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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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29] 그리스인 조르바

 

 

 

 여러분의 행복지수는 몇 점입니까?

어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인터넷 사이트를 눈팅하다가 우연히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를 측정한 결과에 대한 기사였다. 결과가 참으로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가장 행복할 때가 말하는 것과 먹는 것이란다. 하긴 여자들에게 수다는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먹는 즐거움은 남녀노소 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행복하게 드는 요소인가 보다. 그런데 직업과 나이별대로 행복 지수를 측정하기도 했는데 서로 상반된 결과를 보여주었다. 40대 여성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반면에 40대 남성들은 행복하기는커녕 삶에 대한 흥미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특히 40대 남성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이유로는 경제적인 문제와 업무를 꼽았다. 40대 여성의 행복지수가 5점대인 반면에 남성의 행복 지수는 3점대에 불과하다.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의 평균 행복지수는 대체로 50점을 넘는다. 그리고 이 인터넷 기사에는 기사문을 읽고 있는 네티즌들을 위해서 행복지수를 측정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도 있다.  

 

(사족: 참고로 나의 행복지수는 4.44점이다. 건 뭐 숫자 자체부터 꺼림칙하다. 비록 평균 행복지수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측정된 행복지수를 가지고 내 자신이 정말 행복하다 불행하다고 단정 짓기에는 좀 애매한 점이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행복지수가 높게 나왔다고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 우리나라 행복지수 측정 결과 관련 기사 및 행복지수 측정 테스트  

(그냥 재미로 한 번 하셔도 좋을 듯)
http://news.joins.com/article/292/4391292.html?ctg=1200&cloc=home|showcase|main

  

 

 

 조르바식 행복론

 

만약에 조르바가 행복 지수를 측정하게 된다면 과연 얼마 정도 나오려는지 궁금하다. 조르바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이런 허접한질문들과 숫자 놀이를 가지고 행복을 측정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색을 낼 것이다. 만약에 측정을 하게 된다면 평균 행복지수를 거뜬히 넘을 것이다. 기사문을 계속 읽다보면 ‘행복 십계명’이라는 글이 있다. 재미있게도 십계명 속의 일부 내용들이 조르바가 지향 했던 삶의 방식과 비슷하다.

  나는 생각했다.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금화를 약탈하는 데 정열을 쏟고  

  있다가 갑자기 그 정열에 손을 들고 애써 모은 금화를 공중으로 던져 버리다니......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 N.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p 38~39 -

자본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정신적 가치에 정열을 쏟기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얻기 위한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혀 있다. 자신의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돈이 많다고 행복하다는 것은 아니다. 조르바가 말한 ‘자유’의 정의대로 물질주의가 만든 고상한 정열을 버리게 된다면 자본주의적인 삶에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있으며, 더불어 행복감도 느끼게 된다.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중략)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  

  하나 박을 때마다 우리는 승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 N.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p 333 -

조르바는 복잡하게 세상을 사는 것을 거부했다. 한 번 생각해서 행동하는 인간이 되기보다는 본능을 따르는 자유로운 ‘짐승’이 되려 하였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실천하였고, 자신의 집게손가락일지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고민 없이 잘라내고 마는 행동파이다. 남이 뭐라고 하던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남의 일에도 그는 개입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삶의 방식이 쾌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불경스럽기도 하며 혼란스러운 세상에 대해서 지나친 낙천주의에 빠진 인간으로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치장을 걷어낸 진정한 삶의 승리자였다.   

 

 

  

 모든 대한민국 40대 아버지, 아저씨들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조르바는 60대의 노인이지만 세상 앞에서 두려울 것이 없는 혈기왕성한 젊음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면 젊었을 때의 호기는 사라지게 되고 일상적인 세태에 순응하게 된다. 그리고 예전과 같은 그런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무딘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조르바는 자신에게 다가올 정신적 변화를 이미 알고 있었고 인생의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스스로 대처하고 있었다. 조르바는 행복을 유지하는 비결 중의 하나가 가족과의 단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 보쇼. 보아하니 당신은 악기 하나 못 만지는 모양인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집구석에 들어가면, 있는 건 근심 걱정뿐..... 마누라가 그렇고, 새끼들이  

  그렇잖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장차 이러다 무엇이 될까? 이런 젠장,  

  이래선 안 돼요. 산투르를 치려면 환경이 좋아야 해요. 마음이 깨끗해야 하는 거예요.  

 

   - N.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p 22 -

조르바가 원하지 않는 삶이 지금 우리나라 40대 남성들의 모습을 보는 거 같다. 이 소설이 나온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남성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버거웠던가 보다. 특히 대한민국 40대 남성을 대변하는 아버지들은 오늘도 가족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의 짐을 짊어지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열심히 뼈 빠지게 일을 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급여는 부족하기만 하고, 집에 있는 마누라는 돈 많이 못 벌어온다고 바가지를 긁어대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뭐 사달라고 조르기만 한다. 그렇다보니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처럼 불편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조르바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자유분방한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비결이 옳다고는 볼 수가 없다. 조르바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삶의 방식일 뿐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다. 불만, 근심, 걱정과 같은 부정적인 사고에 지배당하면 정작 우리 눈 앞에 가까이 있는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환경과 방식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남성들의 성격상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들에게 나약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 줄까봐 고민을 털어 놓는 것을 꺼려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도 행복이 스스로 찾아올까? 행복이 자신에게 찾아오게 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고민을 가족들과 함께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하고, 가족들은 아버지의 고민을 공감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가족이 있는 보금자리야 말로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최선의 환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의 영혼과 자유를 예찬하는 이 책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특히 인생의 참 맛을 느끼고 있을 대한민국 40대 아저씨들 그리고 아버지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단, 앞에서 언급했던 자유를 찾기 위한 가정생활에서의 도피나 조르바마초 기질은 소설 속 내용이라고 생각하시고 그냥 넘어가시길. 괜히 실천에 옮겼다가는 가정 파탄(?)이 생길 우려가 있다.

