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 중국 최고 석학 장치청 교수의 건강 고전 명강의 장치청의 중국 고전 강해
장치청 지음, 오수현 옮김, 정창현 감수 / 판미동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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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과 캡슐을 이용해 환자의 병변을 찾아 수술하는 기법이 등장하는 등 서양 의학의 발전이 눈부신데도 아직도 한방 치료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 과학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데도 한의학을 찾는 사람이 많은 첫째 이유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는 서양 의학의 효과에 한계를 느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인체의 기능 현상을 연구하는 한의학을 대안으로 찾기 때문이다. 둘째는 마취 수술로 인한 부작용, 특정 약물의 내성 축적 부작용에 의한 피해를 두려워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스트레스와 환경호르몬 식품첨가물 농약 등 각종 인공 유해물질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자연 친화적인 한의학을 찾는 것이다. 서양 의학은 해부학적 생리학 개념에 따라 인체를 연구한다. 이에 비해 한의학은 기의 흐름과 조화를 중시한다.

 

 

 

 

 

 

총체적인 한의학 이론인 ‘소문’과 침구학의 비조로 꼽히는 ‘영추’로 구성된 황제내경은 천지자연의 기와 인체의 기의 조화를 모색하는 한의학 최고의 고전이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 못지않게 병이 들지 않게 하는 양생을 최고 목표로 삼는다. 황제라는 이름이 책 이름에 보이듯, 안의 내용이 대체로 황제와 그의 스승들의 문답 형식을 띠고 있다. 내경이라는 말은 생명의 핵심 또는 의학의 핵심을 담은 경전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정(精), 기(氣), 신(神)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싱명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기와 신은 에너지적인 생명력을 말하며, 정은 인간의 생명력이 구현된 형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다. 정신기는 따로따로가 아니다. 인위적인 나눔일 뿐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성립된다.

 

한의학에서는 인간을 소우주라고 한다. 즉,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여 인간의 생체리듬도 변화해 간다는 것이다. 자연의 흐름 중 가장 주기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계절의 변화와 낮과 밤의 순환이다. 음양오행 이론도 여기에서 나온다. 한마디로 음양이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낮은 양이고, 밤은 음이다. 남자는 양이요, 여자는 음이다. 기(氣)는 양이요 혈(血)은 음이다. 이렇게 어떤 사물이든 간에 상대적으로 우주 간에 존재하며 여기에서 또 음과 양의 양면으로 나누어진다. 우주 만물이 음양과 오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 음양오행의 상대성에서 서로가 균형을 유지하지 못할 때 우주 만물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며 소우주인 우리 인체에는 질병이 생긴다. 옛날에는 계절과 주야의 변화에 인간은 직접 영향을 받았기에, 자연 변화에 순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문명화된 오늘날은 계절 변화에 대한 순응은 많이 퇴색됐다. 하지만 거대한 우주의 변화 속에 인간은 반드시 영향을 받게 돼 있어 이를 따라가지 않을 경우 현대적 계절병이 발생하게 된다.

 

황제내경에서는 ‘춘하양양, 추동양음(春夏養陽 秋冬養陰)’이라는 말이 있다. 이 구절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봄과 여름에 양기를 돕는다면 가을과 겨울에 음기를 돕는다는 뜻이라고 본다. 반대로 해석하는 입장은 봄과 여름에 양기를, 가을과 겨울에 음기를 억제한다고 말한다. 결국, 이 말은 자신의 체질에 맞는 양생법을 선택하여 계절의 변화에 순응해 살 것을 강조한다. 봄은 만물이 위로 솟아 자라나는 따뜻한 계절이고, 여름은 꽃을 피워 영화를 누리는 뜨거운 계절이다. 가을은 결실을 보고 식물의 진액이 뿌리로 내려가 모이는 계절이고, 겨울은 뿌리에 응집되어 봄날을 기약하는 추운 계절이다. 각 계절에 맞춘 것이 한의학 양생의 기본 이론이다.

 

올바른 양생을 위해서는 사계절의 기후와 주위 환경만 맞추는 것이 아니다. 정신수련, 음식과 기거의 조절도 중시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이 생체 리듬이다. 리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음악에서도 리듬이 중요하지만, 건강을 유지하려면 리듬을 타야 한다. 인체는 스위치를 누르면 언제나 똑같이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다. 여러 악기의 음이 조화를 이루듯 각 장기가 서로 협응하고, 리듬을 유지해야 건강이 확보될 수 있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급격하게 변하고, 식사 시간이 들쭉날쭉해지면 생체 리듬이 흔들린다.

