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0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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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제인 에어는 자기 결정권과 욕망을 발현하는 여성을 내세운 근대 소설로 평가받는다. 소설에서 에드워드 로체스터(Edward Rochester)신 존(St. John)은 제인의 결혼 상대자로 나온다. 이 둘 중에 누굴 선택할지 고민하는 제인의 모습은 당시 19세기 영국 사회의 여성들과 다르다. 하지만 당돌한 제인도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제인 로체스터가 된 제인은 자신을 남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된 여자라고 말한다(2424).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기독교는 이 구절을 근거로 여성을 남성의 파생적 존재로, 그리고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해석한다. 결국 제인 로체스터의 이 발언은 로체스터의 온갖 구애를 뿌리치려고 난 새가 아니에요(I’m no bird, 233)라고 당당하게 외친 제인 에어의 말을 무색하게 한다. 그렇지만 모순된 주인공의 모습을 설정한 것에 대해 작가인 샬럿 브론테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샬럿은 남녀 주인공이 결혼하는 결말을 원하는 독자들의 요구에 못 이겨 지금의 결말을 쓰게 됐다.

 

제인 에어2권에 주목해야 할 인물은 당연히 버사 앙투아네트 메이슨(Bertha Antoinetta Mason)이다. 후대에 이 인물이 다시 평가받으면서 제인 에어제국주의적 관점이 반영된 텍스트라는 비판에 직면한다. 제인 에어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제인 에어번역본의 역자 해설이나 제인 에어의 전문가 서평 또는 독자 서평에 자주 언급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 내용을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이미 누군가가 언급한 작품 평과 해석을 그대로 옮겨 쓰는 것은 시간 낭비다.

 

이번 서평도 어제 쓴 서평의 형식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주변 인물을 소개하면서 내 나름대로 그 인물을 분석하는 방향으로 작성했다. 내가 제인 에어2권을 읽으면서 주목한 인물은 손필드(Shonfield)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그레이스 풀(Grace Poole)이다.

 

손필드의 주인은 로체스터다. 제인은 로체스터가 보살피고 있는 프랑스 출신 소녀 아델러 바랭스(Adèle Varens)의 가정교사가 된다. 로체스터는 과거에 프랑스의 오페라 무희와 사귄 적이 있다. 이 무희의 딸이 바로 아델러다. 그러나 로체스터는 아델러를 자신의 친딸로 인정하지 않는다. 몇 년 후 오페라 무희는 이탈리아인 음악가에게 사랑에 빠져 딸을 버리고 이탈리아로 떠난다. 로체스터는 아델러를 부양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졸지에 고아가 된 그녀를 영국으로 데려와 키운다.

 

제인은 손필드에 도착한 첫날에 저택 내부를 둘러본다. 혼자서 저택 복도를 걷다가 기묘한 웃음소리를 듣는다. 제인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웃음소리에 기겁한다. 그녀는 저택 관리인으로 일하는 페어팩스 부인(Mrs. Alice Fairfax)에게 이 웃음소리를 낸 사람이 누군지 묻는다. 부인은 술에 취한 그레이스 풀의 웃음소리라고 말하면서 그레이스에게 시끄럽다고 지적한다. 제인은 그레이스의 외모를 험상궂은 못생긴 얼굴이라고 평가한다.

 

제인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저 못생긴 그레이스가 어째서 손필드에 지내는지 의심한다. 그런 와중에 로체스터의 침실에 화재가 일어난다. 제인이 도와준 덕분에 로체스터는 목숨을 구한다. 제인은 화재를 일으킨 범인으로 그레이스를 지목한다. 왜냐하면 화재가 일어났던 밤에 그녀는 또 한 번 그레이스의 웃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체스터는 제인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그레이스를 쫓아내지 않는다. 제인은 로체스터의 반응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로체스터의 결혼 상대자로 알려진 블랑슈 잉그램(Blanche Ingram)이 등장하면서 제인의 합리적 의심은 잊힌다.

 

손필드에 로체스터의 친구라고 밝힌 리처드 메이슨(Richard Mason)이 나타난다. 그는 누군가에게 습격을 받아 크게 다친다. 끔찍한 일이 일어난 메이슨의 방에 들어간 제인은 그곳에서 그레이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제인은 그녀가 메이슨을 죽일려고 한 살인자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언급된 줄거리는 제인 에어1권에 나온다.