조르바의 삶의 방식은 자유과 행복을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지만 지나치게 그의 삶을 찬양만할 뿐 현실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인생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삶의 진리를 제시할 뿐이지 무조건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인생의 자습서가 아니다. 학창 시절에 숙제로 낸 수학 문제들을 풀기 싫어서 참고서에 베끼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앞에 놓여있는 행복이라는 답을 찾기 위한 삶의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 해결해나가지 않고 타인의 삶이나 책에 의지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게 된다면 남은 일생을 번뇌에 시달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자신보다 높은 곳이나 낮은 곳에서 행복을 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작 행복은 자신과 같은 높이에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눈높이에 맞추게 되면 숨어 있었던 행복이라는 존재가 보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그리스인 조르바』가 대한민국 40대 모든 분들에게 행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그만 도움이 되는 책으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다. 다음에는 모든 40대 아버지들, 아저씨들이 행복해하는 희망찬 뉴스가 날아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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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10-11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에 얽매어 살아야 하는 남자들에게 책을 통해서나마 거침없는 자유인(사실상 난봉꾼)을 만나는 기쁨을 누려보라고 카잔차키스가 선물을 마련했구나 하고 생각해야죠.실제로 조르바 같이 산다면...욕을 엄청나게 얻어먹을 겁니다.

cyrus 2010-10-12 16:28   좋아요 0 | URL
저도 조르바를 읽으면서 이 사람의 행동과 쿨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지만..
간혹 배워서는 안 되는 것(?)도 있더라구요ㅎㅎ^^;;
그래도 이 책을 젊은 시절에 읽었다는 사실에 뿌듯하답니다.
물론 나이가 지나서도 읽어도 되는 고전이지만
대한민국 많은 중년 남성분들이 젊은 시절에 많이 조르바를
많이 읽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리뷰에도 40대 남성 기사 내용과
연관시켰습니다.

2010-10-12 0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2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도둑 2010-10-12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인 조르바는 한 마디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은 영혼을 가진 남자죠. 저도 조르바의 무모함에 기가 질리긴 했지만 그가 삶과 사랑에 대해 노래하고 막힘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다는 점은 카찬차키스처럼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선입견,편견 없이 사물을 대하고 노래하고 행동하는.잊었던 한 남자를 키로스 님 글에서 보고 갑니다.
저는 행복지수 59.3 나오네요...^^ 감사~~

cyrus 2010-10-12 16:35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이런 그리스에 이런 걸출한 작가와 작품, 그리고 개성이 강한
캐릭터가 나왔다는 점에 저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카잔차키스가 두 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는데,
생전에 받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아라비안 나이트 1 범우 세계 문예 신서 14
리처드 F.버턴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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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001-1] 아라비안나이트

 

 

 무모한 천일야화 도전


이번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주최한 리뷰 이벤트에서 운이 좋게 당첨이 되어 『천일야화』세트를 받게 되었다. 원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세트 중 랜덤 발송이었지만 이미 『신』세트 모두 소장하고 있던 터라 뭐 어떻게..... 저렇게 하여.....『천일야화』세트를 받게 되었다. 사실 『천일야화』세트를 받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어릴 때부터 읽었던 축약본 아라비안 나이트가 아닌 완역본의 고전을 서재에 있다는 자체가 기뻤다. 그리고 1001Books 독서 프로젝트 목록에도 『천일야화』가 포함되어 있으니 이번 당첨이 나의 독서에 큰 활기를 불어준 셈이었다.   

 

 



하지만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천일야화』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는 리처드 F. 버턴 (1821~1890) 판이 아니다. 버턴이 번역하기 100여 년 전에 이미 프랑스의 앙투안 갈랑(1646~1717)이라는 작가가 방대한 이슬람의 전설과 민화를 번역한 것이다. 이슬람 문화를 유럽에서 최초로 소개한 사람을 리처드 버턴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앙투안 갈랑이 먼저이다. 이 책에 대한 알라딘 서지 정보에 의하면 발행 당시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면 괴테, 스탕달 등의 작가에도 큰 영향을.....  

 

이야기가 갑자기 앙투안 갈랑 버전의『천일야화』로 새는 거 같다. 자세한 정보는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를 검색해서 찾아보시길. 어차피 앙투안 갈랑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을 읽고난 뒤, 리뷰에 언급해도 되니깐..... 설명은 여기까지 하겠다.   

  

각설하고, 이제 리처드 버턴 판의 『천일야화』아니, 범우사에서 출간된 『아라비안 나이트』에 대해서 글을 시작해보겠다.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 1001권』에는 당연히 리처드 버턴 판이 소개되어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라면 리처드 버턴이라는 이름의 꼬리표는 항상 붙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좀 망설였다. 출간된 지 무려 17년 정도 되었으며(초판 발행 시기가 1992년 12월이다!) 이미 몇 년 전에 쓴 리뷰에는 이 책에 대한 찬평을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있어서 읽는 내내 지루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같은 형태의 이야기가 나온다.....  

