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해적판 서적을 찍어낼 수 있었던 시절에는 종종 ‘유명 외국 작품의 후속작’으로 둔갑한 책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책은 원서명이 나와 있지 않다. 남이 쓴 글을 유명 작가가 쓴 것처럼 소개한다. 여기에 얼추 원작의 느낌이 나도록 그럴싸한 제목을 붙여놓는다. 출판사의 쌈마이한 수법들을 알아차리지 못해 책을 사놓고 후회하는 경우가 있다. 나 또한 그렇다.
《O 이야기》는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과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에로티시즘 소설이다. 1954년 《O 이야기》가 세상에 첫선을 보였을 때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성애 묘사가 문제가 되어 찬사와 비난의 평을 동시에 받았다. 이 엄청난 반응을 예상했는지 작가는 폴린 레아주(Pauline Réage)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펴냈고,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겼다. 《O 이야기》가 발표된 지 40년이 지나서야 작가의 정체가 공개됐다. 《O 이야기》의 작가는 얀 데클로즈(Anne Desclos)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젊은 시절, 프랑스 문단을 주름잡은 장 폴랑(Jean Paulhan)의 비서로 일했다. 장 폴랑과 얀 데클로즈의 나이 차는 30살. 게다가 장 폴랑은 예순이 넘은 유부남이었다. 장 폴랑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은밀한 연인 사이로 지냈고, 이 비밀의 관계를 소재로 한 작품이 바로 《O 이야기》다. 얀 데클로즈가 《O 이야기》를 집필하게 된 계기가 재미있다. 장 폴랑이 ‘여성은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처럼 절대로 야한 소설을 쓸 수 없다’고 말하자, 그걸 들은 얀 데클로즈는 자신감 넘치는 남성 지식인에 도전하기 위해 ‘야한 소설’을 썼다. 결국은 장 폴랑의 말이 틀렸다. 《O 이야기》는 사드의 에로티시즘을 뛰어넘은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1967년에 《O 이야기》의 후속작 ‘Retour à Roissy(루아시의 귀환)’이 나왔다. 이 소설 역시 ‘폴린 레아주’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O 이야기》가 2012년에 정식 계약 완역본으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90년대에 해적판이 떠돌았다. 온라인 헌책방 웹사이트에 ‘O의 이야기’라고 검색하면, 비싼 가격의 해적판 몇 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나온 《O 이야기》가 1975년에 홍익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다. 판매가는 3만 원이다. 그밖에 1989년 만남 출판사, 1990년 타임기획 출판사, 1995년 서원출판사에서 《O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펴냈는데, 정식 계약 절차를 밟지 않은 해적판으로 추정된다. 1975년에 제작된 폴린 레아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성인영화가 국내에 알려지게 되면서 해적판이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The Story Of O>는 <엠마뉴엘>, <차타레 부인의 사랑>을 만든 쥐스트 자캥(Just Jaeckin) 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가 국내에 처음 개봉됐을 때 제목이 ‘르네의 사생활’로 변경되었다.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서 ‘《O 이야기》의 후속작’도 나왔다. 제목이 《르네의 연인》이다. 이 책의 역자는 90년대에 다작 번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정성호 씨다. 책 제목과 표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당히 쌈마이한 느낌이다. 사실 책 뒤표지에는 전라 여인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다. 이 책의 앞날개에 적힌 소개 내용을 보면 《르네의 연인》이 ‘《O 이야기》의 후속작’이라고 되어 있다. 원서 제목은 ‘Rene's club'이다. 책의 뒷날개에는 작가 약력이 적혀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말로 이 책이 ‘《O 이야기》의 후속작’처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르네의 연인》은 ‘《O 이야기》의 후속작’이 아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Retour à Roissy’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다.
《르네의 연인》의 주요 등장인물이 제임스 펨브로크와 로쟌느다. 전작 《O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소설에 ‘펨브로크(Pembroke)’라는 인물의 이름이 나온 걸로 봐서는 《르네의 연인》 줄거리는 1984년에 개봉된 에릭 로챠트(Eric Rochat)의 영화 <The Story Of O : Chapter 2>일 가능성이 있다. 이 영화는 쥐스트 자캥이 만든 영화의 후속편이다. 물론, 이 영화도 레아주의 소설을 기본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원작에서 독립된 영화 줄거리는 에릭 로챠트와 제프리 오 켈리(Jeffrey O’Kelly)가 썼다. 참고로, 이 영화의 음악 담당은 그 유명한 한스 짐머(Hans Zimmer)가 맡았다.
‘죠리 로레이’라는 작가가 쓴 《르네의 연인》 3, 4권도 있다. 물론, 이 책들도 역시 《르네의 연인》을 펴낸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다. 당연히 레아주의 소설과 관련성이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르네의 연인》은 1994년에 나온 단권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해에 두 권으로 분권 되어 나왔다. 그다음에 죠리 로레이의 《르네의 연인》 3, 4권이 출간되었다. 성인소설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르네의 연인》 전 4권을 헌책방에서 구해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O 이야기》의 후속작’이라는 문구에 속아 비싼 돈을 내면서 책을 사지 않기를 권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나라에 아직 정식으로 발행된 ‘《O 이야기》의 후속작’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