 

레이스의 등장 빈도는 높지 않다. 제인과 그레이스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그 장면을 제외하면 그레이스는 대사가 거의 없는 공기같은 인물이다. 그레이스는 주로 제인의 서술을 통해서 언급되는데, 제인은 그레이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일관되게 묘사한다. 그래서 제인의 흥미진진한 서술에 제대로 몰입한 독자는 그레이스를 기괴하고 위험한 인물로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2권에 버사 메이슨의 정체가 알려지게 되면서 제인과 독자들이 함께 씌운 그레이스의 오명은 벗겨진다. 버사는 서인도 제도 출신의 혼혈인으로 로체스터와 결혼하여 영국으로 건너온다. 그러나 그녀는 고향과 너무나 다른 날씨와 언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버사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로체스터는 그녀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결국, 몸과 정신이 완전히 피폐해진 버사는 미쳐 버린다. 로체스터는 자신이 미친 여자와 결혼했다면서 후회한다. 그는 새로운 여성과 결혼하고 싶어서 버사를 손필드에 감금한다. 그 후로 버사는 십년 동안 손필드에 갇혀 지낸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해진 버사를 보살피는 유일한 사람이 그레이스다. 기괴한 웃음소리의 주인공, 로체스터의 침실에 화재를 일으킨 사람, 그리고 자신의 친오빠를 공격한 사람 모두 버사이다. 그녀는 술에 취해 잠든 그레이스의 감시를 피해 방을 탈출하고, 저택 내부 이곳저곳 돌아다닌다. 한 번은 버사가 제인의 침실에 들어온 적이 있다. 제인은 로체스터와의 결혼식에 착용하려고 한 베일을 갈기갈기 찢는 버사를 목격한다. 로체스터가 숨겨온 비밀을 안 제인은 결혼을 포기하면서 손필드를 떠난다.

 

로체스터는 버사를 교활하고 근성이 나쁜 미친 여자(2144)라고 비난한다. 제인 에어를 로맨스 소설로 인식한 독자는 남자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동정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버사는 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을 방해하는 부정적 인물로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이제는 버사에 대한 독자들의 시각이 달라졌다. 로체스터의 무책임한 행동과 발언, 그리고 버사를 정신이 이상한 혼혈인 여성으로 묘사한 작가의 인종차별적 글쓰기를 비판하는 평이 많아졌다. 실제로 샬럿 브론테는 버사를 편파적으로 묘사한 점에 대해 반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버사 다음으로 소설에서 줄곧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진 그레이스를 잊어선 안 된다. 제인의 서술에 너무 따라가지 않고, 그레이스의 행보에 주목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면 제인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제인은 그레이스를 위험인물로 오해한 것에 대해 일말의 반성을 하지 않는다. 또 그레이스가 로체스터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채 십 년 동안 버사를 보살핀 노고를 언급하지 않는다. 버사는 몸집이 크고, 로체스터와 리처드 메이슨을 넘어뜨릴 정도로 힘이 세다. 그레이스는 그런 버사를 무려 십 년 동안 혼자 보살폈다! 소설에서는 버사의 과거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만, 그레이스의 과거는 언급되지 않는다. 로체스터는 그레이스를 그림스비 정신 병원에서 구했다고 말하는데(2권 144쪽), 이것이 그레이스의 이력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이다. 그레이스를 언급한 로체스터의 말이 애매모호하다. 그레이스는 정신 병원에 있던 환자였을까, 아니면 그곳에서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돌본 경험이 있는 간호 직원이었을까.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정신병원에 일한 경력이 있는 그레이스도 혼자서 버사를 십 년 동안 보살피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레이스가 매일 술을 마신 이유를 생각하면 그녀의 노동이 고된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도 이 지긋지긋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고용인 로체스터의 명령을 거부하기 힘들 것이다. 하녀 일을 그만 두면 당장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 테니까. 따라서 그레이스를 주인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수동적인 인물로 볼 수 없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신분에 속한 그레이스에게는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힘든 일을 맡은 것이다.

 

손필드가 화재로 인해 잿더미가 되면서 로체스터가 고용한 하녀와 하인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아마도 손필드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은 다른 직업을 알아보거나 또 다른 귀족의 집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손필드를 떠난 사용인 중에 그레이스도 포함되어 있을 텐데 매정하게도 제인은 손필드를 떠난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그레이스는 제인의 관심 밖에서 완전히 멀어진 인물이다. 끝내 그레이스를 외면한 제인의 반응은 빈민층의 삶에 무관심한 채 여권 신장을 주장한 부르주아지 여성(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한 19세기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의 한계로 해석할 수 있다. 제인 에어를 감명 깊게 읽은 대부분의 독자는 그레이스 풀이 누구였더라?’하면서 생각하거나 소설에서 비중이 적은 못생긴 알코올 중독자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독자들은 그녀가 입에 술을 달면서 살아가게 만든 원인을 생각해봐야 한다. 소설에 드러나지 않은 그녀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해해야 한다그레이스 풀은 소설에서 잠깐 스쳐 나가는 엑스트라’가 아니다. 그녀는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 즉 계급 사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인물이다.

 

 

 

 

 

Trivia

 

 

* 229

 

당신은 어딘가 나하고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제인?”

이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슴속이 벅찼다.

