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뉴욕과 워싱턴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일어났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미국 대통령은 “우리는 지금 전쟁 중”이라면서 테러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 국방부 장관은 사전경고 없이 군사적 응징을 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강준만 《미국사 산책 15: ‘9·11 테러 시대’의 미국》 (인물과사상사, 2010)

 

 

 

 

부시 행정부는 전쟁 돌입에 앞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9·11 테러의 주모자이자 과격 이슬람 테러단체인 알카에다(Al Qaeda)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의 인도를 요구하는 한편 탈레반 정권과 연대 가능한 이슬람국가나 외부세력을 차단하기 위한 총체적인 외교전을 펼쳤다. 그러나 탈레반은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다.

 

 

 “고귀한 독수리(Noble Eagle)가 나라를 지키고 무한정의(Infinite Justice)가 테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미국이 공식 발표한 군사 작전명은 ‘무한정의’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이 빈 라덴 신병 인도를 사실상 거부함에 따라 걸프 지역 인근에 항공모함과 전투기들을 배치하면서 이 같은 작전명을 붙였다. 독수리는 미국을 상징하는 국장(國章) 중의 하나이다. ‘무한정의’ 작전은 1998년 빈 라덴의 테러리스트 훈련캠프 공습 작전이었던 ‘무한접근(Infinite Reach)’ 작전의 맥락을 잇고 있다. 당시 클린턴(Clinton) 정부는 크루즈 미사일을 이용해 빈 라덴의 기지를 공격했으나 빈 라덴을 체포하는 데 실패했다. 부시 행정부는 ‘무한’이라는 단어가 있는 작전명을 내세우면서 장기전을 감수하더라도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기필코 빈 라덴을 체포하여 테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미 국방부는 이슬람권 국가의 정서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작전명을 ‘항구적 자유(enduring freedom)’로 변경했다.

 

 

 

 

 

 

 

 

 

 

 

 

 

 

 

 

 

 

 

* [레드스타킹 16번째 책]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

 

 

 

 

아프가니스탄 공습 이후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생포된 탈레반 및 알카에다 포로들을 쿠바의 관타나모 만(Guantanamo Bay)에 있는 해군기지 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와 국방부는 수용소에 이송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포로(prisoners)’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들을 ‘포로’가 아닌 ‘테러를 일으킨 범죄자’로 간주하면 군사 법정에 세우는 데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관타나모 수용소에 구금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전쟁 포로 및 전쟁 난민을 보호하는 ‘제네바 협약(Geneva Conventions)’에 명시된 권리를 받지 못한다.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법의 적용을 받지 못한 채 무기한으로 구금 상태(Indefinite detention)로 지내야한다.

 

 

 

 

 

 

 

 

 

 

 

 

 

 

 

 

 

 

 

 

*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난장, 2011)

* 강미라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 읽기》 (세창미디어, 2013)

* 미셸 푸코, 콜린 고든, 파스콸레 파스퀴노 외 《푸코 효과》 (난장, 2014)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무기한 구금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관타나모 수용소에 기한 없이 갇혀 지내야 하는 수감자들의 실상을 고발한다. 그녀는 관타나모 수용소 안에서 일어나는 인권 침해 문제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용소 구금자를 무기한으로 억류하도록 결정하는 국가 주권의 실체를 지적한다. 버틀러는 이 ‘국가 주권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제시한 ‘통치성(governmetality)이라는 개념을 참고한다. 1970년대 말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푸코 사후에 강의록이 출간되었고, ‘통치성’을 설명한 내용이 담긴 강의록은 《안전, 영토, 인구》라는 제목이 붙여졌다)에서 처음으로 ‘통치성’을 언급한다. 푸코가 생각한 ‘통치’는 ‘품행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활동의 형태’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적합한 품행으로 처신하고 행동하도록 이끄는 기술이나 절차, 자격 등을 ‘통치성’이라 할 수 있다. 푸코는 왕권과 법을 통해 사회질서를 통제하던 16~17세기와 달리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권력과 구분되는 ‘통치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통치성은 국민 전체를 ‘인구’라는 이름으로 관리(통제)하는 동시에 건강, 안전, 복지 등을 보장받으려는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푸코가 보기에, 통치성은 단순히 국가 권력자의 권위가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지식이나 기술이다. 따라서 통치성을 분석할 때 통치의 주체가 되는 권력이나 기관이 누구이며 이들이 사용하는 지식이나 기술의 형태를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 통치의 효과가 어떤지 등을 파악해야 한다.

