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transient-guest님이 홈즈를 ‘사격의 달인’으로 소개한 글을 본 적이 있다고 말씀했다. transient-guest님은 글의 출전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transient-guest님의 추억(?)을 소환하고 싶어서 어제 밤중에 오래된 책들을 따로 보관한 방에 들어갔다.
[지능훈련 뤼뺑이냐 홈즈냐 (With 동서문화사)] (2017년 5월 1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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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고 싶은 책은 1984년에 나온 ‘동서문화사 홈즈 전집’이었다. 먼지를 이불 삼아 잠들고 있던 동서문화사 홈즈 전집을 지난 5월에 깨운 적이 있어서 책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빨강글자 수수께끼》. 이 책은 홈즈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진홍색 연구(A Study in Scarlet)’를 번역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왓슨은 홈즈의 능력을 쭉 나열한 목록을 직접 만들어 공개한다. 인용한 번역문은 문예춘추사(박상은 번역) 판본을 참고했다.
<셜록 홈즈의 지식 범위표>
1. 문학 지식 : 없음.
2. 철학 지식 : 없음.
3. 천문학 지식 : 없음.
4. 정치학 지식 : 약간 있음.
5. 식물학 지식 : 한쪽으로 치우쳐 있음. 벨라도나, 아편 등과 같은 독약은 잘 알지만 원예에는 무지함.
6. 지질학 지식 : 실용적인 지식은 있지만 한계가 있음. 여러 종류의 토양이 가진 차이점을 한눈에 알아봄. 산책에서 돌아온 그가 바지에 묻은 진흙을 보이면서, 색과 점성 등으로 미루어 보아 런던의 어느 지구에서 묻은 것이라고 일러 준 적 있음.
7. 화학 지식 : 해박함.
8. 해부학 지식 : 정확하지만 체계적이지는 못함.
9. 범죄 사건에 관한 지식 : 매우 자세하게 알고 있음. 금세기에 벌어진 중범죄에 대해서는 혀를 내두를 정도.
10. 바이올린 연구 실력 : 수준급.
11. 운동 실력 : 봉술, 권투, 검술이 뛰어남.
12. 영국 법률 지식 : 꽤 실용적으로 알고 있음.
이 내용만 가지고 홈즈의 능력을 단정하긴 이르다. 코난 도일이 홈즈 시리즈를 집필하면서 ‘설정 구멍’을 여러 군데 남긴 바람에 이 목록 내용이 무용하게 되었다. 《진홍색 연구》 편에서 홈즈는 태양계의 구조와 지동설이 뭔지 모르는 사람으로 나온다. 왓슨은 홈즈의 무식함에 깜짝 놀란다.
홈즈의 지식이 놀라울 만큼 무지도 놀라웠다. 현대 문학이나 철학, 정치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사상가인 토머스 칼라일의 말을 인용하자 홈즈는 칼라일이 누구며 무슨 일을 한 사람인지 진지하게 물었다. 우연히 홈즈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태양계의 구성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의 놀라움은 정점을 찍었다. 19세기를 사는 문명인이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다니! 너무나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진홍색 연구》 중에서, 박상은 역)
홈즈는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아니면 잊어버리는 특이한 사고 습관이 있다. 그는 천문학이 자신이 먹고 사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홍색 연구》 이후 시간이 흐른 뒤에 홈즈는 천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태도를 보인다. 《셜록 홈즈의 회상》에 수록된 『그리스어 통역관(The Greek Interpreter)』 편에 보면 홈즈는 황도(黃道, 천구에서 태양이 지나는 경로) 경사도가 달리지는 원인을 주제로 왓슨과 대화를 나눈다.
어느 여름날 저녁, 차를 마신 후였다. 두서없이 산만하게 흘러가던 대화는, 골프채 얘기에서 황도의 기울기가 변하는 이유로 넘어갔다가, 이윽고 격세유전과 재능의 유전 문제에 이르렀다. 개인의 독특한 재능은 순전히 조상 덕인가, 아니면 초기 학습에 좌우되는가, 이것이 논의의 핵심이었다. (현대문학 주석판, 309~310쪽)
홈즈가 칼라일을 모른다고 해서 문학 지식이 부족하다고 볼 수 없다. 가끔 홈즈는 대화 도중에 호라티우스, 하피즈(14세기 이란에 활동한 신비주의 시인), 셰익스피어의 대사 등을 인용했으며 사건 현장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을 때 페트라르카 시집을 읽었다.
《빨강글자 수수께끼》의 번역을 맡았고, 해설을 쓴 조용만 씨는 홈즈를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인간’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원작에 있어야 할 왓슨의 목록을 ‘작품 해설’로 옮겼는데, 조용만 씨 자신이 홈즈를 평가하는 식으로 썼다. 게다가 원작에 없는 내용까지 첨가했다. 이러한 편집 방식은 원작을 무시하고, 독자를 속이는 일이다.
