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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경험 - 유발 하라리의 전쟁 문화사
유발 하라리 지음, 김희주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7년 7월
평점 :
‘아는 것이 힘이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금언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감케 하는 말이다. 이 말의 배경에는 과학이 예술이나 종교와는 달리 주관적 가치 판단에서 벗어나서 사물의 본질과 현상의 구조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과학관이 깔려있다. 서구 문명은 ‘이성을 가진 인간’의 등장에서 시작된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생각하는 나’, 즉 이성을 가진 인간을 존재하는 대상에 관한 모범 답안으로 제시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무기 삼아 자연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게 세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자, 이제 인간은 세계를 ‘인간을 위한 세계’로 개조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다. 그렇게 성립한 것이 바로 ‘인본주의’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에 따르면 과학혁명은 인간이 신(종교)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이제 ‘인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는 종교로 자리 잡게 되고, ‘신’ 중심의 중세사회에서 ‘인간’ 중심의 근대사회로 이행한다. 하라리는 근대 사회에서 지식을 얻는 방법을 한눈에 보여주는 자신만의 ‘공식’을 내세운다.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은 하라리의 《사피엔스》(김영사, 2015), 《호모 데우스》(김영사, 2017)에 나오는 것들이다. 최근에 나온 하라리의 신작 《극한의 경험》(김영사, 2017)을 읽기 전에 이 두 권의 책을 먼저 읽는 것이 신작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사실 《극한의 경험》을 ‘따끈따끈한 신작’이라고 소개하기가 애매하다. 《극한의 경험》은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보다 먼저 나온 책이다. 《극한의 경험》이 2008년에 출간되었고, 2014년과 2016년에 각각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가 나왔다. 하라리의 전공 분야는 중세사와 군사 역사다. 하라리는 자신의 두 가지 전공 분야를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엮어 나가면서 인류에게 영향을 끼친 전쟁 문화가 무엇인지 살핀다.
하라리는 근대인들이 전쟁에 대해 낭만적으로 접근한 것에 주목한다. 근대 이전 중세 사회에서 전쟁은 지옥을 방불케 하는 재앙이다. 중세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켜 패배하면 신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전쟁을 피하거나 전쟁터에서 살아남고 싶어서 자신에게 신의 은총이 내리길 간절히 기도했다. 18세기 후반부터 낭만주의가 등장함으로써 전쟁을 바라보는 근대인들의 눈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나온 전쟁 회고록을 살펴보면 대다수 전쟁을 혐오하지 않는 관점을 취한다. 오히려 전쟁 회고록 글쓴이들은 전투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치중한다. 이러한 글쓰기 전략은 전쟁이 인간의 감정을 압도하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점을 부각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에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황홀한 감정을 ‘숭고’로 명명했고, 이 ‘숭고’의 개념을 광활한 자연이 아닌 전쟁터에서 찾으려고 했다. 참전 군인들은 참호에서 생활하고, 군사 훈련을 받고, 전우와 적군이 총탄에 맞아 쓰러져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본다. 군인은 마음이 아닌 몸으로 전쟁 경험을 체득한다. 총소리만 듣고도 무서워서 벌벌 떨었던 곱상한 청년이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생활하면 ‘극한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전사’가 된다.
하라리는 군인들이 전쟁 경험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깨닫거나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게 되는 특이점을 ‘계시’라고 말한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신의 눈치 받지 않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전쟁을 ‘긍정적 계시 경험’[1]으로 받아들인다. 종전 이후에 참전 군인들은 ‘나라를 지킨 영웅’으로 대접받고, 전사자들은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쳐 희생한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사회는 참전 용사, 전사자들의 ‘전쟁 경험’에 ‘권위’를 공적으로 부여한다. ‘전쟁을 경험한 자’는 전쟁 회고록을 써서 전쟁이 ‘숭고한 경험’을 느낄 수 있는 긍정적인 극한 상황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전쟁의 교훈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전쟁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품게 되고, 억제된 감정의 해방을 분출하기 위해 직접 전쟁터에 뛰어든다. 앞서 소개한 ‘지식=경험X감수성’ 공식이 전쟁을 바라보는 인식까지 바꿔 놓은 것이다. 베이컨의 금언을 빌리자면 근대인들은 ‘전쟁을 아는 것이 힘’이라고 생각했다.
하라리는 전쟁의 역사를 ‘지식=경험X감수성’ 공식으로 설명한 서술 방식에도 결함이 있다고 밝힌다. 나는 이 책에서 하라리가 놓친 변수 하나가 ‘남성성(masculinity)’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전쟁 회고록 집필에 열중하는 낭만주의자 남성들의 모습은 군대 경험담을 ‘썰’로 푸는 한국 남성의 모습과 조금 비슷하다. ‘국가의 아들’이 된 한국 남성은 각종 군사 훈련을 받는 동안 간접적으로나마 전쟁 분위기를 느껴보고, 국가 수호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국방의 의무를 질 수 있는 건장한 남자’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들이다. 군대를 경험한 남성들은 자신들이 ‘국방의 의무’를 지켰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인식한다. 군대가 가지는 남성성의 강요 및 군대 자체가 만들어내는 남근주의적 인식이 ‘군대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 즉 군 미필 남성, 성 소수자 그리고 여성의 사회 참여를 배제한다. 군대를 경험한 남성이 군 가산점제 도입을 반대하는 여성을 비난하는 전략은 매번 한결같다. “여성은 군대 경험을 하지 않았으니, 군대 생활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군 가산점제 찬성하는 남성들의 주장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2]는 낭만주의자들의 금언과 일맥상통하다. 이 말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보편적 남성성’으로 남아 있다. 전쟁을 특별한 경험적 계시로 미화하는 시각이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게 하는 변수가 바로 군대와 남성성의 찰떡같은 조합이다. 따라서 나는 하라리의 공식에 '새로운 변수'를 추가해서 이렇게 바꾸고 싶다.
지식 = 경험 X 남성성
[1] 《극한의 경험》 391쪽
[2] 같은 책, 3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