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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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번째 글 조각 : 序

 

 

인색함과 방탕함으로 인해 저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잃고 저렇게 싸우니, 그게 어떤 것인지 꾸밈없이 말해 주마. 아들아, 행운에게 맡겨진 재화 때문에 인류는 그토록 아귀다툼을 하는데, 그 짧은 순간의 기만을 보아라. 달의 하늘 아래 있고 또 예전에도 있었던 그 모든 황금은, 이 피곤한 영혼들 중 누구도 편히 쉬게 하지 못할 것이다.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 편』제7곡, 58쪽, 열린책들)

 

 

 

 

 ♣ 두 번째 글 조각 : 인디언이 곰을 사냥하는 방법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덫을 사용해 곰을 사냥했다고 한다. 커다란 돌덩이에 꿀을 바르고 나뭇가지에 밧줄로 메달아 놓으면 훌륭한 덫이 된다. 꿀을 바른 돌을 발견한 곰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로 생각하고 다가와 발길질을 하면서 돌덩이를 잡으려고 한다.

 

그러면 곰의 발길에 채인 돌덩이가 진자운동을 한다. 밀려갔던 돌덩이가 돌아올 때마다 곰을 때린다. 곰은 화가 나서 점점 더 세게 돌덩이를 때린다. 곰이 돌덩이를 세게 때리면 때릴수록 돌덩이는 더 큰 반동으로 곰을 후려친다. 마침내 곰은 나가떨어진다. 곰은 이 기묘한 폭력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방법을 생각해낼 줄 모른다. 그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더욱 안달할 뿐이다.

 

만일 곰이 돌덩이 때리기를 중단하면 돌덩이도 움직임을 멈출 것이고 돌덩이가 일단 멈추면 곰은 그것이 밧줄에 매달려 있을 뿐 움직이지 않는 물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곰은 이빨로 밧줄을 잘라 돌덩이를 떨어뜨려 꿀을 핥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곰은 힘으로 자신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듯 행동할 때가 많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일단 힘으로 제압하려 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나오는 일화다.

 

 

 

 ♣ 세 번째 글 조각 : 가이아가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지구가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라면 그 이름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영국의 저명한 대기학자인 제임스 러브록이 같이 산책을 하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윌리엄 골딩에게 물었다.  "가이아(Gaia)가 좋겠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이지."

 

지구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가설, 즉 "가이아 이론"은 이렇게 해서 이름 붙여졌다. 1978년 제임스 러브록이 창시한 이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인간처럼 살아 있다고 본다. 외부 조건이 변하더라도 내부조건을 일정하게 유지함으로써 생물체가 살기에 적합하도록 능동적으로 환경을 조정하는 일종의 유기체가 지구라는 주장이다. 물론 기성 학계로부터는 이론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설로 보고 있다.

 

꼭 가이아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인간을 지구라는 생명체에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로 비유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대기오염 같은 환경파괴는 말할 것도 없고 농사 등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활동을 포함한 일체의 인간 활동이 지구라는 생명체에는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진, 이상기후 등 인간에 해를 끼치는 자연재해야말로 병원체를 몰아내기 위한 지구의 자기방어활동이라고 말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신작 『제3인류』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가이아를 소환한다. 그런데 이야기 중간에 등장하는 가이아의 독백은 슬프고 분노에 차 있다. 지구상의 생명체에 대한 우월함에 사로잡힌 인류가 가이아에게 해를 끼치고 있으니까.

 

“인간들이 이렇게 깊이 파고들어 올 때는 언제나 똑같은 이유가 있어. 내 석유를 퍼 올리려는 것이지. 이 물질은 바로... 나의 피, 나에게 없으면 안 되는 검은 피이다. 저들이 그 사실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중략) 대개의 경우 저들은 매번 똑같은 이유로 그것(석유)을 내게서 훔쳐간다. 목적은 그저 분주하게 움직이는 데 사용하기 위함이다. 대개의 경우 저들의 목표는 저희의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29쪽)

 

정식적으로 소설가가 되기 전부터 과학소설을 탐독했던 베르베르는 ‘명탐정 셜록 홈즈’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의 추리 작가 코난 도일의 선구적인 SF 소설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도일 SF’의 홈스라고나 할 챌린저 교수가 등장하는 ‘지구가 비명을 질렀을 때’라는 단편이 있다. 이 소설은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상정한다.

 

챌린저 교수가 시추기로 지구의 지각을 뚫고 마침내 지하 13.2㎞의 ‘속살’을 찔러대자 지구가 무시무시한 비명을 지른다는 얘기. 러브록이 주창한 이른바 ‘가이아 이론’과 유사한 설정이다. 그러나 가이아 이론이 발표된 게 1979년이고 도일의 단편은 1928년에 나왔으니까 50년이나 시대를 앞선 작품이다.