   몇 권부터는 번역이 엉망이다..... 등등.      

 

간혹 평이한 칭찬과 책 속 일부 이야기들을 리뷰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대체로 후반부의 권수로 갈수록 그다지 그렇게 좋은 평의 리뷰가 없다. 그래서 범우사판 시리즈를 두고 보류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이벤트에 덜컥 당첨되어서 안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동네 도서관에 당당히 서가에 꽂히고 있어서 최장수 출판 책으로서 위용을 떨치고 있다. 그래서 열린책들 세트가 집으로 배송될 때까지만 1권만 읽기로 하였다. 딱 1권만.....  

 

우여곡절 끝에 1권을 빌리게 되었는데 나와 친분이 있는 동네 도서관의 스마일 사서(남성인데 성격이 무척 착해서 도서관 사서 중에서 제일 친절하고 항상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분이다)가 나에게 1권을 가리키며 씩 웃으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건투를 빕니다."   

    ...... ??

 

그 말을 바로 듣자마자 이해를 하지 못한 나는 한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표정을 본 사서는 본인도 헌책방에서 범우사판 시리즈를 헐값에 구입해서 읽었는데 4권까지 읽다가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버턴이 쓴 완역판이라서 범우사 시리즈가 최고인 것은 인정하였지만 역시나 이 책의 구성의 단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읽기가 쉽지 않음을 토로하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가에 2~4권이 안 보이는데 그 부분의 권수는 보존서고에 보관되어 있냐고 물어봤다.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은 보존서고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컴퓨터에 검색하고 난 뒤,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인 스마일을 활짝 지으면서  

사서가 하는 말.....

  

    "네, 보존서고에 있구요..... 만약에 다음 2권도 읽고 싶으면 

    저에게 이야기하세요. 언제든지 빌려드릴께요."   

    ..... ?! !!!! 

 

나는 의도적(?)이지 않은 사서의 친절한 말에 무심결에 '네' 하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시리즈를 완독하려는 무모한 시민이 되고 말았다. 1권 읽다가 재미가 없으면 다음 권도 안 읽어도 되는 일이지만 스마일 사서의 친절한 표정을 보니 안 읽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스마일 사서는 4권까지 읽다고 포기했는데 나는 1권부터 포기하면 X팔리지 않은가! 

  

은연중에 드러난 독서에 대한 알랑한 자존심이 시리즈 도전에 대한 포기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읽는데 괜찮으면 다음 권도 읽을 생각이다. 솔직히 1권은 좀 무난하였다. 읽다가 중간에 지루한 느낌은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친절한 스마일 사서가 나의 독서 프로젝트 도전을 할 수 있게 해준 숨은 공로자였던 것이다.  

 

 

아! 아라비안 나이트 특유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구성에 혹한 나머지 이상하게도 리뷰도 길어지게 되었다. 이제 진짜로 내용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사실 1권에는 그렇게 기억이 나는 이야기가 없다. 왜냐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고 나면 나중에 기억이 남는 이야기가 없다.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 도중에  새로운 이야기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인해서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뭐 계속 읽다보면 적응은 되지만..... 그래도 읽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1권에서 기억나는 이야기라곤 수많은 여자들과 하룻밤의 동침을 하고 난 뒤에 잔혹하게 죽이는 샤리야르 왕의 이야기, 그리고 운명의 여인 샤라자드(요즘은 세헤라자데라고 하는데 출판 당시 외국어 표기법에 의거해서 그런지 이 책에는 ‘샤라자드’라고 표기하고 있다)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간혹 등장하는 외설적인 대화와 삽화들이 기억이 날 뿐이다. 어린이용 축약본이 있는 이유가 원전에 있는 외설적이면서도 잔혹한 내용들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원전에는 샤리야르 왕이 자신의 아내와 흑인 노예의 불륜 장면을 본 뒤에 열 받아서 여성들과의 잔인한 동침을 하게 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알고 있었고, 요즘에 나오는 어린이용에도 이야기의 시작을 샤라자드가 샤리야르 왕에게 이야기를 하는 장면부터 일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초반부터 불륜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곤란하다.    

  

1권에는 우리가 아는 캐릭터인 신드바드나 알리바바의 이야기는 아직 안 나온다. 그래서 내용이 좀 낯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 딱 하나 온전히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으니..... 그것은 ‘왕과 매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야기에 나오는 왕의 이름이..... 신드바드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신드바드가 아닌 동명이인의 인물이다)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신드바드 왕에게는 애지중지 키우는 매 한 마리가 있는데, 어느 날에 사냥하는 도중에 왕이 무척 갈증이 나서 눈 앞에 마침 물방울이 흐르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왕은 나무에 흐르는 물을 잔에 받으려고 하는데. 자신의 매가 발톱으로 잔을 엎질렀다. 매의 기이한 행동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왕이 계속 잔에 물을 받으려고 하면 또 매가 잔을 엎질러버렸다. 이에 왕은 무척 화가 나서 단번에 매를 죽이고 말았다. 이제 곧 숨이 멎게 될 매는 왕에게 나무 위를 보라는 몸짓의 신호를 보냈다. 왕은 다 죽어가는 매의 신호에 따라 나무 위를 응시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독사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알고 보니 독사들의 입에서 나온 독인 것이었다. 뒤늦게 매의 행동을 알게 된 왕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매를 죽인 것에 대해 큰 후회감에 목놓아 울면서 후회했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방의 행동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상대방이 무슨 의도로 행동이나 말을 하는지 잘 헤아려보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이 이야기 말고도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을 비난하거나 삶에 대한 교훈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원전이 단순 성인용은 아닌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에도 <변강쇠 타령>이나 <고금소총>과 같은 성(性)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듯이 이슬람 인들도 성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자유분방하게 표현할 줄 알았던 것이다. 
  

