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책들 세계문학 122
페터 한트케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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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17] 어느 작가의 오후

 

 

 

      꿈꾸는 작가의 오후 
 

   

우연히 도서관에서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를 만났다.
평소에 작가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작품으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께가 얇은 탓도 있지만, 겉표지 없는 노란색 책이 한편으로 작가노트 같은 분위기도 나서  
(작가노트라기 보다는 노란색 열린책들 북북이 같기도 하다)
페터 한트케의 책에 저절로 손이 갔다.


제목 그대로 이름이 없는 작가의 오후를 그리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단순히 작가의 눈으로 보고 있는 오후의 풍경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작업실 내부 

                                                             

정원 
                                                              

공원 
                                                              

강변 
                                                              

들판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도시의 거리 등등. 
 


우리가 현실에서 쉽게 마주하면서도 지나쳐버리는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작가는 경험하는 세상은 현실과 꿈이 교차하고 있는 환상의 공간이다. 
오전부터 시작된 소설 쓰기를 중단하고 오후에 짬을 내서 쉬려고 했건만
‘작가의 본분’이라는 직업병이 머릿속에 각인된 작가는
소설 구상에 필요한 언어가 잃어버리지 않을까봐 걱정을 하기도 하고, 
소설 속 서술처럼 주변 시선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작품의 장르 자체가 소설이라는 점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작가의 망상은 갈수록 심화된다.
자신의 서재가 있는 작업실로 돌아오면서도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과 풍경이 모두 환영이라고 생각한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온 작가는 소설을 쓰게 될 오전이 올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을 끝으로 작가가 겪었던 환상적인 오후는 그렇게 저물어 간다.  

 

 

  
 
                                     고립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다      

 

                   

 

사실 작가라는 직업에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짧지 않은 산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작품 구상을 위한 심혈을 기울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접촉  

그리고 외부 세계와의 단절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보니 고립된 생활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불후의 명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코르크로 둘러싼 병실 안에서
고독과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이중고에 맞서야 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인생처럼 말이다. 

한트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가처럼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면서 글을 써야하는 실제 작가들에게는 어쩌면 외부 세계와의 만남은
그들이 꿈꾸는 하나의 일탈일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펜과 글을 놓아두고 외부 세계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집필 생활하면서 느껴보지도 못했던 정(情)도 느껴보고  

창작의 고통으로 인해 생긴 번뇌의 찌꺼기를 뱉어내고 

고립으로부터 해방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작품 속 작가는 해방을 시도해보나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노쇠하게 만들어버렸다.
작업실에서 탈출을 해도 자신에게 외부 세상은 낯설게만 느껴지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작품 구상에 결부시키려고 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정도 얻지도 못한 채 그냥 오후동안 싸돌아다닌 것이다.  

결국 그는 고립으로부터의 해방감을 잠시나마 느끼지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걷는 에셔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현실과 꿈을 혼동한 채 살아야 하는 고립의 굴레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독자에게 새로운 현실의 만남과 작품으로서의 해방을 제공해주다 
 

 

                                  


                                      나 혼자 꿈을 꾸면, 그것 한갓 꿈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다.

                         -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1928~2000,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2>에서 인용)

   

 

 

비록 작가는 고립으로부터의 해방은 못했지만,  

작품 읽기를 통해 낯설고도 새로운 현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어느 작가의 오후』는 단지 일상 모습을 그대로 나열하고 있는 무의미한 텍스트이면서도  

작가가 겪는 망상이 가득한 꿈에 불과하다. 

그러나 독자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무의미한 텍스트에도 현실감이 부여된다.  

훈데르트바서의 말처럼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작가의 꿈 같은 체험에 자연스럽게 개입되어 

전혀 꿈 같지 않는 실제 현실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작품에 대한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며 만남이다.  

 

'모든 요소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는 것' (『어느 작가의 오후』p 40) 

작품 속 구절을 빌린다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페트케의 서술 방식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어느 작가의 오후』 속의 모든 요소들이 '자유'라는 것이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자유롭게 작가의 꿈에 공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음으로써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것은  

읽는 내내 순차적으로 돌아가는 소설의 일반적인 전개가 없었던 것이다.   

발달,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을 통해서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때까지

텍스트 속 줄거리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스토리는 필수 요소이기는 하지만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만든 허구적 전개를 읽도록 하게 만든다.

작품 스토리 자체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보이지 않는  

작가와 독자 간의 주종 관계가 형성된다.  

 

『어느 작가의 오후』에도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내용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각각의 과정에서 유난히 눈에 띄인 것도 없이 무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야기 없는 이야기 속에는 독자에게 작가의 오후를 강제적으로 이해시키려는  

한트케의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독자들에게는 무의미한 전개일수도 있으며  

작품 하나로 인해서 작가와 독자가 처한 상황은 극명하게 갈라졌지만

나에게는 스토리 자체에 얽매이지 않는 한트케의 노마드적 전개가 무척 좋았다. 

이런 카타르시스를 평생 살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작품으로서의 해방이라고 해야되나?  

 

이 한 작품을 통해서 페터 한트케의 문학 세계를 제대로 알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낯선 작가로부터 느껴보지도 못했던 낯선 이야기를 통해서  

다독(多讀)에 얽혀 살았던 수많은 시간들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어서 좋았다. 

페터 한트케와의 만남.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 그림 출처    

 

에드워드 호퍼 <작은 도시 속 사무실>
http://blog.naver.com/ziggy1980?Redirect=Log&logNo=80102996673

발튀스 <거리>
http://blog.naver.com/amorfati05?Redirect=Log&logNo=30023096112  

 

M.C. 에셔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http://blog.daum.net/chic_black/6589707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http://jschoe69.blog.me/40014207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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