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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반양장)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현대미술은 어렵다 

 

 

 

 

바넷 뉴먼  『단일성 VI』 1953년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 300억이라면 모두들 수긍하지만, 거대한 파란색 단색 화면에 한 가운데 하얀 줄만 그려져 있는 바넷 뉴먼의 <단일성 VI>이 487억 원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소더비즈 경매에서 뉴먼의 연작인 ‘단일성(Onement)’ 시리즈의 6개 작품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 4380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487억 원에 낙찰됐다.

 

현대미술은 대중에게 쉽게 감동을 주거나 그 의미가 잘 와 닿지 않는다. 혹자는 바넷 뉴먼이라는 이름이 생소할 것이다. ‘미(美)’ 혹은 미적 대상을 ‘아름답게’ 재현하는 과거의 예술 작품에 비해 현대미술 작품들은 그 외형이 단순하고 빈약하다. 그래서 여러 면에서 감상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중 으뜸은 ‘난해성’이고, 특히 말썽인 것은 ‘재현 대상에 대한 비지시성’이다. 고전미술의 처지에서 보면 미술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것이므로, 화가는 ‘이 작품은 무엇을 표현한 것’이라고 감상자에게 설명하는 게 도리다. 화가의 이런 설명을 보통 ‘재현 대상에 대한 지시성’이라 하는데, 현대미술은 종종 이 ‘도리’를 무시한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모노그램』 1955년

 

 

현대미술의 또 다른 당혹감은 재현 대상 그 ‘자체의 모호성’에도 있다. 구상이든 비구상이든 화가가 현실의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는, 혹은 발견할 수 없는 대상을 재현했을 때 감상자는 곤혹스럽다. 예를 들어 나무 판넬 위에 물감을 칠하고 그 위에 박제된 염소 머리와 타이어 등의 오브제를 설치한 라우센버그의 작품을 본다면 감상자가 느끼는 혼란은 극에 이를 것이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주체, 비평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흔한 말이지만 현대미술은 어렵다. 현대미술의 흐름을 소개하는 개론서를 읽어도 단번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작품들을 남긴 채 침묵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나름 친절하게 설명해도 예술가의 말들은 분명 지구상에 사용하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의미의 진의를 가슴 깊이 이해하기에는 난해하다. 자신의 작품을 ‘숭고’의 유형으로 특징짓는 뉴먼의 말을 먼저 읽어 보고 <단일성 VI>을 보라.

 

 

우리는 고양된 것, 즉 절대적 감정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자하는 인간의 자연스런 열망을 다시 확증하고 있다.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오랜 전설이라는 낡은 소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창조하고 있는 이미지들은 그것의 현실성이 자명한 이미지들, 숭고든 미든, 시대에 뒤떨어진 이미지들을 연상시키는 소품이나 목발이 없는 이미지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서유럽 회화의 장치 노릇을 해왔던 기억, 연상, 향수, 전설, 신화와 같은 장애물들을 비워내고 있다. 예수, 인간, 삶으로부터 성전을 짓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느낌으로부터 성전을 짓고 있다. 우리가 생산하는 이미지는 자명한 계시의 이미지로, 그것은 역사에 대한 향수의 안경 없이 그것을 바라보는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92쪽)

 

 

 

뉴먼은 생전에 끊임없이 자신의 미술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꼭 모든 현대미술을 주름잡은 예술가들이 뉴먼처럼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미술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한 관람자의 모습에 속상하거나 한심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난해한 현대미술을 관람자에게 설명하고 소개하기 위해서 비평가들은 화가의 대변인 역할을 자저했다. 우리가 보고 이해하려고 하는 현대 미술의 예술사적 의미와 그 맥락은 비평가의 ‘평론’에 의해서 탄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후 모더니즘의 흐름 속에 새로이 떠오른 예술 주체는 바로 비평가였다. 이전의 예술가들이 직접 강령과 선언문의 형태로 자신들의 생각을 드러냈다면, 전후 미술 작품의 의미를 언어로 설명해준 이들은 바로 비평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린버그를 비롯한 오늘날 비평가들의 평론은 작품에 사후적인 평가를 부여할 뿐 아니라 작품 자체를 성립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비평가 그린버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잭슨 폴록이 존재할 수 없었듯, 작품의 의미를 생산하는 비평가는 이 시대의 새로운 예술가였던 셈이다.