 

버틀러는 ‘통치성’ 개념을 활용해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을 군사 재판으로 세우려는 미국의 정책을 낱낱이 해부한다. 그리고 그녀는 법적 영역 밖에서 수감자들의 운명(‘무기한 구금’)을 결정하는 행정부 관료들의 역할을 ‘초법적 행정 권력’이 작동된 통치성으로 보고 있다. 국가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미국 행정부 관료들은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권위를 확장하고, 국제 협약을 무시하면서 수감자들을 무기한으로 감금시킨다.

 

버틀러의 책 《위태로운 삶》에 수록된 두 번째 글 『폭력, 애도, 정치』와 세 번째 글 『무기한 구금』은 ‘미국’이라는 국가가 생존할 수 있게 하는 통치성의 실체와 일상생활에 침투한 통치성의 부정적인 효과들을 보여준다. 부시 행정부는 ‘무한정의’를 위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국민들에게 테러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분자들을 경계하라고 주문했다. 테러 경계령은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부추겼고, 미국인들은 ‘자기방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테러와 무관한 무슬림들을 경계하고 차별했다. 부시 행정부의 ‘통치성’은 미국인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9·11 테러 이후의 미국인들은 인구를 관리하는 권력에 종속되는 동시에 스스로 안전을 지키려는 주체가 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타자를 위태롭게 만든 행위를 ‘정의’를 위한 일이라고 자위할 것이다. 테러에 희생된 무슬림들은 애도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힌 무슬림들은 합법적인 절차를 받을 수 있는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 채 이도 저도 아닌 ‘무기한 수감자’로 살아간다. 그들에게 ‘항구적 자유’는 없다. 이렇듯 미국 관료들이 생각하는 ‘무한’과 ‘무기한’의 공통점은 타자를 인간답지 살지 못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언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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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1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1 15:49   좋아요 0 | URL
저는 ‘무한 리필’이 가능한 식당에 가면, 제가 가져온 음식은 무조건 다 먹어요. 예전에는 ‘무한’이라는 말이 좋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이 말을 누가, 어떤 상황에 쓰느냐에 따라 부정적인 의미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요즘 9.11 테러와 관련된 글을 읽게 되니까 2001년 이후의 미국과 국내외 상황을 톺아보고 싶어지네요. 테러 이후에 미국과 이슬람권 국가 간의 냉전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군산복합체가 급성장했어요. 거기에 관련된 세력이 네오콘이죠.
 

 

 

이슬람은 삶과 종교가 하나로 된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무슬림들의 일상생활과 그들의 종교 율법 간의 차이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 정치,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영역에서 그들이 항상 이슬람의 전통과 가치관을 앞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슬람은 적어도 무슬림들에게는 삶 그 자체와 동일시된다. 이것이 정교분리의 세속적 가치관에 익숙한 서구인들이나 우리가 이슬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든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2001년에 일어난 9.11 테러 이후 우리는 이슬람권과 첨예하게 대립해 온 미국 중심의 인식 틀을 통해 이슬람을 이해해 왔다.

 

그래도 9.11 테러를 기점으로 국내에 이슬람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관련 서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왜곡과 편견에 가깝다는 점을 알면서도 속 시원하게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 책은 없었다. 몇몇 책은 너무 학문적이거나 전문적이어서 일반 독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못했다. 지금부터 소개할 세 권의 책은 이슬람을 종교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형성된 문화적 체계로 보고, 이슬람 경전인 코란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무슬림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을 폭넓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싶다.

