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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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독한 죽음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자살자는 1만2174명이다. 하루 33명, 42분마다 1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최근에는 지켜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고독사’도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어느 지역에 죽은 지 6개월이 지난 노인의 주검이 발견돼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언젠가는 찾아오는 삶의 마지막 단계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소재는 한편으로 사람들로부터 쉽게 왜곡되고 외면당한다. 그러나 그저 외면하고 덮어두기에 현대인들의 죽음은 너무나 다양하고 갑작스러우며 비참하기까지 하다. ‘인생은 원래 혼자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하에 존재한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이 현대사회에서 점점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사람들은 혼자 밥먹고, 혼자 놀고, 혼자 잠잔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혼자서 맞기도 한다. 스스로 원했든, 상황이 만들었든 ‘홀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왜 우리 사회에서 늘고 있을까. 또 그들은 복잡한 사회 속에서 고립돼 가고 있지는 않은가.

 

 

 

 너무나도 슬프고, 외로운 7일 간의 여정

 

죽음 이후의 삶.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자신 있게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죽은 후의 세계를 얘기한다면 모를까. 혹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말이다. 종교적 믿음을 배제한다면 미지의 사후 세계를 작가가 마음대로 상상하는 건 자유다. 그 허구의 세계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느냐는 진정성의 몫이다.

 

위화의 새 장편 『제7일』은 사고로 버려진 양페이를 혈혈단신 총각의 몸으로 키우는 아버지 양진뱌오와 그들을 돌봐주는 아버지 친구 부부의 이야기, 산아제한 정책으로 강제 유산돼 시신마저 묘연히 처리된 태아들을 그리고 있다. 중국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흡인력 있게 그려진 이야기는 신문이나 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이름 모를 죽음의 한 장면들과 비슷하다. 양페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나서 7일 동안 연옥에서 이승의 인연들을 만나 그 동안의 앙금도 풀고 사랑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양페이처럼 ‘죽었어도 매장되지 못한 이들’이 머무는 곳은 이승과 저승 사이 어느 자락에 따로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죽음은 자살에서 살인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작가가 가장 무겁게 시선을 두는 죽음은 이른바 불행하게도 애도하는 사람 없이 고독하게 죽는 것이다. 지켜보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생을 마감하고 시체마저 뒤늦게 발견되고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죽음. 현대 도시문명의 그늘과 아픔이 짙게 배어있는 죽음이다.

 

"묘지가 있는 사람은 안식을 얻지만 묘지가 없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어떤 게 더 좋습니까?" (215쪽)

 

 

7일이라는 시간. 누군가에게 7일은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은 기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애도 받지 못한 채 묘지 없이 떠도는 양페이에게는 너무나도 슬프고, 외로운 여정일 것이다. 그의 쓸쓸한 뒷모습이 느껴지는 여정을 눈으로 따라가 보면 읽는 내내 마음이 시리다.

 

“나와 아버지는 영원한 이별 뒤에 다시 만났다. 아빠, 나랑 같이 가요, 하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얼마나 일을 사랑하는지, 이 대기실에서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기에 이렇게 말했다. ‘아빠, 자주 뵈러 올게요.’” (299쪽)

 

양페이에게 죽음은 곧 살아야 할 모든 의미의 상실을 뜻한다. 자신의 아버지 양진바오와 한평생 사랑했던 리칭은 그에게 살아야 할 가치이자 의미의 전부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양진바오와 리칭 두 사람은 양페이보다 먼저 끔찍하고 불행한 사건으로 인해 생명의 에너지가 소진된 인물들이다. 망령이 되어서야 양페이는 짧게나마 이 두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랑이 없는 한 삶도 없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나는 지킬 약속들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고 노래한다. 망각에 저당 잡힌 채 살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시시각각으로 죽어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삶의 부조리함은 죽음과 상실의 현존이라는 피할 수 없는 조건에서 생겨난다. 사람은 태어나는 시각부터 죽음을 향해 나가는 존재다.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죽어간다. 죽음이 우리에게서 존재를 박탈하기 전에 우리에겐 지킬 약속들과 가야 할 길들이 있고, 그것이 공허와 무로 기우는 우리를 바로 세운다. 살아 있는 시간들은 죽음의 집행에서 유예된 시간들이다. 어쨌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일으키는 공포감은 삶을 가난하고 누추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이 가난하고 누추하게 만든 삶을 풍요한 것으로 바꾸는 마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절대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야말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약속들, 그리고 가야 할 길의 전부다.

 

사랑이 너무 깊어 죽음의 세계에서도 ‘애도’라는 감정의 끈을 이으려고 하는 양페이와 그 밖의 망령들, 즉 ‘스스로 애도하는 자들’의 사연은 슬프면서도 감동 그 자체다. 감동 속에서 마음의 찌꺼기들, 불필요한 오해와 공허감을 지워버린다. 극심한 소외감과 단절감으로 조금씩 죽음에 다가서는 사람들과 이들을 구제하고 세상에 희망을 심으려는 망령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과 연인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작가는 협잡과 꼼수가 난무하는 현세와 서로를 죽인 원수임에도 매일 토닥토닥 싸우며 아옹다옹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연옥을 함께 보여주면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하지만 망령들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중요한 삶의 가치를 잊은 채 살고 있다.

 

그런 안타까움에서일까. 7일 간의 쓸쓸한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양페이는 의미심장한 말을 이승에 사는 독자를 향해 넌지시 던지고 있다. ‘저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314쪽) 어두컴컴하고 서늘한 죽음의 세계에 사는 그들은 불쌍하고 우울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 내면에서는 정화 작용이 일어난다. 삶이 없는 한 풍요도 없다. 영국의 문필가 존 러스킨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꾼다. 사랑이 없는 한 삶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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