 

지구는 인간의 생리현상과 비슷하게 살아 숨쉰다. 체온(대기)과 허파(아마존 유역 등 삼림지대), 피와 수분(바다, 강) 그리고 신체(암석, 흙)를 지니고 숨 쉬며 살아온 생명체다. 인류의 눈 먼 탐욕 때문에 지금 가이아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좀 가혹한 얘기지만 인간이 개발이나 산업화 등의 명분으로 지구에 어떤 일을 해왔는지 돌이켜보면 그럴 법도 하다. 어쨌든 이 논리를 확대하면 화산폭발, 지진, 홍수 등 인간에게는 재앙인 자연재해는 지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유해 세균’을 털어내는 자기 정화작용이라고 할 만하다. 실제로 자연재해는 과거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인간의 잘못에 대한 신의 분노로 믿어졌거니와 가이아 이론은 이를 생명체 지구의 분노로 바꿔놓은 셈이다.

 

하지만 인류는 가이아의 비명을 듣지 못한다. 그녀가 흐르는 ‘자기 정화’와 우리를 향하는 분노가 담긴 눈물의 의미를 모르는 건 당연하다. 그동안 참고 쌓아왔던 가이아의 분노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슈퍼 태풍 ‘하이옌’이 휩쓸고 지나간 필리핀의 상황을 지켜본 전 세계 사람들은 지구가 주는 경고의 무서움을 느꼈을 것이다. 허나 가이아의 비명을 직접 듣기 위해 ‘신성한 소통’을 시도하려는 오로르(『제3인류』에 등장하는 여주인공)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또다시 잊을 것이 분명하다.

 

 

 

 ♣ 네 번째 글 조각 : 이야기에 심어 놓은 '가능성의 나무' 

 

베르베르는 데뷔작『개미』부터 『타나타노트』『뇌』『신』과 같은 두 권 이상 분량을 뽑는 장편뿐만 아니라 단편도 집필했다. 그는 이야기를 빠르게 지어내는 능력을 유지하고 싶어서 매일 저녁 한 시간을 할애하여 단편소설을 썼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럼으로써 오전 내내 ‘두꺼운 소설’을 쓰는 데서 오는 긴장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단편은 단순히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장르가 아니다. 『개미』부터 지금까지 발표한 모든 소설과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읽어 본, 나름 ‘베르베르’의 팬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독자라면 단편과 백과사전에서 보여준 무한한 상상력이 장편으로 연장된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이라는 친숙한 소재에 ‘만약...’으로 시작하는 낯선 상상력의 옷을 입히고, 진지한 성찰까지 더해져 장편으로 재등장하는데 독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준 전작에 보여준 상상력을 환기시켜 준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보자. 베르베르가 선보이는 전개방식대로 과거로 돌아가 기억해보는 것이다. 2002년은 월드컵으로 한반도는 붉은 함성이 가득했지만, 그 때도 베르베르의 인기는 식지 않았으니 이 때 나온 첫 단편 모음집이 『나무』다.

 

여기에 수록된 이야기 중에 ‘가능성의 나무’라는 제목의 단편이 있다. 이제 막 베르베르의 문학적 상상력에 입문한 독자라면 그것의 원천들을 모은 총합이라 할 수 있는 『나무』를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나무』를 읽었는데 그 이야기가 어떤 내용인지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러면 다시 읽어 보라. 특히『제3인류』1권을 읽기 시작하지 전에 읽으면 흥미로운 독서를 체험할 수 있다.

 

‘만약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면’ ‘만약 어떤 고기를 먹는 사람들 모두가 그 고기 때문에 똑 같은 질병에 감염된다면’ ‘만약 우리 뇌를 컴퓨터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등등 꿈에서 ‘만약…’으로 시작되는 글귀가 적힌 잎사귀가 달린 나무를 보았다. 나무가 자라 가지와 잎이 퍼져나가면서 ‘만약…’이 이루어지는 미래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베르베르의 상상력을 듬뿍 먹고 자란 ‘가능성의 나무’이다.

 

그런 가능성의 나무가 있다면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폭력이 방지되고, 다음 세대의 행복이 보장될 것이다. ‘가능성의 나무’는 컴퓨터에 설치된 프로그램의 이름이기도 하다. 상상의 컴퓨터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가정을 입력해서 인간 사회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낙관적인 꿈은 상징하고 있다.

 

 

 

 

 

M. C. 에셔 「뫼비우스의 띠 II (불개미)」 1963년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없는 ‘가능성의 나무’ 위에

호기심 많고 상상력이 넘치는 베르베르의 개미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가능성의 나무’는 절대로 시들어서 죽지 않는다. 영원불멸하다. 인간이 자유롭게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나가는 것처럼 이것을 영양분으로 기반을 둔 나무는 계속 자란다. 말 그대로 무한성의 나무이기도 하다. ‘가능성의 나무’가 있는 시간은 고정적이지 않다. 유동적이며 연속적이다. 10년 전 과거 때 생각한 가능성이 우리 눈앞에 현실로 이루어지고, 지금 10년 후의 모습을 예상한 미래의 가능성은 새로운 ‘현실’로 전환된다. 무한한 ‘가능성의 나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과거’와 ‘미래’의 구분 경계가 무의미하다. ‘무한대(∞)’를 뜻하는 기호처럼 말이다.