 

병이 나지 않게 미리 막고 천수를 누리게 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변화에 맞춘 생활을 하는 것이다. 황제내경에 여름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며, 겨울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계절별로 잠자는 시간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해가 뜨면 양기가 충만해져 활동하는데 알맞고, 해가 떨어지면 음기가 강해져 몸의 움직임을 줄이고 휴식을 취하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계절별 수면 리듬의 변화는 눈부신 조명 불빛과 스마트폰이란 문명의 혜택을 받기 전엔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해지고 두 세 시간 정도 있으면 자고, 먼동이 틀 때 즈음에 일어나는 것이 일상적인 생활 리듬이었다. 자연과 인간 또한 우주 삼라만상과의 원활하고 조화로운 심신 생활을 통해서 건강을 지키는 것이 황제내경의 양생법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한의학은 또 장부의 작동 원리인 물질의 속성을 목, 화, 토, 금, 수 등 5가지 오행으로 구분하고 서로 돕는 상생과 서로 대립하는 상극으로 나눠 질병의 발생을 이해한다. 또 칠정(七情)을 인간의 기본 감정으로 규정하고 정신 상태에 따른 질환의 발생을 설명한다. 모든 병은 막혀서 온다고도 했다. 무형의 생명력이 유형의 조직체에 잘 출입하면 정상, 출입이 잘 안 되면 병, 영 출입을 못할 정도로 막혀서 빠져 나가버리면 죽음이다. 막히는 원인을 찾아보면 다치는 것 말고는 기후, 음식, 기거, 마음뿐이다. 그래서 같은 병이라 해도 원인을 잘 살펴서 치료를 다르게 해야 한다. 따라서 한의학은 일관된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학문적 특성을 내재하고 있음에도 서양 의학이 해부학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질환의 원인을 파악하고 진단 치료하는 데 여전히 유용한 이점을 안고 있다.

 

황제내경을 이해한다면 인간의 몸이 자연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람이 자연과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을 둘러싼 여러 가지 조건을 우리는 환경이라고 표현하지만, 자연과 사람이 하나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서로 어우러진 상태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의식주의 수준은 높아졌지만 정신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마음으로 인한 병이 많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생기는 병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며 알아도 평소에 원인을 제거하거나 증상을 해소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천 년 전 한의학의 원전인 황제내경 소문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염담무욕, 합동어도(恬淡無欲, 合同於道).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다면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우주와 일체되는 궁극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몸을 해롭게 하는 것을 피하고 마음을 편안하고 담담하게 해서 잡념을 비우고 없애면 생명력이 온몸에 꽉 차서 지켜줄 것이니 병이 생길 수가 없다. 이렇게 몸을 보전하는 바른 생활을 강조하면 삶이 단조롭게 되고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너무 뻔한 말이지만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건강을 잃은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건강을 잃으면 몸과 마음이 고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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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5-02-0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었는데, 밀린 책이 많아서 포기했더랬죠. 恬淡無欲, 合同於道... 이렇게 살 수 있다면야...^^

cyrus 2015-02-07 11:30   좋아요 0 | URL
표맥님이 읽어보신다면 만족하실거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황제내경을 알게 되었는데 입문용으로 좋습니다. ^^

만병통치약 2015-02-06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자연을 거슬러 살면서 과거에 비해 건강해진것도 사실이고 수명도 늘어난 것도 사실인데 왜 과거 단순했던 시절의 철학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몸은 편해도 마음이 불편해서일까요?

cyrus 2015-02-07 11:34   좋아요 0 | URL
통치약님 말씀이 맞습니다. 황제내경 같은 한의학에서 볼 수 있는 철학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카프카의 『소송』에 나오는 주인공 요제프 K ‘고소왕’이다. 이 소설에서 K는 특이하게 자신을 거짓 명예훼손죄로 소송을 제기한다. 본인이 자신을 고소한다? 원래 고소왕은 강변(강용석 변호사)의 별명이었다. 강변은 개그맨 최효종을 집단모욕죄로 고소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소송에 휘말리게 되면서 ‘고소왕’이라는 캐릭터를 얻게 되었다.

