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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황홀한 블랙 - 세속과 신성의 두 얼굴, 검은색에 대하여
존 하비 지음, 윤영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白鷺)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세울세라.
청강에 좋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포은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이 시조는 옛 선비들의 정결한 마음을 알 수 있다. 선비가 명리를 다투는 곳에 들어가면 깨끗한 깃털을 더럽히고 선비의 이름을 다치게 된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까마귀는 시커멓다. 속도 겉도 검은 까마귀는 부정적 이미지를 벗기 어려웠다. 지금의 까마귀는 그다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옛날에는 상당히 신비한 새로 인식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까마귀는 예언의 능력을 갖춘 예언의 신 아폴론(Apollon)의 성조였다. 아폴론의 까마귀는 원래 검지 않았다. 그런데 까마귀의 거짓말이 아폴론에게 발각되었고, 분노한 아폴론은 까마귀의 깃털을 새까맣게 만들었다.
우리는 색과 더불어 산다. 아니, 색에 꼭 붙어산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지 싶다. 어디를 봐도 색이 아닌 건 없다. 색으로 건물을 평가하고 옷을 평가하고 사람을 평가한다. 각기 다른 색에는 특유의 감정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토록 황홀한 블랙》(위즈덤하우스, 2017)은 색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주관적이고 문화적인 산물인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검은색이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 될 때까지 서구사회에서 얼마나 천대받는 색이었던가를 추적했다. 검은색의 역사가 이리 방대했던가. 시대와 분야를 넘나드는 서술 방식을 소화하기 힘들긴 하지만, 검은색의 억울한 사연(?)을 알기 위해선 천천히 읽어야 한다.
아직 ‘색이냐 아니냐?’로 논쟁을 벌이는 것이 검은색이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색,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색. 검은색의 정체는 모호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검은색은 색이 아니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검은색을 아무것도 없는 공간 상태, ‘무(無)’의 실체를 나타내는 색이라고 생각했다. 검은색은 어둠의 색깔이다. 검은색은 죄의식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에는 속죄로 말끔히 제거할 수 있는 ‘죄의 얼룩’으로 비유했다.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부상하면서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이원론적 교리가 정립되면서 검은색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기독교가 설정한 악마는 보통 검은색이다. 피부가 검거나 검은 옷을 입고 있다.
검은 피부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기독교의 선악 이분법을 제멋대로 버무려서 만들어진 위험한 도그마(dogma)다. 기독교는 인간의 원초적 죄의식을 부각해 왔다. 그래서 기독교 설교자들은 아프리카인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그들을 ‘죄악의 살아 있는 증거’로 봤다. 검은색의 부정성이 강조될수록 아프리카인에 대한 경멸적인 시각이 형성되었다. 미국의 흑인은 건국 초기 ‘아프리칸(African)’이라고 불렸다. 노예제도가 심화하면서 ‘니그로(negro, 깜둥이)’라는 경멸적 단어가 보편화했다.
권력과 지위를 가진 남성들이 검은색 옷을 시작했다. 검은색 옷은 정치적 권력의 상징이 됐다. 무솔리니(Mussolini)와 그의 친위부대원들이 검은색 유니폼을 입기 시작하면서부터 검은색은 이탈리아 파시스트를 상징하는 색깔이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여자 옷에서 검은색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둡고 무거운 기운에 가려져 있던 검은색을 클래식 패션코드로 끌어올린 디자이너가 바로 코코 샤넬(Coco Chanel)이다. 1926년 샤넬은 지나친 장식을 덜어낸 과감하고 단순한 디자인으로 ‘리틀 블랙 드레스’를 선보였다. 그녀는 옷을 입은 여성이 주인공이 되도록 했고, 오히려 여성의 우아한 매력을 더욱 돋보이도록 만들었다. 세련된 옷을 원하던 여성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미국판 <보그>는 리틀 블랙 드레스를 “세상 사람 누구나 입게 될 옷‘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인간은 시각을 통해 전달된 정보를 가장 신뢰하지만, 인간의 시각적 능력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단순한 색깔이라도 ‘보이는 것’에 대한 반응은 저마다 다르다. 반응이 다른 이유는 색깔에 대한 저변의 지식이나 경험의 차이일 수 있으며 색깔에 대한 감정의 기복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그래서 검은색은 억울하다. 어둡다는 이유로 색깔로 인정받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다른 색깔들보다 더 천대받고 공격당했으니까. 검은색은 죄가 없다. 문화적 의미와 편견으로 덧칠해온 우리가 잘못했다. 못난 인간의 곁에 있어준 검은색에게 정말 미안하드아아악!
※ Triv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