왜냐하면.” 그가 말했다. “나는 가끔 당신에게 대해 이상한 느낌이 들 때가 있소. 특히 지금처럼 당신이 나와 가까이 있을 때 말이오. 마치 내 왼편 갈비뼈 밑 어딘가에 끈이 하나 달려 있어서, 그것이 당신의 그 조그만 몸뚱이의 오른편 갈비뼈 밑에 달려 있는 똑같은 과 풀리지 않은 풀리지 않게 꼭 매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요.”

 

똑같은 끝똑같은 끈(similar string)의 오식이다.

 

 

 

* 259

 

선생님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아침저녁으로 마나를 주워올 테다. 달나라의 들판이나 산기슭에는 마나가 하얗게 깔려 있단다, 아델러.”

 

만나(manna)라고 써야 한다. 만나는 모세(Moses)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 굶주려 있을 때 신이 내려준 양식이다.

 

 

 

* 2141

 

  “서인도식 얄팍한 칸막이벽은 그녀의 늑대와 같은 아우성 소리를 막아낼 장애물 구실을 별로 하지 못했던 것이었소.”

 

아우성의 ()소리를 뜻하는 한자이다. 아우성 소리는 겹말이므로 아우성이라고 쓰는 게 맞다.

 

 

 

* 2148

 

셀린 바랭 셀린 바랭스

 

 

 

* 2208

 

세이트 세인트 존

 

사실 세인트 존은 오역이다. 성인이 아닌 인물 이름 앞에 있는 ‘St.’세인트라고 발음하지 않는다. ‘신’으로 발음한다.

 

 

 

* 2238

 

아아멘 아멘

 

 

    

* 2권 381쪽

 “그분은 인젠 폐인이나 마찬가집니다. 장님인데다 불구자죠.”

 

인젠인제의 오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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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9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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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에 제인 에어(Jane Eyre)를 다시 읽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인 에어는 정말 재미있다. 제인 에어는 영화와 드라마로 여러 차례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다. 그러나 원작의 재미를 적절하게 살리려면 영화보다는 드라마로 각색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별 뜻 없어 보이는 문장들 하나하나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복선과 상징들이 듬뿍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학적 장치를 과연 영화 한 편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영화 제인 에어가 최장 러닝 타임으로 제작되지 않는 이상 원작의 복선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 독자는 소설의 주인공 제인 에어와 그녀의 로맨스 상대 에드워드 로체스터(Edward Rochester), 그리고 후대에 다시 평가받고 있는 버사 앙투아네트 메이슨(Bertha Antoinetta Mason)에 주목한다.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한 분석과 비평은 이미 전문가 서평과 독자 서평에서 많이 다룬 주제이므로 이 서평에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소설의 주요 인물보다는 주변 인물에 주목하려고 한다.

 

제인 에어1권의 신 스틸러(scene stealer) 헬렌 번스(Helen Burns). 제인은 자신을 미워하는 리드 부인(Mrs. Sarah Reed)의 집을 떠나 로우드 자선 학교(Lowood School)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제인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의 소설 라셀라스를 읽고 있는 헬렌을 만난다. 제인은 헬렌을 처음 만나자마자 자선 학교의 의미가 뭔지 묻는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제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헬렌은 제인에게 자선 학교의 의미와 로우드 학교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헬렌은 수업 시간에 스캐처드 선생(Miss Scatcherd)에게 매일 혼난다. 제인은 유독 헬렌에게만 심한 체벌을 가하는 스캐처드 선생을 못마땅해 한다. 아마도 제인은 스캐처드 선생에게 제대로 미운 털 박힌 헬렌의 모습을 볼 때마다 리드 부인의 집에서 살았을 때 자신의 옛 모습이 생각났을 것이다. 리드 부인과 스캐처드 선생은 권위를 내세워 힘없는 어린이를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학대하는 몰인정한 어른이다. 그러나 헬렌은 제인의 성격과 정반대인 인물이다. 그녀는 선생이 자신의 결점을 싫어하기 때문에 체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또 성서에 있는 구절을 인용하면서(‘악을 보답하기를 선으로 하라’) 고통을 꾹 참고 견디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제인은 헬렌이 강조하는 인종(忍從: 묵묵히 참고 따름)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제인은 헬렌을 결점이 없는 훌륭한 아이라고 칭찬하지만, 오히려 헬렌은 결점이 너무 많은 자신은 형편없는 아이라고 말한다.