1권의 또 다른 특징은 버턴이 번역본을 출판 당시 쓴 머리말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라비안 나이트 판본의 역사(물론 앙투안 갈랑 판본에 대한 언급도 있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 그리고 아랍 어에 대한 언어 법칙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머리말이 무려 23페이지나 할애되고 있다.  

  

분량도 많은 것도 있지만 버턴은 머리말에서 자신의 번역이 이전의 번역보다 월등히 훌륭한 점들을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가면 설명하고 있어서 읽기에 지루하다. 자신의 정통된 이슬람 어 사용을 자랑하면서 자신의 번역본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정도 가지고 영국인 버턴이 이슬람 문화에 대해서 식견이 넓고, 본인도 유럽에서의 이슬람 문화의 전파를 주장할 정도로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애정이 유독 강했던 이유는 머리말의 후반부에 알 수 있다.  

 

   요즈음 영국은, 자국이 세계 최대의 이슬람교도국임을 차차 잊어가는 모양이다.  

   또한 최근에는 조직적인 아라비아어 연구를 경시하고, (중략) 인도 문관(文官)의 임용시험 

   에서조차 조금도 중요시하지 않고 있다. (.....) 갑자기 이슬람교국에서 통치권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되면, 근소한(지극히 근소한) 우리 우방마저 분개시키고 마는 결과가 되어 결국  

   실패를 겪게 될 것이다.  

 

    - 『아리비안 나이트 1권』[영역자 버턴의 머리말] 리처드 F. 버턴. 김병철 역, p 26 -   

 

영국이 이슬람교도국이라.....??   '인도' 문관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인도를 식민지 삼아 지배하는 영국의 통치 상황을 알 수 있다. 버턴이 아라비안 나이트를 번역, 출간한 시기가 1885~1888년이다. 인도는 1857년에 무굴 제국 멸망 후, 영국의 식민지국이 되었고, 1877년에는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인도의 여왕이 된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버턴이 왜 영국을 이슬람교도국이라고 자처하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버턴은 한술 더 떠 이슬람교도를 지배하는 자는 이슬람 교의 문화와 언어를 습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습득 방법에는 자신이 번역한 아라비안 나이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리고 있다.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했던  근대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의 성향이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1권은 무난하게 읽었지만 다음 2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앙투안 갈랑 번역본을 읽기 전에 잠깐 버턴 번역본 1권을 읽어보려고 했었는데 일이 커지고 말았다. 일단 2권도 읽어 보기로 하였다. 원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신드바드, 알리바바 이야기 정도는 읽어봐야 할 거 같기 때문이다. 2권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궁금하면서도 몇 권까지 읽을 수 있을지 걱정도 된다. 일단 읽을 수 있을 능력이 될 때까지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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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0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차드 버턴이고,앙투안 갈랑이고를 떠나서...
어릴때 만화책으로 말고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ㅠ.ㅠ

cyrus 2010-10-07 21:41   좋아요 0 | URL
아무리 버턴 본 번역판이 세계적으로 알아준다고 해도...
뭐니뭐니해도 그냥 만화로 읽는게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ㅎㅎ
아예 원전을 만화화한 아라비안 나이트가
출간되었으면 좋겠네요. 오히려 만화가 더 읽기가 쉽잖아요^^

노이에자이트 2010-10-0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헌책방에서 40년전 번역된 정음사판을 사서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물론 버튼 판이죠.매 이야기는 징기즈칸의 일화에도 나옵니다.민족이나 국적을 떠나 비슷한 서사구조를 지닌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cyrus 2010-10-07 19:05   좋아요 0 | URL
어! 저도 칭기즈칸 생각 했었는데..
나무에 물을 마신다는 점만 다를 뿐
내용과 결말이 같죠ㅎㅎ
그래서 1권의 내용 중에서 제일 기억이 남는 거 같습니다.
사실 리뷰에 칭기즈 칸 일화를 언급하려다가
리뷰가 아라비이안 나이트화(?)될까봐 언급 안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07 23:01   좋아요 0 | URL
아하...역시 징기즈칸 이야기...아무래도 그게 연상된다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책들 세계문학 122
페터 한트케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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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17] 어느 작가의 오후

 

 

 

      꿈꾸는 작가의 오후 
 

   

우연히 도서관에서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를 만났다.
평소에 작가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작품으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께가 얇은 탓도 있지만, 겉표지 없는 노란색 책이 한편으로 작가노트 같은 분위기도 나서  
(작가노트라기 보다는 노란색 열린책들 북북이 같기도 하다)
페터 한트케의 책에 저절로 손이 갔다.


제목 그대로 이름이 없는 작가의 오후를 그리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단순히 작가의 눈으로 보고 있는 오후의 풍경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작업실 내부 

                                                             

정원 
                                                              

공원 
                                                              

강변 
                                                              

들판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도시의 거리 등등. 
 


