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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6년 10월
평점 :
“독일 국민은 신과 인간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고 합일된 유럽의 동등한 권리를 갖는 구성원으로서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을 다짐하며 헌법 제정 권력에 의해서 이 기본법을 제정하였다.”
Im Bewußtsein seiner Verantwortung vor Gott und den Menschen, von dem Willen beseelt, als gleichberechtigtes Glied in einem vereinten Europa dem Frieden der Welt zu dienen, hat sich das Deutsche Volk kraft seiner verfassungsgebenden Gewalt dieses Grundgesetz gegeben.
이렇게 시작되는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은 통일 이전 서독 기본법의 연방정부 구성 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독일의 기본적 국가 구성 원리는 1870년 비스마르크의 첫 도이치 제국 통일 후 만들어져, 바이마르 공화국, 히틀러의 나치 정부,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동독과 서독의 분단 상황을 거친 오랜 역사적 실험과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연방정부의 새로운 기본법은 나치 독일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것을 다짐하며 동서독의 통일과 유럽연합정부의 이상을 수용하고 있다.
패전국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과거이다. 비스마르크의 도이치 제국에 패배한 프랑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오기까지 와신상담의 시간을 보냈고, 제1차 세계 대전에 패배한 독일이 나치즘으로 접어들었던 과거를 볼 때 마음속에서 끝나지 않은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보불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나치즘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등 이 긴 전쟁의 시대는 독일이란 단일 민족국가가 프랑스, 미국 등의 연합국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 시기 전체가 독일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패자인 독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쟁의 시대’는 자멸의 길로 인도하게 한 과오의 시대였다. 독일의 언론인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독일이 ‘전쟁 제국’으로 팽창하는 과정을 되돌아보며 몰락의 원인을 파헤친다. 비스마르크와 히틀러. 시대를 초월한 다소 어리둥절한 조합이지만, 한때 독일제국의 위대한 영웅으로 숭배되었던 이 두 사람은 독일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철(鐵)과 혈(血), 그리고 뛰어난 외교술로 독일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유럽 지도를 만들었던 인물. 비스마르크를 21세기, 그것도 독일이 유럽연합(EU)의 맹주로 자리 잡은 이 시기에 불러내는 작업은 쉽지 않다. 비스마르크의 주변이 항시 적과 동지로 나뉘었듯 그에 대한 평가도 극으로 갈린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나치 등장’의 전조로 지목한다. 독일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극단적 전체주의를 경험해야 했던 파행과 굴절의 이면에는 독일 제국의 권위주의 전통이 뿌리내리고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비스마르크와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에게 닮은 점, 닮은 환경이 없진 않다. 혹자는 트럼프의 등장을 ‘히틀러의 부활’이라고 냉소적으로 조롱하지만, 나는 그가 히틀러보다는 비스마르크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현재 미국이 ‘친 트럼프(대안 우파)’와 ‘반 트럼프’로 분열돼 있다시피 한 것처럼 당시의 도이치 제국도 크게 보면 보수적인 구(舊) 프로이센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통일 도이치 제국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프너는 비스마르크의 도이치 제국이 20여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트럼프가 대선후보로 등장하면서부터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일명 ‘트럼프 쇼크’다. 비스마르크가 들고나온 ‘철과 혈’도 당시 유럽인들에겐 충격이었다. 그러나 제국 통일 이후 비스마르크 2기는 달랐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비스마르크는 유럽 정복의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제국을 팽창하는 것만으로는 독일 내부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없었다. 오로지 순수 독일 민족이 사는 ‘작은 독일’을 건설하는 것이 비스마르크의 원대한 꿈이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내부 분열의 잡음을 줄이기 위해 철과 혈 대신 ‘실리와 실용’, ‘외교와 중재’를 받아들였다. 그랬기에 비스마르크 2기 체제가 거의 반세기를 풍미할 수 있었다. 내년부터 트럼프가 내년부터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통령 권한을 행사할지 아직 알 수 없다. 워낙 자신감에 차 있고, 백인 민족주의를 천명한 그의 공약이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노선과 다르지 않다. 대선후보 시절 무모할 정도로 강경한 자세로 자신의 공약을 주장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선 이후 일부 변화의 모습을 보인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트럼프가 실리를 추구하는 정책을 펼칠지 지켜봐야 한다.
프랑스 황제에 올라 유럽제패를 꿈꾸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한 국가의 정치는 그 나라의 지리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남겼다. 정치현상이 이뤄지는 공간적인 실체, 즉 영토를 중시한 발언이다. ‘작은 독일’ 제국으로 한정된 환경과 지리는 정복 열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작은 독일’ 제국은 자신 주변에 둘러싸인 유럽 연합의 힘을 상당히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독일 제국은 유럽 연합의 힘에 밀려 고립될까 봐 두려웠다. 독일 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이 뒤숭숭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생존 방식을 선택한다. 제국의 극단적인 논리는 나치스의 인종차별과 게르만 민족의 세계지배 이론을 뒷받침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긴 했으나 사민주의적 이상주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을 가진 독일은 20세기 전반기 이미 시민사회가 발달한 선진국이었다. 이때 독일은 민주주의를 재건해야 했다. 그런데 히틀러는 민주주의적으로 집권해 전쟁을 일으켰고, 유대인을 학살했다.
비스마르크는 정치를 이념이 아닌 힘의 논리로 파악했다. 그것은 유럽 정복이 아니라 독일 제국이 평화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선택한 차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차례로 통일 독일제국의 제물로 삼아 ‘평화로운 제국’의 이득을 취했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정복의 야욕을 불러일으키게 한 중대한 배경이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1871년 비스마르크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이후부터 독일 제국에 제국주의적 야망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은 절대로 제국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혔지만, 비스마르크의 ‘작은 독일 제국’을 키워 준 토양은 역설적이게도 나라를 더 크게 만드는 제국주의의 거름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이든 정치적 모험이든 단 한 번의 승부에 국가와 자신의 미래를 걸지 않았다. 절제를 알았고 한계를 알았다. 그런데 히틀러는 자신의 열망을 조절하지 못했고, 위험한 망상에 사로잡혀 유럽 전체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독일은 다시 한번 유럽의 패권 국가가 되려는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철저한 사과로 전쟁 책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처럼 보였던 독일에서도 여전히 미해결의 문제들이 남아 있다. 네오나치 단체들은 여전히 히틀러의 제3 제국 질서를 그리워하고, 나치의 상징인 하겐 크로이츠(Hakenkreuz)에 향수를 느낀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좌절감과 무력감을 교묘하게 자극하고, 거기에서 자란 정치적 허무주의를 발판으로 역사상 전대미문의 절대 권력을 장악, 독일 국민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갔다.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운 기개는 너무 지나치면, 막상 대안 없는 변화가 몰아올 결과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독일이 과거에 만들어진 비스마르크와 히틀러, 두 개의 이름으로 남은 제국의 향수(鄕愁)를 말끔히 씻어내지 못하면, 제 4제국으로 꾸미려는 위험한 향수(香水)가 될 수 있다. 독일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가 지금 걱정해야 할 것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좌절감과 무력감이 자칫 정치적 허무주의를 가꾸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1970년대에 제조된 ‘박정희 향수’를 못 잊고 있다. 허무주의의 기운이 이미 흘러간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여 시대착오적인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환상을 키울까 봐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