 

K는 아무런 죄도 없는데도 갑작스럽게 체포당한다. 자신이 체포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상한 소송 때문에 K는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진다. 결국 K는 처음부터 법원으로부터 고소를 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생활을 미룰 정도로 소송에 집착한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K의 투쟁은 법원에 출두하여 자신이 고소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K는 ‘무죄방면’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향한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뷔르스트너 양에게 자신을 폭행죄로 허위 고소하라고 제안을 하며 변호사 홀트의 간병인인 레니를 자신의 조력자로 나서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조르조 아감벤은 K가 ‘거짓 고발자’를 뜻하는 'Kalumniator'의 첫 글자라고 해석한다. K를 고발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K 자신이었다. 처음부터 K에게 죄는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려는 1년간의 투쟁은 반대로 법적 처벌을 받을만한 죄를 양산했을 뿐이다. K는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회유하고, 뇌물로 법조인들을 매수한다. 이러한 K의 부정적인 행동은 자신을 스스로 모함하는 꼴이 된다. 무죄인 상태에서 거짓으로 자신을 고소하는 K는 점점 소송에 집착할수록 고소 받을만한 죄를 하나씩 저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판결을 회피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K는 떳떳하다. 자신의 무죄를 확신한다. 교도소의 신부 앞에서 자신은 완전히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죄가 없나요?"
"네."
K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게 정말 기뻤다. 특히 그것이 사적인 개인을 상대로 하는, 그러니까 어떠한 책임도 뒤따르지 않는 것이라서 더욱 기뻤다. 그에게 그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이 기쁨을 만끽하려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나는 완전히 결백해요." (『소송』, 191~192쪽)

 

 

아감벤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죄인 자신을 스스로 고소하는 K는 희극적이다. 이것이 바로 카프카적 상황(Kafkaesk)이다.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K가 선택한 방법은 자기를 고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K는 결백한 인물이 아니었고, 결백함을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 처음부터 허위로 자기 고소를 시도했고, 이러한 투쟁의 과정 속에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죄를 저지른 K의 판결은 법원이 아닌 채석장에서 진행된 ‘개 같은’ 처형이다.

 

 

 

 

 

 

 

 

 

 

 

 

 

 

 

 

막스 브로트는 K를 카프카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카프카가 살아있다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브로트의 관점을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반박했을 것이다. 카프카에게 브로트는 애증의 관계이다. 자신의 유고들을 불태워 없애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데다가 작품을 엉뚱하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카프카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분이 깊었던 구스타브 야누흐는 카프카에게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을 한다. 여기서 『소송』에서 K가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신은 무엇을 죄라고 부릅니까?”
“죄는 자신의 사명을 피하는 거예요. 오해, 초조 그리고 게으름 등이 죄예요.”

(『카프카와의 대화』(문학과지성사), 390쪽)

 

 

K는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소송을 진행하기 위해서 ‘일상’이라는 삶의 보편적인 사명을 피한다. 바쁜 은행 업무 때문에 소송 처리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 K는 초조해 한다. 어떻게든 휴가를 신청해서라도 소송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지금 이런 상황에 은행 일을 보아야만 한단 말인가? - 그는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 고객들을 들어오게 해 상담을 해야만 할까? 소송은 계속 진행되는 중이고, 저 위 다락방에선 법원 관리들이 그의 소송 서류들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는 이렇게 은행 업무나 처리해야 하는가? (『소송』, 170쪽)

 

 

K는 법과의 투쟁을 통해서 자신의 무죄, 즉 결백함을 증명하려 했으나 무의미한 싸움에서 패배한 인물 또는 거대한 법 체제에 의해 희생된 인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해석은 K의 무죄를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K의 ‘셀프 고소’는 진실 규명을 통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소송에 집착하고, 거기에 얽매여 저지른 부정행위들을 묵인하기 위한 방어적 수단에 불과하다. 그는 법과 투쟁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없던 죄를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법 앞에 투항한 것이다.