우리가 현실에서 쉽게 마주하면서도 지나쳐버리는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작가는 경험하는 세상은 현실과 꿈이 교차하고 있는 환상의 공간이다. 
오전부터 시작된 소설 쓰기를 중단하고 오후에 짬을 내서 쉬려고 했건만
‘작가의 본분’이라는 직업병이 머릿속에 각인된 작가는
소설 구상에 필요한 언어가 잃어버리지 않을까봐 걱정을 하기도 하고, 
소설 속 서술처럼 주변 시선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작품의 장르 자체가 소설이라는 점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작가의 망상은 갈수록 심화된다.
자신의 서재가 있는 작업실로 돌아오면서도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과 풍경이 모두 환영이라고 생각한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온 작가는 소설을 쓰게 될 오전이 올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을 끝으로 작가가 겪었던 환상적인 오후는 그렇게 저물어 간다.  

 

 

  
 
                                     고립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다      

 

                   

 

사실 작가라는 직업에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짧지 않은 산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작품 구상을 위한 심혈을 기울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접촉  

그리고 외부 세계와의 단절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보니 고립된 생활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불후의 명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코르크로 둘러싼 병실 안에서
고독과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이중고에 맞서야 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인생처럼 말이다. 

한트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가처럼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면서 글을 써야하는 실제 작가들에게는 어쩌면 외부 세계와의 만남은
그들이 꿈꾸는 하나의 일탈일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펜과 글을 놓아두고 외부 세계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집필 생활하면서 느껴보지도 못했던 정(情)도 느껴보고  

창작의 고통으로 인해 생긴 번뇌의 찌꺼기를 뱉어내고 

고립으로부터 해방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작품 속 작가는 해방을 시도해보나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노쇠하게 만들어버렸다.
작업실에서 탈출을 해도 자신에게 외부 세상은 낯설게만 느껴지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작품 구상에 결부시키려고 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정도 얻지도 못한 채 그냥 오후동안 싸돌아다닌 것이다.  

결국 그는 고립으로부터의 해방감을 잠시나마 느끼지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걷는 에셔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현실과 꿈을 혼동한 채 살아야 하는 고립의 굴레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독자에게 새로운 현실의 만남과 작품으로서의 해방을 제공해주다 
 

 

                                  


                                      나 혼자 꿈을 꾸면, 그것 한갓 꿈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다.

                         -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1928~2000,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2>에서 인용)

   

 

 

비록 작가는 고립으로부터의 해방은 못했지만,  

작품 읽기를 통해 낯설고도 새로운 현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어느 작가의 오후』는 단지 일상 모습을 그대로 나열하고 있는 무의미한 텍스트이면서도  

작가가 겪는 망상이 가득한 꿈에 불과하다. 

그러나 독자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무의미한 텍스트에도 현실감이 부여된다.  

훈데르트바서의 말처럼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작가의 꿈 같은 체험에 자연스럽게 개입되어 

전혀 꿈 같지 않는 실제 현실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작품에 대한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며 만남이다.  

 

'모든 요소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는 것' (『어느 작가의 오후』p 40) 

작품 속 구절을 빌린다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페트케의 서술 방식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어느 작가의 오후』 속의 모든 요소들이 '자유'라는 것이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자유롭게 작가의 꿈에 공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음으로써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것은  

읽는 내내 순차적으로 돌아가는 소설의 일반적인 전개가 없었던 것이다.   

발달,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을 통해서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때까지

텍스트 속 줄거리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스토리는 필수 요소이기는 하지만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만든 허구적 전개를 읽도록 하게 만든다.

작품 스토리 자체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보이지 않는  

작가와 독자 간의 주종 관계가 형성된다.  

 

『어느 작가의 오후』에도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내용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각각의 과정에서 유난히 눈에 띄인 것도 없이 무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야기 없는 이야기 속에는 독자에게 작가의 오후를 강제적으로 이해시키려는  

한트케의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독자들에게는 무의미한 전개일수도 있으며  

작품 하나로 인해서 작가와 독자가 처한 상황은 극명하게 갈라졌지만

나에게는 스토리 자체에 얽매이지 않는 한트케의 노마드적 전개가 무척 좋았다. 

이런 카타르시스를 평생 살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작품으로서의 해방이라고 해야되나?  

 

이 한 작품을 통해서 페터 한트케의 문학 세계를 제대로 알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낯선 작가로부터 느껴보지도 못했던 낯선 이야기를 통해서  

다독(多讀)에 얽혀 살았던 수많은 시간들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어서 좋았다. 

페터 한트케와의 만남.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 그림 출처    

 

에드워드 호퍼 <작은 도시 속 사무실>
http://blog.naver.com/ziggy1980?Redirect=Log&logNo=80102996673

발튀스 <거리>
http://blog.naver.com/amorfati05?Redirect=Log&logNo=30023096112  

 

M.C. 에셔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http://blog.daum.net/chic_black/6589707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http://jschoe69.blog.me/40014207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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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 1001 Books You Must Read Before You Die (2006) 죽기 전에 꼭 1001가지 시리즈
피터 박스올 지음, 박누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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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분량, 그리고 ‘죽기 전에’라는 단어에 끌리다

시중에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보면 사람이 살면서 꼭 읽어야 할 책들이라는 메인타이틀 혹은 부제를 내건 일종의 북 다이제스트들이 많이 출간되었다. 어떤 책은 한술 더 떠서 교양인이라는 고귀한 칭호를 내세워서 목록의 도서들을 꼭 읽어야 한다고 독자들 앞에서 유혹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애독가가 아닌 이상 요즘 대부분 사람들은 일 년에 책 한 권도 살까말까 한다. 값비싼 명품들이 즐비한 고급 매장에서 강림하시는 지름신은 서점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독자들을 ‘교양인’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자신들을 구입하라고 알랑거리고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북 다이제스트를 선호하는 편이다. 북 다이제스트의 도서목록에는 정말 읽어야할 고전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 북 다이제스트의 목록들을 비교해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저자와 출판사를 달라도 중복되어 목록에 포함된 책이 꽤 몇 권 있기 때문이다. 간혹 일부 몇 권은 새롭게 고전으로 각광받고 있는 근래의 책들도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못한 것들도 있다. 그래서 도서목록의 구성 및 취지, 내용 소개의 충실성 등을 따져가며 자신에게 맞는 북 다이제스트를 골라야 한다.