 

헬렌에 관련하여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 대부분 독자는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치기 쉽다. 9년 전에 소설을 읽은 나도 최근에 다시 읽으면서 새로 알게 되었다. 헬렌의 재미있는 점이 무엇이냐면 혁명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다. 헬렌은 수업 시간에 딴생각하다가 또 스캐처드 선생에게 걸려서 혼난다. 헬렌은 자신이 수업 시간에 했던 생각을 제인에게 알려준다. 헬렌은 처형당한 영국의 왕 찰스 1(Charles I)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찰스 1세의 한계를 언급하면서도 성실하고 양심적인 찰스 1세가 처형당한 사실에 분노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찰스 1세를 존경한다고 말한다. 헬렌은 훌륭한 왕을 처형대에 오르게 한 세력을 비난한다. 혁명 세력을 비판한 헬렌의 정치관은 프랑스 혁명을 부정적으로 봤던 보수주의에 가깝다. 그녀의 보수주의적 입장은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나쁘고 한계가 있더라도 그 사람에게 저항하기보다는 참고 견뎌야 한다는 인종의 교리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입장의 단점은 자신이 겪고 있는 부당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며 어떤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결점에서 찾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헬렌의 입장은 당시 영국 기득권층의 생각을 반영된 것일까, 아니면 헬렌의 말을 통해 은연중에 드러난 작가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ë)의 생각일까. 112장에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제인의 독백에 나오는데, 여기에 혁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은 묘한 대목이 있다.

 

 

 사람이란 안온한 생활에 만족해야 하는 법이라고 말해보았자 그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사람이란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엔 필경 만들어내고야 만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나보다도 평온한 생활에 얽매여 있고 또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운명에 말없이 항거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반란을 제외하고서도 얼마나 많은 반란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격동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성은 대체로 평온한 존재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오빠나 동생들과 똑같이 자기의 능력과 노력을 발휘할 터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 (197~198)

 

 

제인이 말한 정치적 반란의 의미는 뭘까. 많은 반란중에서 정치적 반란을 제외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정치적 반란도 운명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일이다. 그런데 제인은 왜 정치적 반란을 제외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정치적 반란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제인의 입장에서는 그 상황은 운명에 대항하는 역사적인 항거가 아니라 평온한 생활에 균열을 내는 반란이 된다.

 

작가가 살았던 시기 이전에 영국에서는 청교도 혁명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이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면서 헬렌이 존경한 찰스 1세가 처형당했다. 아니면 전 유럽에 영향을 미친 프랑스 혁명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영국의 계몽주의자들은 프랑스 혁명에 열광했지만, 귀족들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국경을 넘어 온 혁명의 기운이 영국 전역에 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독백을 하고 있던 제인의 신분은 가정교사다. 19세기 영국의 가정교사는 상류층 및 중산층 출신의 영국 여성들이 선호하는 직업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정교사는 상류층에 속하지 못한 신분이었고, 고용인의 보호를 받으면서 생활하고 교용인의 자녀를 가르쳤다귀족이라 할 수 없는 제인이 정치적 반란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하는 점이 특이하다. 혹시 제인은 혁명에 대한 헬렌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일까.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제인은 라틴어를 구사하는 헬렌의 모습을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1권 129쪽). 소설에서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제인과 헬렌은 친하게 지내면서 지적 교감을 나누었을 것이다.

 

제인은 작가의 삶이 어느 정도 반영된 인물이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제인의 보수적인 입장은 혁명에 대한 작가의 생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작가나 소설 속 인물의 생각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제인 에어1권에서 제일 친밀하게 느꼈고, 한편으로는 가장 안타깝게 느낀 인물은 헬렌이다. 제인과 헬렌이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장면은 제인 에어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다. 만약 원작에 대한 2차 창작물이 만들어진다면 과연 헬렌은 어떤 인물로 묘사되어 있을까. 헬렌이 소설에서 비중이 작은 인물로 보일 수 있겠으나 헬렌이라는 든든한 존재가 있었기에 제인은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헬렌도 많은 독자들이 주목해야 할 인물로 알려져서 부활했으면 좋겠다.

 

 

 

 

 

Trivia

 

 

* 로우드 학교의 총책임자는 브로클허스트(Brocklehurst). 그런데 1121브르클허스트라는 오식이 있다.

    

 

 

* 다음 인용문은 1363쪽에 있는 제인과 집시 노인(사실 그 노인의 정체는‥…)의 대화 내용이다. () 보는 집시 노인은 제인의 속마음을 읽는다.

     

 

 “그럼 미래의 일을 속삭여주고 당신의 마음을 북돋워주고 기쁘게 해줄 만한 남모르는 희망이라도 갖고 있는지?”

 “아뇨. 고작 제 희망이란, 언젠가 조그마한 집을 빌려서 학교를 세울 만한 돈을 내 봉급에서 저축하는 거예요.”

  “영혼이 살아나기엔 빈약한 영양분이군그래. 그리고 저 창턱에 앉아서‥… 난 당신의 습관을 잘도 알고 있죠?

  “하인들에게 들은 거겠죠.”

  “! 꽤 똑똑한 체하는군. 그렇지! 들었을지도 모르지. 사실은, 하인 중에 한 사람 아는 사람이 있어서‥… 풀 부인 말이오.”

