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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모노가타리
작자 미상 지음, 민병훈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8월
평점 :
《이세 모노가타리》(伊勢物語)는 우리말로 풀이하면 ‘이세 이야기’이다. 모노가타리는 일본 고대 및 중세시대 때 정형화된 문학 장르이다. 이 이야기 속에 ‘와카(和歌)’라는 노래도 실려 있다. 《이세 모노가타리》는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 794~1185년)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문헌인데, 이 시기에 와카나 하이쿠(俳句) 같은 시가문학이 한창 꽃을 피웠다. 헤이안 시대는 우아하고 섬세한 일본적 정서가 주를 이룬 귀족사회이다. 헤이안 시대의 귀족들은 와카로 연애편지를 보내 관계를 맺고, 능력만 있다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정식으로 정부를 여러 명 둘 수 있었다. 그 시대에 와카 한 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연애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세 모노가타리》는 남녀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와카가 실린 이야기 모음집이다.
《이세 모노가타리》에서 주로 등장하는 주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대부분은 이별이나 계급의 한계에 부딪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한다. 그들의 애틋하고도 서글픈 감정이 와카에 압축되어 있다. 《이세 모노가타리》 제23단 ‘우물 벽(筒井筒)’은 한 남자만 끝까지 사랑하여 홀로 기다리면서 사는 불행한 여자들의 이야기다.
‘우물 벽’ 이야기의 남녀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다. 두 사람은 서로 부부가 될 운명이라고 확신했다. 이들은 부모가 정해준 배우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자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자신의 감정을 와카로 써서 여자에게 보낸다.
우물의 벽에 키를 맞추며 놀던 나의 신장도
우물보다 컸겠죠 보지 않은 사이에
여자는 남자의 와카에 답한다. 자신도 여전히 남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전달한다.
같이 대 보던 가르마 탄 머리도 어깰 넘었소
그대 아니고 누가 올려 묶어 주리오
이렇게 연애편지를 주고받던 남녀는 드디어 결혼하게 됐다. 딱 여기까지만 이야기가 끝냈더라면, 가장 낭만적인 와카가 실린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이세 모노가타리》는 아름다운 사랑을 낭만적으로 미화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잔인하게도 우리가 사랑하면서 꼭 마주하게 될 현실의 장벽까지 언급한다. 부부는 가난에 허덕이면서 살게 되고, 이를 견디지 못한 남편은 무기력한 현실을 잊기 위해 바람을 피웠다. 남편은 두 명의 아내를 두었다. 그런데 아내는 남편의 바람을 알면서도 미워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가 딴 남자 만나러 다닌다고 의심했다. 누가 누구를 의심하는 건지, 참. 남편은 몰래 숨어서 아내를 지켜봤다. 남편의 의심은 틀렸다. 아내는 여전히 남편을 사랑했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화장한 뒤,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내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동한 남편은 두 번째 여자를 만나지 않기로 했다.
남편은 자신의 두 번째 아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그녀가 사는 집으로 찾아갔다. 두 번째 아내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혼자 밥을 푸고 있었다. 남편은 두 번째 아내의 모습에 실망하여 그 집을 다신 찾지 않았다. 남편은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두 번째 아내의 모습을 보자마자 사랑의 감정이 식어버렸다. 사실 두 번째 아내도 남편을 기다리면서 혼자 살고 있었다. 이 어리석은 남편은 아내로 맞이한 두 여자의 속마음을 읽지 못했다. 이미 결혼한 남자를 만난 두 번째 아내의 결정이 잘 한 거로 볼 수 없지만, 그녀가 만든 와카는 ‘해바라기 사랑’의 면모를 보여준다.
당신이 사시는 쪽을 바라보면서 살겠습니다
구름아 가리지 마 비가 내린다 해도
남편은 두 번째 아내에게 재회를 원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남편은 두 번째 아내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남편을 기다린 두 번째 아내는 다시 한 번 와카를 읊어 보낸다.
그대 오신다 전해 주신 밤들이 지나쳐 가니
기대하지 않지만 그리며 지냅니다
상대방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받아들이지 않아 외롭고 슬픈 사랑을 가리켜 외사랑이라고 한다. ‘너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매몰차게 돌아서면 아픈 마음을 보듬으면서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겠지만, 그렇지도 않으면서도 받아들일 듯 말 듯 해 외사랑의 애틋함을 더한다. 외사랑이 심화하면서 누구 먼저 거부할 수 없는 삼각관계가 연출됐다. 그러나 두 아내의 모습 경우 여성은 남성에게 보이는 수동적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아내는 오로지 남편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여성이 아름다워지려면 화장을 해야 한다는 등 여성에 대한 남성 중심적 고정관념이 드러나 있다.
제6단, 제12단 이야기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떠올리게 한다. 제6단의 남자 주인공은 황족의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야밤에 그녀를 납치하여 함께 도망친다. 제12단 이야기의 제목은 ‘도둑(盜人)’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한 남자는 어떤 집안의 딸을 훔친 도둑이다. 여자들은 ‘사랑의 인질’이 되어 자신을 납치한 남자들을 순순히 따른다. 제12단의 도둑은 훔친 여자를 풀숲에 두고, 도망쳤다. 그런데도 여자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남자를 잊지 못한다.
남자는 여자를 훔친 도둑이었기 때문에 풀숲에 두고 도망친 것이다. 뒤를 밟아 온 자들이 “이 들에 도둑이 숨어 있다고 한다”고 말하며 들에 불을 놓으려고 했다. 그때 여자가 슬퍼하며,
무사시노는 오늘만은 태우지 말아 주세요
낭군도 숨어 있고 나도 숨어 있으니
※ 무사시노 : 평야로 이루어진 지역 이름 (리뷰 작성자 주)
아주 극한 상황에서 약자가 강자의 논리나 주장에 동화돼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이상심리가 나타난다. 도둑이 붙잡혔어도 여자는 도둑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납치범과 납치 피해자 사이의 특이한 교감이 낭만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니까’라면서 뒤에 조건이 붙기 마련이다. 하지만 때론 이런 사랑이 듣는 사람, 혹은 제3자에게는 순수한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이 ‘아름다운 구속’이라고 말하지만, 이게 지나치면 남녀 모두 불편하게 만드는 ‘족쇄’가 될 수 있다. 화려한 낭만으로 사랑을 아름답게 포장되는 시대가 지났다.