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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는 사람이 있다 - 상품 뒤에 가려진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
안미선.한국여성민우회 지음 / 그린비 / 2016년 8월
평점 :
백화점 판매직 노동은 대표적인 ‘감정노동’에 속한다. 감정노동은 타인의 감정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규제하는 노동이다. 소비자에게 무조건 친절을 보여야 하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은 통제돼야 한다. 그래서 감정노동자들은 직무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다. 고객 만족 사회가 될수록 백화점 판매직 여성의 감정노동은 더 큰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백화점이 직원들에게 가르치는 서비스 정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친절한 판매가 가능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고객이 잘못해도 고객이 옳다는 고객 제일주의를 표방한다.
백화점은 자본주의의 미니어처다. 온갖 물건들을 사고파는 행위가 이뤄지는 곳이고 그 행위가 화려하게 포장된 곳이기도 하다. 백화점은 영리하다. 백화점은 노동자들조차 상품 판매에 이용한다. 판매 여직원의 미소와 친절함이 곧 ‘상품’이다. 이들은 항상 친절하고 상냥한 응대와 부드러운 말투, 여성스러운 몸가짐을 갖추어야 한다. 온종일 한자리에 서서 고객을 기다리는 건 육체적으로 힘들 뿐 아니라 지루함과 짜증을 참기 어렵게 만든다. 제일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는 고객한테서 유발된 분노와 짜증을 억누르면서 ‘상냥하고 친절하게 웃어야’ 하는 것이다.
백화점 판매직은 깨끗하고 별로 힘들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겉만 번지르르할 뿐이다. 그 속으로 한 발짝만 들어가서 보면 쉬는 데도 마땅치 않고 쉬어도 쉬어지지 않는 힘든 육체노동이다. 산업보건 기준에 관한 규칙에는 사업주가 근로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시설과 의자 등을 배치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서서 일하는 직원들은 기본적인 생리현상을 해소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호소한다. 8시간 이상 서서 근무하는 동안 화장실에 가는 횟수는 1, 2번에 그친다. 고객이 집중되는 시간에는 여유가 나지 않고 화장실에 가기가 눈치 보이기 때문이다.
백화점 여성 근로자의 근로 여건 개선 여부는 사업주의 의지에 달려 있다. 하지만 여러 차례 권고 조치를 해도 사업주의 마음은 꿈쩍하지 않는다. 사업주가 근로 문제를 이해해주고, 태도가 변화하기를 기다릴 수만 없다. 백화점의 화려함 뒤에 가려있는 열악한 여성 근로자들의 노동 현실에 대해 연대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한국여성민우회는 ‘우다다액션단’이라는 시민 모니터링 단체를 발족했다. 시민들이 직접 백화점의 열악한 실태를 파악하여 또 다른 시민들에게 알림으로써 노동 문제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유도한다.
백화점 내부가 활기 넘쳐 보여도 그곳은 ‘환상과 절망’이 이중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다. 쇼핑하는 우리는 점점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 편리하게 쇼핑할 수 있다. 백화점 자본주의가 창출한 소비의 유혹은 고객들에게 강렬한 환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우리가 소비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질수록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공간은 좁아진다. 직원들은 마땅히 앉을 곳도 없고 마땅히 쉴 곳도 부족하다. 백화점의 번듯한 겉모양에 감쳐진 초라한 여성 근로자들의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감정이 말라버려 인간적인 면모마저 사라져버린 마네킹이다.
“직원들 간에 서로 위안을 주고받고, 거기서 힘을 받아서 일을 하는 것인데, 그런 위안조차 못 받으면 무슨 맛으로 일을 해요? 참 답답해요.” (백화점 잡화 매장 직원의 말, 54쪽)
백화점 내부의 빛이 밝을수록 마네킹의 그림자는 길고 어둡다. 문제는 우리는 그 그림자를 보지 못한다. ‘고객이 왕’이라는 생각을 버려야만 마네킹의 그림자를 볼 수 있고, 그 일하는 마네킹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욕설이나 하대를 하거나 심하면 뺨을 때리는 고객이 있다. 근로자들을 존중할 줄 모르는 그들은 상대방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들이야말로 ‘사람’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사람에 대한 무례를 더 이상 용납하면 안 된다. 우리가 근로자들의 고충을 알고, 그들을 존중하는 말 한마디와 인사가 뻣뻣해진 그들의 다리를 한결 가볍게 해주는 최고의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