 

 

 

 "비평은 무슨, 빌어먹을!"

 

 

 

 

하지만 그림을 보는 비평가들의 눈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비평가들은 때때로 민망스럽고 시대착오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다.폴록은 물감을 흩뿌리는 드리핑(Dripping) 기법으로 인해 영국 희대의 살인범죄자의 이름을 따서 ‘Jack the Dripper’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러자 일부의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을 기법, 조화적인 면, 조직화가 결여된 ‘혼돈’(Chaos)이라고 혹평을 하자 폴록은 이에 대해 신경질적인 말로 답변한다. “혼돈은 무슨, 빌어먹을(No chaos. Damn it).” 폴록은 우연 자체를 부정하고 작품 제작에서 우연성이 개입하는 것은 원치 않기 때문에 물감을 바닥에 있는 화폭에 흩뿌리는 행동은 ‘영감, 비전, 직관적 결정’이라는 고도의 질서에 의해 작동된다.

 

폴록의 회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재능을 알아 본 비평가는 현대회화 비평의 양대 산맥(Berg)으로 우뚝 솟은 그린버그(Greenberg)와 로젠버그(Rosenberg)다. 두 사람은 폴록의 작품을 ‘추상표현주의’로 명칭 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반대하는 근본적인 입장은 서로 달랐다. 그린버그는 선과 면의 구별, 형태의 요소가 해체되는 폴록의 그림은 새로운 추상적 차원으로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로젠버그는 그림의 평면성까지 한정된 그린버그의 비평을 넘어서 그림을 그리는 과정, 즉 행동(Action)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처음으로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는 명칭을 제안하기도 했다. ‘현대미술’이라는 같은 길을 동시에 걷고 있고, ‘폴록’이라는 불세출의 화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현대회화 비평의 양대 산맥은 노력했지만 출발하고 접근하기 위한 시작점은 서로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미 모더니즘 회화의 교황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그린버그는 로젠버그의 비평을 반박하는 대립 상태까지 가게 된다. 결국 화가 한 사람을 둘러싼 양대 산맥의 대립은 로젠버그가 뒤늦게 판정승하게 된다. 전성기가 지난 후부터 폴록은 초기의 흑백 구상으로 회귀하게 되면서 그를 옹호했던 그린버그의 비평은 무의미해졌다.

 

 

 

 

폴록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든든한 예술적 비평대상이 사라지게 된 그린버그는 전후 모더니즘 회화의 새로운 주자로 바넷 뉴먼과 마크 로소코의 색면추상을 지목하게 된다. 그린버그는 폴록의 회화에 강조했던 새로운 평면성의 형식을 이들에게도 적용했다. 그리고 그 특징을 색면추상에서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린버그는 화가의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뉴먼과 로소코는 자신들의 작품을 ‘형식’이 아닌 ‘숭고’의 체험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색면추상을 ‘미’의 관점 그리고 색채의 형태를 통해 분석하려고 했다. 뉴먼과 로스코를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추상주의 회화의 영역 속으로 포함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폴록보다 가장 많은 오해의 비평을 받아야만 했다. 뉴먼은 치열하게 비평가들과 설전을 벌였으며 로소코는 아예 작품에 대한 설명을 스스로 포기해버릴 정도였다.

 

 

 

 

그린버그의 망언(?)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62년에 그린버그는 어느 강연회에서 미국 미술 역사 3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재미있게도 그린버그가 지목한 ‘미국 미술 역사 30년’에는 팝아트라는 어마어마한 회화의 맥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미술 역사의 고요함을 주장하던 그 시기에 그린버그가 옹호하던 모더니즘은 서서히 퇴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바로 팝아트에 의해서 말이다. 추상표현주의를 필두로 한 모더니즘 예술도 한 때 새롭고 진보적인 형식이었다. 여기에 총대를 메고 선두를 이끌던 사람이 바로 그린버그였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 새롭고 젊은 예술이 등장하고 과거 혈기왕성했던 예술은 전혀 새롭지 않은 기성 예술로 전락하는 법. 그린버그는 모더니즘과 정반대인 팝아트의 신선한 등장이 여간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비평가의 눈을 제대로 사용하기

 

아서 단토는 그린버그가 무시했던 팝아트를 획기적인 미술사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그는 ‘예술의 탈역사화’를 강조했다. 팝 아트 이후의 현대미술에서는 더 이상 역사적 방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헤겔이 말했던 예술의 종말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다양한 양식이 혼재된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새로운 노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등장한 특정한 예술 양식이 독창성과 참신성의 기준으로 비교하고 우열을 가리는 관점을 부정한다.

