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홍성욱 지음 / 동아시아 / 2016년 9월
평점 :
중세의 우주관은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천동설이었다. 갈릴레오가 관찰과 실험을 계속한 끝에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지동설을 주장한다. 지동설은 중세적 세계관과 정면으로 배치됐기 때문에 교회는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에 부친다. 법정에 선 갈릴레오는 법의 위협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지동설이 틀렸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은 갈릴레오에게 객관적인 진리였다. 데카르트는 과학적 지식을 진리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명제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절대 불변의 진리다. 인간이 스스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는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생각은 과학적 낙관론을 위한 철학적 배경이 되었다. 인간은 과학지식을 통해 자연에 존재하는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과거에는 진리라고 믿었던 과학지식이 새로운 연구를 통해 오류임이 판명되고,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을 과학을 통해 밝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생겼다. ‘과학기술과 사회학(STS)’의 관점에서는 과학지식은 엄밀한 과학적 연구 절차와는 다르게 기술과 사회가 서로 맞물려서 형성된다고 본다. 즉, 과학지식은 인간과 비인간(nonhuman : 기술, 실험도구 등)이 상호 작용으로 형성된 결과물이다. ‘과학기술과 사회학’ 또는 ‘과학기술학’은 과학자와 기술자 모두 자신의 연구가 갖는 의미와 방향을 알기 위해 유용한 학문이다.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인간의 얼굴을 위한 과학을 하기 위해선 역동적인 과학 발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과학기술학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홍 교수는 자연과학과 인문학 간에 공유할 수 있는 열린 지식의 길을 찾는다는 의도로 자신의 책 제목을 ‘과학을 경청하다’라고 정했을 것이다. 그 열린 지식의 길을 찾으려는 방법이 과학기술학에 있다.
과학기술학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개념이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다. 과학기술학과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 브뤼노 라투르의 저서 《젊은 과학의 전선 : 테크노사이언스와 행위자-연결망의 구축》(원제 : Science in Action)에 등장하는 용어인 테크노사이언스는 단순히 ‘과학과 기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학과 기술이 하나의 네트워크에서 연결되어 광범위하게 확산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홍 교수의 책 1장은 과학기술학에 생소한 독자들이 《젊은 과학의 전선》을 읽기 전에 머리로 준비 운동할 수 있는 내용이다. 브뤼노 라투르의 문장은 난해하기로 악명 높다. 홍 교수의 책을 읽으면 테크노사이언스의 의미를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에서의 ‘네트워크(Network)’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과학자들도 포함)과 인간이 아닌 것들(기술)이 서로 과학지식의 생산과 수용, 확장하는 과정의 궤적이다. 그러므로 기술도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가 엮어내는 사회는 역동적이라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예상할 수 없다. 과학기술학을 공부하면 과학과 기술이 낳은 것들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고찰하여 다양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 그래서 홍 교수는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파악하는 네크워크식 사고가 성찰적 사고라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계몽주의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과학이야말로 진리라고 믿으며 이를 선진국을 향하는 애국주의로 이용하는 과학 지상주의가 강고하게 형성되어 왔다. 따라서 과학기술학은 과학을 보편적 진리 또는 민족주의의 도구로 보는 관점에 벗어나는 성찰적 자세를 요구한다.
과학이 특정 이익집단(과학자, 정치인)의 권위를 지탱해주고 보호하는 학문으로 변질하여선 안 된다. 특정 이익집단은 과학지식의 보편합리성을 의심하지 않고, 이를 이용해 암묵적이고 보편적인 지배와 권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천안함과 세월호 침몰 사고 원인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과학을 오용한 특정 이익집단의 일방적 태도를 확인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사고의 원인에 침묵하기도 했다. 권력이 과학을 강제로 손잡으면 이런 비이성적인 상황이 일어난다. 과학이 권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면 과학기술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야 과학지식과 관련한 특정 문제에 심도 있게 접근할 수 있고, 사실을 가리는 편견과 왜곡의 베일을 벗기기 위한 논쟁이 가능하다. 지금 우리 사회의 과학은 권력의 얼굴을 한 과학이다. 과학과 기술이 균형 있게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하고, 그것이 ‘인간적’인지 성찰할 때 비로소 과학은 인간의 얼굴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