    

 

 

 

 

 

 

 

 

 

 

 

 

 

 

 

* 수 로이드 로버츠 여자 전쟁(, 2019)

* 캐런 엘리엇 하우스 사우디아라비아: 중동을 들여다보는 창(메디치미디어, 2016)

* 제럴딘 브룩스 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뜨인돌, 2011)

    

 

 

여자 전쟁()30년 넘게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아일랜드, 코소보 등 전 대륙을 넘나들면서 여성 인권을 취재한 영국의 언론인 수 로이드 로버츠(Sue Lloyd-Roberts)가 쓴 유일한 책이자 유작이다. 그녀는 이 책을 여성의 날에 맞춰 공개하려고 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채 201510월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딸이 저자가 쓰지 못한 마지막 장(12)을 마무리 지었다. 책의 마지막 장에 저자에게 보내는 딸의 진심 어린 메시지가 있다. 가슴 뭉클해지는 글이니 꼭 읽어보시길.

 

저자의 눈길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은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들(감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파키스탄, 요르단)이다. 대부분 무슬림 여성은 여러 형태의 베일을 두르고 길을 나선다. 여성의 신체가 조금이라도 노출되면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전통적 가치관에서 기인한 풍습이다. 감비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지금도 할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여성 성기 절제술(Female Genital Mutilation, FGM)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자 전쟁은 여성들의 인권 유린 사례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정권의 부도덕함과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의 목소리도 들려준다. 이 책에서 저자는 비가시화되기 쉬운 중동 · 아프리카 · 아시아 여성들의 투쟁과 연대 의식에 주목한다.

 

여자 전쟁4장 제목은 세계에서 가장 큰 여성 감옥: 사우디아라비아이다. 제목만 보고도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무런 헌법적 견제도 없는 왕가의 통치를 받고 있다. 비록 사우디 정부는 약간의 제한적인 개혁을 발표했지만, 국민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선출할 수 없고 종교나 언론 혹은 집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사우디에서는 여성의 자동차 운전이 금지돼 있다. 사우디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사우디 사회 내부에 스며드는 서구식 문화 및 세속적 가치를 막기 위해 남편에 순종하는 무슬림 여성상을 강조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중동을 들여다보는 창(메디치미디어)은 사우디 내부에 작동하면서 유지되고 있는 사우디인 특유의 수동적인 성격을 다각도로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미국의 언론인 캐런 앨리엇 하우스(Karen Elliott House)는 사우디 사람들의 내밀한 정서와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전통과 종교적 규범을 구체적으로 살피고 있다. 그녀는 알라, , 이슬람 중심주의의 전통과 생활방식에 고분고분 따르는 사우디 사람들 대다수가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미로와 같은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미로를 허물어뜨리거나 탈출하려는 적극성과 진취성을 가진 사우디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저항 의지를 사라지게 만드는 미로가 더욱 견고해질수록 여성의 지위와 인권에 대한 여론은 반이슬람적인 서구식 가치로 규정 받으면서 외면 받는다. 아랍의 봄을 이끈 계층이 분노한 청년층이라면, 사우디 사회의 개혁 요구는 여성이 주도해왔다. 하지만 이 변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엄밀하게 근본주의적이며 보수적이기도 한 여성들 역시 존재한다. 서구 문화에 어느 정도 적응한 젊은 사우디 여성들도 남성우월주의(‘남성이 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므로 운전은 남성만 할 수 있다’)와 이슬람 중심주의 생활 방식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뜨인돌)을 쓴 호주의 언론인 제럴딘 브룩스(Geraldine Brooks)는 앞서 소개한 두 명의 저자들과 다르게 무슬림 여성들을 억압하는 이슬람 사회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권력체계가 이슬람 신앙을 왜곡해 여성들을 이용하고 억압하고 있다고 말한다. 남성 기득권층이 코란을 해석하는 권리를 독점하고, 종교적 규범을 지키기 위해 코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왔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 진보적인 무슬림들의 소극적인 저항 방식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녀의 지적에 따르면 몇몇 진보적인 무슬림은 명예살인과 여성 성기 절제술과 같은 반인권적인 관습을 이슬람 신앙과 철저히 분리하려고 한다. 그들은 서구권 국가에 망명하여 반인권 · 반문화적이라는 오명이 씌워진 이슬람 신앙 자체를 보호하는 데 급급하다. 이로 인해 그들은 이슬람 사회에 만연된 현실적인 문제를 보지 못한다. 제럴딘 브룩스는 진보적 무슬림이 근본주의적 무슬림을 향한 내부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슬림 여성들의 몸과 삶을 짓밟는 관행들을 타파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슬람권 국가에서도 작게나마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아랍의 봄이후, 무슬림 여성들의 권리 향상 열망도 높아지고 있다. 세상이 느리게 진보하는 게 사실이라면 언젠가 이들도 코란에 갇힌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일찍 여성 운동의 물결을 흠뻑 적신 미국과 유럽의 여성들도 어느 날 갑자기 자유를 만끽한 것은 아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크고 작은 여성 운동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새로운 문화와 삶의 방식을 만들려는 여성들의 여정을 계속될 것이다.