 

 

어떻게 하나의 양식이 다른 것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다음 주면 추상표현주의자나 팝 아티스트, 혹은 사실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무엇인가를 포기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서 말이다. (33쪽)

 

 

하지만 단토의 비평 역시 난점을 피할 수 없었다. 워홀을 비롯한 팝 아티스트들은 ‘팝아트’의 전형적인 양식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믿고 쓰는 모더니즘산(産)’ 폴록 때문에 헛물을 킨 그린버그의 전철을 밟게 된 것이다.

 

현대미술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의 예술적 담론을 되돌아보면 그림 좀 볼 줄 안다는 비평가들도 난해한 현대미술을 잘못 이해하는 관람자처럼 헛다리짚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현대미술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위안이 삼을 수 있는 대목이다. 미술에 ‘미’자도 모르는 사람이나 이들보다 그림을 많이 본 비평가나 누구든지 간에 현대미술은 어렵다.

 

관람자는 그림 보는 비평가의 눈을 빌어서 현대미술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비평가의 눈은 난해한 현대미술을 쉽게 잘 보기 위한 망원경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그것을 의지하면 예술의 시야를 넓히기 위한 망원경은 색안경이 될 수 있다. 특정 회화의 양식만 선호하고 편견의 초점에만 맞춰진 비평가의 색안경은 이제 막 현대미술을 이해하려는 초보자들에게 권하고 싶지 않은 불량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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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민음사입니다. :-)

 

민음사의 신간 <결심의 재발견>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미루기 대장,

세계 최고의 늑장 연구가가 되다

 

 

 

 

자타공인 미루기 대장이었던 피어스 스틸은 그동안 자신을 괴롭힌 늑장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진화심리학, 조직심리학, 뇌과학 전 분야를 망라하는 세계 최고의 늑장 권위자가 되었다. 바로 이 순간에도 저자의 늑장관련 논문은 각종 분야에서 활발히 인용되어지고 있다.

결심의 재발견은 고질적이고 백해무익한 늑장'합리적인 미루기'를 구분하면서 늑장에 대한 과학적 해부를 시도한다.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한 모든 결심,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결국 달성하지 못한 당신의 목표를 위해 늑장탈출에 필요한 과학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방법을 지금 여기에 모두 공개한다.

 

 

 

많은 응모 부탁드립니다. :-)

 

 

서평단 모집 상세내용

 

- 응모 방법 : 리뷰 페이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를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 완료.

 

- 응모 기간: 2013.06.05 - 2012.06.14

- 추첨 인원: 20명

- 서평단 발표: 2013.06.17 (월) 오후

- 서평 기간: 2013.06.20-2013.06.30

 

 

 

 

- 살아가면서 게으르게 되고 제대로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는 경험을 많이 겪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때의 판단에 아쉬움과 후회를 느끼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우리는 무수히 반복하면서도 쉽게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적인 측면에서 문제의 원인을 알고 그 해결 방법을 실행한다면 고질적인 문제를 고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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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3 14: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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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17: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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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교사』 1954년

 

 

저 끝으로 마을이 어슴푸레하게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황량한 들판 위에 한 남자가 홀로 서 있다. 뒷모습이라 얼굴은 볼 수 없다. 차림새로 보아 세련된 도시풍의 중년 신사로 짐작된다. 검정 코트를 반듯하게 차려 입었고 코트에 어울리는 중절모를 쓰고 있다. 그리고 달. 중절모의 머리 바로 위로는 그믐달이 교교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달빛의 기운을 받았는지 밤하늘의 어둠은 청색조로 온통 물들어 있다. 초저녁일까 새벽일까? 천지사방은 적막할 뿐이다.