 

 

 

 

 

 

베르베르는 ‘가능성의 나무’를 시간과 장소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타임머신처럼 자신의 이야기에 한 그루씩 심어 놓는다. 두 번째 단편 모음집인 『파라다이스』(1권 ‘내일 여자들은’)에서 잠깐 언급되며 미래를 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나오는『카산드라의 거울』에도 나온다. 『제3인류』에서는 좀 더 과학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이름으로 독자와 재회한다. 나탈리아 오비츠 대령의 휴대용 컴퓨터에는 ‘미래로 가는 일곱 가지 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상상력을 토대로 인류에게 가능한 진화의 일곱 가지 모습을 담고 있다. 여기서도 작가는 자신의 영감을 준 문학적 상상력의 대선배를 오마주하고, 예전에 발표한 소설의 핵심 코드를 슬그머니 삽입했다.

 

세 번째 길인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로봇의 등장을 경고하는 내용은 공상과학 소설의 한 획을 그은 카렐 차페크의 『로봇』을, 네 번째 길인 ‘우주의 식민지화’에서 거대 우주선 ‘우주 나비 2호’가 언급되는데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제작된 동명의 거대 우주 범선이 나오는 『파피용』을 연상시킨다. (프랑스 어 ‘Papillon’은 ‘나비’라는 뜻이다)

 

 

 

 ♣ 모자이크를 마무리 짓는 다섯 번째 글 조각 :

   과연 우리는 다음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제3인류』에 펼쳐지는 인류의 모든 지식이 버무려진 삼라만상은 독자들의 눈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보가 아니다. 독자에 의해 능동적인 의미가 부여되는 객체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 속에는 동물과 곤충에 대한 과학적 정보는 물론이고, 그것을 통해 느끼는 작가의 철학, 가치관, 인간의 오묘함과 형이상학적 사고 등 다양한 것들이 담겨 있다.

 

『제3인류』 는 소설이 아니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삼라만상의 백과사전’이다. 인간의 판단이란 자신에게는 절대적일 수 있지만 전체적 관점에서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시간/지식’의 상대성과 절대성이다. 『파라다이스』의 부제대로『제3인류』의 세계는 ‘있을 법한 미래, 있을 법한 과거’ 그리고 ‘있을 법한 지식’이 공존한다. 우리는 이러한 기준을 통해 '가능성의 나무'를 살피고 가꿀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두 권 분량으로 압축된 흥미진진한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쫓기에는 『제3인류』가 주는 독서의 무게감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가이아는 자신의 보존을 위해서 계속 불어나는 인류 급증 현상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산아 제한 등과 같은 예방적 억제를 하지 않는 이상, 인류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력 또한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인구론』이라는 책에서 인구의 증가를 억제하지 않으면 인류는 치명적인 파멸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 멜서스의 생각(있을 법한 과거)과 유사한다. 비록 오늘날의 세계는 맬서스의 예측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의 생각은 빗나간 예언이었으며 틀린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이유로 과거에 ‘공상의 예언’으로 치부되고, 폐기되었던 생각과 상상력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현실로 등장하는 선례가 많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13년이 아닌,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미래에 멜서스의 예언이 적중할 수도 있다(있을 법한 미래). 아무리 기술과 과학이 나날이 발전해도 인류의 과욕 때문에 몸살 앓는 지구의 중병이 심해진다면 대규모 식량 부족 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파라다이스』에는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지구의 50억 인구가 목숨을 잃고 20억이 살아남을 거라는 상상이 쓰여 있다. 이번 슈퍼 태풍의 위력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무리 현대 문명의 과학이 발달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겸허함을 배운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종은 어느새 자신들의 존재의 덧없음을 망각하기 시작한다.  『제3인류』에 나오는 삼라만상은 크게 보면 인류 스스로 자초한 멸망이 만들어 낸 거대한 파노라마다. 하물며 남북한 간의 싸움부터 시작해서 종교적 차이와 갈등으로 서로 심장에 총을 겨누는 종고 전쟁까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싸움의 불씨인 종교와 광신적 국가주의가 없어진다면 이 세상에 파라다이스가 올까? 지구상에서 인간끼리의 전쟁이 종식된다 해도,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자연재해의 무서움은 우리에게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공포를 안겨준다. 언제 우리의 오늘이 끝장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오늘을 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카산드라의 거울』에서 미래를 보는 카산드라 카첸버그가 재판을 받는 중에 아기 검사의 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지구는 우리의 부모들이 물려준 것이 아니다. 지구는 우리의 아이들이 빌려준 것이다!” 과연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가능성의 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해서 우리의 지구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예측하고 최소한 다음 세대들에게 우리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깨끗한 지구의 오염을 중단할 수 있을까?