 

 

 

내가 밑줄을 친 문장은 노인이 한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제인에게 높임말을 쓴다. 생뚱맞은 번역문이다. 사실 밑줄을 친 문장은 오역이다. 높임말로 된 번역문에 해당하는 원문(‘You see I know your habits’)은 의문문으로 되어 있지 않다. 원문을 올바르게 번역하면 난 당신의 습관을 잘 알고 있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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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테 자매(Brontë sisters)는 소설가로 잘 알려졌지만, 세 사람 모두 시를 썼다. 세 자매는 자신들이 쓴 시 61편을 모아 1846년에 시집을 가명으로 출판한다. 하지만 세 자매는 시집을 출간해줄 출판사를 찾지 못했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자비로 출판한다. 이때 그녀들이 사용한 가명은 커러 벨(Currer Bell=샬럿), 엘리스 벨(Ellis Bell=에밀리), 액튼 벨(Acton Bell=)이다. 그녀들의 시가 당시 독자들이 선호하는 문학 유행과 맞지 않은 탓인지 시집은 두세 권만 팔렸다고 한다.

    

 

 

 

 

 

 

 

 

 

 

 

 

 

 

 

* 에밀리 브론테 상상력에게(민음사, 2020)

* 박영희 엮음 제인 오스틴과 19세기 여성 시집: 찬란한 숲을 그대와(봄날에, 2019)

    

 

 

세 자매 중 가장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ë)였다. 최근에 신간으로 그녀의 시 선집이 나왔다. 제목은 상상력에게(민음사)이다. 이 시 선집에는 표제가 된 상상력에게를 포함한 총 5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작년에 개정판으로 제인 오스틴과 19세기 여성 시집: 찬란한 숲을 그대와(봄날에)가 출간되었는데, 19세기와 20세기 영미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들의 시를 엮은 책이다. 이 책은 2017년에 출간된 적이 있으나 개정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절판된 상태였다. 이 시집에 샬럿의 시 5, 에밀리의 시 8, 앤의 시 4편이 실려 있다.

    

 

 

 

 

 

 

 

 

 

 

 

 

 

 

 

* 앤 브론테 아그네스 그레이(현대문화센터, 2007)

    

 

 

앤 브론테(Anne Brontë)는 생전에 두 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아그네스 그레이(Agnes Grey, 1847)와일드펠 홀의 소작인(The Tenant of Wildfell Hall, 1848)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된 앤의 소설은 아그네스 그레이(현대문화센터)가 유일하다.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은 앤이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에 발표된 소설이다.

 

 

 

 

 

 

 

 

 

 

 

 

 

 

 

 

 

      

* [DVD]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 : 앤 브론테 원작 BBC TV시리즈 마스터피스 컬렉션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은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영문학 전공자가 아닌 독자들은 이 소설이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아그네스 그레이만큼이나 국외 영문학 연구자들이 주목한 소설이며 영국 BBC에서 원작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가 두 차례(1968, 1996)방영되었다.

    

 

 

 

 

 

 

 

 

 

 

 

 

 

 

* 피터 박스올 외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마로니에북스, 2017)

 

 

100명의 국제적인 필자 집단이 선정한 책들을 소개한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마로니에북스)에 앤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아그네스 그레이가 아닌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이 포함되어 있다.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을 소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알코올 중독과 가정 폭력이라는 센세이셔널한 주제를 다룬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은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아메리칸 리뷰의 표현을 빌리면 이 작품은 벌거벗은 악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였으며, 영원히 영어로 활자화되기를 원하지 않은 대화를 포함하고 있다.” 어쨌든 이 소설은 매우 잘 팔렸으며, 재판의 서문에 앤 브론테는(액튼 벨이라는 남성 필명을 사용해서) 이러한 비판에 대한 변론을 실었다. 악과 악인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작가의 도덕적 의무라는 것이었다.

 페미니즘을 바탕으로 쓰여진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은 방탕한 남자와 결혼한 젊은 여인이 그를 개심시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은 아버지의 타락에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는 내용으로, 서간과 일기를 통해 대부분 여주인공 헬렌 헌팅던의 시점에서 기혼 여성이 법적 권리를 거의 가질 수 없었던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메이 싱클레어(1862~1946, 영국의 작가)1913년에 이렇게 말했다. 남편의 면전에서 헬렌이 침실 문을 쾅 닫은 소리는 빅토리아 영국 전역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지금까지도 현대의 독자들에게 울려 퍼지고 있다.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의 대담한 주제와 묘사는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ë)도 지적할 정도로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샬럿은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의 주제는 앤의 본성에서 벗어난 소름 끼치는 것이라고 평했다.