 

 

 

 

Trivia

 

 

* 엘 사와디FGM을 처녀막에 대한 집착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여자 전쟁, 36)

 

→ 이집트의 여성운동가 나왈 엘 사다위(Nawal El Saadawi)의 오자.

 

 

* 내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우울한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의 하마스(Hamas),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Mujahedin) 분파들, 이집트의 수많은 급진주의자들과 알제리의 이슬람구국전선(Islamic Salvation Front)이 자신의 조국과 이슬람 세계 전체의 모범이라고 주장하는, 남녀가 분리된 황막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 237)

 

오류. 하마스는 이스라엘 정부와 대립하는 팔레스타인의 무장 단체이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집권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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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지수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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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직업과 나이에 상관없이 어느 정도 경력만 쌓이면 ‘꼰대’가 된다. ‘꼰대’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특징은 이렇다. 첫 번째, 자신이 모든 걸 알고 있어야 한다(“내가 해봐서 아는데‥…”). 두 번째, 자신보다 어리거나 직위가 낮은 사람에게 반말한다. 세 번째, ‘내가 틀렸다’는 말보다 ‘네가 틀렸다’는 말을 자주 한다.

 

꼰대는 반민주적인 태도다. 권위주의에 기대서 세상을 보는 꼰대의 태도, 그것이야말로 서열에서 우위를 차지한 사람이 당연히 권력을 가지는 걸 합리화하는 태도다. 우리는 ‘나는 꼰대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생각하지만) 실제로 꼰대 노릇을 즐겨 하고 있다. 나이가 들었어도 열정과 패기를 잃지 않는, 노익장의 정신을 유지하여 꼰대가 되는 것을 피해갈 수만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될까 싶다.

 

