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민수 《프로레슬링 : 흥행과 명승부의 역사》 (살림, 2005년)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문예출판사, 2002년)
프로레슬링을 좋아한 지 십여 년이나 지났다. 중학생 때 친구의 권유로 케이블 채널에 중계한 WWE 경기를 보면서 레슬링에 ‘입덕’하기 시작했다. WWE 관련 소식을 전하는 국내 프로레슬링 전문 매체가 여러 개 있는데, 하루를 거르지 않고 꼭 챙겨본다. 관심 있는 레슬링 선수들이 무슨 경기를 했는지 확인하고, 경기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시청한다.
각설하고, 지난주 네이버 메인에 잠시나마 오른 레슬링 관련 뉴스 하나를 소개해본다. 뉴스의 주인공은 멕시코에서 레슬러로 활동 중인 미국 출신의 샘 폴린스키(Sam Polinsky)다. 나는 인디 단체 레슬링도 좋아하는 레슬링 덕후 수준이 아니라서 처음에 이 선수가 누군지 몰랐다. 샘 폴린스키는 본명이고, 링네임(ring name)은 샘 아도니스(Sam Adonis)다.

이 선수가 화제가 된 이유는 링에 입장하면서 상당히 ‘위험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샘은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이 있는 성조기를 들고 오면서 관중이 보는 앞에서 ‘트럼프 지지자’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샘은 미국인이고, 멕시코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경기를 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과 트럼프의 국경장벽 공약 때문에 멕시코와 미국 간의 사이가 비틀어지는 중이다. 샘이 트럼프를 찬양할 때 멕시코 관중들은 온갖 야유와 욕설을 퍼붓는다. 이곳에서 샘은 멕시코 관중들이 싫어하는 ‘악당’ 같은 존재다. 그를 혼내주기 위해 멕시코 레슬러가 등장하고, 관중들의 열화 같은 응원에 힘입은 멕시코 레슬러는 미국인 악당을 무찌른다.
레슬링 경기를 안 보는 사람들도 다 안다는 명언이 있다. ‘레슬링은 쇼(show)다!’ 이 말 한마디로 WWE를 포함한 모든 전 세계 프로레슬링은 순수 스포츠 종목이 아닌 ‘가짜’라고 믿는 사람이 생겼다. 레슬링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어느 선수가 이기는지 다 정해져 있으며 심지어 선수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 또한 정교하게 짜인 각본의 일부이다. 그러나 선수들이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링 위에 구르고, 뛰고, 땀 흘리는 과정들은 ‘100% 가짜’가 아니다. 선수들이 링 위에 움직이는 모든 동작은 피나는 훈련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한 경기 다 뛰고 나온 선수들은 온몸에 몰려오는 통증에 시달린다.
레슬링 선수들이 관중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면 ‘기믹(gimmick)’을 갖춰야 한다. 기믹이란 선수가 연기하는 캐릭터이다. 쉽게 말해서 드라마의 배역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기믹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관중들에게 환호받는 선역 기믹, 반대로 반칙을 일삼으며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악역 기믹이다. 샘 폴린스키는 악역 기믹 선수이다. 그가 트럼프를 찬양하고, 미국을 싫어하는 멕시코 관중들을 비난하는 행동은 실제 본 모습이 아니다. 그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 뿐이다. 악역을 맡은 선수들은 심하면 입에 담지 못할 욕설까지 듣지만, 관중들의 관심을 얻은 것에 만족한다. 악역인데도 관중들의 반응이 썰렁하거나 반대로 환호를 보내면 그 선수의 기믹은 실패한 것이다.
여전히 ‘레슬링은 쇼’라고 믿는 일부 사람들은 각본대로 진행되는 레슬링을 무슨 재미로 보냐고 핀잔준다. 당연히 그들이 기믹에 맞게 연기하고, 링 위에 뛰는 모습 하나하나가 재미있어서 보는 거다. 레슬링 경기를 시청하는 것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닮았다. 드라마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 악인이 착한 주인공을 괴롭히면 분노를 드러내고, 반대로 악인이 궁지에 몰리는 ‘사이다 전개’를 보면서 통쾌감을 느낀다. 드라마 줄거리 전개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시청자의 감정 상태를 ‘카타르시스(Katharsis)’를 느낀다고 말한다. 카타르시스, 즉 배설은 쾌락을 가져다주며 눈물도 그중 하나라고 정의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시학》에서 비극은 관객들로 하여금 숭고한 인물이 불행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눈물이라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정서의 순화작용을 일으키게 한다고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억눌려 있지만, 인간의 감정을 비극의 힘을 빌려 자연스레 분출하도록 함으로써 사회적인 윤리를 유지해 나가는 하나의 방편으로 비극을 생각했다. 오늘날의 영화나 드라마는 비극의 역할을 대신 해주고 있다. 드라마에 볼 법한 요소가 들어간 프로레슬링도 마찬가지다. 미국 최대 레슬링 단체인 WWE의 약자가 ‘World Wrestling Entertainment’이다. WWE는 프로레슬링에 ‘오락’을 부여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독특한 개성의 선수들이 링 위에 등장했다. 레슬링 관중들은 그 선수들을 응원하거나 야유를 보내면서 가슴 속에 쌓인 응어리를 한 번에 푼다.

WWE에서 악당으로 인정받는 선수들 대부분은 관중이 싫어할 만한 언행을 하며 자기중심적인 성격이다. 예를 들면 ‘밀리언 달러맨(The Million Dollar Man)’으로 잘 알려진 테드 디바이시(Ted DiBiase)는 ‘재수 없는 갑부’ 기믹으로 80년대 최고의 악역 선수로 자리 잡았다.

WWE는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애국심’도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한다. 걸프 전쟁이 한창이던 90년대 초에 서전 슬로터(Sgt. Slaughter)는 미국을 배신하고 이라크 편에 선 반미주의자로 등장하여 ‘무적 선역’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헐크 호건(Hulk Hogan)과 메인이벤트 경기를 가졌다. 두 선수들은 8, 90년대에 활동한 최고의 악역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선역 선수를 만날 때면 무기력하게 패배당했다. 이 장면에서 관중들에게 주는 카타르시스는 배가 된다. 특정 선수 간의 대립을 통해 최후의 승자가 가려지는 이야기 전개는 매번 똑같아 보이지만, 결국 그런 과정이 관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WWE 프로레슬링이 인기를 얻는다.
카타르시스가 느끼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카타르시스를 억지로 만드는 것은 이야기 몰입을 방해하는 독이 된다. 갈수록 답답한 전개로 이어지는 ‘고구마 드라마’처럼 요즘 WWE를 보면 관중들이 공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수 간의 대립이 ‘고구마’ 전개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실 ‘선역’과 ‘악역’이 명확히 구분되어 양 선수가 갈등을 빚는 설정은 식상하다. 오죽하면 관중들은 선역 선수에게도 심한 야유를 보낸다. 월드 챔피언을 지낸 존 시나(John Cena)와 로만 레인즈(Roman Reigns)는 WWE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인데도 관중들의 야유와 욕설이 많이 나온다. 이 상황은 마치 답답한 행보를 펼치는 드라마 속 선역 주인공을 싫어하는 시청자들의 반응(MBC 주말 드라마 ‘내 딸, 금사월’)과 동일한 맥락이다. 분노를 표출하여 정서를 순화시키는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모든 사람에게 전부 적용되는 건 아니다. 카타르시스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려면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덧붙인 이야기를 만들지 말고, 그 이야기를 보게 될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