 

K는 결백하지 않았다. 그는 죄를 저질렀으며, 누구도 K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부의 말처럼 법원은 K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K 혼자서 자신을 비방함으로써 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원조 고소왕은 강용석은 고소의 아이콘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세탁하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고소왕 K는 법에 저항을 하다가 끝내 무릎을 꿇은 고독한 고소의 아이콘으로 결백함을 증명하는 척하는데 성공했다. 과연 우리는 『소송』을 읽을 때 법의 권위에 희생된 인물의 비극에만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을까? 당신이 책에서 만났던 K가 여전히 결백한 인물로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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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 단 하나의 삶을 사랑하는 길 작은길 교양만화 메콤새콤 시리즈 12
막시밀리앙 르 루아 글.그림, 임명주 옮김, 이수영 해제, 미셸 옹프레 원작 / 작은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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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니체만큼 많은 영감을 주는 철학자도 드물다. 방대한 저작과 그 난해함, 또 해석의 폭넓은 스펙트럼. 청년기엔 누구나 한 번쯤 그 철학의 바다에 몸을 담그게 된다. 그러나 수심이 깊은 ‘니체’라는 바다가 두려워서 대부분 바닷가에서 발목을 적시는 정도로 끝날 수 있다. 니체 자신의 저작도 분량이 만만치 않지만, 입문서와 해설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많다. 입구를 잘못 찾으면 평생 잘못 파악한 채 살아가게 된다. 니체에 관한 책은 이미 너무 많아 새 저작을 낸다는 것은 자칫 군더더기가 되기 쉽다. 이는 니체만큼 다양한 주석과 해석, 논쟁을 일으키는 철학자도 드물다는 역설적 반증이기도 하다.

 

한때 니체를 알기 위해 제법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서 배운, 그 ‘시험문제용’ 니체가 아니라 ‘삶’의 철학자 니체를 찾기 위해서. 그러나 투자한 시간과 열정에 비해 그 열매는 언제나 나의 지적 능력을 의심할 만큼 초라했다. 니체의 대표작『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몇 번 읽어봐도 늘 미로를 걷는 기분이었다.

 

막시밀리앙 르 루아가 그린 『프리드리히 니체』는 니체의 삶과 철학을 적절한 수준에서 간결하게 복원했다. ‘니체의 모든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니체에 입문하는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만화는 중간에 니체의 책에서 발췌한 문장을 인용하여 그의 핵심사상을 건드린다. 내 지난날의 수많은 시간과 열정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니체로 가는 길을 친절하고 쉽게 안내한다.

 

 

 

 

 

 

만화의 채색은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다. 다 알듯이 니체는 항상 병마에 시달렸다. 쉼 없는 집필을 보상받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되었을 때, 이미 니체는 거의 몸과 마음이 병들어 죽음을 앞둔 상태였다. 르 루아는 매독의 고통을 못 참아 몸부림치거나 환상과 망상에 시달려 울부짖는 니체의 모습도 그려냈다. 대사 한 줄 없는 무언의 컷 안에 너무 튈 정도로 과감한 선과 색채로 형상화된 니체는 철학자라기보다는 병자와 광인 이미지를 돋보이게 한다. 왜 르 루아는 병과 망상 앞에서 무너지는 연약한 니체의 모습을 강조하려고 했을까.

 

 

 

 

 

