미로에 빠진다. 갸우뚱, 애매하고 애매하다. 근데 곱씹다 보면 뭔가 우러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느새 온몸의 털이 솟구치는. 그 속엔 책과 인생 위에 펼쳐진, 세상과 우주가 있다.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한 철학자의 말을 원용하자면 책의 안과 바깥의 구분은 사실 무의미하다. 자율적이라 믿는 당신의 모든 행동이 실은 책에 쓰인 한 단어 한 문장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사람의 일생이라는 게 기껏 높이 쌓아올려진 한 무더기의 책일 수도 있다. 책 속의 그림 속의 여인을 보는 당신을, 지금 누군가, 당신이라는 그림이 그려진 책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은 책을 통해 세상을 보지만, 혹은 보고 있다고 믿지만 그 세상이 곧 하나의 거대한 책이라면 그 책을 펼쳐들고 읽고 있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어린 시절 한 권의 책이 손에 들어오면 당신은 그걸 마음 놓고 읽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어디론가 숨곤 했다. 이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나만의 장소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책을 읽듯 그런 우리 또한 어느덧 읽혀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그들에 따르면 책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책 속에서 열리고, 책 속에서 갇힌다. 각성과 혼돈의 공존. 그렇기에 책은 고맙고도 무섭다. 빌딩만큼 쌓아올려진 책 위에 홀로 선 남자 그림을 받은 체코 출신 작가 이반 클리마도 그 양면성을 훑는다.

 

 

 

 

“이는 책이라든지 다른 모든 사물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숫자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면 말이다. 그건 거리의 자동차든, 신발장의 신발이든 아니면 하늘의 별이든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우리가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친구에서 우리를 자기들 사이에 파묻어 버리는 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인생의 답은 책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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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천 프로젝트 - 4할 타자 미스터리에 집단 지성이 도전하다
정재승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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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요시, 그란도 시즌! 라지에타가 지금 터졌어." 

 

‘요시, 그란도 시즌!’이라는 말을 아는가. ‘요시(よし)’는 ‘좋다’는 뜻의 일본어다. ‘그란도 시즌(グランド シ―ズン)’은 ‘그랜드 시즌(grand season)’이란 영어의 일본식 발음이다. 뜻하지 않게 좋은 일이 생기거나 원하는 것을 얻게 됐을 때 ‘요시, 그란도 시즌!’이라는 감탄사를 쓰면 적절하다. 비슷한 말로 '라지에타가 터졌어'가 있다. 꼭 좋은 일이 아니더라도 뭔가 인상적이고 강렬한 일이 터졌을 때 두루 쓸 수 있는 감탄사다.

 

 

               

 

인터넷에 '백인천 요시'라고 검색하면 쉽게 볼 수 있는,

그 유명한 백 전 감독의 '요시, 그란도 시즌' 동영상  

 

이 표현의 특별한 의미는 야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잘 알 것이다. 2008년 일본 센트럴리그에 소속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던 이승엽 선수가 홈런을 때렸을 때 TV 해설을 하던 백인천 전 야구감독이 흥분하면서 뱉은 표현에서 유래했다. 당시 이승엽 선수는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109일 만에 터진 첫 안타가 시즌 1호 홈런이었던 것.

 

이승엽 선수의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자 백인천 전 감독은 흥분 상태에서 “요시, 아~ 그란도 시즌! 라지에타가 지금 터졌어. 아주 그냥” 등의 말을 쏟아냈다. 백 전 감독은 일본 생활을 오래 해 평소 일본식 표현을 쓸 때가 많다. ‘그란도 시즌’은 만루 홈런을 뜻하는 ‘그랜드 슬램’과 시즌 1호 홈런을 실수로 합쳐 말했다는 설과 이승엽 선수에게 ‘좋은 시즌’이 시작됐다는 의미로 말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후 ‘요시, 그란도 시즌!’과 ‘라지에타가 지금 터졌어’는 일본식 표현이 주는 묘하게 입에 붙는 느낌과 이승엽에 대한 야구팬들의 관심 등이 어우러져 네티즌 사이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 해설 음성은 인터넷에 이승엽 선수 관련 이미지를 올릴 때 꼭 함께 쓰이는 합성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현재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고 있는 이승엽이 슬럼프 끝에 안타나 홈런을 치게 되면 네티즌들은 ‘요시, 그란도 시즌!’이라는 댓글을 달기도 한다.

 

 

 

 Scene #2  4할 타자는 왜 사라졌는가?

 

뜻하지 않은 감탄사 한 마디가 야구팬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어 해설위원으로서의 백 전 감독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선수 시절에 남겼던 개인 성적이 ‘백인천’이라는 이름 석 자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든다.