 

얼핏 봐서 그림에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다. 적어도 이상한 점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들여다볼수록 야릇한 의문과 신비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우선 그믐 치고는 사위가 너무 훤하다. 중절모 위에 거의 내려앉은 듯한 달의 위치도 묘하고, 낮게 깔린 지상의 풍경과 대비된 남자는 거인처럼 커 보인다. 그리고 왜 저렇게 부동의 차렷 자세로 우두커니 서 있을까? 양복점 마네킹처럼 혹은 방부 처리되어 압정으로 고정된 곤충표본처럼 미동도 않는 모습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전혀 짐작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림 전체는 뭐라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신비와 경이의 영역으로 우리를 몰입하게 만든다.

 

마그리트가 그린 ‘교사’(敎師)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제목과 그림 전체의 이미지와의 연관성도 수수께끼다. 그의 그림은 늘 이렇다. 불합리, 부조리, 불가해함. 더불어 시와 꿈과 환상이 배어있는 그림.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것이 사실적으로 정확히 그려진다. 다만 그려진 내용은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힘든 모습들이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참이라고 믿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그 속성 때문에 참이라고 믿는 순간, 동시에 우리는 모순과 역설에 직면한다. 정작 그려진 건 도저히 참일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술은 이때 발생하고 우리는 일상의 현실과 이미지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그러나 그 헤매는 과정에서, 관성에 젖은 평범한 현실 너머를 호흡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우울증 속에서 은둔자적인 삶을 살았던 화가 자신의 뒷모습이 연상된다. 실제 마그리트는 종종 작품 속에 등장하는 중절모 사나이와 비슷한 복장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할 때 작품이 제대로 되었다고 생각했고,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했던 화가 자신에게는 헛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래도 마그리트 그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거창하게도 세계 속 단독자의 절대적인 고독이 보인다.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존재. 그 존재의 황당함. 우리는 죽음이라는 절멸의 순간에 대한 예감과 더불어 살아간다. 누구나 간직한 이 예감의 능력은 곧 '천형(天刑)'이다.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의 이별이다.  

 

 

 

 

 

 

 

 

 

 

 

 

 

 

 

 

 

산유화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무상(無常)으로서 곧 영원(永遠)을 구현한다. 그러나 그 끝없는 생성과 소멸의 질서 속에 사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다. 개별자의 삶이다. 그만큼 불만족스럽다. ‘산’의 질서를 수락은 하되 그 삶이 구족(具足)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꽃이 좋아서 산에 사는 새도 있다. 이것이 곧 삶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는 노래한다. 그러나 그 만족스러움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꽃은 지고 또 진다. 별리(別離), 또는 영결(永訣)을 피할 수 없다. 산유화는 무상 속에서 영원을 구현하는 산의 질서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유한한 개별자로서의 고독과 사랑과 비애 또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또 받아들이면서 그 모순의 한가운데 담담히 서 있다.  

 

이 망 위를 부지런히 오가는 동안에는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공포와 불안은 유보되거나 경감된다. 그러나 우리의 발은 망 사이의 틈새로 빠지기 일쑤다. 그때 절대 고독과의 대면은 불가피하다. 마그리트의 이 그림이 바로 그 불가피한 대면의 순간을 형상화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중절모를 쓴 사내는 저만치 혼자서 고독의 질서를 받아들인 채 서 있다. 무한한 세계와 유한한 인간의 적나라한 만남.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그림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뒷모습이 누구인지 중요하지가 않다. 그는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는 척 외면할 뿐이다. 그리고 묵묵히 고독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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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6-04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프잖아 ㅠㅜ
 
서점은 죽지 않는다 - 종이책의 미래를 짊어진 서점 장인들의 분투기
이시바시 다케후미 지음, 백원근 옮김 / 시대의창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동네 서점에 대한 아련한 추억

 

