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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6년 10월
평점 :
조폭. 원래 조직폭력배라는 의미로 사용돼온 경찰 전문용어였다. 지금 조폭은 가장 익숙한 말 중 하나가 됐고, 그 실체는 일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각종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문화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조폭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아마도 배신과 불신이 판치는 세태에 거친 사나이의 야성적 매력과 자기들끼리긴 해도 끈끈한 의리랄지 우정 같은 것들이 재미를 주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천명관의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는 조폭물의 세계를 비꼬고 희화화한 코미디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천 뒷골목 조폭 두목과 건달들은 그저 우습거나, 망가지는 존재로 묘사된다. 작가는 처음부터 익숙한 조폭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액션과 웃음 속에 막판 감동을 살짝 끼워 넣는 뻔한 줄거리의 조폭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 돋보인다. 의리나 인정 같은 조폭 세계에 대한 알량한 미화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생존을 위한 싸움에 휘말린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는, 조폭 그 자체보다는 남자들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일상적 폭력성과 먹이 사슬을 형성하는 사회 구조의 모순에 대한 공포가 더욱 구체화하여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건달 ‘울트라’는 정식 조직원이 되는 것이 꿈이다. 그런데 그가 심부름을 가던 도중 재수 없게 일이 꼬이는 바람에 조직원 전체가 ‘원산폭격(손을 뒤로하고 머리를 박는 벌)’을 받게 된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울트라는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단체로 요가라도 하는 중인가? 울트라는 단순하고 무식했지만 그래도 예감이라는 게 있었다. 그 예감은 뭔가 일이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울트라는 답답하고 무서워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못 본 척 사무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오금이 저려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41쪽)
이 소설에 묘사된 조직 내 가혹 행위는 남자들이 말하기 불편했던 익숙한 문제이기도 하다. ‘원산폭격’은 지금은 사라진 군대식 기합이다. 과거에는 ‘연대 책임’이라는 군대 문화 때문에 장병들은 연일 군홧발에 죽도록 맞고 ‘원산폭격’을 밥 먹듯 했다. 의무적으로 군대에 몸을 담게 되는 대한민국 남성은 두 가지 선택을 강요받는다. 적응할 것인지, 반항할 것인지. 그러나 개인의 힘으로 군대의 조직문화에 반항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상 한 가지의 선택을 강요받는 셈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남성들은 권위에 복종하고, 불의와 타협하는 법, 비합리적 상황에 맞서기보다는 적당히 피하는 법을 배운다.
‘군대에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을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이 말은 곧 ‘군대에 다녀와야 복종과 포기를 내면화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다시 이 말을 조금 순화하면 ‘군대에 다녀와야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런 말은 명백한 불의와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원래 조직사회란 그런 곳’이라고 합리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엄격한 위계질서와 상명하복의 원리는 군대뿐만이 아니라 많은 조직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내리 갈굼’으로 표현되는 일방적 의사소통 구조, 강요되는 복종의 문제는 비단 군대 내의 문제만은 아니다. 좀 더 넓게 보면 ‘권력에 의한 일상적 폭력’은 가정에서도 일어난다.
인천 연안파 두목 양 사장의 유년시절은 참혹하다. 그는 뱃사람이었던 아버지의 폭행에 시달렸다. 아버지 때문에 어둡고 좁은 어창에 사흘 동안이나 갇히는 바람에 아사 직전, 죽음의 위기까지 갔다. ‘물고기 썩은 내가 진동하는’ 어창에 갇힌 양 사장의 기억은 어린아이에게 있어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충격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양 사장의 정신적 탯줄이 끊겨버린다. 그렇게 일찌감치 존재의 연줄이 사라져 버린 양 사장은 남성성을 통해 자신을 살찌우면서 뒷골목 세계에 살아남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조폭 집단은 모든 권력이 한 사람, 즉 두목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는 ‘강한 남성’으로 행사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상처의 기억을 잊으려고 한다. 작가는 이런 양 사장의 심리적 경험을 따라가면서 그것이 왜곡된 남성성에 대한 집착임을 짚어낸다.
그러나 이런 세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가 관습화된 조폭물을 넘어설 만큼 특별한 무엇을 보여줬다고는 평가하기 힘들다. 작가가 노골적으로 묘사한 ‘수컷의 모습’들은 시시콜콜 헤집을 것까지도 없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고 군대 미담을 언급하거나 지나가는 여자들의 몸매를 관찰하면서 희희낙락거리는 사내들의 모습은 남자들끼리 모여 있을 때 등장하는 공식 클리셰(Cliché)다. 무망한 목표를 위해 거칠고 물불 안 가리는 위험한 열정을 과시하면서 사력을 다하는 건달들의 모습은 우리 남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실상 남자는 상처를 지닌 하나의 작은 인간에 불과하다. 약점을 지우려고 남성성을 과시하려는 동족들의 호들갑이 불편하고,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