 

베르베르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를 ‘인류 전체의 폐경기’라고 비유한 적이 있었다.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결혼과 가족의 무게는 희박해지고, 믿고 기대며 살아야 할 식량도, 마음도, 정신도 고갈이 나고 있는 형편이다. 앞으로 우리는 가이아의 복수를 극복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슈퍼 태풍보다 강도가 센 자연의 복수를 만날 수 있다. 과학 기술에 점점 의존하는 인류는 오만해져만 간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달콤한 꿀에 집착하여 탐욕에 눈이 먼 곰처럼 폭력을 믿는다. 오만하고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이여, 가이아의 복수가 두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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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퀴아노의 흥미로운 이야기
올라우다 에퀴아노 지음, 윤철희 옮김 / 해례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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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56] 재미있는 이야기

 

 

 

 

영국 중학생들은 자국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정규 수업시간에 배운다. 2008년부터 11∼14세 중학생들이 노예제도의 실상과 영향, 저항운동과 폐지 과정 등을 배우도록 의무화되었다. 학생들은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어떻게 노예무역에 개입했고 노예무역이 영국 무역과 산업혁명, 국제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을 전반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동안 영국 중학교 역사 과목에서 제1,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대학살 등은 정규 수업내용에 포함돼 있었으나 노예제도는 배제돼 있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 언급되는 핵심 인물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이 새롭게 포함되었는데 그 중 눈여겨 볼 이름이 바로 올라우다 에퀴아노라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이다.

 

노예서사의 원형은 올라우다 에퀴아노의 자서전이다. 나이지리아 태생의 노예였던 그가 1789년에 쓴 ‘아프리카인 올라우다 에퀴아노, 혹은 구스타프 바사의 재미있는 인생이야기’는 자신의 경험을 상세히 묘사해 베스트셀러가 됐다.36판을 찍을 정도로 널리 읽혀 그는 18세기 말에 미국 흑인이 보여준 독립정신의 대표 인물로 여겨졌다. 이 책에서는 아프리카로부터 서방에 이르는, 즉 노예로의 관문인 ‘중간항로’의 참혹함을 지옥으로 하강하는 은유로 표현했다.

 

지금의 나이지리아에서 1745년 태어난 에퀴아노는 11살 때 여동생과 함께 노예 사냥꾼에게 납치된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의 버지니아로 팔려간 그는 주인 마이클 파스칼 밑에서 일하면서 그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니며 읽기를 배우고 기독교 신자가 된다.

 

그는 이후 무역업을 하는 로버트 킹에게 팔려갔다.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킹은 노동의 대가로 에퀴아노가 모은 40파운드를 받고 자유의 몸이 되게 해준다. 이후 영국으로 간 에퀴아노는 노예무역 폐지 운동가들과 합류, 강연에 나서고 자서전 출간 이후로 노예제도 폐지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백인 여성과 결혼해 적잖은 부를 쌓을 정도로 영국 정부가 신뢰하는 흑인으로 명성을 누렸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영국 사회에 야만적인 노예무역을 반성하고 이를 없애자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에 불을 불인 것은 노예 출신 작가 올라우다 에퀴아노의 자서전이었다. 에퀴아노는 자서전에서 입에 쇠로 재갈을 물린 채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며 고문과 중노동에 시달리는 노예의 비참한 삶을 생생하게 전했다.

 

주인님 밑에서 일을 맡아 하는 동안 나는 내 불행한 동료 노예들에게 자행되는 온갖 종류의 잔혹 행위를 자주 목격했다. 나는 새로운 니그로들을 판매용 화물로 취급하는 일을 자주 했다. 그런데 우리 사무원이나 다른 백인들이 여자 노예들의 순결을 잔혹하게 짓밟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일은 꾸준히 벌어지는 관행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질 때면, 그들을 도울 도리가 없는 나는 약간은 주저하면서도 늘 상황에 굴복해야만 했다. (166쪽)

 

 

이 책이 펭귄 클래식 100선에 꼽힌 것은 그만큼 문학사적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높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만큼 노예 문학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작품이다. 아프리카 노예 출신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어 표현력과 사건 묘사 능력이 뛰어나다. 책 속에서 성경 구절과 밀턴의 『실락원』 구절 등을 적재적소에 인용하는 것으로 보건대 에퀴아노는 지적 수준도 매우 높았다.

 

인간 특성의 하나는 잠재력을 계발시킬 가능성에 있다. 특히 장애나 제약을 극복하고 가능성의 단계를 드높인 인간 승리자에게 우리는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찬탄을 아끼지 않는다. 에퀴아노가 그런 인물이었다. 노예무역을 금지하도록 영국의회에 낸 청원서도 서두에 소개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문학적 가치도 없는 내 글을 읽게 하는데 대해 용서를 간청해야 됨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고통 받는 동포를 구해 내기 위한 도구가 되려는 희망으로 고무된 것이니 만큼, 그 대담함이 용서되리라 믿는다.” 당대 백인이 갖고 있던 흑인에 대한 지능적, 도덕적 열등함에 대한 편견을 꼬집고, 흑인은 글로써 자신을 표현하기에 너무 무식하다는 통념도 뒤집어 놓았다. 비록 영국인으로써 명예로운 대우를 누려도 ‘흑인’으로써의 정체성만큼은 잊지 않았다. 노예 해방 운동을 위해 순회 여행을 다닐 때나 저술을 할 때에는 구스타프 바사라는 이름을 씀으로써 아프리카인임을 내세웠다.