스위스의 소설가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한 책방으로 들어가 포르투갈어로 된 책 한 권을 집어 든다. 중년의 서점 주인이 그 옆으로 오더니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아세요?”라고 묻는다. 주인공이 모른다고 하자 “그럼 번역을 해드릴까요?”하며 서문을 읽어준다. 주인공은 그 문장들에 매혹되어 포르투갈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책을 갖게 되고, 마침내 책의 저자를 추적하고 싶은 마음에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탄다. 서점 주인이 읽어준 책 한 권 때문에, 예순을 앞둔 사람이 그제까지 유지해왔던 생활 방식을 버리고 일종의 모험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저 정도로 극적이진 않지만, 내게도 내 일생에 큰 영향을 준 동네 서점 하나가 있다. 중학교 1학년이던 나는 그때까지 부모님이 사준 세계문학전집류 외엔 다른 책을 읽은 경험이 거의 없었기에 스스로 책을 고를 줄도 몰랐다. 그날 나는 처음 내 돈으로 책을 살 작정이었다. 뭘 골라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는 내게 책방 주인이 걸어와 추천한 책이 정재승 교수의 <과학 콘서트>였다. 처음으로 굳어 있던 생각의 시선을 과학의 세계 쪽으로 향하게 만든 의미 있는 책이었다.

 

동네 서점들의 폐업 위기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엔 그런 소식이 부쩍 잦다. 그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 건, 동네 서점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귀한 독서 체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쾌적한 환경과 합리적인 시스템의 대형서점이 지금보다 더욱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줄 수 없는 작지만 빛나는 2%의 그 무엇. 사상 최악의 출판 위기라는 지금 그 무엇이 더욱 애타게 그립다.

 

누군가는 책의 몰락을 말한다. 출판 불경기가 극심하고 책 읽는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만든 책은 팔리지 않고 서점은 문을 닫는다. 이러다가 책의 운명이 영영 소멸해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한다. 하지만 절대로 그럴 일은 생기지 않는다. 출판사가 망해도 책은 죽지 않고 서점이 문을 닫아도 책은 살아남는다. 다만 바람직하고 다양한 책이 살지 못하고 잘 팔리는 책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 애서점가들이 말하는 책 알리는 비결 

 

그렇다면 동네 서점도 살리고, 팔리지 않는 좋은 책이 살아남아 고객에게 반응을 줄 최고의 방법이 있을까?

 

그 해답은 일본의 출판 전문 주간지 편집장을 지내고 있는 이시바시 다케후미가 만난 소형 서점 운영자들의 비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 <서점은 죽지 않는다>에서 등장하는 여덟 명의 서점 사람들이 책을 고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신조는 같다. 책 제목처럼 ‘서점은 죽지 않는다’라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고객들에게 좋은 책 한 권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소통하려는 그들은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책 한 권을 알리기 위해 서점을 지키고 있을 진정한 ‘애서점가’(愛書店家)다.

 

그래도 종이 만지는 일은 언제나 몸부림이다. 운명적으로 팔리지 않는 책을 서가 한쪽 구석으로 옮기는 검열에 시달리는 일이며, 자본에 한없이 부대끼는 일이다. 그러나 힘들다고 해서 종이를 만지고 소개하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이들에게 책은 소비재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와야 서점의 점장으로 활동했던 이토 기요히코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런 일들은 하던 시대는 끝났다.’ 눈앞의 판매량에 따른 수익을 좇아 베스트셀러나 화재의 신간만 찾아 진열하는 과거의 모습을 단절한 것이다. 이제는 책을 멀리하는 고객들의 냉담한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지 못하는 낡고 고집스러운 판매 전략이다. 과거의 서점들은 일방적인 판매의 이윤목적 달성에만 관심을 뒀기 때문에 고객이 선호하는 책의 종류나 독서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다.

 

동네 서점은 비교적 집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길 가다가 편안한 마음에 방문해서 종이책을 음미할 수 있는 안락한 휴식처가 될 수도 있다.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켜 가장 효과적인 방향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서점의 역할이 필요하다.

 

 

 

 ♣ 책 읽어주기 100회 도전

 

이하라 아트숍을 운영하는 이하라 마마코의 사례가 지역 동네 서점이 존속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이하라 아트숍은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서점에 불과하다. 남녀노소 지역 주민은 이곳을 방문하는데 책을 사기 위해서 오는 건 아니다. 서점은 책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도 판다. 책장이 아니라 냉장고로 향하는 손님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이하라는 책 대신에 아이스크림을 사더라도 눈치를 주지 않는다.

