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노동자 - 뉴딜이 기획한 가족과 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56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지음, 김현지.이영주 옮김 / 갈무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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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미국 전역을 덮친 대공황은 많은 사람을 실업과 가난의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당시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작은 정부’ 중심의 자유주의를 고집했다. 후버 정부의 미온적인 대책은 불난 집에 부채질만 하는 꼴이 됐다. 물가는 계속 폭락했고, 실업자도 날로 늘어나 수천만 명에 이르는 파산자가 속출됐다. 후버의 뒤를 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공황으로 무너진 미국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을 들고 나왔다.

 

루스벨트는 가난한 하층민을 상징하는 ‘잊힌 사람(The Forgotten Man)’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잊힌 사람들을 위한 뉴딜 정책’을 천명했다. 뉴딜 정책은 국정 운용과 경제의 틀 자체를 변화시켰다. 루스벨트 정부는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 경제정책 대신 정부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 케인스 경제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연방정부의 기능과 권한을 확대해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쳤다. 또한,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등 노동자의 복지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추진됐다. 역사학자들은 뉴딜 정책이 대공황으로 위험에 빠진 자본주의를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 복지국가체제의 기틀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뉴딜 정책 신화’에 가려진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게 마련이다. 그 진실은 시간이 지나서야 명백해진다. 뉴딜 정책의 일부 사회보장제도가 실제로는 여성과 흑인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경제의 ‘경’ 자도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글로 설득력 있게 쓴 책이 1983년에 나왔다. 이탈리아의 여성 운동가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집안의 노동자》(갈무리, 2017)이다.

 

이 책에서 코스따는 루스벨트 정부가 시행했던 여러 가지 정책들과 그 결과를 제시한다. 루스벨트 정부가 경제성장의 기폭제로 내놓은 것은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계획(TVA)이다. 뉴딜 정책 일환으로 추진된 TVA는 테네시강 본류와 지류에 26개 대형 댐을 건설하고 남부 내륙 운하를 설치하는 대형 토목공사였다. 루스벨트 정부는 공공 일자리를 만들면 노동자의 임금이 향상되고, 내수 소비가 살아나서 생산과 투자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뉴딜 정책이 창출한 일자리 대부분은 ‘백인 남성’이 차지했다. 정부는 백인 남성‘에게 가족과 국가를 재건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했다. 흑인 남성은 여전히 열악한 근로환경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여성은? 여성은 ‘집안의 노동자’로 전락했다. 여성의 재생산노동은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집안일, 가족을 돌보는 일,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등의 가족과 사회가 유지되는 데 필수적인 노동을 의미한다. 대공황의 여파로 망가진 경제는 가족의 해체를 불렀다. 돈이 없어서 자식에게 일을 시키거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이 증가했다. 정부는 경제위기가 초래한 가족 해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에게 집안의 노동을 직접 담당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겼다. 정부는 여성에게 ‘가정학’을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했으며 가사노동을 ‘사랑으로 하는 노동’으로 포장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코스따는 여성을 위한 뉴딜 정책이 여성에게 ‘집안의 노동자’ 역할을 부여한 전략적 기획이라고 지적했다. 그리하여 ‘남편은 바깥일, 아내는 집안일’이라는 성별 노동 분업이 미국 사회에 강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정부는 가족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여성의 노동을 착취했다. 이렇게 여성의 가사노동은 ‘특별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 ‘당연히 여성이 해야 하는 일’로 여겨지게 되고, ‘집안의 노동자’는 뉴딜 정책 신화에 가려져서 ‘잊힌 여성(The Forgotten Woman)’이 되었다.

 

남성의 노동력은 가족 내 가사노동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여성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에 의지하게 되고, 여성의 가사노동 및 임금은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없다는 전제로 설정된다. 뉴딜 정책 시기의 미국 여성들은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 받는 차별뿐만 아니라 ‘집 밖의 일’을 얻는 기회조차 받지 못했고, 저임금을 받는 이중, 삼중의 차별까지 겪었다. 남성 노동자 파업에 동참하거나 파업을 주도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순히 노동에 따른 보상을 받기 위한 일이 아니다. 재생산노동을 남성들의 임금노동 하위에 위치시키면서 가사노동을 여성들에게 전가하고 여성 노동력을 ‘0원’으로 만드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저항이다.

 

《집안의 노동자》는 뉴딜 정책 시대의 남성과 여성의 성별 분업 구도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치밀한 분석을 통해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역작이다. 《집안의 노동자》을 읽으면 지금도 변함없는 여성 노동 문제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노동자로 제대로 인정받고 존중받으면서 일해본 적이 없다. 물론, 한때 ‘알파 걸’, ‘슈퍼 우먼’ 같은 일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신조어가 유행했지만 사회는 ‘집 밖의 노동자’가 되어 일하고 싶은 여성에게 ‘집안의 노동자’ 역할을 포기하지 말라고 강요한다. 결혼과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여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여전하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국가는 재생산노동의 책임을 여성에게 일차적으로 부여하면서 여성 노동력을 비정규직 형태로 노동시장에 흡수하려는 정책을 고집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여성들은 성별 분업을 조장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 맞서 자신을 저항주체로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될, 힘겹지만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여성들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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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8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3-29 13:45   좋아요 0 | URL
네.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여성에 참정권을 준 국가입니다. 뉴질랜드 내에서도 여성 참정권 획득을 위한 운동이 펼쳐졌는데요, 미국과 영국 페미니스트들의 참정권 운동이 많이 알려져서 그런지 이 중요한 사실을 다룬 자료를 찾기가 어려워요.

sprenown 2018-03-2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아때문에 어쩔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요즘은 집안일만 하는 여성이 더 눈총받는거 같아요^^.비정규직이나 시간제라도 돈벌어오기 바라죠. 씁쓸한 현실..

cyrus 2018-03-29 13:50   좋아요 1 | URL
문제는 비정규직, 시간제 근무 여성을 위한 고용 보장이 열악해요. 기본적인 노동 3권 원칙조차 지키지 않은 회사가 많아요.

AgalmA 2018-04-01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육아, 가사 일을 여성이 잘 한다고 본성이나 특성으로 틀로 만든 경향이 있죠. 생물학 보면 호르몬상의 차이는 분명 있는 거 같지만 사회 생활 속에서 같이 분담하는 문화를 만들었다면 이렇게까지 고착화되진 않았을 겁니다.
여성이 사회생활에 진출하니 어디 얼마나 잘 하나 감시 & 평가가 아니라 서로서로 도와야죠. 평등과 평화 말로만 떠들게 아니라^^;;

cyrus 2018-04-01 19:43   좋아요 1 | URL
여성이 취업하는 과정을 보면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점이 많아요. 특히 면접 때 남성 면접관은 여성 구직자에게 결혼 계획이나 남자친구 유무를 묻습니다. 회사는 결혼하는 여성을 직원으로 고용하는 걸 꺼려하죠. 여성 직원은 일처리가 미숙하다는 남성 직원의 편견도 여성의 ‘가정주부화‘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