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배신 - 모두에게 수학이 필요하다는 거대한 착각
앤드류 해커 지음, 박지훈 옮김 / 동아엠앤비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2006년에 응시한 수학능력시험의 수리영역(인문계) 점수는 삼십 몇 점이다. 십삼 년이나 흐른 지금은 점수가 몇 점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34점에서 37점 사이로 추정된다. 성적표를 봐야지 점수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게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성적표를 갈가리 찢어 버리지는 않았다.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 아무튼 성적표를 처음으로 확인했던 그 날 당시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2년 동안 모의고사를 여러 차례 보면서 가장 낮은 수리영역 점수는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2년 동안 교과서와 문제집 여러 권을 끄적거리면서 해온 수학 공부는 도로 아미타불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수학능력시험은 열심히 노력만 해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 하는 일이 있다는 걸 처음 깨닫게 해준 날이다.

 

내가 수험생이었던 시절에 수학을 포기한 자를 줄인 말(수포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 시절에 수포자라는 말이 유행했더라면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수학 공부를 포기했을 것이다. 모의고사 수리영역 점수가 좋지 않았는데도 수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친구들은 나를 비웃었다. 그렇게 문제집만 보면 점수가 올라가느냐면서.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와 주지 않아서 마음이 울적한 내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수학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의고사 점수에 너무 실망할 필요 없어. 평소 하는 대로 꾸준히 공부하면 분명 수학능력시험에 고득점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수학 선생님은 모의고사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다가 수학능력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은 제자들을 많이 봤다면서 나도 그런 학생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순진했던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믿었고, 수학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면 최후에 웃는 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의 말씀은 수학 공부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괴롭히는 희망 고문이 될 수 있다.

 

존버 정신(존나게 버티는 정신)으로 수학 공부를 하면 수학 시험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은 착각이고, 때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수학의 배신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인 수학 공부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여러 가지 근거로 비판한다. 머리가 나쁜 학생도 수학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수학에 대한 미신(Math myth, 이 책의 원제이다)이다. 물론 열심히 공부하면 분명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해서 무조건 잘 되는 건 아니다. 노력과 결실이 비례하지 않는 상황도 일어난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나 교수들은 어려운 수학이더라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일수록 똑똑하며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수포자가 되려는 학생들을 위한 희망의 동아줄이 되며, 이과계 학생의 취업률이 인문계 학생보다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수학의 배신은 그 말 또한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학 성적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을 주는 변수가 되지 못한다. 수학을 잘한다고 해서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이 책은 수학자나 이과 계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수학이 우리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책의 장()과 장 사이에 현장의 목소리라는 제목이 붙은 익명의 말들을 모아놓은 작은 장이다. 이 장은 수학 미신에 속은 독자들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해준다. 익명의 목소리들은 이구동성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 훌륭한 의사와 변호사, 용접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인력들인데, 아무런 연관성 찾기 힘든 수학 성적을 이유로 꿈이 좌절되었죠. (40)

 

* 나에겐 공인회계사 자격증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도 삼각법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비즈니스 스쿨에서 왜 미적분을 배워야 하는지도 의문이고요. 한 번도 쓴 일이 없거든요. (65)

 

* 나는 평생을 엔지니어로 일해 왔어요. 대수학? 미적분? 미분방정식? 쓸 일이 없다 보니 거의 다 잊어버렸어요. (83)

 

*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대부분을 풀 수 있으면서도, 배우자를 고르는 눈은 영 아닌 사람들이 많다. (125)

 

 

수학 미신을 비판하는 수학자와 이과계열 전문가들은 수학이 학생들의 대학 진학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것에 염려한다. 실제로 대부분 미국 학생들은 수학 과목에 고득점을 받지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이 이과계열 직업 업무에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적다. 다만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인이며 당연히 이 책에 나오는 사례들은 미국 사회 및 교육제도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국내 현실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책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수학 교육과 수학에 대한 무비판적인 찬양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우리에게 크고 작은 혜택을 가져다준 수학의 유용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목욕물을 버리면서(수학 교육을 비판하면서) 목욕하는 어린아이까지 버리는(수학의 유용성까지 무시하는)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 수학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현상의 원인은 수학이 아니라 수학 교육이다. 저자는 수학 공부에 초점이 맞춰진 교육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면서 철학, 예술, 신학, 역사 분야 공부에 중점을 두는 교육 제도를 제안한다. 저자의 제안은 좋긴 한데 학생들이 인문학에 올인(all-in)하는 교육 제도도 한계가 있다. 인문학도 현재의 수학 과목처럼 시험 통과나 입사를 위한 목적으로 가르치는 분야가 된다면 학생들은 난해하기 짝이 없는 철학책을 펼치게 될 것이다. 정말로 그런 날이 오면 수학의 배신후속편 격인 인문학의 배신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올지도 모른다. 저자가 후속편에서는 대안이랍시고 수학과 인문학을 같이 공부할 수 있는 교육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겠지? 제발 그런 말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어른들의 교육 제도 논쟁에 학생들 머리 터진다.

 

 

      

 

Trivia

 

 

*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게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7)

 

시작하기로 고쳐야 한다.

 

 

* 앉아서 원장에 합계를 기입하는 크라칫과 바틀비[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의 등장인물이다옮긴이]를 떠올려보라. (58)

 

옮긴이가 쓴 방주(旁註)바틀비가 누군지 알려주는 설명이 없다. 바틀비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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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5-08 17:41   좋아요 0 | URL
캐나다 학교에 가르치는 과목 명칭을 정확히 말하면 ‘산수’입니다. <수학의 배신>에 보면 산수와 수학의 차이점이 나옵니다. 따님이 캐나다에서 배운 산수는 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과목입니다. 산수를 제대로 배우면 기본적인 사칙연산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수학은 미적분, 벡터, 삼각법, 대수학 등을 말합니다. 이과 계열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들이죠.

웃긴 게 상아탑에 오랫동안 갇혀 지낸 이과계열 교수들은 미적분을 모르는 신입생을 만나면 기본 교양이 부족하다면서 학생들이 문제 있다는 식으로 지적합니다. <수학의 배신>의 저자가 비판하는 대학 교수들은 수학을 찬양하고, 입시 위주의 교육 제도를 옹호합니다. 이런 교수 밑에 배운 수학 교사는 학교에 배치됩니다. 이렇게 되면 입시용 수학을 포기하는 교육 제도를 고치기 힘들어요.

방랑 2019-05-08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6년도 수능을 응시하셨다면.. cyrus님의 연세가.
저는 수학을 싫어하진 않았어요
물론 대학교 입학 후에는 아예 본 적이 없게 되었죠.

cyrus 2019-05-09 16:09   좋아요 0 | URL
30대 초반입니다. 저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은 싫어하고, 수학사나 수학자들의 에피소드 같은 ‘이야기 있는 수학’을 좋아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