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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 ㅣ 시공아트 10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 시공사 / 1999년 5월
평점 :
성을 통해 태어나고 성을 통해 자신을 복제해 가는 우리의 삶과 예술 곳곳에 성 의식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는 서구 미술가들이 섹슈얼리티의 주술을 피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 주술로부터 창작의 모티브를 챙겼음을 보여준다. 성과 에로티시즘이 미술작품에서 어떻게 표현됐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변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는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미술작품을 분석 · 설명하는 방식을 택한다. 첫 번째 방식은 시대적 상황 및 미적 신념 등이 반영된 역사적 방법이다. 두 번째 방식은 범주화 작업이다. 공통적인 속성을 중심으로 분류할 수 있는 범주를 만들어 서양미술과 섹슈얼리티의 밀접한 연관성에 주목한다. 저자는 ‘쾌락을 주는 성’, ‘신성화된 성’, ‘여성 · 동성애 · 거세에 대한 공포감’ 등으로 나눠 서양미술이 드러난 성을 해부하고 있다.
인간이 언제부터 몸을 예술로 재현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최초의 인간 조각상은 2만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다. 커다란 젖가슴과 부풀어 오른 배, 풍만하게 강조된 엉덩이와 허벅지 등 과장되게 표현된 이 조각상은 다산과 풍요에 대한 원시인들의 열망을 보여준다. 스미스는 ‘빌렌도르프의 미녀’를 루벤스와 앵그르의 그림에 등장하는 뚱뚱한 미녀의 선조라고 평가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성에 대해 매우 엄격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지만, 성을 금기시하거나 억압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신화에 나오는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제의(祭儀)를 통해 욕구를 분출하고, 관능적인 쾌락을 도기와 화폐 등으로 표현했다. 로마 제국 후기에 기독교가 다신교 신앙을 누르면서 성은 규제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성적 욕망을 원죄로 간주하고 섹스는 자녀 생산 수단으로만 인정했다. 중세의 미술가들은 ‘금욕’을 강조하기 위해 ‘성적 방종을 즐기는 바람에 지옥에서 벌을 받는 신체’를 묘사했다.
르네상스에 이르러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재발견하게 됨에 따라 쾌락을 즐기고자 하는 태도를 강조한 미술작품들이 등장한다.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됐고, 미술가들은 에로틱한 상상을 자아내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렇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남성들은 품위 있게 그려진 에로틱한 그림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남성 고객들을 위해 남성 미술가들은 ‘벌거벗은 여신’을 주제로 여성 누드를 그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책의 1부에 해당되며, 1부는 ‘섹슈얼리티의 관점으로 본 서양미술사’라고 보면 된다. 2부는 미술가들이 즐겨 그린 ‘상징’으로 압축한 섹슈얼리티를 소개한다. 미술가들은 관음자의 시선으로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여 묘사했고,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성적 행위를 그림으로 형상화하여 극대화된 섹슈얼리티를 강조했다. 2부의 내용은 여성에게 향한 차별과 편견을 드러낸 미술작품들과 미술가의 역할을 비판하는 데 적절한 근거가 된다.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미술사가 겸 시인이다. 원래는 자메이카에서 태어났으나 영국에 귀화했다. 그는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 문제의식을 느꼈고, 여성 미술가들의 성취를 재조명한 《여성과 미술》(주디 시카고 공저, 아트북스, 2006)을 펴내기도 했다.
그런데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가 ‘출판사’를 잘못 만났다. 책의 구성도 아쉽다. 2백 점이 넘는 도판 중에 원색 도판이 고작 29점에 불과하다. 전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면서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던 자의 아들이 만든 회사라서 그런가. 아니면, 부자가 숫자 29를 좋아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