니체의 질병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적 의미의 그것과 다르다. 그는 질병을 가장 건강한 사람만이 감행할 수 있는 모험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자신이 심한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 스스로 병적이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니체는 질병으로 자신의 철학을 검증하려고 했다.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려고 일보 직전 상태인 자신을 스스로 탈출해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다. 즉, 허무주의에 길들면서 생겨난 지배 정서를 의심하고, 공격하기 위해 니체는 위험한 싸움을 감행한다. 망치를 들고 철학을 하는 것이다. 망치로 허무주의적 본성을 파괴한다면, 삶에 대한 긍정을 느끼고, 삶이 건강해진다. 결국, 병들고 미쳐버린 니체의 모습은 그저 독특한 생의 이력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살아있을 때나 죽고 나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 지금이나 니체를 미친 사람으로만 봤을 뿐, 왜 니체가 미쳐버렸는지 그 누구도 묻지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식이 우리가 니체의 생각을 어렵게 느껴지게 만든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비록 그는 10년 동안 진행된 질병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그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직면하면서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죽을 때까지 평생 그를 힘들게 한 친구가 매독이라면 그를 외롭게 만든 친구는 고독이었다. 니체는 외롭게 살았다. 미모와 지성을 두루 갖춘 루 살로메에게 반해 단 한 번 만난 후 청혼까지 했지만 결국 사랑은 얻지 못했다. 루는 위대한 철학자의 가슴을 벼락처럼 후려칠 수 있는 여자였다. 그 과정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은 위대한 책이 탄생했다. 니체는 운명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미래의 철학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바로 차라투스트라. 미래에서 온 철학자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에게 비극과 불행은 삶에 있어서 필연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불행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Amor Fati. 니체는 운명을 사랑하지 않고, 이렇게 병마에 시달리다가 무기력하게 죽었다면, 우리가 아는 지금의 니체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니체는 당시까지의 모든 철학과 종교관, 인간관을 비판하고 새로운 인간상을 부르짖었다. 그가 평생 추구한 최대의 화두는 완전한 인간이었다.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것은 종교의 부정이 아니다. 피안의 존재에 의지하는 나약한 인간상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완성에 전념하라는 주문이었다. 그가 그토록 갈망한 인간다운 인간의 완성은 끊임없이 안정을 거부하고 새로운 혼돈을 지향해 전진하는 역동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인간을 니체는 Übermensch라고 이름 지었다. 니체의 삶은 전적으로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삶의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이 될 수 있는가를 탐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무주의가 지배된 세상에 짓눌려 생긴 환부를 도려내 버린다고 우리의 삶이 건강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도려낼 수 있는 상처라면 차라리 좋겠다. 까짓 잠깐의 고통쯤이야 참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10년 동안 골골 앓아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니체라는 철학자도 있었는데. 맹목적으로 아픔을 참는 그런 서투름도 아니고, 그 아픔을 잊으려 하는 어리석음도 아닌, 병을 통해 건강해지는 니체의 지혜를 얻고 싶다. 고통을 즐거운 것으로 긍정할 수 있는 그 삶의 지혜를. 이제 니체의 삶과 생각을 이해했다면, 차라투스트라처럼 미래의 철학자가 된 니체를 만나러 가보자. 그런데 그가 있는 곳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니체 철학의 이정표들, 즉 니체를 알고 싶은 독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국내 문헌들이 언급되지 않은 점이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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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4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25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25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단한 독서 - 내 삶의 기초를 다지는 근본적 읽기의 기술
에밀 파게 지음, 최성웅 옮김 / 유유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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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밀란 쿤데라, 『느림』 중에서)

 

 


 Scene #1  속독의 시대 

 

바야흐로 속도의 시대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빨라졌고, 그에 걸맞게 간편해졌다. 그 속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도태되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수십 가지 정보가 쏟아지는 요즘, 한 장 한 장 교감해야 하는 책은 낡고 지루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수많은 정보가 범람하는 요즘 시대에는 쓸 만한 정보를 얼마나 빨리 입수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성공의 성패를 좌우한다. 필요한 정보를 제때 얻지 못한다면 뒤처질 것이 자명하다. 바쁜 직장인들에게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기 위해 가장 간편하고 좋은 방법은 독서를 통한 공부이며, 독서를 도와주는 것이 바로 속독법이다. 속도의 시대는 곧 속독의 시대인 셈이다.

 

올해 초, 미국에 속독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 이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면 두꺼운 책을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천천히 단어를 읽으면서 시선을 아래로 이동하게 된다. 애플리케이션은 이런 동작을 세분화시킨 것인데, 이용자들에게 단어를 한 번에 하나씩 빠르게 보여준다. 1분에 250단어에서부터 천 단어까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이 기술은 삼성의 갤럭시 기어가 이미 베타버전으로 선보였다. 만약 최고 속도인 1분당 1000개 단어의 속도로 읽을 수 있다면 해리포터를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77분,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는 단 하루다. 우리나라도 전자북을 읽을 수 있는 속독 애플리케이션이 나왔다.

 

그런데 속독을 하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예전에 속독으로 일주일에 다섯 권을 읽은 적이 있었다. 수필이나 가벼운 소설 한 권 정도는 세 시간이면 볼 수 있었고, 어렵고 두꺼운 책이라도 넉넉잡아 너 다섯 시간이면 충분했다. 별생각과 준비 없이 줄거리 위주로 속독했는데 며칠 지난 후에 그때 읽은 책의 주요 내용이나 줄거리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다. 서평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책에 대해서 조금만 깊은 내용을 물었다면 대답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Scene #2  느릿느릿 거듭거듭 읽기의 즐거움  

 

그렇다면 속독의 시대 속에 효과적으로 책을 읽는 지름길이 없을까. 요즘처럼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속독과 다독이 효과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둘 다 일리가 있다. 마음의 양식인 책도 질과 양의 조화가 맞아야 '영혼의 보약'이 된다는 뜻에서 보자면 먼저 천천히 음미하면서 깊이 있게 책을 읽는 방식도 좋다.