 

비록 에퀴아노가 영국에서 인정받는 흑인 명사가 되었으나 그의 사후 10년 만인 1807년, 노예무역법이 폐지되기에 이른다. 사실 힘 있는 자들이 만든 노예제도법보다 더 무서운 건 노예를 잔인하게 대하는 비윤리적인 대우와 그들을 멸시하는 인식이다. 노예의 삶은 때론 동물보다 못했다. 잔혹한 매질에 시달리는 데다 음식부족으로 반 아사 상태에서 때로는 돼지와 먹을 것을 놓고 다툰다. 극단적인 노동으로 움직임이 둔한 열서너 살의 노예를 몽둥이로 쳐 죽이는 여성 노예 주인이나 남자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노예를 처형했다는 노예감독도 있었다. 오랜 노예 생활을 몸소 체험했고, 끔찍한 노예의 삶을 목격한 에퀴아노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인식의 변화를 꾀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인종 차이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자행됐다. 미국에서 심심찮게 일어난 인종에 관련된 ‘증오범죄’나 세계의 인종분규가 이를 증명한다.

 

에퀴아노의 자서전은 그가 단순히 노예의 한 많은 삶을 극복하고 ‘브리티쉬 드림’을 이뤄냈다는 것이 아니다. 독특한 통찰력을 통해 노예의 심리 상태 및 노예 제도가 흑인들에게 안겨준 고통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의 ‘흥미로운’이라는 단어에 노예제 폐지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일부 영국 상류층 사람들은 단순히 사회 진출을 꿈꾸는 흑인의 성공 스토리로만 치부했을 것이다. 흑인 노예가 따르는 차를 마시면서 편안하게 안락의자에 앉아 사회적으로 성공한 흑인의 자서전을 흥미롭게 읽는 어느 영국 귀족의 모습이 어렴풋이 상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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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3-11-0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책 제목 자체가 좀 잘못된 것 같다만
너의 리뷰 제목도 좀 헷갈리는데가 있는 것 같네.
제목은 그렇게 쓰고 별점은 네개라서 말이지...ㅋ
아무튼 영국 사람들은 대단하네.
일본도 좀 배워야 할텐데 말야.

근데RP는 뭐지?^^

cyrus 2013-11-03 23:27   좋아요 0 | URL
이 책 원제를 풀이하면 '에퀴아노의 흥미로운(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왜 이런 제목을 짓는지 궁금했어요. '흥미로운', '재미있는'이라는 형용사가 없으면 책이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흑인 노예의 비참한 생활상을 묘사하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만 보면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죠. 그리고 별 네 개를 준건, 에퀴아노 이 사람이 노예 해방이 되고나서 바다를 항해하는 여행을 하게 되는게 전 그 부분이 좀 지루했어요. 노예제의 부당함에 대한 내용이 없으면 흑인 노예의 성공담이 되었을꺼에요.
 
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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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독한 죽음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자살자는 1만2174명이다. 하루 33명, 42분마다 1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최근에는 지켜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고독사’도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어느 지역에 죽은 지 6개월이 지난 노인의 주검이 발견돼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언젠가는 찾아오는 삶의 마지막 단계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소재는 한편으로 사람들로부터 쉽게 왜곡되고 외면당한다. 그러나 그저 외면하고 덮어두기에 현대인들의 죽음은 너무나 다양하고 갑작스러우며 비참하기까지 하다. ‘인생은 원래 혼자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하에 존재한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이 현대사회에서 점점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사람들은 혼자 밥먹고, 혼자 놀고, 혼자 잠잔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혼자서 맞기도 한다. 스스로 원했든, 상황이 만들었든 ‘홀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왜 우리 사회에서 늘고 있을까. 또 그들은 복잡한 사회 속에서 고립돼 가고 있지는 않은가.

 

 

 

 너무나도 슬프고, 외로운 7일 간의 여정

 

죽음 이후의 삶.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자신 있게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죽은 후의 세계를 얘기한다면 모를까. 혹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말이다. 종교적 믿음을 배제한다면 미지의 사후 세계를 작가가 마음대로 상상하는 건 자유다. 그 허구의 세계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느냐는 진정성의 몫이다.

