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목요일 대구는 하얀 눈으로 뒤덮었습니다. 폭설이 내린 이후로 사흘이 지난 지금, 대구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3월인데 대구는 여름 날씨입니다. 이틀 전인 일요일도 날씨가 무척 좋았습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을 알게 된 이후로 요즘 저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서점, 도서관, 헌책방을 전전하던 제가 처음으로 독립영화관에 가게 됐습니다. 대구 동성로에 독립영화관 ‘오오극장’이 있습니다. 곽병원 근처에 있어요. 오오극장 안에 커피 및 각종 음료, 술을 주문할 수 있는 삼삼다방이 있어요. 그래서 영화를 예매할 수 있고, 커피와 술을 주문하여 상영관 안에서 마실 수 있답니다. 이런 좋은 곳이 있었다니! 솔직히 저는 대구에 독립영화관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책바보’라서 진짜 바보예요. 오오극장에서 나와 경상감영공원 쪽으로 가면 레드스타킹 아지트이자 독서인들을 위한 안식처인 ‘스몰토크’가 있습니다.

지난 일요일(3월 11일) 오오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피의 연대기>의 김보람 감독님이 참석하는 ‘관객과의 대화(GV)’가 진행되었습니다. 오후 2시 영화 상영 후 GV가 시작되었습니다. 김 감독님이 오오극장에 찾아온 건 두 번째입니다. 지난달에 이미 삼삼극장에서 GV가 진행된 적이 있었는데요, 저는 이날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GV 진행은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 지식이 풍부한 레드스타킹 멤버가 맡았습니다.
<피의 연대기>는 여성의 월경, 즉 생리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보여준 영화입니다. 영화 제목의 피는 ‘생리 혈’을 의미합니다. 생리 혈. 이 단어를 듣자마자 기분 나쁘고, 불쾌한 기분이 드나요? 초경을 경험한 여성들은 생리를 한다는 것 자체를 창피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생리 혈이 새어나왔을까 걱정 안 해본 여성들은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생리를 ‘부끄럽고 비밀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생리가 여성들만의 영역이고 감추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죠. 그리고 생리는 당연히 몸의 현상인데, 부모나 학교는 이를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여성들은 생리에 대한 정확한 정보 없이 ‘빨간 날’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초경을 ‘당황스러운 일’로 인식하게 됩니다.
<피의 연대기>는 여성들마저 쉽게 공유하지 못한 생리를 공론의 장으로 드러낸 작품입니다. 영화는 생리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여성 운동과 생리대의 상관관계를 조명합니다. 무상으로 생리대와 탐폰을 공급하는 법안을 도입하자는 의견이 나오면 대부분 남성은 이러한 반응을 보입니다.
“내가 낸 세금이 왜 여성들을 위해서 써야 되는 거죠?”
“무상 생리대 정책이라니? 이거 빨갱이 정책 아닌가요?”
“생리를 특권으로 여기는 여성들이 좋아할만한 정책이군요.”
무상 생리대 법안 도입뿐만 아니라 생리 휴가를 보장하는 법을 반대하는 남성들도 있어요. 이들은 무상 생리대 지급, 생리 휴가 도입을 찬성하는 여성들에게 ‘메갈충’이라고 부르면서 비난합니다. 그들은 무상 생리대, 생리 휴가가 여성들을 위한 특혜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들의 말이 맞을까요?
* 김보람 《생리 공감》(행성B, 2018)
* 박이은실 《월경의 정치학》(동녘, 2015)
* 글로리아 스타이넘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현실문화, 2002)
생리와 생리통 그리고 생리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사회 속에 살아가는 여성들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생리가 ‘특혜’라고 말할 수 없어요. 생리는 ‘여성만 경험할 수 있는 특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몸의 현상입니다. 그런데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의 생리를 기피했고, 생리 혈에 대한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어요. 과거나 지금이나 생리의 ‘생’ 자를 쉽게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있는 여성들이 있는데, 생리가 여성의 특권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김 감독은 자신의 책 《생리 공감》(행성B, 2018)에 생리를 기피하는 문화가 여성을 억압하는 점을 날카롭게 짚어냈습니다.
생리는 몸의 일이다. 여성의 몸, 특별히 질 그리고 질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오랜 세월 금기시되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되고, 그것에 대한 경험은 공유되거나 기록되는 대신 잊히고 삭제된다. 이토록 오랜 시간 이 피를 금기시한 사회는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방치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피를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로 만들었고 그 피를 처리하는 데 들어가는 노동과 비용 그리고 고통은 모두 여성 개인의 몫으로 남겨 뒀다. (프롤로그, 9쪽)
영화에 박이은실 님이 출연합니다. 박이은실 님은 예전에 《월경의 정치학》(동녘, 2015)을 펴낸 적이 있습니다. 김 감독님은 자신의 책에 《월경의 정치학》을 인용했습니다. 《월경의 정치학》은 생리를 ‘남녀 모두 불편하게 만드는 금기’로 규정하여 여성을 억압하게 만드는 인류 역사와 사회 구조를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은 역사적 터부에 가려 언급이 금기시돼온 생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보여줍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은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통해 남성이 생리를 하는 세상을 상상했습니다.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녀는 월경이 분명 부럽고도 자랑할 만한 남성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에 나오는 내용에 따르면 초경을 한 소년들은 드디어 남자가 되었다고 좋아합니다. 정부는 사회 발전에 헌신하는 남성을 위해서 생리대를 무료로 지급합니다. 종교인들은 남성이 흐르는 피가 죄를 씻어 내리는 신성한 반응이라고 말하고, 월경이 없는 여성들은 불결한 존재라고 규정합니다. 생리를 ‘특혜’라고 주장하는 분들이라면 아주 좋아할 만한 유토피아군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생리는 여자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남성들은 여성의 생리를 부러워했던 걸까요? 남성 중심사회는 오랫동안 생리를 불결한 것,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게끔 했습니다.
<피의 연대기>는 생리대를 통해 여성들이 살고 있는 생리 기피 사회, 생리대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대기업이 만든 일회용 생리대만 선택하고 착용해야 하는 여성의 경험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영화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생리 공감》에서는 ‘생리를 안 할 권리’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저는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먼저 읽었어요. 영화를 못 보신 분이라면 김 감독이 쓴 《생리 공감》을 읽으면 됩니다. 책에 영화 속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의 연대기>와 《생리 공감》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성 장애인의 생리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입니다. 생리를 경험하는 장애인 여성들만의 불편함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비장애인 남성’인 저는 장애인 여성들의 생리 경험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김 감독님도 여성 장애인의 생리 문제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공감했지만, 여성 장애인의 생리 문제를 영화로 만들 능력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비장애인 여성’인 자신이 여성 장애인의 생리 경험을 주제로 영화를 만든다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생리하는 여성의 몸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그것 또한 혐오예요. 생리는 몸이 변화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므로 건강한 생리를 위해 필요한 도움을 받는 건 당연한 인간의 권리입니다. 여성들은 생리를 혐오하는 문화에 반항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여성들은 생리를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 Trivia

GV가 끝난 후에 감독님의 친필 사인을 받았습니다.

삼삼다방에 연회비 3만 원을 내면 영화 관련 도서들과 영화 DVD를 대여할 수 있습니다. ‘책 덕후’인 제가 삼삼다방에 있는 책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죠. 책 구경하다가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의 《여성론》(까치, 1990) 제본 판을 발견했어요. 저는 이 책을 가지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