 

이하라는 어린이 책 전시 판매회를 홍보하기 위해서 본인이 직접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명 ‘책 읽어주기 100회 도전’. 가게 출입구에서 그림책을 읽는 것이다. 진지하게 소리 내어 책을 읽는 이하라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지나가는 길을 멈추고 그녀의 낭독을 듣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하라는 책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홍보 방법이라고 말한다.

 

독서 행위를 몸소 보여줌으로써 손님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것. 단순히 책을 더 많이 팔릴 수 있는 판매 전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동네 서점에게는 좋은 책을 널리 알리려는 열정을, 주민들에게는 열독(熱讀)의 중요성을 각인시켜 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특히 독서를 많이 해야 할 어린이들이 직접 이하라의 ‘책 읽어주기’ 행사에 참여한다면 금상첨화다.

 

즐거운 놀이는 아이의 언어적, 인지적, 사회성 발달을 촉진한다. 이때 아이의 몸에서는 자연스레 엔도르핀이 나오고 아이들은 기분이 좋아짐을 느끼게 된다. 책을 소리 내서 읽는 행위를 하나의 즐거운 놀이로 만들어 아이의 성장과 지적 발달을 도모할 수 있다.

 

그리고 ‘책 읽어주기’는 시각 및 지적 장애인들에게 실제적인 독서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이들은 신체장애 등의 이유로 일반적인 독서활동에 제약을 받는 편이다. 공공기관으로부터 화면 낭독 및 확대 S/W, 독서확대기, 점자정보단말기 등의 통신 보조기가 지원되고 있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 이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동네 서점이 이들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새로운 복지 서비스 제공자가 되어 서점의 역할이 재조명된다. 꾸준한 참여가 이루어진다면 지식정보 취약계층을 위한 낭독 서비스를 제공하는 ‘볼런티어리딩’(volunteereading)으로 발전할 수 있다. 육성을 통한 도서 낭독은 장애인들의 독서 능력과 사색의 범위가 성장하고, 책을 통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서점의 미래를 만드는 것은 바로 한 사람

 

이시바시는 말한다. 서점의 미래를 다시 한 번 만드는 것은 바로 한 사람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어렵다. 하지만 책의 존재는 건실하여서 한 사람 한 사람 책을 읽게 하는 독서 문화를 만든다면 실현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책을 읽어야 한다.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은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라고 말했다. 독서에는 혼자 읽고 이해하고 느끼는 개인 독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읽고 공유하는 독서, 즉 ‘소셜 리딩(Social Reading)’이 있다. 같은 책을 읽고 타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환경과 맥락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고, 그 안에서 내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 생각하는 과정을 모두 담고 있다. 같은 책을 함께 읽음으로써 주민은 서점 존재의 중요성을, 동네 서점은 주민이 원하는 독서의 유형을 알 수 있다. 동네 서점과 지역 주민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화합의 장이 마련된다면 동네 서점과 독서의 중요성이 무관심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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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을의 나라 - 갑을관계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배해왔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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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잣집 딸은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다는 것은 1920년대 미국사회에 대한 풍속화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돈과 섹스, 그리고 파티와 사치에 빠진 상류층, 서슬파란 금주법에도 불구하고 지겹게 반복하는 일상성을 알코올 소비로 상쇄하려는 대중들, 주류밀매로 한몫 챙겨 상류층으로 상승을 도모하는 약삭빠른 부류들. 제1차 세계대전 후 목표 없이 방황하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술과 파티에 절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로스트 제너레이션’ 젊은 미국인들의 모습이다.

 

돈과 사랑, 신의와 배반 사이의 갈등 속에서 자기 파멸로 치닫는 비극적 운명에 대한 관심이 아마도 작가에게 『위대한 개츠비』를 집필하게 한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미 20대 초반에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 피츠제럴드가 28세 되던 해에 집필하기 시작한 개츠비의 이야기는 가난한 청년은 부유한 여자와 결혼할 수 없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개츠비는 군 복무 중 미모의 데이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중 그는 유럽 전선으로 떠나고 기다린다던 데이지는 곧 시카고 출신의 부자 톰 뷰캐넌과 결혼한다. 종전 후 귀국한 개츠비는 데이지의 결혼 사실을 알고 그녀를 되찾고자 롱아일랜드에 대저택을 산다. 개츠비는 3년 동안 번 돈으로 큰 저택을 사고 호사 주말파티를 열어 손님들을 모은다. 첫사랑을 만나보려는 일편단심에서다. 이제 개츠비는 재산을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사용한다. 다시 그녀를 차지하고자 한다.

