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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날 불평등, 그 중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전 세계적인 이슈다. 이는 그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의 힘과 정치적 권모술수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생겨난다. 자본주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을 희생시키면서 상위 계층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움직여 왔다.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 큰 부자가 되고 있다. 반면, 중산층은 공동화되어 가난한 사람이 갈수록 더 늘어나고 있다. 또한, 사회적 기회는 기득권자들이 독식하며 양극화의 심화와 승자독식이라는 불평등은 우리들이 해결해야할 공동의 숙제가 되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미국의 부자들이 담장 공동체(gated community)에 살면서 호화로운 혜택을 받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사회의 부자들 역시 ‘영훈국제중학교’ 입시 비리 사건에서 보았듯이 온갖 탈법으로 자신들만의 성을 쌓아가기에 바쁘다. 최근 ‘부유세’ 논란 속에서도 1%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나머지 다수의 약자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관념을 심어 주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이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부자들의 부의 증가는 부와 소득의 위계에서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사하고 부자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낙수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악명이 자자하지만 그나마도 갈수록 환상이 되어가고 있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오늘날 점점 더 통과할 수 없는 수많은 격자들과 넘을 수 없는 장벽들로 바뀌어가고 있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 (59쪽)

 

 

컵을 피라미드같이 쌓아놓고 위에서 물을 부으면 제일 위의 컵에 물이 다 찬 뒤에 그 아래에 있는 컵으로 물이 넘치게 된다. 이처럼, 대기업이나 수도권을 우선 지원하여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 그 혜택이 중소기업이나 소비자, 지방에 돌아간다는 주장이 바로 낙수효과(Trickle Down)이다. 이런 논리라면 역사는 기득권이 영원히 보존되는 형국이 될 것이며, 아마 기득권자들은 이런 세상이 영구화되길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우만은 이런 현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들은 마침내 영구기관을 만들어 작동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22쪽)

 

 

대기업이 잘 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일반 소비자들한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 ‘낙수효과’는 정부가 경제정책을 대기업 중심으로 가져가는 데 주요 근거가 됐다. 정부가 감세를 통해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를 늘려주면 결국 총체적인 국가의 경기를 자극해 경제발전과 국민 복지가 향상된다는 것이다. 1990년 초 미국에서 시행된 이런 정책은 문제점이 드러난 지가 오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이런 잘못된 믿음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전면적인 경제 시스템의 교체 없이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창조경제’, ‘경제민주화’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불평등 구조의 희생자들이 분노하기는커녕 부자 감세와 복지 예산 삭감에 동의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바우만은 잘못된 현상의 비밀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거짓 믿음들에서 찾는다. 거짓 믿음은 '경제성장은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소비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들 사이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경쟁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의 네 가지로 정리된다. 이런 믿음들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은 자신을 스스로 영속화할 수 있는 능력에다 자신을 선전하고 강화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됐다.

 

그러나 바우만은 다시 자문한다. '길을 달리 하겠다고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될까, 우리가 길을 바꾸기만 하면 현실이 바뀌고 우리에게 행위를 명하는 현실의 냉혹한 요구들이 바뀔 것인가.' 결국, 사회적 불평등의 행진을 막을 방법은 거짓 믿음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역할'을 예로 든다.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는 『말의 양심』에서 "진짜 작가로 만드는 요소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책임을 지려고 하고 말의 실패에 속죄를 하려고 하는 갈망"이라고 썼다.

 

바우만은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위"라면서 "세계에 사는 주민들은 거주권을 매정하게 거부당하지 않는 한 예언자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다"며 여전히 암울한 미래를 예견했다. 이어 "우리는 파국을 맞이해야만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면서 "그러나 시도해보지 않는 한, 거듭해서 더욱 더 열심히 시도해보지 않는 한 그 생각이 틀렸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는 다소 힘 빠진 결론을 맺었다. 경제학적인 관점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한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를 먼저 읽은 독자라면 바우만이 대안으로 제시한 내용이 추상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적 수사와 은유를 곁들여 ‘거짓믿음’의 실체를 분석하고 그것이 심화되는 과정을 분석한 데는 공감할 대목이 많다.

 

이제 불평등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현재의 불평등 문제는 완화되기는커녕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시장에 대한 맹신을 거두고 정부 및 시민사회가 보다 더 적극적이고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대처해나갈 때 비로소 희망이 생긴다고 말한다. 현실을 직시해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사회 공통적인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책임의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는 먼저 인식의 전환을 가로막고 있는 시장경제의 ‘거짓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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