어떤 북 다이제스트는 꽤 적지 않은 분량을 내세워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것도 있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이 그 중의 한 권이다. 지금까지 접한 북 다이제스트 도서 중에서 분량이 제일 많다. 페이지만 해도 900페이지 넘는다. 방대한 분량만큼 소개하고 있는 작품의 수는 1001권이다. 읽기에는 만만치가 않지만 1001이라는 어마어마한 수는 무의적으로 큰 수에 연연하는 독자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고 있다. 1001권의 책들이 문학 작품이라서 문학을 좋아하는 애독가들에게는 정말 유용한 책이다. 그리고 제목이 단순해보일지라도 ‘죽기 전에’라는 글자가 독자들을 이끌리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 ‘죽기 전에’로 시작하는 예능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는 남자 연예인들이 남자가 죽기 전에 꼭 해야 하는 것들에 도전한다. 그리고 중년의 배우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출연하는 영화 [버킷 리스트]의 부제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 이다.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황혼기 인생의 두 노인이 죽기 전에 하고 싶어 했던 것들을 한다는 내용이다.   

인간은 평생 하고 싶은 것이 많아도 죽기 전에 다 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이 무한하기에 ‘죽기 전에 해야 한다’라는 조건은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는 강한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거나 삶의 의욕 같은 것이 나지 않는다면 인생을 헛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말 [버킷 리스트] 속의 두 노인들처럼 흰 머리가 다 된 마당에 불현듯이 아프리카 세렝게티에 가서 짐승들을 사냥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현실적으로 실천하기에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죽음의 신은 짓궂다. 언제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갈지도 모른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죽고 나서야 우물쭈물했던 세속의 삶에 후회하게 된다. 독서라는 정신적 활동도 죽으면 못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뇌 기능 이상 혹은 실명이 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살아있으면서도 독서라는 유쾌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우둔한 애독가, 북 버킷 리스트에 도전하다 
 

양이 많다고 해서 북 다이제스트의 내용이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집필에 참여한 저자들은 각 국의 권위 있는 100명의 문학가, 평론가, 학자들이라는 점에서 믿음이 간다. 동, 서양, 라틴 아메리카, 제3대륙 등 대륙별 다양한 나라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단순 고전뿐만 아니라 추리소설, SF, 판타지 등 장르도 다양하다. 그러나 소개된 작품이 많다보니 모든 책이 우리나라에 다 번역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1001권의 번역은 현재진행형이다. 『죽기 전 1001권』이 2007년에 처음 나온 이후 지금까지 생소하지만 유명한 외국 문학 작품들이 조금씩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다. 한 작품의 소개에 활자만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작품 속 삽화와 작가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진들이 있다. 그렇다고 1001권의 모든 작품에 그림이 딸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의 그림들이 그 작품에 대한 내용을 각인시켜주는데 시각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양도 많고, 가격도 꽤 많은 터라 이 책을 소장하고 있지 않지만 가끔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대출하는 데만 해도 8번 정도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는 한국 독자들에게 생소한 라틴 아메리카 작가와 지금까지 활동 중인 외국 작가들을 이 책을 참고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 책 덕분에 살면서 읽어보지도 못했던 괴테의 『파우스트』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일게 되었다. 만약에 『죽기 전 1001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런 훌륭한 문학고전들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 문학으로 편향되어 있었던 편식적인 독서 습관을 고칠 수 있었다. 고대부터 근대 이전의 문학고전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필자는 이 책을 길잡이 삼아 『죽기 전 1001권』에 소개된 1001권의 책을 읽으려는 개인적인 독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이 책이 자칭 애독가의 심장 속에 1001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고 싶은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관련 작품을 읽을 때마다 리뷰로 작성한다. 일종의 북 버킷 리스트라고 해야 되나? 시작한 지 4개월 정도 되었지만 고작 읽고 리뷰로 남긴 작품이 달랑 10여 편이다. 강렬한 독서 의욕과 비교하면 활동 결과물이 부진한 것은 인정하고 있으며 필자가 백발이 성성하고 노안이 찾아오는 그 날까지 독서를 계속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미래에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들 부양하다가 살다보면 독서 프로젝트가 잊혀버릴 수 있다. 그러나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는, 정말 제대로 된 독서를 하면서 살다가 죽는 것이 독서를 끔찍이도 좋아하는 필자의 커다란 소망이다. 독서는 인간의 정신을 성숙하게 만드는 정신적 운동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처럼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꾸준히 한다면 나름의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우둔한 애독가는 믿고 있다. 
            