 

한국 프로야구 30년사에서 최고의 타율기록은 1982년 프로야구 원년에 MBC청룡에서 뛰었던 백 전 감독이 기록한 0.412(4할1푼2리). 그 이후로 4할대의 타자는 아직껏 등장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야구의 역사가 오래된 미국에서도 요즘 4할 타자를 보기가 쉽지 않다. 1941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테드 윌리엄스가 0.406을 기록한 이후로 메이저리그에서 4할의 타율은 자취를 감췄고, 일본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작년 60개로 일본 한 시즌 최다 홈런과 동시에 아시아 리그 최다 홈런을 기록(종전 기록이 이승엽의 56개)하여 일본 리그를 평정한 블라디미르 발렌틴(야쿠르트)의 시즌 타율은 0.330이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 아주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일명 백인천 프로젝트. 한국 프로야구에서 왜 4할 타자가 없어졌는지 그 이유를 밝히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가 트위터를 통해서 이 작업에 참가할 사람들을 모았다. 자료를 모을 사람, 통계 처리를 할 사람, 자료 분석을 담당할 사람, 홈페이지를 만들 사람, 논문을 작성할 사람 등이 집단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중에 과학자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일반 시민들이다. 참가자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통계 전문가, 야구 데이터 수집가, 직장인, 대학생, 야구광... 연구자의 눈으로 보면 오합지졸일 수도 있는 참석자들이 각기 움직이며 질문도 답도 스스로 찾아내서 연구를 한 끝에 드디어 작년에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사실 4할 타자의 멸종에 관한 궁금증은 야구팬들의 수다거리로만 여겼던 주제였다. 그러다가 진화생물학자이자 골수 야구광인 스티븐 제이 굴드가 최초로 과학의 연구 주제로 끌고 들어왔다. 진화론자답게 굴드는 4할 타자 실종을 시스템의 진화적 안정화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메이저리그는 정착화 되고 팀이 이길 수 있는 다양한 전략들이 등장한다. 이렇다보니 점점 최고 타율의 선수와 최저 타율 선수 사이의 차이가 줄어든다. ‘신계’에 가까운 뛰어난 실력을 가진 테드 윌리엄스 같은 특출한 선수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대표적 진화이론인 ‘외부의 유입이 없는 닫힌 계에서는 진화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돌연변이 확률이 떨어진다’는 내용을 야구에 적용한 것으로, 메이저리그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굴드의 가설 이외에도 야구계에서는 ‘타자의 기량 약화’, ‘투수의 전문화와 기량 향상’, ‘타자에게 불리한 룰과 심리적 압박감’. ‘경기장의 변화’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놨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여러 가지 가설과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프로야구는 타율 향상 폭이 연평균 0.3리가, 출루율은 연평균 0.6리가, 장타율은 연평균 1.1리가 각각 상승하는 등 기존 야구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타자의 기량 약화'가 아닌 타고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투수 지표는 평균자책점(ERA), 이닝당 출루 허용률(WHIP), 9이닝당 삼진수(K/9)를 분석한 결과 기록 하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투저’ 현상을 확인됐다. 이러한 ‘투저타고’(투수는 성적이 낮고, 타자는 성적이 좋음) 현상의 입증을 통해서 ‘타자의 기량이 떨어져 4할 타자가 사라졌다’, ‘투수 성적이 높아져 사라졌다’는 속설도 틀린 셈이다. 결국 굴드의 가설이 4할 타자의 실종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타당성이 증명되었고, 한국 야구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한국 프로야구는 30년 동안 선수들 사이의 기량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튀는 선수가 사라지고, 4할 타자가 나타날 확률도 그만큼 낮아졌다.

 

 

 

 Scene #3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미국에서 이미 입증된 결론을 검증한 연구 결과가 다소 허무할 수도 있겠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의 기량이 점점 떨어지는 이 슬픈(?) 사실을 알게 된 야구팬들 입장에서는 맥이 풀렸을지도. 하지만, 과거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4할에 가까운 성적을 달성했던 선수들이 있었다. 앞으로도 4할 타자가 절대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전설의 야구선수 요기 베라의 말을 잊지 말자. 한 시즌 끝났다고 해서 야구는 끝난 것이 아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드디어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지 않은가. 제2의 백인천의 등장을 기대하면서 앞으로도 특별한 연구는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확보된 데이터는 한국 야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본다.

 

‘백인천 프로젝트’는 야구학의 측면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무려 58명의 아마추어 과학자들이 공저자로 참여해 외국 잡지에 제출할 만한 논문을 완성했다는 것 자체가 과학의 대중적 이해를 넘어 ‘과학의 대중적 참여’가 가능한지를 탐색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프로젝트 덕분에 야구를 몸으로 직접 뛰며 하는 동호인이나 데이터를 분석해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는 마니아 모두 야구에서 ‘즐거움’을 찾았을 것이다. 일단 시동이 걸린 이 프로젝트가 앞으로 어디까지 진화하고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실험이 될 것 같다. 마음에 품고 있었던 야구에 대한 열정 그리고 지적 호기심이 라지에타처럼 지금 터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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