 

위화의 새 장편 『제7일』은 사고로 버려진 양페이를 혈혈단신 총각의 몸으로 키우는 아버지 양진뱌오와 그들을 돌봐주는 아버지 친구 부부의 이야기, 산아제한 정책으로 강제 유산돼 시신마저 묘연히 처리된 태아들을 그리고 있다. 중국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흡인력 있게 그려진 이야기는 신문이나 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이름 모를 죽음의 한 장면들과 비슷하다. 양페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나서 7일 동안 연옥에서 이승의 인연들을 만나 그 동안의 앙금도 풀고 사랑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양페이처럼 ‘죽었어도 매장되지 못한 이들’이 머무는 곳은 이승과 저승 사이 어느 자락에 따로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죽음은 자살에서 살인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작가가 가장 무겁게 시선을 두는 죽음은 이른바 불행하게도 애도하는 사람 없이 고독하게 죽는 것이다. 지켜보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생을 마감하고 시체마저 뒤늦게 발견되고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죽음. 현대 도시문명의 그늘과 아픔이 짙게 배어있는 죽음이다.

 

"묘지가 있는 사람은 안식을 얻지만 묘지가 없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어떤 게 더 좋습니까?" (215쪽)

 

 

7일이라는 시간. 누군가에게 7일은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은 기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애도 받지 못한 채 묘지 없이 떠도는 양페이에게는 너무나도 슬프고, 외로운 여정일 것이다. 그의 쓸쓸한 뒷모습이 느껴지는 여정을 눈으로 따라가 보면 읽는 내내 마음이 시리다.

 

“나와 아버지는 영원한 이별 뒤에 다시 만났다. 아빠, 나랑 같이 가요, 하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얼마나 일을 사랑하는지, 이 대기실에서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기에 이렇게 말했다. ‘아빠, 자주 뵈러 올게요.’” (299쪽)

 

양페이에게 죽음은 곧 살아야 할 모든 의미의 상실을 뜻한다. 자신의 아버지 양진바오와 한평생 사랑했던 리칭은 그에게 살아야 할 가치이자 의미의 전부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양진바오와 리칭 두 사람은 양페이보다 먼저 끔찍하고 불행한 사건으로 인해 생명의 에너지가 소진된 인물들이다. 망령이 되어서야 양페이는 짧게나마 이 두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랑이 없는 한 삶도 없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나는 지킬 약속들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고 노래한다. 망각에 저당 잡힌 채 살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시시각각으로 죽어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삶의 부조리함은 죽음과 상실의 현존이라는 피할 수 없는 조건에서 생겨난다. 사람은 태어나는 시각부터 죽음을 향해 나가는 존재다.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죽어간다. 죽음이 우리에게서 존재를 박탈하기 전에 우리에겐 지킬 약속들과 가야 할 길들이 있고, 그것이 공허와 무로 기우는 우리를 바로 세운다. 살아 있는 시간들은 죽음의 집행에서 유예된 시간들이다. 어쨌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일으키는 공포감은 삶을 가난하고 누추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이 가난하고 누추하게 만든 삶을 풍요한 것으로 바꾸는 마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절대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야말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약속들, 그리고 가야 할 길의 전부다.

 

사랑이 너무 깊어 죽음의 세계에서도 ‘애도’라는 감정의 끈을 이으려고 하는 양페이와 그 밖의 망령들, 즉 ‘스스로 애도하는 자들’의 사연은 슬프면서도 감동 그 자체다. 감동 속에서 마음의 찌꺼기들, 불필요한 오해와 공허감을 지워버린다. 극심한 소외감과 단절감으로 조금씩 죽음에 다가서는 사람들과 이들을 구제하고 세상에 희망을 심으려는 망령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과 연인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작가는 협잡과 꼼수가 난무하는 현세와 서로를 죽인 원수임에도 매일 토닥토닥 싸우며 아옹다옹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연옥을 함께 보여주면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하지만 망령들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중요한 삶의 가치를 잊은 채 살고 있다.

 

그런 안타까움에서일까. 7일 간의 쓸쓸한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양페이는 의미심장한 말을 이승에 사는 독자를 향해 넌지시 던지고 있다. ‘저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314쪽) 어두컴컴하고 서늘한 죽음의 세계에 사는 그들은 불쌍하고 우울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 내면에서는 정화 작용이 일어난다. 삶이 없는 한 풍요도 없다. 영국의 문필가 존 러스킨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꾼다. 사랑이 없는 한 삶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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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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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읽기 거북했던 소설

 

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 중에는, 작품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독자 사이 혹은 둘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 있다. 텍스트의 해석 과정 모두가 독자의 계기를 포함한다는 해석학적인 맥락에서의 말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서, 특정 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서 독자가 평정을 잃게 되는 경우, 그 작품과 관련된 무언가에 끌려서 그 무언가가 보게 하는 것만을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 다소 모호하지만 뭐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문학 작품이 주는 의미 효과가 아니라, 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라 쓴 것도 이런 까닭이다.