  

 

배보다 배꼽이 커버린 책 
 

그러나 좋은 책에도 나름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이 책의 최대 단점이라면 소설 작품으로 구성된 지나친 편향성이다. 1001권 중 대부분이 소설이다. 희곡도 몇 편 소개하고 있지만 극히 일부분이다. 더구나 시가 많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유일하게 소개된 시가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뿐이다. 워즈워스, 심지어 노벨상을 받은 T.S. 엘리엇, 파블로 네루다와 같은 시인들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소설’ 책이라고 불려도 무방할 구성이었다. 문학이라는 배보다 소설이라는 배꼽이 큰 책이었다. 이미 고전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들을 제외하고 조금씩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현대 작가의 작품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고전들을 발굴하려는 집필진의 의도는 좋았지만 장르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동양 문학에 대한 소개 분량도 적었다. 대부분 중국, 일본 작가가 많았으며 한국 작가는 고작 2명(故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아직까지도 외국 땅에서 융숭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한국 문학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언 맥이완? 이언 매큐언?

그리고 옥의 티가 있다면 ‘이언 맥이완’에 대판 표기의 문제이다. 영자로는 Ian R. McEwan. 우리나에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는 작품에서는 ‘이언 매큐언’으로 표기하고 있다. 영국 출신이며 우리나라에 그의 작품이 꽤 번역되어 있는 작가이다. 이언 매큐언이라는 이름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지 14년이 되었다. 지금도 ‘이언 매큐언’이라는 표기로 통용되고 있다. 『죽기 전 1001권』에서도 이언 매큐언의 작품이 세 편 정도 소개되고 있을 정도로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아무리 외래어 한글 표기가 완전한 통일안으로 협의되지 못했더라도 이미 우리나라에 꽤 소개된 작가의 이름을 잘못 표기되어 있으면 독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좀 더 나은 훌륭한 북 다이제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죽기 전 1001권』은 분량 면에서나 내용면은 훌륭한 문학 작품 다이제스트이다. 『죽기 전 1001권』에 버금가는 책이 다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출간된 지 3년이 지난 만큼 내용에 대한 개정이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이언 매큐언의 외래어 표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3년이라는 세월동안에 변방 국가의 문학 작가와 작품들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우리나라의 독서계에 외국문학이 제대로 널리 보급되기 위해서는 현세에 걸맞은 내용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2007년 첫 출간 당시, 1001권 목록에 포함된 에밀리오 살가리의『산도칸: 몸프라쳄의 호랑이들』은 우리나라에 출간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2년 뒤인 2009년에 열린책들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작품 이외에도 뒤늦게 서야 번역 출간된 작품들이 꽤 있다. 또 다른 사례를 들자면 올해 출간된 다니엘 파울 슈레버의『한 신경병자의 회상록』(김남시 역, 자음과모음 출판) 이다. 지금『죽기 전 1001권』에서는 미출간 상태로 소개되고 있다.


애독가들을 위한 훌륭한 북 다이제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개정판이라도 재출간되어야 한다. 물론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분야에도 새로운 정보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으며 특히나 여행지 같은 경우 시대가 변할수록 여행 정보도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죽기 전에' 시리즈가 일상 생활에서 유용하고 깊이 있는 정보들을 소개하고 있는 만큼 내용 개정을 통해서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것들 다 해보고 싶어하는 열혈 독자들을 위한 시리즈로 각인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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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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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만난 좀머 씨

 

열린책들 세계문학 이벤트를 계기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읽는 것을 필두로 하여『좀머 씨 이야기』도 같이 읽게 되었다. 오랜만에 장 자크 상뻬의 삽화가 그려진 책표지를 보고 나니깐 무척 반가웠다. 지금의 신판보다 나은 거 같다. 그러고 보니, 장 자크 상뻬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도 읽은 지도 10년이나 지났다. 세월의 흐름에 왠지 모를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좀머 씨나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읽었을 때만 해도 어린아이였는데 말이다. 그 때는『향수』를 쓴 작가의 또 다른 베스트셀러라는 것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분량도 『향수』보다 얇다는 이점(?)이 있어서 읽게 되었다. 책 속의 어린 ‘나’가 좀머 씨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몇 년 전, 어린아이였던 나도 좀머 씨의 행동을 기이하게 여겼으면서도 좀머 씨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살아남는 자의 슬픔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용은 좀머 씨의 기이한 행동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읽었을 당시에는 좀머 씨의 행동을 이해할 만한 성숙한 수준의 나이도 아니었고, 오히려 좀머 씨를 바라보는 관찰자 어린 ‘나’에 관심을 가지며 읽었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만큼 어린 ‘나’와 동질감을 느꼈다고 해야 되나? 동산의 초원에서 바람의 기운을 느끼면서 날아다니는 체험도 해보고 나무타기도 하면서 노는 ‘나’가 무척 부러웠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이제는 어른이 된 눈으로 다시 읽게 되니 어렸을 때 보지 못했던 좀머 씨를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좀머 씨가 기이한 행동을 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되니 그에 대해서 서글픔과 동정심이 느껴졌다. 과거에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 이외에는 좀머 씨에 대한 정확한 과거의 단서를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전시 기간 중에 겪었던 원인 모를 일이 그를 평생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전쟁터에서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승리라는 쟁취의 목표를 위해서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사람과 결국에는 승리를 얻는 동시에 살아남는 사람이다. 좀머 씨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이다. 하지만 그는 지옥과 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죽여야 했을 것이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터에서 동원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좀머 씨의 내성적인 마음에 침투하여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세상은 전쟁터라는 말이 있다. 비록 총을 겨누고 피 튀기는 그런 잔혹한 전쟁은 아니지만 지금도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 상대방을 희생시켜야하는 총성 없는 전쟁과 같은 세상이다. 좋은 성적, 좋은 대학은 곧 좋은 취업으로 연결되는 화려한 인생의 연결고리 때문에 마음껏 친구들과 어울려 놀아야하는 학생 시절에는 높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해야 한다. 어른이 되어서 사회에 나가서도 이번에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또 다시 친구들과 경쟁해야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과도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더욱 슬픈 것은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승리자에게도 해피엔딩은 없다. 언젠가는 자신도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평생 경쟁 사회에 구속받는 힘든 삶을 살아간다. 경쟁 사회 속에서 사는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빨리 하려고 한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뒤처지게 되면 쉽게 배 아파하고, 무조건 따라잡기 위해서 자기 자신 스스로 경쟁 대열에 합류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다보니 사는 것이 힘들어지고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회의적으로 보게 된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 비관적인 생각만 하게 된다. 주위에 모든 이들과 관계를 차단하며 자신 스스로 외톨이가 되어간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은 현대판 ‘좀머 씨’나 다름없는 것이다.   