 

프랑스 인문학자 에밀 파게(1847~1916)는 온전히 독서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느리게 읽을 것을 강조한다. 책을 느긋하게 꼼꼼히 읽어내는 ‘슬로 리더(slow reader)’가 되는 것이다. 에밀 파게의 『단단한 독서』는 『L'Art de Lire』를 번역한 책이다. 프랑스어 원제를 우리말로 풀어내면 '독서술'이다. 1959년에 '독서술'이라는 제목으로 에밀 파게의 책이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번역자는 우리나라 최초로 불한사전을 편찬한 故 이휘영 선생(1919~1986)이다. 최근에 새로운 제목으로 『L'Art de Lire』 완역본이 처음 선보였다.

 

『단단한 독서』는 에밀 파게가 65세 때 쓴 책이다. 그러니까 1912년에 출간되었다. 세상에 나온 지 무려 100년이나 지난 이 책이 지금까지도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인문학 열풍과 함께 '독서법'을 소개하는 책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쏟아지고 있는데, 속독의 시대 속에서 '슬로 리딩'이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슬로 리딩'을 올바른 독서법으로 정립하고, 제시한 사람은 에밀 파게였다.

 

책 읽는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선 책을 천천히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뒤로도 계속 천천히,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게 될 소중한 책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가야 한다. (17쪽)

 

『단단한 독서』는 책을 효율적으로 읽는 특별한 비법 몇 가지 나열한 자기계발 도서가 아니다. 속독의 시대 속에서 잊고 있던 독서의 즐거움을 떠올리게 한다. 되도록 빨리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속독 콤플렉스' 때문에 점점 책을 꺼리는 현대인들에게 '느리게 읽기'는 잊힌 책에 대한 애정을 되살려준다. 독서가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친근한 행위로 만들 수 있다. 책과 좀 더 친해지려면 느리게 읽을수록 좋다. 수박 겉핥기식의 속독은 책의 가치를 제대로 판별하지 못한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생각을 무턱대고 믿어버리고, 텍스트의 오류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버린다. 오히려 이런 속독이 책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는 나태한 독서법이 된다.

 

천천히 책을 읽었다면, 이제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듭 읽어야 한다. '생각을 담은 책' 즉 철학자가 쓴 책의 경우, 책 속 내용과 자기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철학자의 생각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 책 속에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는 문체를 즐기는 데 좋다. 우리가 글을 쓰게 되면 교정을 거치지 않은 불완전한 형태의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이 좀 더 나은 글로 독자의 마음으로 다가서기 위해서 문체와 언어를 교정해야 한다. 거듭 읽기도 마찬가지다. 책을 다시 읽으면 우리가 맨 처음에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묵상해야 하는 책들을 급하게 읽어버리면 이건 좀 낭비다. 천천히 생각하면서 읽다가, 불현듯 깨닫게 되는 지혜에 무릎을 치게 되는 그 기쁨을 놓쳐버린다니,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Scene #3  단단히 무장한 독자가 돼야 한다

 

깨달음의 깊이는 읽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깊은 깨달음은 깊은 읽기에서 나온다. 천천히 깊이 읽기 위해서는 서둘러서는 안 된다. 천천히 깊이 읽을 때 우리는 독서의 깊은 맛을 경험하게 된다. 독서의 기술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영혼의 양식인 책을 소중히 여기는 독서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 딱 한 권이라도 있다면, 처음의 마음으로 책을 펼쳐보라. 그리고 천천히 읽기 시작하라. 오래 사귄 친구처럼 진정으로 속 깊은 정을 나누듯이.

 

그렇지만, 세상에 나온 모든 책이 다 완벽하고 똑똑하다고 볼 수 없다. 파게는 책을 자신의 오성을 일깨워주는 좋은 친구이면서도 그의 결점을 숨기는 것을 경계한다. 느린 속도로 거듭 읽는 것은 단지 책에 대한 감동의 즐거움을 느껴줄 뿐만 아니라, 독자가 책의 결점을 꼼꼼하게 검토하여 저자를 비판할 수 있도록 무장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파게가 독자에게 강조하는 ‘단단한 독서’다.