 

좀 더 확장하자면, 작품과 독자 외에 이 둘의 관계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제3의 항목이 개입되는 경우를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개입이 독서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고 그럼으로써 작품을 온전히 읽어내는 데 장애가 되는 경우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앞서 밝힌 갈래들을 염두에 두고 좀 더 명확히 말해 보자면, 이 작품에 대한 타인의 언급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몇 차례 겪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어떻게 생겼는지 감을 잡으며 비로소 다 읽게 된 것은 최근에 원제로 새롭게 번역된 것을 읽은 지금에 와서이다.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낼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내 기억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독서 체험이 거북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내가 군 복무했을 때 어느 내무반에 가면 한 권씩 꽂혀 있었다. 한번은 고참 하나가 내게 말했다. 이건 그저 여자 세 명하고 연애하고 섹스하는 얘기라고(사실 더 적나라한 군대 말투로 말했었다). 그러고 보니 아니랄 것도 없었다. <노르웨이의 숲>에는 세 가지 타입의 여자가 나온다. 순수한 나오코, 발칙하고 되바라진 미도리, 달뜬 청춘 시절을 지나온 연상의 레이코 여사. 이 땅의 많은 청춘들은 와타나베이기를, 미도리가 되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와타나베 분위기를 내고 있어도 미도리 같은 여자아이의 눈길을 끌 수 없다는 데 있었지만.

 

책장을 펼치고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노르웨이의 숲 한가운데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디까지 읽었나 하는 궁금증에 책의 뒤쪽을 몇 차례 더듬어 보았다. 낭패감은 여기서 찾아왔다. 뒷부분을 펼쳐보면 어느 곳이든 기억에 없는 데, 거기까지 읽어가다 보면 읽은 것은 분명하게 되고, 또 그렇게 되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건망증적 고아가 된다는 것에 무척 기분을 상했고 나는 결국 책읽기를 그만두었다.

 

이런 정도면 그냥 안 읽어도 좋을 텐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나는 4년 만에 다시 노르웨이의 숲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끝까지 읽어보겠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서 짤막한 감상을 세련되게 말한 걸 본 적이 있는데 살짝 부러 우면서도 샘이 났던 건 사실이다.

 

 

 

 다양한 빛깔로 채색할 수 있는 무색의 숲

 

<노르웨이의 숲>은 열려 있는 작품이다. 세상에 나온 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 제 빛깔로 채색할 수 있는, 그야말로 색채가 없는 소설이다. , 이 소설은 해석을 달고 있지 않다 하겠다. 서사의 구조 자체가 실상은 회상 형식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술자에 의한 편집자적인 논평이나 요약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소설에서 서술자의 태도나 인생관, 의식 수준 등은 서술 자체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은 그렇지 않다. 서술 시점의 서술자가 함부르크 공항의 자신을 바라보며, 서른일곱 살이던 그때의 그가 다시 18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이중의 회상 구조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회상의 주체에 의한 의미부여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소설은 극적이다. 극문학이 그러한 것처럼 현재 빚어지는 장면 장면들이 그 자체로만 제시될 뿐, 서술자에 의한 해석이나 규정 등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서술자 자신이 작품의 표면에서 사라져 버린 까닭이다. 그 빈자리에서 독자들인 우리는, 저마다 제 기억을 되살리며 작품의 서사에 나름의 빛깔을 덧보탤 자유를 얻는다.

 

이러한 자유는, 시점 화자이자 주인공인 와타나베로 해서 한층 더 확장된다.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작품의 주 내용이 철저히 와타나베의 시선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 와타나베라는 인물 자체가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철두철미 와타나베가 보고 듣고 겪는 것, 그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이야기해 주는 것, 그가 보내고 받는 편지들의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곧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겪지 않은 일들, 그가 알 수 없는 일들은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만나지 않을 때,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도 이 작품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오직 그의 상념 속에서만 희미하게 존재할 뿐이다.

 

더 나아가서, 이 희미한 존재들은 정말로 희미하게 존재하는데, 이는, 그들과의 관계 맺음이 와타나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와타나베에게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성년식을 겪고 있다 할 열아홉 스무 살의 와타나베는 세상을 해석하려는 의지도 세상을 읽고서 의미를 추려 내거나 구축할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열아홉 스무 살의 나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할 테니 조금도 이상할 건 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인물이 그런 면모만으로 작품 속에 등장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로서의 서술자의 측면이 거의 부재한 것은 일반적인 소설 유형에서는 매우 드문 까닭이다. 특징적으로 요약하자면 '침묵하는 서술자의 설정'이라고 할 이러한 특징이 <노르웨이의 숲>을 독특한 작품으로 만들어 주며,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의 각 장면 장면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덧칠할 수 있게 해 준다. <노르웨이의 숲>이 자기 고유의 색채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가리킨다.

 

 

 

 11년 뒤에 다시 한 번 그곳을 순례할 수 있을까?