세상엔 참으로 수많은 형태의 꼰대가 있다. 그중에 나는 ‘생각 있는 꼰대’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생각 있는 꼰대’는 우리가 흔히 아는 꼰대(융통성 없이 꽉 막힌 늙은이)와 다르다. ‘생각 있는 꼰대’는 누구나 공감하는 ‘맞는 말’을 잘한다. ‘생각 있는 꼰대’도 ‘꼰대’가 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들의 말에 수긍하고, 일말의 의심을 하지 않는다. ‘생각 있는 꼰대’는 몸소 모범을 보이고, 늘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는 ‘참 어른’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런데 ‘생각 있는 꼰대’가 너무 많아도 문제다. 그들이 하는 말은 100% 옳다. 하지만 ‘100% 옳은 말’이 많아지면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정작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아예 듣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100% 옳은 말’은 ‘수신자(청자)가 없는 메시지’가 되어 떠돈다. 옳은 말만 하는 꼰대의 문제점은 ‘구체적인 말’을 하지 않거나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지 않는 것이다. ‘생각 있는 꼰대’는 앵무새와 같다. 앵무새는 올바른 말만 골라 듣고 그것을 똑같이 따라 한다.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는 내가 앞서 말한 ‘생각 있는 꼰대’의 특징과 문제점을 짚어낸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우치다 타츠루(內田樹)는 ‘옳은 말만 하는 어른’의 말하기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생각 있는 꼰대’는 말 그대로 머릿속에 생각만 가득 차 있는 어른이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 밖에 있는 생각이나 말을 하지 않는다. ‘옳은 말’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생각 있는 꼰대’는 옳은 말만 하면서 얻은 덕망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반대 의견이 나올 법한 사회 문제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는 주제에 침묵한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말하기 힘든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정론이 틀릴 수 있다는 말’과 ‘무지를 인정하는 말’이다. 저자는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무엇이 옳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깨달음은 훌륭한 어른이 되는 과정의 일부이다. 훌륭한 어른은 자신의 의견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기 힘든 문제에 대해선 모른다고 말한다. 반면에 꼰대는 자신의 과거 고생담 얘기하는 걸 큰 자랑으로 여기고, 스스로 대접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꼰대의 ‘무식함’을 참 어른의 ‘무지함’과 똑같은 의미로 봐서는 안 된다.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내 주장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태도이다.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언제든지 수정한다.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는 우리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참 어른’, ‘훌륭한 어른’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 또는 되고 싶은 ‘참 어른’은 프랑스의 사상가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가 언급한 ‘무지한 스승’에 가깝다. 무지한 스승은 아는 것만을 가르치지 않고 모르는 것도 가르친다. 그들도 그렇고, 우리 또한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지하다. 따라서 가르치는 스승도, 가르침을 받는 제자 모두 지적으로 평등하다. 항상 ‘옳은 말’만 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의 말에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지적 능력의 차이는 위계의 차이로 변질되고, 우리가 ‘참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듣는 사람을 편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말만 하는 ‘생각 있는 꼰대’가 된다. ‘참 어른’이 많아진다고 해서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질까?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늘 명쾌한 해답만 주는 구세주가 될 수 없다. 아니, 그렇게 되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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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배신 - 모두에게 수학이 필요하다는 거대한 착각
앤드류 해커 지음, 박지훈 옮김 / 동아엠앤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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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6년에 응시한 수학능력시험의 수리영역(인문계) 점수는 삼십 몇 점이다. 십삼 년이나 흐른 지금은 점수가 몇 점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34점에서 37점 사이로 추정된다. 성적표를 봐야지 점수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게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성적표를 갈가리 찢어 버리지는 않았다.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 아무튼 성적표를 처음으로 확인했던 그 날 당시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2년 동안 모의고사를 여러 차례 보면서 가장 낮은 수리영역 점수는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2년 동안 교과서와 문제집 여러 권을 끄적거리면서 해온 수학 공부는 도로 아미타불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수학능력시험은 열심히 노력만 해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 하는 일이 있다는 걸 처음 깨닫게 해준 날이다.

 

내가 수험생이었던 시절에 수학을 포기한 자를 줄인 말(수포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 시절에 수포자라는 말이 유행했더라면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수학 공부를 포기했을 것이다. 모의고사 수리영역 점수가 좋지 않았는데도 수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친구들은 나를 비웃었다. 그렇게 문제집만 보면 점수가 올라가느냐면서.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와 주지 않아서 마음이 울적한 내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수학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의고사 점수에 너무 실망할 필요 없어. 평소 하는 대로 꾸준히 공부하면 분명 수학능력시험에 고득점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수학 선생님은 모의고사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다가 수학능력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은 제자들을 많이 봤다면서 나도 그런 학생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순진했던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믿었고, 수학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면 최후에 웃는 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의 말씀은 수학 공부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괴롭히는 희망 고문이 될 수 있다.

 

존버 정신(존나게 버티는 정신)으로 수학 공부를 하면 수학 시험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은 착각이고, 때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수학의 배신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인 수학 공부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여러 가지 근거로 비판한다. 머리가 나쁜 학생도 수학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수학에 대한 미신(Math myth, 이 책의 원제이다)이다. 물론 열심히 공부하면 분명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해서 무조건 잘 되는 건 아니다. 노력과 결실이 비례하지 않는 상황도 일어난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나 교수들은 어려운 수학이더라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일수록 똑똑하며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수포자가 되려는 학생들을 위한 희망의 동아줄이 되며, 이과계 학생의 취업률이 인문계 학생보다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수학의 배신은 그 말 또한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학 성적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을 주는 변수가 되지 못한다. 수학을 잘한다고 해서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이 책은 수학자나 이과 계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수학이 우리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책의 장()과 장 사이에 현장의 목소리라는 제목이 붙은 익명의 말들을 모아놓은 작은 장이다. 이 장은 수학 미신에 속은 독자들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해준다. 익명의 목소리들은 이구동성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 훌륭한 의사와 변호사, 용접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인력들인데, 아무런 연관성 찾기 힘든 수학 성적을 이유로 꿈이 좌절되었죠. (40)

