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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그때 그 시절’은 단 한 번뿐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이 역행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스티븐 호킹 경은 그건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처럼 바꿀 수 없는 시간은 회상과 상상을 통해 재생되고 변형된다. 시간을 복원하는 문학적인 시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김애란 작가는 무심코 지나쳐버린 범속한 일상의 시간으로부터 누구나 쉽사리 포착할 수 없는 그 이면의 진실들을 건져 올린다. 그 문학적인 시도의 결과물이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2017)이다.
김애란이 2000년대 젊은 소설의 대표 명사로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평론가 유종호는 “김애란 소설의 특징은 개그적 재능이다. 개그처럼 즉흥과 되풀이가 많다”고 했다. 故 이청준 선생은 김애란의 첫 번째 창작집 《달려라, 아비》(창비, 2005)를 “장면만 제시하고 지나가는 TV 드라마와 같은 소설”이라고 평가했다.[주1]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에 그녀를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넘겨짚은 분들이 있었다면 이번에 출간된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 《바깥은 여름》을 꼭 읽어 보길 바란다. 유종호 평론가와 이청준 선생은 그 당시 ‘국내 문단의 샛별’이나 다름없던 김애란의 포텐(poten, 잠재력)이 얼마만큼 터질지 몰라서 성급한 평가를 했다. 나는 김애란에 대한 두 분의 표현이 지금으로선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애란 소설의 본령은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명민한 시선과 탁월한 조망에 있기 때문이다. 김애란은 죽음과 상실의 고통을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파고든다. 그녀의 소설에 우리가 살면서 느끼게 되는 시간의 모순과 같은 묵직한 소재도 녹아 있다.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몇 살일까.”,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어디 살까.”,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어찌될까.”[주2] 『침묵의 미래』의 ‘나’는 자기 자신을 향해 끈질기게 묻는 걸까. 『침묵의 미래』에서 작가는 독자들에게도 많은 질문을 던진다. 독자들은 이야기 중간중간마다 나오는 질문 공세로부터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독자는 끝도 없이 대답을 준비하거나, 혹은 혼잣말로 그때그때 질문들에 응수하면서 『침묵의 미래』와 대면한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지금’ 사는 사람들에게 언어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뭇 진지하게 묻고 있다.
직선적인 시간은 그저 미래를 향하여 순차적으로 흐르다가 어느 순간 멈춘다. 우리는 그 시간의 소유자를 ‘나’라고 부르게 된다. 그 시간의 소유자가 세상에 종언을 고하는 순간, ‘말’로는 독해할 수 없는 치명적인 고독에 갇혀 버린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들은 모두 이 세계에 단 하나뿐인 언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화자’들이다. 그리고 대부분 혼자 산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이 쩌렁쩌렁한 모어(母語) 한복판에, 우주 한가운데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끌벅적한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뒤늦게 울어 봐야 소용없었다. 다 죽고 살아남은 건 오직 자기 자신과 엄청나게 아름답고 어마어마하게 정교해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그 ‘말’뿐이라는 걸…‥ 결국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이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침묵 속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 애썼다. (127~128쪽)
‘마지막 화자’는 소수언어를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을 의미하지만, 나는 이 대상을 좀 더 포괄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마지막 화자’는 ‘죽음 앞에 한발 짝 다가선 인간’이다. 인간이 사라지면서 남게 된 언어는 사어(死語), 즉 생명력이 없는 무의미한 기호일 뿐이다.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고독 앞에 선 인간은 대화가 단절된 외로운 고아와 같다. 죽은 인간은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시게 되고, 살아생전 입안에 맴돈 언어가 씻겨 내려간다. 그렇게 강물에 떠내려간 언어는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고, 새롭게 태어난 시간의 소유자가 잊힐 뻔한 언어를 건져낸다. 하지만 소수언어박물관의 전시장에 갇힌 언어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작가는 시간의 모순을 정면으로 포착한다. 과연 기억하기 위해서 ‘보존’이라는 목적으로 전시장에 갇힌 언어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죽어서 박제가 된 언어들이 레테의 강물에 떠내려가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기억해야 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기억의 보존성을 비판한다.