 

작품이 열려 있다 해도 그렇게 열어 놓은 하루키의 머릿속까지 모호하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품의 평가에 소용될 만큼의 작가론 차원의 정보를 나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작품의 평가를 시도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인데, 어찌 됐든 다행인 것은, 그럴 의도가 내게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상실의 시대>를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태도로, 때론 조금 깎아내리는 말투로 이 책을 둘러싼 이런저런 수다에 열심히 끼어들어 왔다(가벼운 수다라기보다는 독설에 가까웠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좋든 싫든 나 역시 이 책으로부터 적잖은 세례를 받았던 게 틀림없다. 이번에 다시 읽게 되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문장에 주목했었다.

 

<상실의 시대>의 첫머리는 서른일곱이 된 와타나베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며 스무 살 무렵을 회상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서른일곱의 나이라... 지금으로부터 11년 뒤다.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삶을 실감으로 부딪쳐 느껴 보기도 전에 어쭙잖은 거리를 두고 멀뚱멀뚱 지내다 아까운 청춘 다 흘려보낸 걸 뒤늦게 깨닫게 되는 시기. 그 서른일곱의 나이가 되면 나는 과연 이 책을 다시 한 번 펼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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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9
너대니얼 호손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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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06] 주홍 글자

 

 

 

 

“그녀의 웃옷 가슴에는 화려한 주홍빛 헝겊에 금실로 꼼꼼하게 수를 놓아 환상적으로 멋을 부린 ‘A’ 자가 보였다. 그 글자는 아주 예술적으로 만든데다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공상을 마음껏 발휘한 것으로,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식적 효과를 내고 있었다.” (16쪽)

 

17세기의 미국 보스턴. 청교도정신으로 똘똘 뭉친 마을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사생아를 낳은 헤스터는 간통(Adultery)을 상징하는 주홍 글자 ‘A’를 평생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주위의 조롱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자못 당당하게, 진정한 속죄와 참회로 이웃에 선행을 베풀면서 딸을 키우며 살아간다. ‘A’는 간통의 상징에서 점차 ‘Able’(능력)과 ‘Angel’(천사)의 의미로 승화되기까지 한다.

 

다른 쪽에는 그녀와 간통한 목사 딤스데일, 전 남편 칠링워스라는 인간형이 있다. 이들 역시 보이지 않는 ‘A’를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 딤스데일은 간통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죄책감에 의해 정신적인 고통(Agony)에 시달리며, 칠링워스는 그것을 알고 분노(Anger)에 찬 채 복수를 노린다.

 

넓게 보았을 때 딤스데일의 죄는 숨겨진 죄를 상징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묘사되는 병약한 모습과 죄를 숨기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비추어 볼 때 그의 죄가 헤스터의 죄보다 더욱 악한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다. 호손은 죄를 저지른 행위보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숨기는 은폐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딤스데일의 죄를 통해 말하고 있다.

 

반면 칠링워드의 죄는 헤스터처럼 공개되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드러난 죄는 아니지만 인간의 마음을 파괴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상징한다. 작품 전반에 계속적으로 나타난 인간애를 상실한 그의 차가운 모습과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자의 비참한 결말은 칠링워드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얼마나 사악한 죄인가를 한층 더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주홍글자 A를 평생 달고 다녀야 하는 헤스터는 공개적으로 ‘왕따’를 당한 채 변두리 오두막에 살며 바느질로 생계를 잇는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간통 사실이 폭로되는 것을 당당하게 견디면서 융통성 없는 청교도의 권위에 도전하며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산다. 그래서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딤스데일의 무덤 곁에 묻힌 그녀를 ‘청교도적 파우스트’라고 부르는 해석도 있다. 종교적 계율과 사회적 규범의 쇠사슬을 박차고 인간으로서의 본능에 충실하며 개인의 참다운 자유를 구하려 한다. 물론 헤스터는 딤스데일에게 도둑맞은 칠링워스의 사유재산, 한낱 남성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녀는 이러한 현실에 저항한 페미니스트였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 헤스터는 딤스데일이 사망한 뒤 청교도 사회를 떠나 유럽에 머물다 뒷날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와 고통 받는 여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남녀 간의 모든 관계가 상호 행복이라는 좀 더 굳건한 토대 위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으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식을 기른 최초의 편친모(偏親母)일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여성 상담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소설은 이처럼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근대적 주제의 천착을 통해 사회적 인식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받는 헤스터와 달리 딤스데일이 끝까지 자신의 죄를 숨기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죄를 실토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두 사람이 처한 사회적 지위와도 관련이 있다. 청교도 사회에서 간통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이지만 평범한 시민이 아닌 목사의 직분을 지닌 딤스데일에게는 더욱 치명적이기 때문에 그는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7년 동안 자신의 죄를 털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헤스터와 딤스데일, 두 사람의 개인적 성품 차이일 수도 있지만 사회 구성원의 정직성은 사회적 관용 수준과도 관계가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보는 타인 또는 사회 전체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리고 원치 않던 낙인에 대해 좌절하고, 숨기고, 때로는 평생의 상처로 안고 간다. 그러나 그 낙인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헤스터가 ‘간음의 A’를 ‘유능함의 A’와 ‘천사의 A’로 바꿨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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