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그네스 그레이 ㅣ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12
앤 브론테 지음, 문희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7년 10월
평점 :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에 많이 언급되는 《제인 에어》(Jane Eyre)와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은 여러 번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됐을 만큼 유명하다. 고아 소녀의 파란만장한 성장 과정을 그린 《제인 에어》와 황량한 들판 위에 자리 잡은 외딴 저택을 무대로 한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인 《폭풍의 언덕》을 읽으면서, 문학과 독서를 좋아하는 소녀들은 이 두 편의 소설을 쓴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e)와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를 흠모하기도 했다.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은 1847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샬럿과 브론테는 가명으로 소설을 발표한다. 여기서 대부분 사람이 의외로 잘 잊어버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자매로 알려진 ‘브론테 자매’는 세 명이다. 세 자매 중 막내인 앤 브론테(Anne Bronte)도 1847년에 두 언니와 함께 가명으로 소설 《아그네스 그레이》(Agnes Grey)를 발표한다. 그러나 앤 브론테가 쓴 이 소설 제목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은 어린 독자를 위한 축약판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국내에서 가장 인기 많은 소설이다. 반면 막내가 쓴 소설의 번역본은 지금 내가 소개하려는 책, 이 한 권이 전부다. 두 언니의 국제적 · 국내 위상과 오십 종이 넘는 국내 번역본 수를 비교하면 막내의 소설은 초라하게 보인다. 누군가는 앤의 《아그네스 그레이》가 두 언니의 대표작에 비해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은 것일까. 나는 세 자매의 소설이 모두 선정된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올해는 앤이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녀가 두 언니의 명성의 반 정도 있었더라면 지금쯤 새로운 《아그네스 그레이》 번역본이 나왔을 것이다. 앤은 1월 17일에 태어났는데 그녀의 탄생일에 맞추어 《아그네스 그레이》 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올해 안으로 《아그네스 그레이》 새 번역본이 나올지, 아니면 앤의 또 다른 작품(그녀가 죽기 전에 쓴 두 번째 소설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 이 소설도 뒤늦게 주목받고 있는 명작이다)이 번역되어 나오는지 내가 두고 본다.
《아그네스 그레이》가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해도 나는 이 소설이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에 포함할 자격이 충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입장을 밝히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일단 첫 번째 이유로 《아그네스 그레이》는 쉽게 읽히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소설의 주인공 아그네스 그레이는 가정교사(governess)다. 앤 은 이 소설에서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서 가장 흔한 직업 중 하나로 알려진 가정교사의 생활상과 사회적 지위를 아주 정직하게 보여준다. 《제인 에어》에도 가정교사가 활동하는 제인 에어의 모습이 나오는데, 앤의 정직한 글쓰기는 《제인 에어》와 비교하면 평범하면서도 심심하다. 《제인 에어》는 독자를 흡입하게 만드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반면에 《아그네스 그레이》는 독자를 흥분하게 만들거나 긴장하게 만드는 크고 작은 사건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앤은 두 언니와 비교하면 소설의 재미와 흥미를 유발하는 필력이 조금 모자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아그네스 그레이》의 장점이자 매력으로 작용한다. 《아그네스 그레이》에서는 주인공을 둘러싼 시시콜콜한 사건들이 언급되지 않아서 독자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앤은 가정교사로 일했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가정교사의 삶과 애환을 최대한 정제해서 표현한다. 그래서 《아그네스 그레이》를 읽는 독자는 줄거리를 요약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그네스 그레이》의 줄거리는 단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줄거리가 단순해서 평범하다는 이유만으로 《아그네스 그레이》가 작품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아그네스 그레이》가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에 포함되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 소설에 동물권(animal rights)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아그네스가 가르치는 톰 블룸필드(Tom Bloomfield)는 부유한 집안에 자란 아이지만, 성질이 고약하며 아그네스를 무례하게 대한다. 그는 정원에서 사냥한 새를 아주 잔인하게 죽인다. 아그네스는 동물을 괴롭히면서 죽이는 톰의 버릇이 잘못된 행동임을 알리기 위해 ‘새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낀다’고 말한다. 하지만 톰의 어머니와 그의 삼촌은 오히려 아이의 행동을 옹호한다. 톰의 어머니는 ‘모든 생명체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하면서 아들을 꾸짖는 아그네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자 아그네스는 ‘인간의 쾌락을 위해 동물을 고문할 권리가 없다(We have no right to torment them for our amusement)’라고 응수한다. 그녀가 동물의 생명도 인간의 생명처럼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모습은 《아그네스 그레이》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이다. 《아그네스 그레이》를 결혼에 성공하는 가정교사의 사랑 이야기로만 봐서는 안 된다. 너무 일관된 평가는 《아그네스 그레이》의 또 다른 진가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아그네스 그레이》는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처럼 페미니즘 비평으로 독해할 수 있는(혹은 자주 독해해야 하는) 소설이다. 그러므로 《아그네스 그레이》는 독자, 특히 페미니스트가 반드시 알아야 할 소설이다. 인간에게 동물을 고문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 아그네스의 대사는 인간 중심의 페미니즘을 넘어 동물권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오늘날의 페미니즘 의제와 맞닿아 있다. 아그네스는 가정교사로 고용되기 위해서 만든 자신의 광고에 휴가를 보장하는 계약 조건을 내세운다. 당시 영국의 가정교사는 중류 계층과 상류 계층 여성이 선호하는 인기 직업이었지만, 현실은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불안정한 직업이기도 했다. 가정교사는 고용인이 사는 집에 지내면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고용인의 집안 분위기마다 다른데, 종종 소설에 나오는 톰의 어머니처럼 고용인은 가정교사를 하대할 뿐만 아니라 여성 가정교사의 지도력을 의심한다. 그렇다 보니 가정부와 유모, 하녀가 여성 가정교사를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사회적 지위가 그리 높지 않은 여성 가정교사가 고용인에게 자신의 휴가를 보장해주는 계약 조건을 내세운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대담한 일이다. 아그네스가 ‘갑(甲)’의 위치에 있는 고용인들에게 공개한 계약 조건은 여성 근로자 및 노동자의 유급 휴가 보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자, 지금까지 일독할만한 고전으로 알려져야 할 《아그네스 그레이》의 매력을 모조리 알려 줬다. 책을 좋아하는 동지들이여, 그래도 이 소설을 그냥 지나칠 것인가. 《아그네스 그레이》의 진가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로서 언니들의 유명세에 오랫동안 가려진 앤 브론테의 위상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진다. ‘형만 한 아우는 없다’라고 해서 ‘언니만 한 여동생은 없다’라는 말도 성립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 브론테 자매를 보라, 언니만 한 여동생‘들’이 있다.
※ Trivia
부인은 아들의 정직함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터라 톰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릴 터였다. (43쪽)
→ ‘철썩같이’는 맞춤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철석같이’라고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