죽음과 상실의 경험. 오늘을 살아가는 그것과 같은 불안함과 공포를 느껴 본 것이 언제였을까. 우리는 충격적인 공포 경험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 있다. 살면서 겪을 일이 많지 않다. 우리는 대개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애란은 잊을 만하면 이 어려운 질문을 독자에게 재차 묻는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남편을 잃은 명지가 스마트폰 인식음성 프로그램 시리(Siri)에게 던지는 질문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즉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화두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259쪽)
사실 이 질문은 익숙하다. 일상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본질적인 낯익은 질문, 그러나 이 문제는 늘 죽음에 대한 불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풍경의 쓸모』 시작 부분에서 나오는 사진기의 플래시 불빛은 평온한 일상에 묻힌 죽음에 대한 불안을 살짝 비춘다.
햇빛이 충분치 않은 공간에서 이따금 플래시가 터졌다. 사진기는 펑! 펑! 시간에 초크질을 하며 현재를 오려갔다. 플래시 소리는 낙하산 퍼지는 기척과 비슷해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살았다는 안도를 줬다. 운전자를 덮치는 에어백마냥 푹신한 충격을 줬다. (150쪽)
죽음의 실재를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에 의한 상실은 마음 어딘가에 꼭꼭 숨겨진 불안과 공포의 근원으로 자리한다. 인간은 누구나 늙을 수밖에 없고 결국 죽음을 맞게 마련이지만 누구도 이 같은 사실을 선선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가리는 손』의 ‘나’는 자신이 일하는 곳인 요양병원에서 자신이 늙은 모습을 생각하게 되고, 늙은 엄마의 모습을 회상한다. 보통 늙는 것이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서 그러한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은 아니다. 늙어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신체 증상을 직접 겪거나 눈으로 보게 되면 노화를 두려워한다.
죽을 때까지 우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하고, 마시고, 먹고, 느낀다. ‘인생’이라는 이 소중한 시간이 그러한 행위의 끝없는 반복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사람의 기분에 따라 어떨 때는 짧게, 어떨 때는 길게 느껴지게 한다. 기분이 나쁘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란다. 반대로 기분이 고조돼 있을 때는 주변의 일에 집중하는 탓에 시간의 신호에 신경 쓰지 않는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지나가고 불편한 시간은 한없이 길게 늘어지는 이유다. 『입동』에서의 ‘시간’은 존재하는 것들을 모조리 집어 삼키는 거대한 소용돌이다. 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부는 삶에 대한 의욕마저 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흘러 보낸다. 부부의 시간은 ‘빨기 감기’한 필름처럼 확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나날을 보내려 애썼다.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말대로라면 ‘다 엉망이 되버린’ 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 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20~21쪽)
상실감에 빠진 사람은 허무 의식을 드러낸다. 매일 자연스럽게 행하던 일들이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억지로 해야 하는 짐처럼 느껴진다. 깊은 슬픔은 일상생활을 뒤죽박죽 엉망으로 만든다. 소중한 존재를 잃을 때 오는 상실감이 특히 혼자 극복하기 힘들다. 『노찬성과 에반』 의 노찬성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반려견 에반의 죽음을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다. 상실감에 빠질 땐 ‘죄책감’이란 감정도 끊임없이 괴롭힌다. 마음이 여린 에반은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생각 혹은 살아있을 때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낸 자의 고통과 슬픔이 강할수록 세상과의 단절을 부를 위험이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 부부의 시간, 그리고 에반과의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찬성의 모습이 독자의 명치 끄트머리를 아프게 찔러온다.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어느 정도로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명지와 『가리는 손』의 ‘나’를 닮았을 것이다. 김애란 소설을 읽으면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타자의 진실, 나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현실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출구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작은 희망의 빛 한 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못 찾은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내게는 《바깥은 여름》의 다소 아쉬운 측면이기도 하다. 만일 작가가 이런 작은 선물이라도 독자들에게 허여하지 않았다면, 나는 매우 서운했을 것이다. 《바깥은 여름》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얽매이고, ‘죽음’에 묶여 버린 인간의 내면 심리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삶과 죽음’을 깊이 사유하도록 한다. 어쩌면 김애란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틀에 박힌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김애란이 그려내는 일상 풍경의 기저에 잠재적 불안의 근원이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보자면 당연해 보인다. 우리가 체감하는 삶과 죽음의 간격은 그다지 크지 않다.
※ [주1] 「커버스토리-‘달려라 아비’의 김애란」 (주간경향, 2007년 6월 7일)
※ [주2] 『침묵의 미래』 123쪽, 125쪽, 1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