자, 이제 조 씨와 출판사가 각색한 ‘홈즈의 지식 범위표’를 이 자리에 공개한다. 내가 앞서 소개했던 (원전에 충실한) ‘홈즈의 지식 범위표’와 비교하면서 동서문화사의 ‘창조 번역’을 본다면 웃음이 터질 것이다.
1. 문학 지식 : 없다.
2. 철학 지식 : 없다.
3. 천문학 지식 : 없다.
4. 정치학 지식 : 조금 있다.
5. 식물학 지식 : 어느 종류에 대해선 자세하나 어느 종류에 대해선 전혀 없다. 아편 따위 독극물은 잘 알지만, 원예는 전혀 모른다.
6. 지질학 지식 : 실제적인 지식은 있지만 한정되어 있다. 한눈에 여러 종류의 흙을 가려 낼 수는 있다.
7. 화학 지식 : 아주 깊다.
8. 해부학 지식 : 아주 깊다.
9. 음악 : 바이올린을 아주 잘 켠다.
10. 운동 : 권투, 봉술, 검술, 유도를 잘한다.
11. 법률 : 영국 법률을 아주 잘 알며, 영국에서 일어난 큰 범죄는 거의 다 알고 있다.
12. 그 밖의 재능 :
① 피스톨 : 5미터 앞에 있는 트럼프의 하트를 맞출 수 있다.
② 자전거 : 1시간에 50km, 2시간에 90km를 달릴 수 있다.
③ 연기 : 죽어가는 환자, 욕심쟁이 연기를 특히 잘 한다.
④ 변장 : 어떤 나라, 어떤 직업의 사람으로도 변장할 수 있다.
⑤ 최면술 : ‘안심하십시오’, 이 한 마디면 상대방을 푹 잠들게 할 수 있다.
⑥ 재주 : 땅 위 20m의 높이의 지붕 위에서도 태연히 걸어 다닐 수 있다.
⑦ 암호 해독 : 어떤 암호든 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똑같은 방식으로 암호를 만들 수도 있다.
⑧ 미행 : 달리는 마차에 올라타 함께 가기도 한다.
13. 홈즈의 초능력 :
① 시력 : 2.0, 밤에도 부엉이처럼 멀리까지 본다.
② 청력 : 소리를 가려듣는 능력이 뛰어나다. 한 번 들은 발자국 소리는 절대 잊지 않는다.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성별, 나이, 지위 등을 알아맞힌다.
③ 후각 : 마치 개처럼 예민하다. 약품이나 사람 냄새를 특히 잘 맡는다.
④ 완력 : 세 사람 만큼의 힘을 지녔다. 굵은 쇠막대기를 구부리기도 하고 펴기도 한다.
⑤ 주력 : 100미터를 11초에 띈다. 마라톤도 문제없다.
⑥ 체력 : 사흘 동안 밤낮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추리할 수 있다. 독한 담배를 계속 10개비나 태워도 거뜬하다.
⑦ 기억력 : 10여 년 전 신문의 작은 기사까지도 외고 있다.
⑧ 관찰력 : 현장을 흘끗 보기만 하고서도 전체의 모습을 자질구레한 점까지 머릿속에 그린다.
⑨ 방향 감각 : 눈을 가리고 런던 시내를 달려도 그곳의 이름을 맞출 수 있다.
동서문화사의 ‘홈즈의 지식 범위표’ 12번, 13번 항목은 원작에 없는 내용이다. 잘 보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능력이 있고, 원작으로 확인 불가능한 능력도 있다.
확실히 홈즈는 연기와 변장의 달인이다. 『보헤미아 스캔들』(A Scandal in Bohemia, 《셜록 홈즈의 모험》 수록) 편, 『빈사의 탐정』(Dying Detective, 《셜록 홈즈의 마지막 인사》 수록) 편은 홈즈가 연기 · 변장 실력을 유감없이 펼치는 작품이다. 홈즈의 암호 해독 실력은 『글로리아 스콧 호』(Gloria Scott, 《셜록 홈즈의 회상》 수록) 편, 『춤추는 사람』(Dancing Men, 《셜록 홈즈의 귀환》 수록)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스톨 사격 능력, 최면술은 원작과 현실을 초월한 과장된 내용이다. 어렸을 땐 홈즈가 정말 굉장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그저 웃음만 나온다. 가끔은 이런 ‘창작 번역’이 독자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줄 때가 있다. 허울뿐인 구호로 그친 ‘창조 경제’보다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