 

 

 

 세상의 회의주의자들이 웃으면서 살아남는 방법 

   

이 책 속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어린 ‘나’와 자살과 좀머 씨의 자살이었다. ‘나’는 미스 풍켈 선생님의 고약한 잔소리와 주위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 때문에 높은 나무에 올라가 자살을 시도하려고 한다. 다행히도 하필 나무 밑에 지나가고 있던 좀머 씨 때문에 자살을 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방금 자신이 했던 행위들이 웃기는 짓거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린 ‘나’는 매일 돌아다니는 좀머 씨를 보고 죽음 앞에서 굴복당하지 않으려는 태연함에 감명 받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좀머 씨는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이 두 사람의 자살 행위를 통해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인생이 전개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긍정적 혹은 부정적. ‘나’는 동심이 만들어 낸 긍정적 시선이 발동했기에 아주 어린 나이에 요절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피폐해질 대로 정신이 황폐화된 좀머 씨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시선에 눈이 먼 나머지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택하게 되었다. 
 

 
 좀머 씨, 우리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立秋)가 온 지 이제 한 달쯤 지났고, 더위가 한 풀 꺾이면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는 처서(處暑)가 온 지 보름째이다. 일 년 내내 살면서 알겠지만 여름은 다음 계절인 가을에게 자연의 텃세를 쉽사리 물려주지 않는다. 9월이 되어도 햇빛은 쨍쨍하게 내리 찌어 무더운 날씨는 여전하기만 하고, 태풍이 하루 우리나라 한 번 휩쓸고 갔다하면 며칠 뒤에 또 다른 태풍이 오게 마련이다. 지난주에 곤파스가 지나갔건만 이번 주에는 말로라는 태풍이 또 온단다.  

 

여름만 되면 무더위에 따라 사람의 몸이 느끼는 불쾌함의 정도를 나타내는 불쾌지수라는 말이 뉴스에 나오게 된다. 그만큼 사람이 느끼는 불쾌함에 따라서 여름 날씨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날씨가 너무 더운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조그마한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고 그 감정이 더욱 격화되질수록 상대방과의 다툼으로 커지게 된다. 외람된 예이지만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단지 태양이 너무 눈부시다는 이유만으로 별다른 이유 없이 아랍인을 죽인 것처럼 날씨에 따라서 평범했던 사람의 감정이 갑자기 타오르는 불처럼 변할 수 있다. 여름에는 너무 덥다는 이유만으로 짜증만 내는가?  비가 지지리 와도 짜증이 나게 된다. 장마 기간이 지속되면 집 안에 습기가 가득 차게 된다. 습한 기운 때문에 찝찝한 기분은 불쾌하기 짝이 없고, 이런 환경 조건은 곰팡이들이 아주 좋아한다. 장마보다는 더 최악인 것은 바로 태풍이다. 한반도에 거쳐 가는 태풍의 영향력과 경로에 따라서 올 해의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 알 수가 있다. 농사 관련 관계자만 태풍을 겁먹는 것이 아니다. 태풍 때문에 침수 피해가 많았던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빌고 있다. 그리고 태풍이 주는 경제학적 문제는 농산물 가격이 오른다는 것이다. 특히 추석을 앞둔 지금, 제사상에 올려야할 과일 가격이 너무 비싸서 대한민국 모든 어머니들은 ‘최소 비용, 최대 이익’(?)을 위해서 지금도 머리를 싸매고 계실 것이다.  이렇듯, 변덕스러운 날씨인 여름이 사람의 감정 변화에 영향을 주기 쉽다. 그렇다고 날씨가 무척 덥다고 불만을 갖는다거나 태풍 때문에 사는게 꼬였다고 원망은 하지 말아야 한다. 부정적인 말과 생각은 스트레스가 되어 도리어 자신만 피곤해질 뿐이다.   

 

 

여전히 좀머(Sommer, ‘여름’이라는 뜻도 있음) 씨는 9월 중에도 걷고 있다. 도저히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이번 주에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또 더워질 것이다. 그래서 변덕스러운 좀머 씨에게 이 말 한마디 전해주고 싶다.

“좀머 씨, 우리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당신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부정적인 마음을 갖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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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고딩때 처음 읽었을때는 정말 글자 그대로 읽기만 해서 뭔소리 인가 싶더군요.

유행이 조금 지나서 대학을 다닐때 이 책을 봤는데 정말 좋더군요~

cyrus 2010-11-06 16:08   좋아요 0 | URL
매버릭꾸랑님도 그러셨군요.
저도 아무것도 모른 시절에 이 책,, 베스트셀러라기에
무턱대고 읽었다가는 좌절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