 

 

 

 

 

 

 

 

 

 

 

 

 

 

 

 

 

 

* 찰스 킹슬리 물의 아이들(시공주니어, 2006)

 

 

 

 

그러나 물의 아이들의 작가이자 목사인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을 호평했으며 오히려 이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꼬집었다. 그는 추악하고 위선적인 사람들의 모습, 즉 이런 끔찍한 진실을 그대로 보여준 소설이 많지 않았다면서 영국 사회는 앤을 비웃으면서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앤이 악과 악인을 표현하는 작가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본인이 굳게 믿어온 작가의 의무를 아그네스 그레이에서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그네스 그레이는 여성 가정교사의 척박한 삶뿐만 아니라 그녀들을 박대하는 상류 사회의 일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앤은 아그네스라는 화자의 입을 통해서 부유한 고용인들의 눈칫밥을 먹으면서 살아야 하는 여성 가정교사의 상황을 전달한다. 그래서 아그네스 그레이를 읽으면 마치 고용인과 그 가족들을 관찰하는 여성 가정교사가 기록한 보고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앤의 글쓰기를 문제 삼는 사람들은 아그네스 그레이작품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앤이 글을 쓰면서 인식하고 있는 작가의 의무를 알지 못해서 나오는 부당한 평가다.

 

아그네스 그레이가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어린이에 대한 어른들의 편견이다. 아그네스 그레이가 나온 19세기 영국 사회에서는 여성과 어린이를 순수한 본성을 지닌 존재로 여기는 인식이 있었다. 아그네스는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고용인 자녀들의 못된 행동들을 상세히 언급한다. 실제로 앤은 가정교사로 일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아그네스 그레이는 작가의 경험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가정교사의 지도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고용인 자녀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오는 아그네스 그레이악을 표현하는 작가의 의무를 그대로 보여준 소설이다. 앤은 이 소설을 통해 동화에 나올 법한 순수한 어린이의 모습을 믿는 기성 사회의 인식이 허상임을 보여준다. 또 자녀들이 무조건 착하다고 믿는 고용인 부모의 어설픈 교육관도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아그네스 그레이와일드펠 홀의 소작인계급, 교육, 여성 차별 등에 대한 사회 비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소설이다. 이런 두 편의 소설을 재미없고, 작품성이 떨어진다면서 무시하고 외면한 사람들은 앤 브론테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소설을 출간할 생각을 하지 않는 국내 출판업계는 반성해야 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제인 에어폭풍의 언덕만 펴낼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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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0-03-0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저는 무식하게도 에밀리와 샬럿 브론테만 알고 있었어요~~
브론테자매에 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어요^^
항상 독서의 지평을 넓게 만들어주고 새로운 지식을 입력시켜주시는
cyrus 님께 감사드려요^^

cyrus 2020-03-03 19:08   좋아요 1 | URL
저도 한때 무식했어요. 샬럿과 에밀리가 너무 유명해서 앤의 존재를 잊어버렸거든요. <아그네스 그레이>를 몇 년 전에 사놓고 안 읽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집에 쉬게 되면서 읽었습니다...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20-03-0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자매가 다 글을 잘 쓰다니, 역시 유전자의 힘은 세군요.

민음사의 상상력에게, 가 탐나는군요. 장바구니에 담겠습니다.

cyrus 2020-03-04 14:54   좋아요 1 | URL
브론테 자매의 능력에는 문학에 대한 관심과 글을 쓰려는 노력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을 것입니다. ^^
 
아그네스 그레이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12
앤 브론테 지음, 문희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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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에 많이 언급되는 제인 에어(Jane Eyre)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은 여러 번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됐을 만큼 유명하다. 고아 소녀의 파란만장한 성장 과정을 그린 제인 에어와 황량한 들판 위에 자리 잡은 외딴 저택을 무대로 한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인 폭풍의 언덕을 읽으면서, 문학과 독서를 좋아하는 소녀들은 이 두 편의 소설을 쓴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e)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를 흠모하기도 했다.

 

제인 에어폭풍의 언덕1847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샬럿과 브론테는 가명으로 소설을 발표한다. 여기서 대부분 사람이 의외로 잘 잊어버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자매로 알려진 브론테 자매는 세 명이다. 세 자매 중 막내인 앤 브론테(Anne Bronte)1847년에 두 언니와 함께 가명으로 소설 아그네스 그레이(Agnes Grey)를 발표한다. 그러나 앤 브론테가 쓴 이 소설 제목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제인 에어폭풍의 언덕은 어린 독자를 위한 축약판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국내에서 가장 인기 많은 소설이다. 반면 막내가 쓴 소설의 번역본은 지금 내가 소개하려는 책, 이 한 권이 전부다. 두 언니의 국제적 · 국내 위상과 오십 종이 넘는 국내 번역본 수를 비교하면 막내의 소설은 초라하게 보인다. 누군가는 앤의 아그네스 그레이가 두 언니의 대표작에 비해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은 것일까. 나는 세 자매의 소설이 모두 선정된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올해는 앤이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녀가 두 언니의 명성의 반 정도 있었더라면 지금쯤 새로운 아그네스 그레이번역본이 나왔을 것이다. 앤은 117일에 태어났는데 그녀의 탄생일에 맞추어 아그네스 그레이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올해 안으로 아그네스 그레이새 번역본이 나올지, 아니면 앤의 또 다른 작품(그녀가 죽기 전에 쓴 두 번째 소설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 이 소설도 뒤늦게 주목받고 있는 명작이다)이 번역되어 나오는지 내가 두고 본다.

