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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사회 - 지속가능한 갑질의 조건
양정호 지음 / 생각비행 / 2017년 7월
평점 :
성숙한 자유 시장 경제가 이루어지려면 누구에게나 균등한 경쟁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시장에서의 분배야말로 정의로운 분배가 된다. 성별과 재산, 연령이나 사회적 계층을 불문하고 능력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렇게 볼 때 ‘능력에 따른 분배’라는 자유주의 이념이 설득력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입만 열면 자유 시장 경제를 외치지만 정작 자유 시장 경제 체제의 기본원리인 공정한 경쟁 관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불평등한 경쟁 관계를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나라 경제가 소수 재벌 · 대기업 중심의 성장전략을 고수해 대 · 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관행이 여전하고, 자영업자나 청년층 · 노년층의 생존이 벼랑 끝에 몰리는 한계상황이다. 여기서 ‘갑을관계’의 문제점이 발생한다. 갑과 을은 불균형적인 권력 관계를 상징한다. 갑은 권력자, 을은 종속자다. 우리나라에서 갑은 대기업, 을은 중소기업이다. 갑이 원청업체라면 을은 하청업체가 된다. ‘기업 간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며 불공정거래를 규제하기 위해 설립된 공정거래위원회는 갑과 을의 동등한 거래를 보장하지 못한다. 갑이 을을 대등한 계약의 당사자로 보지 않고 자신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상대로 여기는 사회에서 시장 경제 체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몇 년 전 우리 사회의 화두였던 경제민주화의 기본 원칙 중 하나가 ‘갑’의 횡포에 무력한 ‘을’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경제민주화 관련 정책들은 이익만을 좇는 대기업의 무분별한 탐욕을 막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원론적인 구호만 되풀이하는 경제민주화 담론은 ‘갑’이 국내시장에 구축한 독점적 시장 구조를 깨뜨리기에 역부족이었다. 뜨겁게 달궈진 냄비에 담긴 경제민주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식어갔다. 산업 현장에서 계약상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갑의 횡포는 도를 넘어섰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갑의 횡포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하청사회》(생각비행, 2017)는 갑이 횡포 수준을 넘어 사회에 악영향을 주는 연결 고리를 끊고, 갑을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 책이다. 이 책을 쓴 저자 양정호 씨는 갑이 을에게 군림하는 현상이 증가하는 사회가 더는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본다.
그는 갑질이 판치는 사회를 ‘하청사회’라고 부른다. 갑을관계를 바탕으로 하청사회를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그것은 ‘지대추구행위’와 ‘외주화(outsourcing)’다. 지대추구행위는 공정 경쟁의 기회를 축소하고 시장을 왜곡하는 행태이다. ‘조물주보다 높은 건물주’의 등장은 지대추구행위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건물을 빌려 장사하는 자영업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무엇보다 치솟는 임대료다. 결국, 임대료 부담으로 장사를 접는다. 역세권이나 대표적 지역 상권 등의 임대료는 계속 오르고 있다. 상권이 뜰 경우 대기업 프랜차이즈 상점이 들어오면서 영세 자영업자들은 주변 상권으로 밀려 나가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일어난다. 건물주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갑’이다. 그들은 별다른 생산 활동 없이 초과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건물주들은 임대료 수익으로 다른 부동산을 매입하는 등 지속적으로 지대수익을 확대하고 있다. 시장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는 공정한 경쟁을 강조하는 시장경제에 위배된다.
외주화는 급격히 변화된 경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국내기업들이 내세운 경영 방식이다. 한 기업이 ‘모든 것을 잘 하기’보다 ‘한 가지를 더욱 잘하기’ 위해 핵심역량에 집중하고, 그 이외의 것은 다른 전문회사, 즉 하청업체에 맡겨 시너지 효과를 끌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외주화 경형의 핵심은 기업과 하청업체가 서로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생산성 향상과 경비 절감을 해오게 되고, 진정한 상호이익 관계가 확립된다. 하지만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노사협력 · 상생 협력을 외치지만, 한국에서 노동자는 사용자의 동등한 파트너로서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경제 성장을 위해 친기업 정책을 펼친 정부의 비호 아래 거대한 갑이 된 경제 권력은 경제적 을인 하청업체에게 위험한 일을 전가했다. 하청업체를 쥐어짜는 불공정한 계약과 열악한 노동 조건은 하청업체 재해의 원인이며, 잊을만하면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같은 산업재해가 발생한다.
사회가 성숙해지려면 그때그때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성공적으로 풀어가야 한다. 불공정한 갑질 문제가 그중 하나다. ‘지대’를 편하게 받아먹어 독점할 수 있는 사회 구조를 개선하지 못하면 누구나 ‘갑’의 위치에 오르려는 심각한 상황이 초래할 수 있다. 저자는 지대추구행위가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상황을 지적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즘 청소년들의 장래희망 최상위가 건물주와 임대사업자라고 한다. 갑질 문화를 확대 재생산 하는 ‘보이지 않는 나쁜 손’이 아이들에게까지 뻗친 지 오래됐다. 이 아이들이 비정상적인 사회 속에 성장하면서 또 다른 ‘갑’이 된다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른들에게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