 

자신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단지 첫사랑 때문에 젊은 졸부가 된 개츠비의 모습은 어이없이 찾아온 불행한 최후를 생각해본다면 너무나도 허무하기만 하다. 소설과 영화를 본 사람은 그가 어리석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가난했던 그가 3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부자가 되게 만든 열등감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했지만 전쟁과 가난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전운의 소용돌이, 언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갈지 모르는 총탄에 두려움은 감당할 수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도 이어지는 가난한 삶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전장에 간 그를 기다릴 줄만 알았던 연인은 부유한 남자와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그 열등감과 분노감은 말 못할 정도로 자존심을 짓밟았을 것이다.

 

개츠비와 데이지 두 사람이 8년 만에 만난 장면은 아주 극적이다. 데이지를 자신의 호화스러운 집에 초대한다. 그동안 쌓여왔던 열등감의 서러움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게다가 오랜만에 데이지와 함께하는 단 둘만의 시간. 개츠비의 집을 본 데이지는 그 규모에 놀란다. 의기양양한 개츠비는 영국 주재원이 자신에게 선물한 호화 셔츠를 방안에 던지며 과시한다. 데이지는 그 중 하나를 잡고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는 처음 본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왜 자기를 기다리지 않았느냐는 개츠비의 물음에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말하며 덧붙인다. “부잣집 딸은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요.”

 

 

 

 

 ♣ 억울해? 억울하면 출세해라!

 

피츠제럴드의 유명한 대표작이 영화로 리메이크되어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있지만 내용 속 당시 시대적 배경의 이면을 살펴보면 개츠비가 처한 현실의 구조는 갑과 을로 관계를 구분 짓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슷하다.

 

기업들의 지나친 '갑'의 노릇으로 우리 사회는 심한 홍역을 치루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불합리한 차별의 제도가 존재한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놓여 있다. 개천에서도 용이 탄생할 수 있는 사다리는 있어야 평등한 사회라 할 수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근검절약으로 을에서 갑으로 진입하려는 힘없는 세력의 노력이 경쟁의 초석이 되고 갑으로 진입하는 길을 열게 하는 경쟁력이 된다. 갑들이 많은 세상은 을들이 살아가는 데는 너무 힘들고 도처에 갑들이 쳐놓은 바리케이드가 높은 장벽이 되어 을들의 반란을 부르기도 한다. 성공한 갑의 집단은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고 을은 언제나 피해자인양 억울해 하다보면 양극화 현상으로 사회문제를 야기해 사회가 혼란스럽게 된다. 우리 사회는 갑의 과부화에 노출되어 있다. 갑을 관계는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노예관계’라는 말이 나올 만큼 더 심각하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오늘날 갑을 관계의 뿌리를 조선 시대 관존민비로부터 찾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관은 민을,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지배하는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공직’이라는 성격을 더욱 강화했다. 반공을 앞세운 과대성장국가는 시민사회를 억압하면서 형성됐기에 기존 관존민비를 더욱 강고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관존민비에서 출발한 갑을 관계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뜯어먹기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결국 갑을 관계는 한국 사회의 삶의 방식과 연결되는 문제다. 갑을관계를 일상적인 삶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출세할 수 있고 배가 아파 병원을 갈 때도 인맥이 있어야 빨리 진찰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이 ‘갑을 관계’다. 갑질이라는 더러운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돈을 벌어서 크게 출세를 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게 여의치 않으면 우선 인맥이라도 갖춰야 한다.