 

아그네스 그레이가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해도 나는 이 소설이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에 포함할 자격이 충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입장을 밝히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일단 첫 번째 이유로 아그네스 그레이쉽게 읽히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소설의 주인공 아그네스 그레이는 가정교사(governess). 앤 은 이 소설에서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서 가장 흔한 직업 중 하나로 알려진 가정교사의 생활상과 사회적 지위를 아주 정직하게 보여준다. 제인 에어에도 가정교사가 활동하는 제인 에어의 모습이 나오는데, 앤의 정직한 글쓰기는 제인 에어와 비교하면 평범하면서도 심심하다. 제인 에어는 독자를 흡입하게 만드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반면에 아그네스 그레이는 독자를 흥분하게 만들거나 긴장하게 만드는 크고 작은 사건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앤은 두 언니와 비교하면 소설의 재미와 흥미를 유발하는 필력이 조금 모자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아그네스 그레이의 장점이자 매력으로 작용한다. 아그네스 그레이에서는 주인공을 둘러싼 시시콜콜한 사건들이 언급되지 않아서 독자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앤은 가정교사로 일했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가정교사의 삶과 애환을 최대한 정제해서 표현한다. 그래서 아그네스 그레이를 읽는 독자는 줄거리를 요약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그네스 그레이의 줄거리는 단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줄거리가 단순해서 평범하다는 이유만으로 아그네스 그레이가 작품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아그네스 그레이가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에 포함되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 소설에 동물권(animal rights)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아그네스가 가르치는 톰 블룸필드(Tom Bloomfield)는 부유한 집안에 자란 아이지만, 성질이 고약하며 아그네스를 무례하게 대한다. 그는 정원에서 사냥한 새를 아주 잔인하게 죽인다. 아그네스는 동물을 괴롭히면서 죽이는 톰의 버릇이 잘못된 행동임을 알리기 위해 새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낀다고 말한다. 하지만 톰의 어머니와 그의 삼촌은 오히려 아이의 행동을 옹호한다. 톰의 어머니는 모든 생명체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하면서 아들을 꾸짖는 아그네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자 아그네스는 인간의 쾌락을 위해 동물을 고문할 권리가 없다(We have no right to torment them for our amusement)라고 응수한다. 그녀가 동물의 생명도 인간의 생명처럼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모습은 아그네스 그레이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이다. 아그네스 그레이를 결혼에 성공하는 가정교사의 사랑 이야기로만 봐서는 안 된다. 너무 일관된 평가는 아그네스 그레이의 또 다른 진가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아그네스 그레이제인 에어폭풍의 언덕처럼 페미니즘 비평으로 독해할 수 있는(혹은 자주 독해해야 하는) 소설이다. 그러므로 아그네스 그레이는 독자, 특히 페미니스트가 반드시 알아야 할 소설이다. 인간에게 동물을 고문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 아그네스의 대사는 인간 중심의 페미니즘을 넘어 동물권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오늘날의 페미니즘 의제와 맞닿아 있다. 아그네스는 가정교사로 고용되기 위해서 만든 자신의 광고에 휴가를 보장하는 계약 조건을 내세운다. 당시 영국의 가정교사는 중류 계층과 상류 계층 여성이 선호하는 인기 직업이었지만, 현실은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불안정한 직업이기도 했다. 가정교사는 고용인이 사는 집에 지내면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고용인의 집안 분위기마다 다른데, 종종 소설에 나오는 톰의 어머니처럼 고용인은 가정교사를 하대할 뿐만 아니라 여성 가정교사의 지도력을 의심한다. 그렇다 보니 가정부와 유모, 하녀가 여성 가정교사를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사회적 지위가 그리 높지 않은 여성 가정교사가 고용인에게 자신의 휴가를 보장해주는 계약 조건을 내세운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대담한 일이다. 아그네스가 ()의 위치에 있는 고용인들에게 공개한 계약 조건은 여성 근로자 및 노동자의 유급 휴가 보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 지금까지 일독할만한 고전으로 알려져야 할 아그네스 그레이의 매력을 모조리 알려 줬다. 책을 좋아하는 동지들이여, 그래도 이 소설을 그냥 지나칠 것인가. 아그네스 그레이의 진가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로서 언니들의 유명세에 오랫동안 가려진 앤 브론테의 위상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진다. 형만 한 아우는 없다라고 해서 언니만 한 여동생은 없다라는 말도 성립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 브론테 자매를 보라, 언니만 한 여동생이 있다.