 

* 나에겐 공인회계사 자격증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도 삼각법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비즈니스 스쿨에서 왜 미적분을 배워야 하는지도 의문이고요. 한 번도 쓴 일이 없거든요. (65)

 

* 나는 평생을 엔지니어로 일해 왔어요. 대수학? 미적분? 미분방정식? 쓸 일이 없다 보니 거의 다 잊어버렸어요. (83)

 

*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대부분을 풀 수 있으면서도, 배우자를 고르는 눈은 영 아닌 사람들이 많다. (125)

 

 

수학 미신을 비판하는 수학자와 이과계열 전문가들은 수학이 학생들의 대학 진학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것에 염려한다. 실제로 대부분 미국 학생들은 수학 과목에 고득점을 받지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이 이과계열 직업 업무에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적다. 다만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인이며 당연히 이 책에 나오는 사례들은 미국 사회 및 교육제도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국내 현실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책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수학 교육과 수학에 대한 무비판적인 찬양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우리에게 크고 작은 혜택을 가져다준 수학의 유용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목욕물을 버리면서(수학 교육을 비판하면서) 목욕하는 어린아이까지 버리는(수학의 유용성까지 무시하는)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 수학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현상의 원인은 수학이 아니라 수학 교육이다. 저자는 수학 공부에 초점이 맞춰진 교육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면서 철학, 예술, 신학, 역사 분야 공부에 중점을 두는 교육 제도를 제안한다. 저자의 제안은 좋긴 한데 학생들이 인문학에 올인(all-in)하는 교육 제도도 한계가 있다. 인문학도 현재의 수학 과목처럼 시험 통과나 입사를 위한 목적으로 가르치는 분야가 된다면 학생들은 난해하기 짝이 없는 철학책을 펼치게 될 것이다. 정말로 그런 날이 오면 수학의 배신후속편 격인 인문학의 배신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올지도 모른다. 저자가 후속편에서는 대안이랍시고 수학과 인문학을 같이 공부할 수 있는 교육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겠지? 제발 그런 말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어른들의 교육 제도 논쟁에 학생들 머리 터진다.

 

 

      

 

Trivia

 

 

*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게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7)

 

시작하기로 고쳐야 한다.

 

 

* 앉아서 원장에 합계를 기입하는 크라칫과 바틀비[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의 등장인물이다옮긴이]를 떠올려보라. (58)

 

옮긴이가 쓴 방주(旁註)바틀비가 누군지 알려주는 설명이 없다. 바틀비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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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5-08 17:41   좋아요 0 | URL
캐나다 학교에 가르치는 과목 명칭을 정확히 말하면 ‘산수’입니다. <수학의 배신>에 보면 산수와 수학의 차이점이 나옵니다. 따님이 캐나다에서 배운 산수는 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과목입니다. 산수를 제대로 배우면 기본적인 사칙연산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수학은 미적분, 벡터, 삼각법, 대수학 등을 말합니다. 이과 계열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들이죠.

웃긴 게 상아탑에 오랫동안 갇혀 지낸 이과계열 교수들은 미적분을 모르는 신입생을 만나면 기본 교양이 부족하다면서 학생들이 문제 있다는 식으로 지적합니다. <수학의 배신>의 저자가 비판하는 대학 교수들은 수학을 찬양하고, 입시 위주의 교육 제도를 옹호합니다. 이런 교수 밑에 배운 수학 교사는 학교에 배치됩니다. 이렇게 되면 입시용 수학을 포기하는 교육 제도를 고치기 힘들어요.

방랑 2019-05-08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6년도 수능을 응시하셨다면.. cyrus님의 연세가.
저는 수학을 싫어하진 않았어요
물론 대학교 입학 후에는 아예 본 적이 없게 되었죠.

cyrus 2019-05-09 16:09   좋아요 0 | URL
30대 초반입니다. 저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은 싫어하고, 수학사나 수학자들의 에피소드 같은 ‘이야기 있는 수학’을 좋아해요.. ^^
 

 

 

