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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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 번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 누구도 이 말을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당연한 섭리로써 인간의 삶은 영구 장천 계속되지 않는다. 다 알면서도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죽음을 사유하는 예술가는 죽음을 낯선 것이 아닌 고유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죽음을 통해 삶을 사는 자로서의 질적 전환을 시도한다.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시라는 형식을 통해 중화된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시집이다. 죽음에 대한 허수경 시인의 태도는 적극적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공포를 견디는 동시에 즐기는 독특한 방식 속에 ‘죽음’이 중화되는 공간으로서의 시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공중에서는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

라일락, 웃다가 지네

나의 라일락

 

(『라일락』 52쪽)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라일락』에서 가장 빛나는 구절이다. 라일락은 죽음의 이미지를 거느리고 있다. 어딘가 모르게 슬픔을 품고 있는 꽃 같은 느낌이 든다. 꽃이 시들기 전에 바람에 의해 꽃잎이 후드득 땅바닥으로 체념하듯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웃다가 지는’ 꽃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젊음만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문화에서 죽음만큼이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나이 듦’이다. 시인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했다. 그녀는 꽃이 피고 지는 현상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쉬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 중요한 것이 바로 ‘늙어가는 과정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마음가짐’이다.

 

사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죽음만큼 두려운 일이 되어가는 것은, 늙음을 ‘아름다움에 대한 모욕’이라 여기는 사회 문화적인 환경과 우리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온다. 결국, 모든 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미래에 다가올 죽음을 깨닫는 것이 현재의 삶을 즐겁게 사는 데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매우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이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물건과 비슷하겠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에서 그대들은 나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않을 것이며

섬에서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속에는 눈물이 없다

다만 짤막한 안부 인사만, 이렇게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106~107쪽)

 

 

비정한 세상에 대한 어떤 미련도 없이 세상을 등져버리고 싶을 때 선택하는 수단이 ‘고독’이다. 이보다 가장 극단적이고도 불행한 방법은 소중한 자아를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자살’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독도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라고 말한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는 인간에게 있어 고독이 과연 무엇인지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한다. 철저한 단절 속에 갇힌 고독은 어두컴컴한 죽음을 떠올린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시인의 고독은 공포와 평안을 잘 분배한 것이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의 화자는 자신만의 섬에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혼자 했다. 그리고 같은 처지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편지로 고백한다. 이 시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꼭 고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꼭 떠나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여기서 보여주는 ‘짤막한 안부 인사’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사람의 심정을 대변하는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즉 욕구와 욕망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떠나보낼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무한하지만 끝이 있는 고독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찾아오는 평온함.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삶과 죽음이라는 두 글자는 상반된 단어이기는 하지만 두 글자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삶의 끝은 곧 죽음이요 산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시인의 씁쓸한 고백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삶과 죽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을 차분하게 비춰주는 시인의 언어는 성찰을 거듭하게 한다. 독자는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행복의 중심점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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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물고기 2017-03-15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혼자 가는 먼 집]을 곱씹어가며 읽었는데 이 것도 구매해야겠어요

cyrus 2017-03-15 16:39   좋아요 1 | URL
《혼자 가는 먼 집》은 안 읽어봤습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제가 처음으로 읽은 허수경 시인의 시집입니다. 구름물고기가 언급하신 시집도 읽어보고 싶군요. ^^

2017-03-15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15 20:41   좋아요 1 | URL
시집 리뷰를 어떻게 하면 잘 써야할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그냥 느끼는대로, 생각나는대로 정리해서 쓸려고요. 이 시집, 작년에 읽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Agalma님의 리뷰를 보고, 저도 써봤습니다. ^^

[그장소] 2017-03-15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까지 ㅡ 우오~ 넘 맛나게 즐기고 갑니다!^^

cyrus 2017-03-15 20:43   좋아요 1 | URL
제가 고른 시들이 전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라서 진지하게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장소] 2017-03-15 23:33   좋아요 1 | URL
제가 생각은 단순한데 시는 이런 시가 좋더라고요 . 가볍게 쓰는 시가 쉬운 시는 절대 아니지만 ... 덕분에 잘 읽었어요 . 아.. 들었어요! 시는 듣는 보는 그런 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