 

 

한 대기업 임원이 항공기 여승무원 폭행 사건이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중략) 네티즌들의 댓글 한두 개를 보자. (중략) “돈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듯하군요. (비즈니스 석에 탑승해서) 발 닦아달라는 요구도 한다지요. 돈은 일단 많이 벌고 봐야 할 듯!!” (7쪽)

 

 

 

이런 물질적 불균형이 인격적 불균형으로 이어진다는 게 한국적 갑을관계의 가장 큰 비극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인격적으로 평등한 사회이고 사회적 위치가 다르더라도 개개인 모두 동등한 인격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물질적으로 열세인 상대방을 동등한 계약 상대자가 아니라 ‘나보다 부족하거나 못한 사람’으로 보는 전근대적·봉건적 인식이 남아 있다. 약탈과 착취를 위해 도입된,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는 을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현실을 인식하도록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을이 강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억울하지만 출세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돈은 일단 많이 벌고 봐야 한다"라는 열등 의식이 내포된 사고가 내면화된다. 빈농이었던 개츠비가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애인을 다시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거부가 되는 과정은 을의 전형적인 심리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갑을 미워하면서도 자신 또한 갑처럼 닮아 가는 것이다.

 

 

 

 ♣ 증오에 호소하는 시위만으로 갑을 관계를 개선할 수 없다

 

갑에 대한 을의 분노는 시위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촛불 시위가 등장해 평화적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고 있지만 과거에 흔히 보던 폭력적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의 하나로 이는 집단적 형태로 행하여지는 넓은 의미에서의 표현의 자유의 일종이다. 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민주정치 실현을 위한 전제조건이자 소수자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불법시위에 대해 대체적으로 관대한 편이다. 과격한 행동을 하더라도 인내하였고 영업방해를 받더라도 감내하였다. 수십 년간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투쟁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생긴 면역력 때문일 것이다.

 

강 교수는 심정에 호소하는 감성 민주주의의 ‘뗑깡 시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의사 표시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시위 집단은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식의 감성적 분쟁해결 습성이 법 절차에 의한 해결에 앞서 작용하기 때문에 건전한 시위문화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피해 의식에 대한 분노가 조종하는 폭력적 시위는 새로운 폭력을 양산하고 그 폭력에 짓밟히는 제2, 3의 을이 나올 수 있다. 갑이라는 이름의 가해자가 된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 때 간도에서 생활하는 조선인의 비참한 삶을 그린 최서해의 <홍염>의 결말을 기억하는가. 주인공 문 서방은 소작인으로 살아가지만, 소작료를 제때 내지 못해 그의 외동딸 용례를 중국인 지주인 인가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에 문 서방은 자신의 딸을 빼앗아 사위가 된 중국인 지주의 집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온 그를 도끼로 쳐 살해하고, 딸을 구하게 된다. 조선의 ‘을’로서 억압받는 조선인 빈농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울분의 심정을 장중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빈곤과 계급 차별을 폭로하고 이에 저항하는 인물을 설정하는 신경향파 소설에 한계가 있다. 문 서방이 선택한 문제 해결의 방식인 살인과 방화라는 장치가 한 충동적 개인의 보복 수단에 그쳤다. 주인공의 극단적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고찰함으로써 을이 갑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 방식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파편화된 개인적 체험으로 끝나버린다.

 

강 교수는 갑을관계의 종언을 고하기 위해서는 을의 반란이 ‘증오의 이용’을 넘어 ‘증오의 종언’을 향하는 정신의 전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원한과 복수심이라는 증오만으로 갑을 관계의 뿌리를 완전하게 뽑을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적과 동지’, 일명 편 가르기 식으로 모든 문제를 갑을 관계로 해석해서 자신의 행위가 폭력적, 불법적인데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일상 속에 깊게 침투한 갑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공감, 즉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성찰이 필요하다. '갑을'이라는 용어를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널리 퍼져 굳어진 계급의식이나 상하문화의 틀을 벗어나는 일이다. 갑을관계는 윽박지르면 따르는 사이가 아니라 상생하는 관계여야 한다. ‘슈퍼 갑’으로 통하는 대기업, 공무원과 그 아래로 통하는 중견기업, 하청업체, 대리점 등 대부분의 사례를 찾아보면 갑은 을을, 을은 병을, 병은 정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갑도 을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고 을도 갑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잘못된 주종, 상하 관계를 개선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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