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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고도 유쾌한 시간의 철학 -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것, 우리가 시간으로 하는 일
뤼디거 자프란스키 지음, 김희상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러시아의 곤충학자 알렉산드르 류비셰프는 50여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시간 통계 노트를 작성했다. 그는 시간의 속성과 존재감을 정확히 인식했고, 자기에게 주어진 1분 1초까지도 지배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류비셰프는 철저한 시간 관리와 왕성한 지적 호기심으로 총 70권의 학술 총서와 단행본 100권 분량에 달하는 연구 논문을 남겼다. 류비셰프에게 시간은 곧 삶이다. 시간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버는 것임을, 부족한 시간은 없다는 것을 류비셰프에게서 배우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시간 관리’는 영원한 숙제다. 시간은 화살처럼 휙 지나간다. 하지만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이 화살처럼 빨리 지나간다는 말은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 주관적인 표현이다.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기로 유명한 칸트는 시간을 “시간은 모든 경험의 주관적 형식”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에게 시간은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동등하게 흐르는 것이며 이를 시계로 확인할 수 있다. 삶의 효율성을 높이려고 만들어진 시계가 때론 주어진 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는 강박을 불러일으키는 감옥이 된다.
시간은 불가역적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며 시간에 거역할 수 없다. 시간이 왜 과거에서 미래로만 흘러가는지는 알 수 없다. 시간의 의미는 수 천 년 전부터 현재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독일의 철학자 뤼디거 자프란스키는 시간의 근본적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에 관한 다양한 상념을 펼치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 철학적 작업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시간을 바라봤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의식이 다른 일에 몰두하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즐거운 시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반면 최악의 시간은 분노 지수를 높인다. 친구를 기다리다 지치면 화가 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작정 기다리기에 고통스럽다. 이때의 지루함은 우리를 예민하게 한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는 것으로, 정해진 채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우리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다고 한다. ‘누구나 같은 시간을 가지고, 그것이 끝나면 죽는다’라고 생각하면, 주어진 시간을 이용하지 못한다. 자신의 인생 전체에 어떤 활동을 해야겠다는 전망이 뚜렷하지 않으면, 지루함과 불안이 동시에 나타난다. 과거에 집착하거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새 출발에 두려움을 가진다. 죽음에 대한 이른 공포는 흘러가는 시간의 덧없음을 느끼게 해준다. 어찌 보면 시간에 대한 의식은 과거와 미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자신보다 조금 뒤에 존재하며, 우리의 목표와 꿈이 미래에 투영하기 때문에 항상 자신보다 조금 앞서서 존재한다.
자프란스키의 책에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한 특별한 비결은 없다. 결국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시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저자의 결론이 너무 쉽고 평범한가. 저자의 표현 중에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것이 딱 하나 있다.
망각은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새 출발을 도모하는 예술이다. (49쪽)
이 문장은 특별하다. 새 출발을 시도하는 연초 분위기를 '업(up)'하게 띄워주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 살다가 시간 속에 죽는다. 우리는 과거를 잊지 못하면 시간이 쏜살같이 가는 것을 안타깝게 느껴진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즈음이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좌절하게 마련이다.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막을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물을 어떻게 흘려보내느냐에 따라 시간의 의미가 달라진다. 과거의 부귀영화를 따질 때가 아니고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한정된 시간을 의미 있게 살려면 과거를 말끔히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어떤 시간을 사느냐 생각하는 문제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