 

단단히 무장한 독자가 돼야 한다. 이해하고자 할 때는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의 무장을 해제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다시 갑옷을 입을 수 있어야 하며, 최종적으로 비판적 검토 아래, 작품이 지닌 진실과 아름다움에 애당초 토론이 불필요했음이 입증됐을 때 다시 자신의 갑옷을 내려놔야 한다. (189쪽)

 

빨리 읽고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게 읽더라도 깊게 다가와 저자의 의식을 한 방 때려줄 수 있는 힘. 그것이 제대로 된 '단단한 독서'다. 카프카가 『변신』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단단히 무장한 독자가 되고 싶다면, 에밀 파게의 독서술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은 느릿느릿 거듭거듭 읽어야 한다. Iterum quae digna legi sint. 『단단한 독서』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의 의미처럼 다시 한 번 읽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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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파인더 - 인류 최초의 지혜로 미래를 구하다
웨이드 데이비스 지음, 이승민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는 과학기술과 진보를 향한 숭배에 내재하는 만인을 위한 단일한 문명이라는 이상으로 말미암아 피폐해지고 불구가 된다. 세계관 하나가 소멸할 때마다, 문화 하나가 사라질 때마다 생명의 가능성도 낮아진다.” (옥타비오 파스, 『웨이파인더』 중에서, 178쪽)

 

 

 

 

 Scene #1  오만한 문명    

 

“그는 몹시 불편해했다. 바지를 입는 일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고 윗도리의 소매로 말미암아 어깨와 팔 안쪽에 찰과상을 입기도 했다. 그래서 자꾸 아프다고 말하는 부분을 몇 군데 넓혀 주었는데, 그는 점차 자신의 신체를 의복에 길들여갔다.”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중에서)

 

프라이데이를 처음 본 로빈슨은 무척 놀랐을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백주대낮을 활보했으니 말이다. 신앙심 빵빵한 로빈슨은 프라이데이를 '문명인'으로 개조하기 시작한다. 당시 유럽인들은 '야만인 옷 입히기'를 ‘야만인’에서 ‘문명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혜택이라고 생각했다.

 

'문명'이 고고학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30년대부터다. 이때부터 실제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문명이라는 사회단계의 개념화가 진행됐고, 문명 단계로의 이행을 가져온 다양한 요인에 대한 검토가 이뤄졌다.

 

'문명' 개념은 인류는 발전한다는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믿음 속에서 탄생했다. 인류학자 헨리 루이스 모건은 '발전'의 개념을 도입해 인류가 야만과 미개가 단계를 거쳐 오늘의 문명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당시 유럽에선 사람이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듯 인종이나 사회도 거친 상태에서 문명 상태로 발전한다는 생각이 급속도로 퍼졌고, 자기 문화권과 다른 사회는 야만으로 규정해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물질문명의 발달이 정신문명을 압도하는 오늘날, 기술과 자본이 개입되지 않은 삶의 모습은 이질적이고 비문명적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옷을 입지 않고 산다거나 피부에 무수한 상처를 남기는 고통스런 통과의례 등은 흔히 야만적인 풍습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인식이 상대 문화에 대한 무지나 오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문명은 오만했다. 대항해 시대 이후 불붙은 유럽 제국은 문명의 이름으로 야만을 단죄했다.

 

도시문명이 발달한 유럽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시선처럼 원주민 문화는 야만스러운 것일까?

 

 

 

 Scene #2  인류학자, 문명과 야만 사이로 직접 뛰어들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지 수 백만 년이 지났지만 서로 긴밀한 교류를 시작한 건 채 수 백 년도 되지 않는다. 인류는 문명의 발달 단계에서 보편적 경로를 밟기도 했으나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창조해왔다.

 

캐나다 출신의 인류학자 웨이드 데이비스는 물질문명의 단선적인 흐름을 근거 삼아 진보를 주장하는 서구의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박한다. 그가 쓴『웨이파인더』는 단순한 서구 탐험가의 오지 탐험기가 아니다. 전 세계 토착 부족 사회 사람들의 생활상을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록했다. 자연과 인간, 문명과 야만 사이로 나누어진 세계 속으로 뛰어 들어가 어떤 소통을 꿈꾸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다.

 

웨이드 데이비스는 문명인의 눈에는 미개하게 느껴지는 야만의 모습을 그저 야만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곳에 살아가는 토착 부족민은 물론이고 동식물에 이르는 생명들의 삶이 그 자체로서 얼마나 경이롭고 자연스러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야만적 문화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한 그들이 스스로 터득한 뛰어난 지혜다.