 

 

 

 

Trivia

 

 

  부인은 아들의 정직함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터라 톰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릴 터였다. (43)

 

철썩같이는 맞춤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철석같이라고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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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20-03-03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 있는 <아그네스 그레이>도 2007년판이예요. 이것만 있나봐요.

cyrus 2020-03-03 12:29   좋아요 0 | URL
네, 안젤라님 가지고 있는 책이 제가 읽은 것과 같은 거예요. ^^;;
 

 

 

국내에 번역된 체호프(Chekhov)의 단편소설 중에 제목은 다르지만, 내용이 같은 것이 있다. 그중 한 편이 우수(憂愁) 또는 애수(哀愁)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188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의 러시아어 원제는 Тоска. 우울과 애수를 뜻한다.

    

 

 

 

 

 

 

 

 

 

 

 

 

 

 

 

 

    

* 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문예출판사, 2006)

*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2009)

    

 

 

     

Тоска를 수록한 체호프 단편 선집으로는 체호프 단편선(문예출판사)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등이 있다. 이 두 권에 수록된 Тоска의 작품명은 다르다. 체호프 단편선에 표기된 작품명은 우수이며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 표기된 작품명은 애수. 이 글에서는 Тоска의 국내 작품명을 애수로 쓰겠다.

    

 

 

 

 

 

 

 

 

 

 

 

 

 

 

 

* 스티븐 킹 미저리(황금가지, 2004)

    

 

 

애수의 영문판 제목은 ‘Misery’. 이 단어는 1990년에 나온 스티븐 킹(Stephen King) 원작의 동명 영화 제목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misery’정신과 육체에 부담을 주는 극심한 고통을 의미한다. 애수의 영문판 제목은 슬픔, 근심, 우울을 뜻하는 러시아어 원제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하지만 소설의 줄거리를 보게 되면 고통이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마부 요나 뽀따뽀프(‘열린책들판에는 이오나 뽀따뽀프로 되어 있다)는 아들의 죽음에 깊은 실의에 빠진다. 그는 죽은 아들이 계속 생각나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요나는 여러 명의 손님을 태워 그들이 원하는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그는 마차에 타는 손님들에게 자신의 슬픔을 하소연한다. 그러나 손님들은 요나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일을 마친 요나는 동료 마부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향한다. 그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젊은 마부에게 아들이 죽은 사실을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젊은 마부는 이내 잠들고 만다. 온종일 마음이 괴로운 요나는 아무나 붙잡고 아들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한다. 결국 그는 마구간에 있는 자신의 말()에 다가간다. 그리고 말에게 귀리를 주면서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한 말()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 네게 새끼 말이 있고, 넌 그 새끼 말의 엄마라고 하자…‥. 그런데 갑자기 새끼 말이 어딘지 먼 곳으로 가버렸단 말이야…‥. 그런데도 슬프지 않니?”

 

(문예출판사, 247)

 

 

애수는 요나가 말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끝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담담하다.

 

 

 요나는 흥분한 어조로 자초지종을 말에게 이야기한다.

 

(문예출판사, 247)

 

 

애수는 단순한 줄거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반전을 이용한 소설의 결말은 주인공의 슬픈 감정을 극대화하고 있다. 요나는 아들의 죽음에 슬퍼할 뿐만 아니라 슬픔에 빠진 자신의 상태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한다. 슬픔을 마음속에 묻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정말 괴롭고 힘든 일이다.

 

슬픈 내용의 단편소설을 소개하는 글에 어울리지 않은 내용이겠지만, 그래도 문제 있는 번역에 대해서 언급하겠다. 내가 이 글에서 맨 처음 인용한 우수의 번역문(문예출판사, 274)은 고칠 필요가 있다. 우수』의 번역가새끼 말이 어딘지 먼 곳으로 가버렸다면이라고  썼으며 애수(열린책들)의 번역가는 새끼 말이 죽었다면이라고 썼다.

 

 

만일 말이다, 너에게 새끼가, 네가 낳은 새끼가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다, 그 새끼가 죽었다면 말이다‥… 얼마나 괴롭겠니?

 

(열린책들, 31)

 

 

어딘지 먼 곳으로 간다는 표현은 생이별을 의미한다. 인간을 위한 가축또는 상품이 되어야 하는 망아지에게는 어미 말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지 않다. 인간에 의해서 강제로 생이별을 해야 한다.

 

한편 망자가 사는 세계를 먼 곳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말할 때 먼 곳으로 갔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예출판사 번역문은 어미 말과 망아지의 생이별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망아지와 사별한 어미 말의 상황을 뜻하는 것인지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이 번역문을 중의적 표현으로 볼 수 없다. 영어로 번역된 애수에서는 망아지의 죽음을 뜻하는 문장(다음에 나올 인용문에 밑줄이 있는 문장)이 나와 있다.

 

 

 “Now, suppose you had a little colt, and you were own mother to that little colt‥…. And all at once that same little colt went and died‥…. You’d be sorry, wouldn’t you?‥….”

 

 

독자들에게 혼동을 주지 않으려면 망아지의 죽음을 가정하는 문장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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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1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1 2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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