역사적으로 장애를 극복하여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들을 수 없는 가운데 총 9곡의 교향곡을 만든 음악가 베토벤(Beethoven), 소아마비를 앓았던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루 게릭 병(Lou Gehrig’s disease)’으로 알려진 근위축성측색경화증으로 인해 전신이 마비된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던 이 위대한 인물들에게 많은 사람이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2005년에 상영된 영화 <말아톤>은 다섯 살 지능을 가진 스무 살 자폐 청년이 마라톤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초원은 얼룩말과 초코파이를 좋아하고 아무 데서나 막춤을 추는 종잡을 수 없는 면모를 가졌지만 달릴 때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듬해에 나온 영화 <맨발의 기봉이>는 지적장애 1급인 엄기봉 씨의 실화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은 것이다. 기봉 씨는 팔순의 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시는 효자로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 그는 어머니의 틀니를 사드리기 위해 마라톤을 시작하지만, 지병인 협심증의 위협과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달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하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두 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장애를 가졌지만,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역경을 헤쳐 나간다. 그들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영화 밖으로 나와 우리 곁에 있다면 어땠을까. 스크린 속에만 있는 그들은 적어도 낯선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에 친근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아톤>, <맨발의 기봉이>와 같은 영화로 인해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인식은 ‘착하고 순수한 존재’로 이해된다. 문제는 이러한 이해가 장애인을 특정 이미지로 고착시킨다는 점이다. 영화와 현실 사이의 벽이란 이런 것이다. 영화가 아닌 우리 주변에 볼 수 있는 장애인이라면 ‘비장애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불행한 존재’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애인에 대해 대부분 비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이미지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는 데 일부 언론이 큰 몫을 했다. 신문과 방송에서 개인의 능력을 통해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들을 마치 한 편의 영웅담을 들려주는 것처럼 보도하는 방식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언론과 영화가 만든 ‘장애인 영웅 서사’를 보고 듣고 자란 비장애인은 장애를 ‘장애인이 극복해야 할 삶의 일부’이며 반드시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장애인 영웅 서사’는 장애인들이 직접 겪고 있는 장애의 진정한 모습을 가린다.

 

 

 

 

 

 

 

 

 

 

 

 

 

 

 

 

 

 

* 해릴린 루소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 (책세상, 2015)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해릴린 루소(Harilyn Rousso)는 장애인 인권운동가이자 여성 운동가이다. 루소는 사람들에게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Don’t Call Me Inspirational)고 말한다. 이 메시지는 그녀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루소는 이 책에서 한 개인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인식이 장애인들을 어떻게 타자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삶은 자신을 ‘대단한 영웅’ 또는 ‘불쌍한 괴물’로 보는 사회적 편견과 맞서는 투쟁의 과정이다. 그녀는 자신을 ‘생긴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주길 바란다.

 

 

 

 

 

 

 

 

 

 

 

 

 

 

 

 

 

 

* [절판] 앨리슨 래퍼 《앨리슨 래퍼 이야기》 (황금나침반, 2006)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는 발과 입으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예술가다. 그녀의 두 팔은 아예 없고 다리는 자라다 말았다. 래퍼는 팔과 다리가 짧은 해표지증(海豹肢症)이라는 희소병을 진단받았다. 생후 6주 만에 거리에 버려져 복지시설에서 자랐다. 20대에 결혼했지만,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9개월 만에 헤어졌다. 그녀는 장애인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았다. 래퍼는 자신의 벗은 몸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그녀는 자신의 몸, 즉 장애인 여성의 몸을 작품 소재로 삼음으로써 자신을 기형이라고 여기는 비장애인들에게 정상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물음을 던져준다.

 

해릴린 루소와 앨리슨 래퍼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비장애인들은 그녀들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 혹은 ‘대단하다’라는 양가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 반응에 저항하면서 분투하는 삶은 절대 쉽지 않았으리라. 장애인에게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내는 것마저도 왜 이리 깐깐하게 구느냐고 말하는 분도 있겠지만(또 어떤 분은 내가 ‘정치적 올바름’에 너무 몰입하고 있다면서 말할 것이다), 사소하면서도 익숙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장애인을 막 대하게 만드는 편견으로 굳어진다. 그러한 편견은 너무나도 투명해서 쉬이 제거하지 못한다. 장애인은 투명한 공기와 같은 세상의 온갖 편견들을 마시고 걸러내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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