 

폴리네시아인은 지도와 나침반이 없어도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바람, 파도, 구름, 별, 해 등 눈에 보이는 자연현상이 항해하는데 필요한 아주 중요한 부표다. 예를 들어 달무리가 생기면 다음 날에 비가 온다는 징조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는데 오래전에 폴리네시아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밖에 달무리 안에 보이는 별의 개수를 통해 폭풍의 강도를 예측할 수 있고, 구름이 떠있는 형태나 움직이는 정도로 대기 상태나 바람의 세기 및 방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폴리네시아인들은 항로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항해 과정 중에 보고, 겪은 자연현상들도 머릿속에 저장해둔다. 이것을 지도 삼아 직접 눈으로 바닷길을 찾는 그들은 바닷길잡이(wayfinder)인 셈이다. 기억으로 축적된 폴리네시아인의 추측항법은 오늘날의 천문학, 해양학으로 증명된 지식들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들은 추측항법을 따로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다음 후손들에게 물려줌으로써 다행히 폴리네시아의 추측항법은 보존되고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콜롬비아의 바라사나 족의 우주론은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그들은 거대한 지구를 구성하는 자연에 각각의 생명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영적 기운으로 살아 숨 쉰다고 말한다. 인간, 동식물 모두는 하나의 우주적 기원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서로 관계 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는 통합체로 인식한다.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생명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커다란 생명체로 본다. 그러나 바라사나 족은 열린 눈과 마음으로 온갖 생물, 무생물을 보듬어 안은 인류의 지혜를 살아 있는 자의 의무로 봤다. 바라사나 족뿐만 아니라 일부 토착 부족도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거대한 공공 재산이자 영적 기운이 들어있는 성스러운 대상으로 생각한다.

 

 

 

 Scene #3  “우리가 어떻게 자연을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근대 문명은 인간의 이성을 무기로 삼는 인류사회의 진보를 자랑해왔지만, 그 이면에는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야만의 역사가 성장해왔다.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줄기차게 울려왔다. 그 목소리의 중심에는 우리가 '야만'과 '미개'라는 단어를 붙였던 토착 부족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내는 진실 되고 간절한 목소리 앞에 귀를 막아버렸다. 표면적으로는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서 과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또 다른 세상 보기를 시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때론 편견과 오만이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 깊은 슬픔을 느낀다.

 

1854년, 북미 대륙에서 잔혹하게 인디언을 몰아낸 백인들이 내민 계약서 앞에 시애틀 추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돌직구를 날린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웨이드 데이비스도 시애틀 추장처럼 인류학적 근거를 들어 자연과 공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혜를 강조한다. 자연을 개발하고 소유하는 인식은 미래의 지혜를 무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과 하나로 연결된 채 살아가는 토착 부족의 생존권을 위협한다. 자연개발론자는 '진보'라는 이름 아래에 자연을 이윤 획득을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본다.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오랫동안 한 곳의 터전에서 살면서 자연을 소중하게 여긴 토착 부족을 집단학살(genocide)하는 비인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한 민족의 생활방식을 말살하는 문화학살(ethnocide)도 일어난다. '진보'의 불도저를 앞세운 문화학살은 우리가 보존해야 할 최고(最古)의 언어, 문화 그리고 내일을 내다보게 만드는 삶의 지혜마저 사라지게 한다.

 

우리는 희귀종의 멸종이나 서식지 파괴와 같이 생물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만,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생물 다양성과 언어 및 문화 다양성은 무관하지 않다. 자연과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수세기를 살아온 인간의 언어들 속에는, 자연에 대해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거는 방법이 무척 다양했다. 그래서 특정 언어가 사라지면 특정 생물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생물종의 상실을 한탄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버금가는 손실 즉, '인종권'(ethnosphere)이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방관하고 있다. '인종권'이란 인간의 지성과 의식이 함축된 인류를 총칭하는 문화적 재산으로 정의된다.

 

과학 기술의 지속적 발명과 개발과 발전이란 명목 하에 진행되는 인류에 의한 자연 정복이 이대로 계속될 때 틀림없이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은 지구의 황폐, 생태계의 파멸, 인류 종말 및 모든 생명체의 멸종이다.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지구는 이대로라면 멀지 않은 장래에 병에서 회복될 수 없어 사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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